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53
553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에서 이적해 간 인원 외에 원래 도도 엔터테인먼트에 있으면서 강제적로 성 접대 등에 이용되던 무명 연예인과 연습생 몇 명이 포함되면서 숫자가 늘어났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잠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던 오주호는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계약 해지라니 무슨 헛소리야!”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오주호하고 달리 지석영 변호사는 조금도 위축되는 기색 없이 차분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온갖 억지스러운 명목으로 의뢰인들한테 빚을 씌우셨더군요. 그걸 빌미로 강제 술 시중은 물론이고 성 접대까지 시킨 걸 모두 알고 왔습니다.”
미간을 찡그린 오주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면서 화를 냈다.
“갑자기 전화를 안 받아서 이상하다 싶었더니. 뒤에서 이런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군!”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분하다는 투였다.
지석영 변호사는 이쪽의 주장이 상세히 적혀 있는 서류를 상대편에 내밀면서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채무 대부분은 부당한 명목으로 책정된 것이고, 액수마저 비정상적으로 크게 부풀려져 있으니 변제할 의무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계약 해지 역시 귀책 사유가 도도엔터테인먼트에 있다는 걸 명확하게 밝혀 드리는 바입니다.”
“하!”
오주호의 입에서 같잖다는 듯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 제가 나열한 사실들을 모두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럼 피차 일이 편해질 텐데요, 하고 지석영 변호사가 차분한 눈길로 오주호를 바라보았다.
“웃기는 소리! 지금 누구한테 수작질을 하는 거야?”
언성을 높이면서 두 사람을 윽박지르자 백성균이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섣불리 나서지 않고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자 지석영 변호사가 안주머니에서 초소형 녹음기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고는 음향 파일을 재생시켰다.
-……그게 싫으면 위약금하고 지금까지 회사에서 투자한 돈을 전부 다 토해 놓고 나가던가! ……오늘은 호텔까지 같이 올라가야 되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
초소형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오주호는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이건 분명 얼마 전에 방송국 관계자들을 데려다 놓고 접대를 했을 때 유미해와 소속사 연예인들이 있던 룸에서 나눴던 대화였다.
어쩐지 평소와 달리 고개를 쳐들고 겁도 없이 대들더니 몰래 이런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거였다.
“이렇게 막 도청을 하는 건 불법일 텐데.”
오주호가 무섭게 눈을 부라리자 지석영 변호사는 여유로운 얼굴로 손가락 하나를 들어 좌우로 까딱였다.
“물론 제3자가 몰래 임의로 한 도청이라면 그렇지만 이것처럼 대화 당사자가 녹음을 하는 건 합법적인 행동입니다. 당연히 경찰이나 검찰 수사에서도 증거 능력을 가지고 있고 말입니다.”
“으음.”
기껏 생각해 낸 반박거리도 단번에 묵살되고 나니 오주호가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박할 줄 알아!”
궁지에 몰린 것을 부정이라도 하려는지 오히려 표정을 사납게 한 오주호가 갑자기 손을 뻗어 초소형 녹음기를 바닥에 던지고 구둣발로 짓밟았다.
콰직!
몇 번이고 뒤꿈치로 내리쳐 완전히 망가뜨렸지만 지석영 변호사는 느긋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이고는 약을 올리듯이 말했다.
“설마 이런 자리에 원본을 가져 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살기로 가득 찬 눈빛으로 오주호가 노려보자 지금껏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성균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 노석대 밑에서 주먹을 좀 썼나 본데, 괜히 허튼짓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씨발. 넌 또 뭐야!”
거친 욕설을 내뱉으면서 오주호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백성균이 한쪽 발로 두꺼운 원목 탁자를 앞으로 밀어 버렸다.
“커억!”
탁자에 무릎이 세게 부딪친 오주호는 그대로 다시 몸을 굽히면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성균은 거침없이 손을 뻗어 상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는 탁자에 힘껏 내려찍어 버렸다.
“이 새끼야! 할 짓이 없어서 여자애들 등골을 빼 먹고 있냐. 너 같은 놈은 아예 아작을 내 버리고 싶지만 겨우 참고 있는 걸 알아야지. 신사적으로 나올 때 말을 알아 쳐 먹는 것이 너한테도 좋을 거야.”
“이, 이익.”
눈 깜짝할 사이에 기선을 제압당한 오주호는 탁자에 얼굴이 눌린 채 입가에서 시뻘건 피를 흘렸다.
“놔! 놓으라고!”
몸을 뒤틀면서 발악하는 오주호를 백성균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머리통을 짓누르는 힘이 더욱 강해지자 오주호의 입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갈고리같이 휘어진 손아귀가 더욱 세게 옥죄어 올 뿐 소용이 없었다.
거기다 뒤로 꺾인 팔 역시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오주호가 반항하면 할수록 통증만 심해졌다.
“어허, 그러다 어깨 관절 빠지겠네. 자기 몸은 소중히 여겨야지, 응?”
“미친놈, 지금 나랑 장난해!”
“기껏 생각해서 해 준 충고인데. 거참, 기분 더럽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석영 변호사가 발밑에 놔둔 서류 가방을 챙겨 들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루 안에 답변이 없으면 원만하게 해결할 생각이 없다는 걸로 알고 경찰에 갈 거니까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라도 의뢰인들을 협박하거나 위해를 가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방금 변호사님이 한 말씀 명심하도록 해.”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백성균이 주먹을 오주호의 옆구리에 있는 힘껏 쑤셔 박았다.
퍼억.
“끄으윽.”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고통에 오주호는 두 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잡은 채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이 나가자 여비서가 주춤거리며 안을 들여다보다가 오주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뛰어 들어왔다.
“실장님, 세상에! 괜찮으세요?”
이게 무슨 일인지 황급히 방 안을 둘러보는 그녀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일단 일어나 보라고 부축하는 여직원의 손을 오주호가 세차게 뿌리쳤다.
“그, 그놈들 어디 갔어!”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면서도 난폭하게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에 여직원이 무서운 기색으로 뒤로 물러나 답했다.
“손님들이라면 방금 나가셨는데요.”
“뭐?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어!”
“그럼 어떡하라고요…….”
여직원이 억울한 투로 말끝을 늘어뜨리자 오주호가 눈에 핏발을 세우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감히 날 건드려. 그냥 두지 않겠어.”
“마실 걸 좀 사 오려고 하는데 뭐로 드시겠어요?”
막 한 신을 끝내고 온 소현은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분장실 의자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난 레몬 꿀 차 따뜻한 걸로요.”
“아메리카노가 아니고요?”
“집중을 했더니 당이 떨어지는지 달달한 것이 당기네요.”
“알았어요. 금방 다녀 올 테니까 잠깐만 혼자 있어요.”
도형석이 나가자 분장실에 혼자 남겨진 그녀는 힘없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
“휴우.”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나름 준비를 많이 했고 두 번째 작품이라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소현의 착각이었다.
조연이지만 여주인공과 대립하는 역할이기에 비중이 상당히 클 뿐만 아니라 감정 표현을 담아 내야 되는 장면이 많아 연기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은 까마득하게 연기 경력이 오래된 선생님들하고 붙는 신들이라서 더욱 신경을 쓰느라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배우는 것도 많았고 PD의 OK 사인을 받으며 장면을 하나씩 끝낼 때마다 느껴지는 성취감이 컸다.
최소한 발연기라는 소리를 들으며 함께 하는 연기자들한테 폐를 끼치지는 않기 위해 소현은 벌써 수십 번을 봐서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집어 들었다.
“이걸로 큰 걸 줘요. 아니, 그 옆에 있는 걸로. 선물할 거니까 포장을 해 줘요.”
조금 있다가 찍을 대사를 진지하게 연습하고 있을 때 누군가 분장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스태프나 다른 연기자인 줄 알고 대답을 하고는 무심코 몸을 뒤로 돌린 소현은 채상우가 미소 띤 얼굴로 들어오자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침 있었네.”
여기 있는 걸 뻔히 알고 와 놓고는 뻔뻔하게 말하는 걸 보며 어의가 없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펜클럽에서 도시락을 보내와서 가져다줄 겸 할 이야기도 있어서 왔어.”
“…….”
안 그래도 껄끄러운 상대인데 하필이면 분장실에 아무도 없을 때 찾아와서 둘만 있는 것이 그녀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하실 이야기가 뭐예요?”
도시락이 들어 있는 비닐 봉투를 화장대 한쪽에 내려놓은 채상우는 은근슬쩍 가까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소현 씨는 내가 부담스러운가 봐?”
“솔직히 편하지는 않아요.”
처음부터 선을 딱 긋고는 틈을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채상우는 눈썹을 찡그렸다가 금방 바로 했다.
“난 그냥 친하게 지내자는 것뿐이야.”
그러면서 채상우의 손이 어깨로 올라오자 소현은 정색을 한 채 팔을 뿌리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제 그만 좀 튕기지.”
마치 자신이 밀당이라도 하는 것처럼 채상우가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 이상 말을 섞는 것조차 싫었던 소현은 그래도 연기 선배였기에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던 걸 버리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분명히 싫다고 했는데 왜 자꾸 질척거리는 거예요!”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어려서 이쪽 바닥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그저 심심풀이로 여자를 건드리고 다니는 남자들을 심심치 않게 봐 왔다.
그랬기에 채상우가 무슨 의도로 접근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소현이 가장 싫어하는 거였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가면을 벗어던진 채상우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채 그녀를 무섭게 노려봤다.
순간 겁이 덜컥 났지만 소현은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상대의 기세를 살려 주는 꼴이 되어 버리기에 애써 강한 태도를 보였다.
“자꾸 이러면 사람 부를 거예요!”
“불러 봐, 어디 해 보라고.”
채상우는 황급히 스마트폰으로 손을 뻗는 소현의 팔을 우악스레 잡아끌었다.
“꺅!”
남자의 강한 힘에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이거 놔요!”
하지만 소현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채상우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오히려 반항하면 할수록 더욱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즐기는 타입처럼 보였다.
“윽!”
한순간 느슨해진 틈을 타 소현이 도망치려 했지만 어딜 도망 치냐는 것처럼 다시 손이 억지로 끌려갔다.
“놔요. 아파!”
“그러게 조심해야지. 이 가는 팔목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당신이 할 소리예요?!”
소현이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달고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서워서 흘리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찡그린 덕에 생리적으로 맺힌 눈물이었으나 채상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더 괴롭혀주고 싶은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알 것 같네.”
“뭐가요?”
소현은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이 채상우의 말에 꼬박꼬박 반박했다.
그런 모양새를 마치 애교라도 피우는 것처럼 귀여운 짓 한다는 눈으로 내려다 본 채상우가 느릿하게 답했다.
“너, 모델 일을 할 때 왕따였다며?”
일부러 귓가에 가져다 댄 그의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훅 끼쳤다.
“친구 하나 없이 혼자였다면서. 위의 선배들한테 찍혀서 고생 많이 했다던데. 런웨이 위에서는 친한 것처럼 웃지만 쇼가 끝나면 이야기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숙소에도 혼자 걸어가야 했다지.”
“…….”
소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 아물어 가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도 모자라 딱지를 마구 긁어내는 것 같은 그의 발언에 소현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조금 얌전해지려나.’
약점을 잡아서 기세등등해진 채상우에게 소현이 갑자기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네, 왕따 맞아요. 근데 그게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