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49
549
정현태 PD가 모니터로 촬영한 부분을 확인하는 동안 감기가 걸리지 않도록 담요를 몸에 두른 은신영은 한쪽에 마련된 간이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다음 신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소현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건네면서 살갑게 말을 걸었다.
“언니, 고생하셨어요.”
“뭘, 이제 겨우 첫 신을 시작한 건데.”
데뷔 8년 차의 베테랑답게 상당히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첫 주연작이라는 흥분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간이 의자에 앉은 채 메이크업 수정을 받으면서 은신영이 말을 이었다.
“아직 소현이 차례가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빨리 왔네.”
“현장 분위기도 익히고 언니가 연기하는 모습도 구경할 겸 일찍 나왔어요.”
싹싹한 대답에 은신영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신인이 부지런해서 나쁠 건 없지. 하지만 찬 데 오래 있다가 감기 걸리면 연기하는 데 지장이 있으니까 몸 관리는 잘하도록 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현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옷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렇게 패딩을 입고 왔죠. 거기다가 핫팩도 빼놓지 않고요.”
자랑하듯 양쪽 주머니에서 짠하고 핫팻을 꺼내 들었다.
“어머.”
나름 선배로서의 조언을 해 주려던 은신영은 그런 행동에 귀엽다는 듯이 픽 웃었다.
“걱정해 줄 필요도 없었네.”
“언니도 하나 드릴까요?”
“그래. 고마워.”
어느새 많이 친해진 은신영은 따뜻한 핫팩을 건네받아 손에 쥐었다.
그렇게 얼마쯤 수다를 떨었을까 모니터를 끝낸 정현태 PD가 조명 감독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큰 소리로 은신영을 불렀다.
“신영 씨, 바스트 샷을 따야 되니까 준비해요!”
“예.”
바로 몸을 일으킨 은신영은 촬영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조금이라도 더 배우기 위해 은신영이 연기를 준비하는 모습에서 그녀가 눈을 떼지 않고 있을 때 인기척을 내며 누군가 옆으로 다가왔다.
“뭐 하고 있어요?”
고개를 돌리자 채상우가 미소를 띤 얼굴로 서 있었다.
“아. 선배님.”
얼른 의자에서 일어난 소현이 살짝 머리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자 상대가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아. 예.”
말은 그렇게 해도 연기 선배인 데다 자신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 인기가 많은 스타였기에 그녀는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들으니까 나보다 어리던데 말을 편하게 해도 되지.”
“그러세요.”
“앉아.”
은신영의 간이의자에 마음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상우는 소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패션 모델 출신이라고 했지.”
“네.”
“그래서 그런지. 비율이 아주 좋네.”
“…….”
위에서 아래로 몸매를 훑어보는 느끼한 시선에 소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연기 선배인 데다 이제 막 드라마 촬영이 시작됐는데, 자신으로 인해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기에 애써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오늘 촬영이 끝나고 따로 스케줄이 있어?”
“그건 왜 물으시는 건데요?”
“저녁에 강남 바에서 친한 연예인들끼리 모임이 있는데 함께 가지 않겠어?”
이제 갓 이쪽 바닥에 발을 들인 신인들한테는 아주 솔깃한 제안이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백이면 백 눈을 반짝이면서 그를 따라왔기에 채상우는 이번에도 당연히 그리될 줄 알았다.
하지만 소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기대와 완전히 어긋나는 거였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뭐?”
“촬영이 끝나면 다른 일정이 있거든요.”
명백한 거절에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던 채상우는 내심 어처구니가 없고 당황스러웠다.
설마 하니 이제 갓 데뷔한 신인한테 한류 스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인기를 받으며 스타라고 불리는 자신이 이런 식으로 까일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짜증이 났지만 여기서 티를 내면 자신만 우스운 꼴이 되는 거였기에 채상우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아쉽지만 일이 있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차가운 소현의 표정에 더욱 자존심을 구긴 채상우는 그대로 간이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밴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안 좋은 기분을 혼자 추스르고 있을 때 잠깐 자리를 비웠던 도형석이 옆으로 와서는 힐끗 채상우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채상우 씨 아니에요.”
“맞아요.”
“뭐가 그렇게 바쁜지 지난번 대본 리딩 때는 인사도 잘 안 받아 주더니. 무슨 일이래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촬영 잘하라는 말을 했어요.”
“어. 그래요.”
뭔가 더 있는 눈치였지만 소현의 기분이 그다지 안 좋은 걸 알아차린 도형석은 깊이 묻지 않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지금 찍고 있는 신이 끝나면 소현 씨 차례니까 미리 준비를 해 두라고 하네요.”
“제일 마지막 아니었어요?”
“원래는 그랬었는데 고순영 선생님이 조금 늦는다고 하셔서 소현 씨 장면을 먼저 찍는 걸로 바꿨다네요.”
설명을 들은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일정대로라면 오후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됐는데 촬영을 먼저 할 수 있다면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촬영장에 일찍 나와 있으니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이득도 생겼다.
곧 촬영을 한다고 하자 어느새 채상우에 대한 불쾌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운 소현은 하도 읽어서 이제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다시 꺼내 대사를 확인하며 감정을 잡았다.
이런 가운데 밴에 올라탄 채상우는 차 문을 닫자마자 입에서 욕설을 내뱉으면서 꾹 누르고 있던 화를 폭발시켰다.
“씨팔. 내가 어이가 없어서.”
조수석에 앉아 있던 김지호가 몸을 뒤로 돌리면서 말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별것도 아닌 년이 비싸게 굴잖아. 뭐 스케줄이 있어. 내 참 기가 막혀서.”
하루 이틀 함께한 것이 아니었기에 대충 뭣 때문에 이러는 건지 알아차린 김지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구설수에 오르면 골치 아프니까 내가 자제를 좀 하라고 했잖아.”
잔소리에 채상우가 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됐고. 번호를 따 놓으라는 건 어떻게 됐어?”
자신이 무슨 채홍사採紅使도 아니고 여자 전화번호나 구해 오라고 시키는 것에 화가 났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기에 애써 참고는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하나 꺼냈다.
“제작부에 있는 걸 받아 적어 온 거야.”
그러자 채상우가 눈을 반짝이면서 종이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역시 수완이 좋은 건 알아줘야 된다니까.”
종이를 펼치자 소현의 스마트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너 소현이라는 애하고 진짜 사귀려는 건 아니지? 대표님이 너 조태석 감독 신작에 꽂아 넣으려고 애를 쓰고 계신데 스캔들이 나면 안 돼.”
걱정스러운 시선을 주자 채상우가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고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애가 모델 출신이라서 늘씬하니 보기 좋은 데다 얼굴도 제일 예쁘니까 한번 갖고 놀아 보려는 거지. 그런 재미도 없으면 어떻게 촬영장에 다니겠어. 가뜩이나 일일 드라마라서 짜증 나는데.”
“야, 그 얘기는 저번에 다 끝냈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어쨌든 그런 거면 굳이 걔가 아니어도 되잖아? 다른 애들도 뭐 괜찮던데.”
“손 한번 까딱 한다고 금방 넘어오는 건 재미없어. 꺾을 보람이 있어야지.”
김지호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튕기면 튕길수록 불타오른다? 나 참, 어이가 없다.”
적당히 해라, 하면서 구시렁거리니 채상우가 팔을 뒤로 쭉 뻗으며 등 근육을 풀더니 약간 나른한 얼굴로 입을 뗐다.
“오늘 내 분량은 다 끝났으니 개운하게 사우나나 가자, 형. 땀 쫙 빼고 마시는 술이 또 꿀 맛이에요.”
“우리 내일도 촬영 있거든!”
“엄청난 연기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일일드라마인데 무슨 걱정이야? 대충 해도 괜찮아. 어차피 아줌마들만 볼 건데.”
프로 의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채상우의 발언에 김지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너 어디 딴 데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인기 단번에 꼴아 박아.”
그러거나 말거나 채상우는 귀찮다는 듯이 스마트폰 들었다.
자신의 SNS에 좋아요가 얼마나 늘었나 확인하던 중에 뒤늦게 다른 스텝들이 밴으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운전석에 앉는 로드 매니저와 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코디와 메이크업을 마뜩찮은 눈길로 노려보던 채상우가 앞좌석을 발로 퍽 찼다.
“야. 어딜 쏘다니느라 이리 늦게 다녀?”
“그게 화장실을 좀 다녀오느라…….”
“그런 건 알아서 미리미리 갔다 와야지. 내가 너희들을 기다려야 되겠어!”
“……조심하겠습니다.”
많이 지체한 것도 아니고 길어 봤자 5분 정도밖에 안 됐는데 괜히 꼬투리를 잡아 진상을 부렸다.
채상우의 갑질에 스태프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옆에 있던 김지호가 얼른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애들도 잘못했다고 하니까 그만하고 이제 출발하자.”
“쯧.”
혀를 채상우가 다시 스마트폰에 시선을 돌리자 김지호는 재빨리 스태프들에게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조용히 앉아 있으라는 뜻으로 눈짓을 한 후 옆의 로드매니저에겐 기운 내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자, 자, 가자고.”
“예.”
여전히 기가 죽은 표정에 양심이 찔렸지만 어쩌겠는가.
이 바닥에선 잘나가는 스타님이 최고 갑인 것을.
그렇게 채상우는 자신의 신이 끝나자마자 간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현장을 떠나 버리면서 첫 촬영부터 개인 행동을 했다.
같은 시각 오랜만에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사무실에 나온 혁권은 정동식 이사에게 업무 보고를 받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채 서류를 천천히 넘겨 보던 혁권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드라마 앞뒤로 광고를 꽉 채운다고 해도 제작비를 다 회수하기 어렵다 이 말이지?”
왼쪽 소파에 앉아 있던 정동식 이사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최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수익 수단인 PPL(Product PLacement)도 시청률이 낮은 일일 드라마라 잘 붙지 않는 데다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면 드라마 자체의 재미 자체를 망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PPL로 거둘 수 있는 수익도 한계가 명확하고 말입니다.”
수익보다는 투자에 더 무게를 두고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막대한 적자가 예상되는 걸 마냥 두고만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럼 역시 결론은 하나뿐이군.”
그가 앞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해외 판권 판매를 통해 수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되겠군.”
최근 제작되고 있는 드라마 상당수가 한류 바람에 편승해서 해외 판매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에 딱히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당연히 정동식 이사 역시 이걸 생각하고 있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 않은지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니시리즈가 아니라 회차가 긴 일일 드라마라서 해외 판매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외교적인 문제로 가장 큰 한류 시장인 중국에 한한령限韓令이 내려지는 바람에 판권 시장이 거의 개점휴업 상태입니다. 얼마나 상황이 안 좋으면 한류 스타가 출현한 대작 드라마도 한동안 판매가 안 되다가 겨우 50만 달러도 안 되는 돈에 판권을 넘겼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보고서를 읽고 예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해외 판매는 이대로 포기해야 된다는 거야?”
판권 판매를 못 한다면 적자가 상당히 커졌기에 혁권의 미간이 찡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