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35
735
소현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오피스텔을 나오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성균이 며칠 전에 부상을 치료하고 복귀한 아미르와 함께 다가왔다.
여러 차례 습격을 당했고 얼마 전에는 정말 위험한 상황을 겪었기에 두 사람 말고도 권총을 소지한 경호원 셋이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국정원에서 묵고 계신 호텔로 지난번 안전가옥을 보스 이름으로 등기 이전한 서류를 보냈다고 합니다.”
시가로 150억이 넘는 저택을 넘겨받은 거였지만 혁권은 그리 좋지 않은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흥. 빨리 원하는 물건을 가져오라고 재촉하는 기분이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혁권은 경호원이 지하 주차장 버튼을 누르는 걸 보면서 말을 이었다.
“김 전무한테 연락해서 괜찮은 업체를 하나 골라 리모델링 견적을 뽑아 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어찌 됐건 계속 호텔 생활을 할 수는 없는 데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만한 크기의 집을 구하는 것도 쉬운 건 아니었기에 리모델링을 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경호 인력까지 상주하려면 공간이 조금 좁을 것 같은데 근처에 주택을 추가로 매입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지난번 사건 이후로 경호원 숫자를 대폭 늘려서 스무 명이 2교대로 그를 밀착 경호하고 있었다.
국정원에서 넘겨받은 안전가옥이 넓기는 했지만 경호원들을 전부 수용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듣고 보니까 그렇군. 주변에 적당한 건물이 있으면 가격에 상관없이 매입해서 함께 수리를 하도록 해.”
“예.”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리자 밖으로 걸어 나온 혁권은 대기하고 있던 벤츠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앞뒤로 경호 차량의 호위를 받으면서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대로에 들어서자 조수석에 앉은 백성균이 몸을 뒤로 돌리며 말했다.
“지난번에 조사를 하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글로브박스에서 서류봉투를 하나 꺼내서 내미는 걸 혁권이 건네받았다.
안에 든 건 명동 사채 시장의 거물이자 태일산업 지분 10%를 소유한 대주주인 박형윤이 북한에 남겨 두고 왔다는 가족에 관해서 조사한 자료였다.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혁권은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서류를 보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는데 얼마 있지 않아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만들면서 고개를 들었다.
“박 사장의 본처는 이미 사망했군.”
“나이도 고령인 데다 아무래도 한국보다 의료 체계가 낙후되어 있다 보니 노인들이 오래 살지 못하고 조금만 아프거나 병에 걸리면 치료를 제대로 못 받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한 모양입니다.”
“으음.”
원래 사회구조가 취약해지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제일 먼저 그리고 큰 타격을 입으며 많이 희생되는 쪽이 바로 노약자와 어린아이 들이었다.
특히나 북한은 수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아무런 경제력이 없던 노인계층이 크게 줄어드는 비극을 겪었고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었다.
비록 휴전선으로 가로막혀 있었으나 같은 피가 흐르는 한민족이었기에 이런 북한의 상황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큰아들인 박병주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겁니다.”
“함경북도 경원군이라······ 두만강이 있는 국경 바로 옆이군.”
첨부되어 있는 지도를 보며 그가 눈을 반짝였다.
“자료에도 나와 있지만 월남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오래전에 고건원 탄광으로 강제 이주돼 석탄을 캐는 광부 일을 해 온 모양입니다. 결혼도 해서 슬하에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49년생이면 나이가 꽤 있을 텐데 아직 탄광 일을 하는 건 아니겠지?”
“10년 전에 은퇴를 했습니다만 진폐증으로 인해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폐증은 폐에 분진이 침착해서 폐 세포에 염증과 섬유화가 일어나 기침을 심하게 하며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병이었다.
주로 광산처럼 밀폐된 곳에서 오랫동안 분진을 들이마시면서 일하는 노동자들한테 많이 생기는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북한이라 조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걸 다 알아낸 거지?”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보위부 자료를 통째로 빼내 왔다고 하더군요.”
“뭐?”
국가안전보위성의 줄임말인 보위부는 이름 그대로 체제 보위 임무와 간첩 및 반혁명분자 색출, 주민들의 사상적 동향 감시, 대남 정보 업무 등을 담당하는 북한의 핵심 기관이었다.
그런 곳에서 박형윤 사장이 북한에 남겨 둔 가족에 대한 자료를 빼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배급 체계가 무너지면서 이제 돈만 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북한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보위부까지 이러다니 국가 전체가 썩었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던 혁권은 문득 든 생각에 백성균을 보며 말했다.
“박형윤 사장쯤 되는 인물이라면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 대해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왜 한국으로 데려오지 않고 그냥 놔두고 있는 거지?”
예전처럼 북한이 완전히 폐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해 수백 명의 탈북자들이 국내에 들어오는 만큼 찾아보면 가족을 데려올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북한에 사는 큰아들을 위해 재산을 한몫 떼어 놓고 있을 정도로 애착이 있다면 벌써 손을 썼어야 됐다.
“알아보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야?”
“브로커를 써서 몇 번이나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빼내 오려고 했지만 운이 나쁘게도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어쩐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박형윤 사장이 지금까지 그냥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을 것 같았다.
“여기저기 뇌물을 써서 다행히 고통스러운 단련대나 수용소로 끌려가는 건 막았지만, 그 이후로 보위부의 감시가 붙어 섣불리 데려올 생각을 못 하게 된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브로커를 통해 생활비로 쓸 돈만 보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지원마저 없었다면 진폐증을 앓고 있는 큰아들은 벌써 죽고 말았을 겁니다.”
“까딱했다가는 수십 년 동안 보지 못한 큰아들은 물론이고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몽땅 다 잃을 뻔했으니 박 사장 입장에서는 다시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할 엄두가 나지 않겠군.”
“아마도 그럴 겁니다.”
혼자 월남을 하는 바람에 지금껏 고통을 당해 온 북한의 가족들이 또다시 자신으로 인해 해를 입는다면 그 고통과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터였다.
매끈하게 면도를 하고 나온 턱을 한쪽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잠시 고심하던 혁권은 이내 서류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일단 이 문제는 보류해 놓도록 해.”
“예.”
아무리 박형윤 사장이 가지고 있는 태일산업 지분이 필요하다고 해도 한가족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기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사이 혁권을 태운 벤츠 승용차는 정체가 풀린 시내 도로를 빠르게 달려갔다.
흐릿하게 어두운 하늘 아래, 추적추적 빗방울이 잔디를 적시고 있었다.
대청마루에 선 박형윤은 한 손으로 부채를 부치며 안개라도 낀 듯 뿌옇게 보이는 정원과 모처럼 비를 맞아 초록빛이 되살아 난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한여름의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고작 이런 비로는 열기를 해소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흙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먹는 식물에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터였다.
“어르신.”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박형윤이 눈동자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날도 궂은데 밖에서 어찌 이러고 계십니까?”
오랫동안 비서로 그의 옆자리를 지켜온 문명균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정원 구경을 하고 있었네. 비가 오니까 나무들도 기뻐하는 것 같군.”
그러면서 박형윤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가지를 뻗고 있는 소나무가 아니라 좀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마치 지금 여기에 없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에 문명균이 한 번 더 안으로 드시라고 권할까, 고민하던 차 박형윤의 입이 열렸다.
“날씨가 이래서 그런가, 부쩍 옛날 생각이 나는군.”
“옛날이라 하시면······.”
“북에 있는 내 고향이 말이야.”
그러면서 박형윤은 느릿한 손동작으로 부채를 흔들었다.
“지난 세월 동안 한순간이라도 내 고향과 가족들을 잊은 적이 없네. 누군가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은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어.”
하지만, 하고 박형윤이 말끝을 흘렸다.
아무리 돈으로 못하는 것이 없는 시대라고는 하나 그어진 휴전선을 넘는 것은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럼 어르신. 지금이라도 다시 한 번 북에 계신 가족분들을 모셔 오는 걸 시도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박형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나라고 어디 안 그러고 싶겠나. 하지만 남으로 넘어오다 자칫 생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순 없어.”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언제 천수를 다하고 죽을지 모르는 나이였기에 마지막으로 북에 있는 큰아들과 손자, 손녀를 만나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자 가슴 깊숙이 남아 있는 한恨이었다.
북에 있는 가족들이 국경을 넘어오려다가 잡혔을 때 박형윤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문명균이었기에, 차마 더 브로커를 보내는 걸 권할 수가 없었다.
“죽기 전에 한 번만 봤으면 소원이 없겠지만 하늘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쩌겠나. 그게 운명인 것을······.”
회한이 가득한 얼굴로 말한 박형윤은 이내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문명균을 봤다.
“울적한 생각을 해서 그런지 소주가 당기는군. 오랜만에 같이 한잔하도록 하세.”
“인천댁한테 술상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작게 머리를 끄덕인 박형윤은 안방으로 느릿한 발걸음을 옮겼다.
이틀 뒤.
거래를 위해 싱가포르에 도착한 혁권은 특급 호텔인 마리나베이샌즈 펜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객실 안은 24시간 틀려 있는 에어컨 덕분에 상당히 쾌적했다.
물소 가죽으로 만든 소파에 앉아서 쉬던 혁권은 마치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듯 때맞춰 걸려 온 심인성의 전화를 받았다.
“무슨 용건이오?”
-호텔에 감시가 붙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해 주려고 연락했소.
이미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혁권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에서 이렇게 자꾸 전화를 해 대는 것이 더 위험할 것 같소만······.”
-꼭 알려 줘야 될 정보가 있어서 연락을 한 거니까 너무 까칠하게 말하지 마시오.
그가 눈썹을 좁히는 사이에 심인성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싱가포르에 왕전이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박희도라는 인물과 함께 움직이고 있소.
“북한 쪽 사람인 모양이군.”
-맞소. 대외적으로 승리 무역이라는 수산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진짜 정체는 북한군 대좌로 해군 직속의 외화벌이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자요.
“그럼 이자가 이번 거래에 결정권을 쥐고 있다고 봐도 되겠군.”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할 거요.
그동안 외부 시선을 의식해서 절대 앞에 나서지 않던 북한 측 인물이 싱가포르에 나타난 걸 어떤 신호로 받아들여야 될지 갈피가 안 잡힌 혁권은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살짝 인상을 썼다.
-김 대표를 감시하는 놈들도 박희도가 데려온 인원들이오.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닐 테니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시오.”
혁권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분명히 이야기해 두는데 쓸데없이 끼어들었다가 거래가 잘못되면 전적으로 그쪽 책임이오.”
-알겠소. 멀리 떨어져서 가만히 지켜만 볼 테니까 아무 염려 하지 마시오.
신뢰가 안 갔지만 여기서 이걸 가지고 신경전을 벌일 상황은 아니었기에 이쯤하고 그냥 넘겼다.
통화를 마친 혁권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전송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을 열어 보니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 찍은 듯한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그는 어딘가로 움직이는 중이었고, 버릇인지 주위를 경계하는 모양새였으나 위층에서 몰래 줌을 당겨 찍은 것까지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정면이 아니라 살짝 옆모습이긴 해도 얼굴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게 박희도라는 남자인가.’
혁권은 사내의 얼굴을 눈에 자세히 새기며 사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