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72
672
그렇게 몇 시간이나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결국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날 임원 회의는 끝이 났다.
“김인철!”
오차돈 사장과 함께 대회의실 복도로 나온 김인철은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큰형인 김성균이 최세원 사장을 비롯해 자신을 지지하는 주요 임원들을 가신처럼 거느린 채 다가왔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멈춰 선 김성균 사장은 그를 사납게 노려봤다.
“지금 끝까지 해보자는 거냐?”
체면 때문에 꾹 눌러 참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김인철은 그런 형을 향해 눈썹을 크게 들어 올렸을 뿐, 뻔뻔하리만큼 태연한 낯짝으로 오히려 반문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말이야? 하나도 모르겠군.”
아득.
김성균 사장의 한쪽 입꼬리가 사납게 비틀리며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이번엔 옆의 오차돈 사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오 사장을 앞에 내세우고 넌 뒤로 빠지시겠다? 그런다고 네놈이 아버지 뒤를 이을 수 있을 것 같아!”
점점 격해지는 어조에 김인철은 도발하듯 일부러 형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그룹을 위해서 더 좋은 의견을 냈을 뿐이야.”
김인철은 피식,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았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신경쇠약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차라리 여름 휴가를 일찍 받아서 물 좋고 공기 좋은 데 한 한 달 정도 쉬다 오는 건 어때? 그동안 일은 내가 맡아서 하고 있을 테니.”
겉으로만 보면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속닥이는 모양새였지만 주고받는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나 다름없었다.
“이…… 낯짝도 두꺼운 놈 같으니.”
김성균 사장은 눈을 부라리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히 나한테 덤빈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친형제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증오심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에 김인철 또한 지금까지 마음껏 속에 감춰 두었던 감정을 드러내었다.
“누가 길고 짧은지는 대봐야 알지.”
이젠 더 이상 동생이 형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물론 예전부터 예의라고는 싹수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지금 김인철의 행동이나 표정은 명백히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악의, 그리고 탐욕 그 자체였다.
반대로 김성균 사장 역시 제 것에 욕심을 내는 김인철을 쳐 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어찌 보면 서로 꼭 닮은 모양새라 할 수 있었다.
김성균 사장은 김인철을 향해 차가운 눈빛을 던지다가 이내 제 뒤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겨 그대로 두 사람 앞을 지나쳐 갔다.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멀어지는 큰형의 뒷모습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자, 조마조마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오차돈 사장이 굳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날을 세워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후회라도 됩니까?”
김인철의 시선에 오차돈 사장은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이대로 가만히 놔뒀다면 그룹 경영권이 넘어가는 걸 두 눈 뜨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야 될 겁니다.”
김인철의 말에 오차돈 사장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갑자기 본사에서 비상대책 회의가 소집될 때부터 김인철은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둘째 형의 죽음에 그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걸 의심하는 박상빈 비서실장이었기에, 자신을 제쳐 두고 큰형을 후계자로 밀어 올리려고 할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상대책 회의에서 그동안 김인철 형제를 비롯한 일부 사장단만 알고 있던 김종원 회장의 병세를 공개하면서 경영 공백을 핑계로 큰형인 김성균한테 그룹을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주려고 했다.
미리 대비를 해 놓지 않았다면 분위기에 휩쓸려서 꼼짝없이 당했을 테지만, 공동 경영 체제로 갈 것을 주장해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동안 김씨 일가가 독점해 온 경영권을 계열사 사장들한테 일부지만 나누어 준다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으나, 아직은 김성균 사장을 지지하는 세력이 더 컸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큰형한테 경영권이 완전히 넘어가는 걸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큰형이 중도 성향의 임원들을 회유하기 전에 내 쪽으로 끌어 올 수 있게 최대한 빨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룹 내 기반이 단단하고 상당수 임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김성균 사장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 버렸기에 오차돈 사장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스위스 제네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은행 VIP 센터에 혁권이 하킴만 대동한 채 들어서자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금발 백인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존슨 씨.”
친절한 미소와 함께 혁권을 맞이한 상대는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금고로 가시겠습니까?”
“부탁합시다.”
“예. 절 따라오십시오.”
멋진 맞춤 정장과 영국식 발음을 갖춘 직원이 천연 대리석 바닥을 지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 앞에는 허리에 권총을 찬 무장 경비원이 서 있었는데, 어설프게 체구만 큰 일반 사설 업체에서 파견된 인원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자세나 눈빛이 남다른 것이 한눈에 봐도 군, 혹은 경찰 출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은행 직원이 안주머니에서 ID 카드를 꺼내 한쪽 벽에 설치된 인식기에 갖다 대자 불빛이 바뀌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렸다.
“들어가시죠.”
1천만 달러 이상을 계좌에 예치한 VVIP들만을 위한 공간답게 엘리베이터도 원목을 써서 아주 고급스럽게 실내가 장식되어 있었다.
마지막에 탄 은행 직원은 문이 닫히자 팔을 뻗어서 지하 3층이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목적한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고급 호텔 로비처럼 꾸며진 넓은 공간이 나타났는데, 한쪽이 굵은 철창으로 막혀 있었다.
은행 직원이 손짓을 하자 안쪽에 있던 무장 경비원이 다가와 철창을 열어 줬다.
철컹.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커다란 금고가 나타났다.
“지금과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시겠습니까?”
은행 직원이 옆으로 비켜서며 말하자 혁권은 금고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디스플레이에 8 자리로 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는 오른쪽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마지막 고객 확인 절차가 끝나자 은행 직원의 영업용 미소를 지은 채 금고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내부에는 서랍처럼 생긴 개인 금고들이 삼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혁권은 익숙하게 은행 직원과 함께 왼쪽 벽면으로 다가가서 양쪽에 설치된 지문 인식기에 같이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고는 책상 서랍보다 조금 큰 크기의 개인 금고를 꺼냈다.
“그럼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용무가 끝나시면 바로 불러 주십시오.”
은행 직원이 밖으로 나가자 혁권은 가운데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앞면에 붙어 있는 숫자 패드를 눌러 개인 금고를 열었다.
안에는 가죽으로 된 서류 봉투와 고액권인 500유로 지폐 뭉치가 여러 개 들어 있었다.
보통이라면 현금에 먼저 눈이 가겠지만 대신 혁권이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서류 봉투 쪽이었다.
안에 손을 넣어서 내용물을 꺼내자 미국 재무부에서 발행한 채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강 어림잡아도 수천만 달러어치는 될 것 같은 양이었다.
눈으로 쭉 훑어본 혁권은 다시 봉투에 채권을 집어넣고 하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거 줘 봐.”
그러자 하킴이 들고 있던 가방에서 톤코릴리 철광산 지분 절반을 양도받은 계약서와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다이아몬드 원석이 가득 있어서 무게가 제법 되었는데 품질도 좋아 모두 보석용으로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코로나 대통령한테 계약금으로 받은 것과 자신이 보유한 광산에 들렀다가 채굴된 원석을 받아 온 걸 합쳐서 양이 꽤 됐다.
미리내 브랜드를 통해 바로 가공을 해도 됐지만 한꺼번에 많은 다이아몬드 원석이 유통되면 가격이 떨어질 수 있었기에 일단 그냥 보관을 해 두기로 했다.
혁권은 받은 물건들을 모두 개인 금고에 집어넣고는 뚜껑을 닫고 탁자 한쪽에 놓인 벨을 눌렀다.
그러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은행직원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용무가 다 끝나셨습니까?”
“그렇소.”
“그럼 다시 보관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혁권이 머리를 끄덕이자 은행직원이 양손으로 개인 금고를 집어 들어서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놨다.
볼일을 모두 끝낸 혁권은 하킴과 함께 은행을 나와 입구 앞에 세워져 있던 벤츠 승용차에 올라탔다.
“화물선은 어디쯤 갔다고 했지?”
“발레아루스 제도를 지나는 중이라고 했으니까. 내일 오후쯤에 예정대로 지브롤터해협Gibraltar Straitof을 통과할 겁니다.”
“그럼 시간에 맞춰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군.”
“도중에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럴 겁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면서 말했다.
“바로 공항으로 가.”
“예.”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제네바를 떠난 혁권은 지브롤터로 향했다.
“블랙 래빗이 코로마 대통령하고 손을 잡았다고?”
러셀 CIA 국장의 말에 마주 앉아 있던 샌더슨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톤코릴리 철광산 지분 절반과 코로마 대통령이 프리타운을 탈출할 때 중앙은행 금고에서 꺼내 간 다이아몬드 원석을 받고 정부군에 필요한 보급 물자를 공급해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어쩐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코로마 대통령이 외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시에라리온에 계속 남아 있었던 거군.”
“MI-24 하인드 공격 헬기까지 2대를 가져온다고 하니 쿠데타군과 승부를 겨루어 볼 만할 겁니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러셀 국장이 물었다.
“그건 또 어디서 난 거야?”
“폴란드군이 구소련제 무기를 대거 퇴역시키면서 처분할 때 블랙 래빗이 손에 넣은 기체들입니다.”
혁권에 대한 동향 보고서를 읽었던 걸 떠올리며 러셀 국장이 입을 작게 벌렸다.
“사탄의 마차가 하늘에 뜬다면 쿠데타군 입장에서는 지옥이나 마찬가지겠군.”
“공중 전력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니 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괜히 그런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맞습니다.”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신 러셀 국장은 여유로운 얼굴로 샌더슨을 봤다.
“어찌 됐건 우리한테 나쁜 일은 아니군.”
“독재자이기는 하지만,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쿰부야가 정권을 잡는 것보단 코로마 대통령이 계속 시에라리온을 통치하는 것이 나으니까요.”
“맞는 말이야.”
머리를 끄덕인 러셀 국장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소파 등받이에 어깨를 붙이면서 말을 이었다.
“시리아처럼 일이 꼬이면 골치 아프니까 직접 개입은 하지 말고 러시아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적절하게 막기만 하고 블랙래빗의 행동을 그냥 놔둬.”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에라리온 상황을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이었는데, 친미 성향이 강한 코로마 대통령이 혁권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수 있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