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50
650
다음 날 정오가 지나서 서초동 빌라로 찾아온 정동식 이사는 거실 소파에 앉아 혹시라도 흐트러진 것이 없는지 옷매무새를 살폈다.
넥타이 매듭을 올리고 들고 온 가방에 서류가 잘 들어 있는지 확인한 뒤에 약간 들뜬 얼굴로 손목에 찬 시계를 볼 때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들자 혁권이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을 한 하킴과 함께 안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정동식 이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머리를 숙이며 먼저 인사를 했다.
“대표님.”
“일찍 왔군. 점심은 먹었나?”
“예.”
가볍게 악수를 나눈 혁권이 상석에 앉자 정동식 이사도 가죽 소파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혁권은 정동식 이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중국 시장에 내놓을 작품 목록을 가져왔다고?”
“네. 여기 있습니다.”
바른 자세로 앉은 정동식 이사는 가방을 열고 서류철을 하나 꺼내 두 손으로 공손하게 건넸다.
“2배수로 뽑아 놨는데, 쿼터가 늘어난 덕분에 대표님이 보시기에 문제가 없다면 목록에 있는 작품 판권을 전부 계약할 생각입니다.”
천천히 목록을 살펴보다가 뭔가를 발견한 혁권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제목 앞에 체크 표시가 되어 있는 건 뭐지?”
“중국 측에서 꼭 넣어 달라고 먼저 요구한 작품입니다.”
“완다시네마에서?”
혁권의 말에 정동식 이사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신문출판광전국에서 장덕천 부장을 통해 연락을 해 온 겁니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는 뜻인데…… 제목이 낯선 걸로 봐서 유명한 작품은 아닌 것 같고 도대체 이유가 뭐야?”
“‘꽃잎’이라고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위안부라고?”
“네. 작년이 남경대학살이 벌어진 지 80주년이 되던 해였지 않습니까. 우리 못지않게 태평양 전쟁 중에 많은 여성들이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잡혀 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나라가 바로 중국입니다. 최근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정치적으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을 고조시켜 내부적인 불만을 해소시키려는 용도로 쓰려는 것 같습니다.”
설명을 들은 혁권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는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내부 불만이라면……?”
딱히 바깥에 말을 옮길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동식 이사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경제성장에 따라 크게 벌어진 빈부격차와 헌법 개헌으로 시진핑 주석이 사실상 종신 집권이 가능해진 것 때문에 중국의 민심 동요가 심상치 않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당과 군軍은 물론이고 언론까지 한 손에 확실히 틀어쥐고 사실상 만장일치로 개헌을 통과시키면서 임기 제한 없이 국가 주석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됐지만,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시진핑 주석의 독주 체제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장은 언론과 인터넷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동요를 꽉 억누르고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 한계점에 도달한다면 자칫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반일 감정을 건드려서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분노를 일본한테 쏟아 내게 만들겠다는 속셈이군.”
“때마침 일본 총리와 정치인들이 역사적으로 민감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중국인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일이 있었고, 얼마 전에는 센카쿠열도[尖閣列島]에서 중국 어선들이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하고 충돌하는 사건까지 있었으니, 판을 벌이기에 딱 좋지 않겠습니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어느새 보는 시야가 예전보다 많이 넓어진 정동식 이사였다.
“자네 말을 듣고 나니 저쪽에서 왜 그런 요구를 해 왔는지 이해가 되는군.”
위치에 걸맞지 않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옛날 방식을 고수하려고 할 때마다 쓴 소리를 해 왔지만, 이런 식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 준다면 혁권으로서도 꽤 보람을 느꼈다.
“중국 정부와 관계도 생각해야 되겠지만 신문출판광전국에서 제시한 조건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기에 그러는 거지?”
“완다시네마를 비롯한 중국의 모든 멀리플렉스 극장 체인에서 골고루 최소 2주 동안 3,500개 이상의 상영관을 확보해 영화를 상영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
“그것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정부 산하기관 등을 동원해서 단체 관람을 하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도 있었습니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던 혁권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파격적인 조건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고속열차’ 때보다 상영관 숫자가 많은 거잖아.”
“그렇습니다.”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정동식 이사가 말을 이었다.
“제시한 조건을 반만 지킨다고 해도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중국 시장의 막강한 티켓 파워를 이미 확인한 데다 중국 정부에서 인위적으로 작품을 띄워 준다면 그 역시 최소한 적자는 보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제목이 ‘꽃잎’이라고 했나?”
“네.”
“작품 완성도는 어때? 상영관에서 영화를 틀면 관객들이 흥미를 가지고 볼 것 같나?”
그러자 정동식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다른 상업 영화보다 흥행도가 떨어지는 건 감수해야 되겠죠.”
“흠…….”
확실히 혁권의 생각에도 묵직한 주제인 만큼 가족이나 연인들끼리 마음 놓고 가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그래도 해외의 인권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데다 국내에서도 꽤 많은 관객이 봤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평론가들의 비평도 거의 호의적이었으므로 작품성은 문제없고요. 전체적인 완성도를 따졌을 때 조금 미흡한 부분도 있지만 저예산 영화인 데다 신인 감독이었던 걸 감안하면 훌륭한 수준입니다.”
“영화도 괜찮고 이런 파격적인 조건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 같군.”
“그럼 판권 계약을 해도 되겠습니까?”
“설사 손해가 나더라도 중국 정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무조건 배급을 해야 되는 상황이니까,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혁권은 서류철을 덮어 다시 정동식 이사에게 밀어 주었다.
“다른 작품들도 딱히 뺄 것이 없는 거 같으니까 이대로 진행시키도록 해.”
“예.”
받은 서류철을 가방에 챙긴 정동식 이사가 대답과 함께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그리고 표제은 작가하고 정식으로 전속 계약을 맺었고 정현태 PD도 이번 달 안까지 KBN 방송국에 사표를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인재를 빼내 간다고 KBN 방송국에서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나?”
“저도 그 부분을 우려했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김정숙 작가의 드라마를 우리가 제작하고 중국 수출까지 맡기로 해서 그런지 별다른 말없이 넘어갈 것 같습니다.”
“관계가 껄끄러워져서 좋을 것이 없었는데 잘됐군. 그러면 전속 계약을 맺은 작가가 몇 명이나 되는 거지?”
“이번에 합류한 표제은 작가까지 합쳐서 모두 10명입니다. 그중에서 2명은 스타 작가까지는 아니더라도 방송국에서 편성을 어렵지 않게 따낼 수 있을 만큼 나름 인지도가 높은 A급 작가고요.”
“그 정도면 작가진은 얼추 구색이 갖춰졌군.”
“정현태 PD와 스카우트한 다른 제작 스태프들까지 모두 합류를 하면 드라마 제작사로서 완전한 체계가 만들어질 겁니다.”
“이왕 시작했으니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를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키워 봐.”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정동식 이사의 눈동자는 의욕으로 가득했다.
대표인 혁권이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해 주고 하루가 다르게 회사가 커지는 것이 느껴지니 신명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동식 이사를 보내고 잠시 쉬고 있던 혁권은 입사 동기이자 친구인 유기백의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자주 연락을 하지 못했기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여어. 유 차장님께서 어쩐 일이야?”
-차장은 개뿔, 그것보다 너 어디야?
“서울.”
-뭐야? 한국에 들어왔으면 이 형님한테 연락을 했었어야지.
그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어. 넌 잘 지냈냐?”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윗대가리들 눈치 보고 밑에 애들 사고 친 거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매일 늘어나는 건 흰머리뿐이다.
“그러게 내가 그만두고 같이 일하자고 했잖아.”
-됐어, 인마. 난 그냥 지금처럼 가늘고 길게 살란다.
마음이 잘 맞고 믿을 수 있는 유기백이 함께 일을 한다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었기에 혁권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라.”
-그럴 일 없다니까.
심드렁하니 대꾸하지만 딱히 귀찮아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전화했어?”
-아, 맞다. 마침 서울에 있다고 하니 딱이네.
“그러니까 뭐냐고?”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용건을 말하라니까 자꾸 대답하길 피하면서 빙빙 돌려 묻는 것에 혁권이 미간을 좁혔다.
“나 바쁜 몸인 거 알지.”
-야야, 바쁘긴 뭐가 바빠. 어쨌든 저녁에 얼굴 좀 보자. 간만에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 것도 있고, 술이나 한잔하자고.
혁권은 머릿속으로 오늘 스케줄을 체크한 뒤 딱히 중요한 일은 없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
“그래. 어디서 만나?”
-음, 저번에 갔던 고기집은 어때? 거기 돼지 껍데기가 야들야들하니 맛있더라.
“알았어.”
약속 시간이 되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서 후끈한 열기가 훅 끼쳐 왔다.
아직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자리는 거의 만석에 가까웠다.
근처 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 보이는 무리가 단체석을 차지하고 앉아 벌써부터 왁자지껄하게 소란을 떨고 있었고, 혁권처럼 정장을 입은 직장인도 식사 겸 반주를 하는 모양인지 열심히 고기를 구우면서 소주잔을 비우고 있었다.
불판에 고기가 구워지면서 치이익 하는 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실내에 가득 울려 퍼지는 가운데 먼저 와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기백이 손을 들고 혁권을 맞이했다.
“어이!”
반갑게 부르는 소리에 혁권은 일단 윗도리를 벗어 한쪽 손에 들고 그 앞에 나란히 의자를 끌어 앉았다.
“오랜만이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넌 볼 때마다 아주 얼굴이 훤해진다? 뭐 여자들처럼 관리라도 받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단 술이나 따라 봐.”
큭큭 웃으면서 유기백이 소주잔을 가득 채웠다.
“짠. 한번 해야지.”
“좋지.”
챙, 가볍게 유리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유기백이 흘러넘칠 정도로 소주를 잔뜩 따라 줬기 때문에 두 사람 다 튄 술 방울로 손을 적실 수밖에 없었지만 주변의 분위기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한없이 유쾌하기만 했다.
“크, 오늘따라 술맛이 다네.”
일회용 물티슈로 손가락을 닦으며 유기백이 말했다.
“천천히 마셔, 그러다가 한 방에 훅 간다.”
“걱정 마. 내 주량 알고도 그러냐.”
“어쭈. 한번 해보자 이거야.”
“자신 있으면 한번 덤벼 보든가.”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