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49
649
시리아와 예멘 내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기에 그쪽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기도 했지만, 그가 유가 하락을 확신하는 건 만수르 회장의 그런 뉘앙스의 말을 슬쩍 흘려줬기 때문이었다.
만수르 회장은 UAE의 원유 정책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국제석유투자회사(IPIC)의 사장직을 겸임하고 있었기에 중요한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다.
이런 걸 알고 있으면서 활용하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낸다면 그건 바보 멍청이 같은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나온 혁권은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라탔다.
엔진 소리를 내면서 차량이 출발하자 조수석에 탄 하킴이 몸을 뒤로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공항으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그는 차창을 통해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면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딱히 더 할 일도 없으니까 그렇게 하도록 해.”
눈을 감은 채 잠시 휴식을 취하던 혁권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스마트폰을 꺼냈다.
-대표님, 정동식입니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에 왜 그러는지 대충 짐작한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중국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군.”
-역시 대표님께서 손을 쓰신 모양이군요.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리셨기에 수입 쿼터를 2배로 늘려 놓으신 겁니까?
“운이 좋았어. 그것보다 쿼터가 늘어난 만큼 서로 겹치지 않게 작품을 선보이려면 계획을 재조정해야 되는데, 문제가 없겠지?”
그러자 정동식 이사가 바로 대답했다.
-중국 시장에 진출하길 원하는 작품들이 줄을 서 있는 데다 ‘고속열차’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당신’의 현지 반응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일정 조율과 판권 판매는 어렵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4,5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온 ‘고속열차’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의 하나뿐인 당신’ 역시 방영을 한 방송국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을 했기에, 정동식 이사가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 이사가 나보다는 이쪽 분야를 더 잘 아니까, 알아서 일을 진행시키도록 해. 지난번에 문영표 국장한테 약속을 한 것도 있으니, 이왕이면 드라마 가운데에 하나는 KBN 방송국 걸로 했으면 좋겠군.”
-적당한 작품이 하나 있는데 바로 KBN 방송국에 연락해서 협의를 진행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조건을 너무 양보 하지는 말고.”
-물론이지요.
KBN 방송국하고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하반기에 방영이 예정되어 있는 주말 드라마 제작을 맡는 것을 긍정적으로 논의 중이었기에, 이럴 때 호의를 한번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한국은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지금 공항으로 가는 길이니까 내일 아침에는 서울에 도착할 거야.”
-그럼 오후까지 대략적인 작품 리스트를 정리해서 보고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만족스러운 얼굴로 혁권은 통화를 끝냈다.
일행을 태운 차량은 고층 빌딩 사이로 천천히 저무는 해를 등진 채 복잡한 도로를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값비싼 수제 실크 양복을 걸친 김인철이 심복인 차민성 대리를 대동하고 부속실로 들어서자 비서실 직원들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사장님 안에 계시지?”
“예.”
대답을 들은 김인철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가볍게 노크만 한 번 하고는 거침없이 사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각 부서에 올라온 결재 서류를 살피고 있다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든 오차돈 태일정유 신임 사장은 상대가 회장의 막내아들인 김인철인 걸 확인하곤 얼른 표정을 풀었다.
“절 찾으셨다고요.”
“흠흠. 일단 이쪽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
직급은 물론이고 나이도 오차돈 사장이 많았지만 오너의 직계 가족이었기에 편하게 말을 놓지 못했다.
“차는 뭘로 마시겠나?”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일이 바빠서 그런데 갑자기 보자고 한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상당히 무례한 태도에 오차돈 사장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봤자 자신만 손해였기에 화를 꾹 눌러 참았다.
“김 이사를 오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여수 공장 확장 건 때문이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기존에 확보해 둔 공장 부지 외에 추가로 40만 ㎡가 넘는 땅을 매입하라고 했다던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뭐가 문제냐는 듯한 얼굴로 김인철이 대답하자 오차돈 사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부지 매입에 필요한 돈이 무려 750억이라고 보고받았는데, 가뜩이나 나프타 공장 증설에 막대한 투자금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이건 좀 무리이지 않겠나.”
김인철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면서 마주 앉아 있는 오차돈 사장을 쳐다봤다.
“이미 회장님께 재가를 받은 상황이라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나프타 공장과 함께 에틸렌 생산 시설까지 동시에 짓는 건 자금 부담이 너무 크니까 순차적으로 일을 진행하자는 말일세.”
상대의 의중을 파악한 김인철은 표정이 굳어졌다.
“에틸렌 공장 건설을 연기하자는 겁니까?”
“맞네. 일단 부지만 확보해 두고 나프타 공장 증설을 다 끝낸 다음에 바로 이어서 계획을 진행시킨다면, 지금보다 재정 부담도 줄어들고 훨씬 더 일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지 않겠나.”
공장 시설 증설 계획이 예정했던 것보다 많이 길어지겠지만, 투자금 확보를 위해 주거래 은행에서 수천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대출을 받아야 되는 상황인 걸 감안하면 나름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빨리 성과를 내야만 되는 김인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안 됩니다.”
잠깐 고려해 보는 기색도 없이 바로 딱 잘라 거부하자 오차돈 사장은 약간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김 이사.”
“공장 증설의 시너지 효과를 가장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프타와 에틸렌 생산 공장을 동시에 완공시켜야 됩니다.”
“그러기에는 자금 사정이 그리 여의치 않다고 방금 내가 설명을 했지 않나.”
“이번 분기 영업 이익만 2천억 원이 넘는 데다 부족한 부분은 차입을 통해서 충당하면 되지 않습니까.”
돈을 빌리는 걸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모습에 오차돈 사장은 답답한 얼굴을 했다.
“현재까지 확정된 투자금만 무려 1조 3천억 원일세. 그중에 절반은 금융권에서 차입을 받아야 되는데, 그러면 연간 지급해야 되는 이자만 수백억 원이야.”
그러자 김인철이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 것도 파악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킬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러 이야기가 쉬워지겠구먼.”
작게 머리를 끄덕인 오차돈 사장이 이야기를 이어 가려는 걸 중간에 끊고는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자가 많기는 하지만 매 분기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상태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번에 새로 발행하는 회사채를 통해 확보할 자금을 합친다면 차입 금액을 크게 줄일 수 있지 않습니까.”
오차돈 사장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채를 발행해서 들어오는 자금은 이미 쓸데가 따로 정해져 있다는 걸 김 이사도 알고 있지 않나.”
매 분기 흑자를 내고 있는 태일정유에서 갑자기 1천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는 이유는, 건설 경기 둔화와 용산드림타워 공사로 인해서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태일건설을 지원해 주기 위해서였다.
“같은 계열사끼리 돕는 것도 좋지만, 앞서 말씀하신 사장님의 논리대로라면 당장 우리도 자금이 부족해 금융권에서 차입을 해 와야 되는데 1천억이나 되는 거금을 그것도 회사채를 발행해서 빌려줄 여유가 없을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태일건설에는 김종원 회장의 장남이자 후계자로 유력한 김성균이 있었기에, 오차돈 사장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김인철은 그런 상대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이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후계자 경쟁이 끝난 게 아닙니다.”
“…….”
“큰형님한테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이신데, 얼마 전까지 둘째 형 라인이었던 사장님이 그쪽에 붙는다고 해서 제대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중에 토사구팽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으음.”
그렇지 않아도 내심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제대로 찔린 오차돈 사장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난 다릅니다. 내 목표는 더 높은 곳이지 정유사 사장 자리가 아닙니다.”
그가 욕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자 오차돈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날 돕는다면 최소한 지금 앉아 있는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김인철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오차돈 사장을 내려다보면서 마지막으로 짧게 말했다.
“누구 뒤에 설지 신중하게 판단을 내리길 바랍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가는 김인철의 뒷모습을 오차돈 사장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오늘도 늦게 업무를 끝내고 퇴근한 이두현 과장은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회사를 나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중간에 24시간 영업을 하는 대형 마트에 들렀다.
지하 주차장 한쪽에 승용차를 세우고 엔진까지 끈 이두현 과장은 밖으로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운전석에 앉아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인 이두현 과장은 하얀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가끔씩 자동차 한두 대가 오가는 소리만 들릴 뿐 인적이 거의 없이 조용했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내 한 명이 조수석 문을 열고 승용차에 올라탔다.
이두현 과장은 전혀 놀라는 기색없이 기다렸다는 듯 반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끄며 입을 열었다.
“돈은 가져왔어?”
그러자 사내가 마스크를 벗으면서 이두현 과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놀랍게도 김인철의 심복인 차민성 대리였다.
“한두 번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러십니까. 우선 어떤 정보인지부터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순서일 텐데요.”
느릿한 차민성 대리의 말에 이두현 과장은 미간을 찡그렸다.
대화를 나누는 걸로도 알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이번이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김종원 회장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 김인철이 본사 비서실에 뚫어 놓은 끈이 바로 이두현 과장이었다.
그동안 박상빈 비서실장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두현 과장이 중간에서 정보를 흘려 줬기 때문이었다.
“조대한 사장이라고 비서실에서 가끔씩 골치 아픈 일을 맡기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실장님이 그쪽에 연락을 해서 필리핀에 전문가들을 보냈어. 행방을 감춘 노형석을 찾아내 끌고 오라고 말이야.”
이야기를 들은 차민성 대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현지 지사 직원들이 노형석을 못 찾고 있으니까 강수를 둔 거지.”
“…….”
“조 사장 밑에 있는 직원들 실력이 보통 아니니까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런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은 차민성 대리는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내 이두현 과장한테 내밀었다.
이두현 과장이 얼른 봉투를 받아서 안을 열어 보자 5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또 넘겨줄 정보가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다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차민성 대리는 주위를 살피고는 차 문을 열고 승용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