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71
671
#전화위복
몬로비아로 가서 대기시켜둔 비즈니스 제트기로 갈아탄 혁권은 이틀 뒤 흑해 연안에 위치한 루마니아 항구 도시인 콘스탄차Constanta에 도착했다.
부두 한쪽 마치 성벽처럼 줄을 지어 높다랗게 쌓여 있는 컨테이너들 사이로 승용차 세 대가 줄을 지어 달려가다가 천천히 멈추어 섰다.
먼저 내린 하킴이 날카롭게 주위를 살펴보고는 두 손으로 공손히 차 문을 열자 혁권이 뒷좌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정오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늘은 금방이라도 한바탕 비가 뿌릴 것처럼 흐리고 어두웠다.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짝 흐트러뜨리고 지나가는 가운데 혁권은 함께 내린 함단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입니다.”
얼마쯤 걸어가자 부두 안쪽까지 이어진 녹슨 철로 위에 컨테이너를 실은 화차 10여 개가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팔을 들어 함단이 앞에 줄지어 있는 컨테이너를 가리키며 바로 이거라고 하자 혁권이 턱을 까딱였다.
“열어 봐.”
함단의 눈짓에 뒤에 있던 부하 둘이 재빨리 움직여 제일 가까운 자리에 있던 컨테이너 뒤로 돌아갔다.
철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어젖히자 나무 상자들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무 상자에는 폴란드 조병창 마크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AK-47용 7.62mm 탄환 10만 발과 전투식량 1만 개가 실려 있습니다.”
“다른 물품들은?”
“이것들은 폴란드에서 가져오느라 늦게 도착한 거고 나머지 화물은 이미 배에 선적이 다 끝난 상태입니다.”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수고했어.”
“저야 그저 보스께서 지시하신 대로 움직인 것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혁권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대꾸했다.
“말한 걸 제때 처리하는 것도 능력이야.”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테지만, 루마니아와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에서 쏟아져 나온 구소련제 무기류를 헐값에 대거 사들여 보관해 놓고, 많은 인맥을 만들어 둔 덕분에 커다란 화물선 한 척을 사흘 만에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공격 헬기도 실었겠지?”
혁권의 물음에 함단이 바로 대답했다.
“부피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로터Rotor를 비롯한 일부 부품을 분해해 화물칸에 선적해 놨습니다.”
“시에라리온에 도착하면 바로 사용해야 되는데 기체를 재조립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아니겠지?”
기껏 거기까지 가져갔는데 제때 써먹지 못한다면 손해인 데다 코로마 대통령과 한 약속도 어기게 되는 거였기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16시간 정도면 다시 재조립이 가능하고 합니다.”
“다행이군.”
적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정비성이 그리 좋지 않은 구소련제 무기인 걸 생각하면 이것도 아주 빠른 거였다.
MI-24 하인드 공격 헬기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베테랑 정비사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하들에게 손짓을 해서 컨테이너 문을 닫도록 한 함단은 고개를 돌려 혁권을 보며 말했다.
“공격 헬기를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그래.”
사실 MI-24 하인드는 폴란드 군이 나토에 합류하면서 구소련제 무기를 대거 퇴역시킬 때 다른 장비들과 함께 거의 고철값만 받고 매입해 둔 거였다.
그걸 코로마 대통령한테 더 많은 톤코릴리 철광산 지분을 받아 낼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던 혁권이 떠올리고는 협상 카드로 쓴 것이었다.
다행히 결과는 아주 좋았고 함단한테 급히 연락해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MI-24 하인드를 꺼내 콘스탄차로 옮겨 오는 한편 민간 군사 기업을 통해서 공격 헬기를 운용할 조종사와 정비사 들을 고용했다.
“그럼 이제 화물을 시에라리온으로 가져가는 일만 남았군.”
“남은 화물을 마저 다 실고 내일 아침 일찍 출항하면 기한에 맞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빈틈없는 일 처리에 혁권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남은 물량도 최대한 빨리 실어 보내야 되니까 차질이 없도록 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이번 오더로 창고에 쌓아 뒀던 재고를 완전히 처분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 때마침 운이 좋았지.”
처음에는 쿠데타로 인해 정권이 무너지면 시에라리온에 있는 사업체에 악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크게 우려했었다.
그런데 상당한 값어치를 가진 톤코릴리 철광산 지분 절반을 받아 내고, 동시에 몇 배의 차익을 내며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팔아 치울 수 있으니 전화위복이 따로 없었다.
커다란 크레인이 하차에 실린 컨테이너를 들어 옮기는 걸 보면서 혁권은 뒷짐을 진 자세로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
같은 시각.
서울 시내 중심가, 바벨탑처럼 우뚝 솟아 있는 태일그룹 본사 대회의실에서는 그룹 주요 임원들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비상대책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뇌출혈로 쓰러진 김종원 회장이 계속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어서인지 참석자들의 표정이 무거웠다.
“심폐 기능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의식이 계속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사이 얼굴이 초췌해진 박상빈 비서실장이 태일병원에 입원해 있는 김종원 회장의 몸 상태를 말해 주자 실내가 크게 술렁였다.
지난 수십 년간 경영권을 한 손에 움켜쥐고 제왕적인 그룹 경영을 해 온 김종원 회장이었기에 그의 부재가 가져오는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당장 그룹에서 추진하던 굵직한 사업 계획들이 오너인 김종원 회장의 결재를 받지 못해 모두 올 스톱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까지는 괜찮았지만 이런 상태가 장기화된다면 기존 사업에까지 여파가 미치는 건 시간 문제였다.
“회장님을 담당하고 있는 의료진은 뭐라고 합니까?”
임원 중 한 명이 답답한 얼굴로 묻자 박상빈 비서실장은 선뜻 바로 대단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지금 상태로는 회장님 스스로 깨어나시기를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어쩌다가 이런 일이······.”
“허어.”
파문이 번져 나가듯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퍼졌다.
김종원 회장의 경영 복귀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설마하고 있었는데 그걸 공개적으로 인정했으니 다들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다만 몇몇 그룹 핵심 인사들과 서로 떨어져서 마주 보며 앉아 있는 김인철, 김성균 두 형제는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웅성거리면서 대회의실 안이 시끄러워지자 박상빈 비서실장이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탕! 탕!
“조용! 모두 조용해 주십시오.”
그러자 소란이 조금씩 가라앉으며 참석자들의 시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박상빈 비서실장에게 다시 모였다.
장내를 천천히 둘러본 박상빈 비서실장은 목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회장님께서 복귀하시기 전까지 경영 공백을 막기 위해 임시로 그룹을 이끌어 갈 비상 경영 체제를 구성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야기를 끝내기 무섭게 실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지면서 참석자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박상빈 비서실장이 끝까지 김종원 회장이 복귀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뒀지만, 사실상 은퇴가 확정된 상황 속에 여기서 주도권을 쥐는 쪽이 후계 구도를 확정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참석자들이 긴 회의 테이블 끝에 앉아 있는 김인철과 김성균 두 형제의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어느새 소음이 잦아든 실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 태일물산을 맡고 있는 최세원 사장이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발언권을 요청했다.
“최 사장님, 말씀 하십시오.”
앞에 놓인 마이크에 불이 들어오자 최세원 사장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김성균을 힐끔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회장님이 쓰러지신 이후로 온갖 소문이 난무하며 그룹 계열사 주식이 10%나 떨어진 걸 생각하더라도 더 이상 경영 공백이 장기화되는 건 막아야 될 겁니다. 그래서 전 이번 위기를 넘기는 데 회장님의 장남이자 오랫동안 건설사를 맡아 많은 성과를 이루어낸 김성균 사장이 적격이라고 봅니다.”
최세원 사장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김성균 사장파로 분류되는 임원들이 지지하는 발언을 쏟아 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회장님의 후계는 당연히 장남인 김성균 사장님께서 이어 받으셔야지요.”
“옳습니다.”
분위기를 김성균 사장 쪽으로 몰아가자 김인철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큰형인 김성균 사장한테 그룹 경영권이 그대로 넘어가 버릴 상황이었다.
김인철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옆에 있던 오차돈 태일정유 사장이 잔뜩 굳은 얼굴로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반대 의견을 냈다.
“아직 회장님께서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벌써 후계 문제를 운운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오 사장은 이대로 경영 공백 사태가 장기화되는 걸 그냥 방치하자는 거요!”
최세원 사장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쏘아봤지만 오차돈 사장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마저 했다.
“경영 공백이 생기는 건 당연히 막아야 되겠지요.”
“방금 전에 한 이야기는 뭐요?”
약점이라도 잡았다는 듯 최세원 사장이 바로 모순矛盾을 지적했다.
“경영 공백은 최소화해야 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다급하게 후계 구도를 확정 짓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오히려 시장과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만들 겁니다.”
“누가 회장직을 승계한다고 했소. 비상 상황인 만큼 김성균 사장을 중심으로 전 직원들이 뭉쳐 이번 위기를 넘기자는 것 아니오.”
“그렇게 하면 회장님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돼서 불안감을 더 키우게 될 겁니다.”
“그러면 어쩌자는 거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자 오차돈 사장이 좌중을 둘러보고는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한 사람한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계열사 사장단이 다 함께 부담을 나눠 지는 집단 경영 체제로 당분간 그룹을 이끌어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참석자들이 웅성거리며 삼삼오오 목소리를 낮춰 의견을 교환했다.
“공동 경영 체제라······.”
“일 리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고려해 볼 가치는 있을 것 같군요.”
김인철을 지지하는 임원들이 분위기를 만들자 중도파이거나 아직 김종원 회장 대신 아들인 김성균 사장이 태일그룹 경영권을 맡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던 이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굳이 그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지금은 강력한 리더가 그룹을 이끌어 가야 됩니다!”
“그쪽 의견대로 하려면 새로 주주총회를 열어 주주들의 동의를 구해야 되는데, 가뜩이나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상황에서 굳이 일을 더 힘들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소.”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당분간 회장님의 복귀가 어려워졌으니 이번 기회에 후계 구도를 명확하게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누구 마음대로 그룹 후계를 정한다는 거요!”
“회장님이 자리를 못 지키신다면 당연히 장자長子인 김성균 사장님이 뒤를 이어 받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급기야 삿대질까지 하면서 두 패로 갈려 말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파벌이 갈려 서로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에, 박상빈 비서실장은 오늘따라 유달리 크게 느껴지는 김종원 회장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씁쓸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