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09
809
“그렇다면 원유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겠군.”
-네. 국제 유가가 폭등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정유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태일정유는 더 절박한 상황일 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물을 그쪽에 팔았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소?”
-선물을 전부 처분하실 생각입니까?
“맞소.”
-연일 최고가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처분하는 건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
스텐저가 살짝 만류했지만 이제 며칠 뒤면 페르시아만 봉쇄가 풀리며 중동 사태가 해결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폭등 상황이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소.”
-흐음.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하긴 지금 매각을 한다고 해도 수익률이 엄청날 겁니다.
투자 액수도 적지 않은 데다가 레버리지를 최대한 끌어와 베팅을 했으니 수익이 어마어마할 터였다.
“거제도 비축 기지에 저장해 둔 원유가 110만 톤가량 있는데, 그것까지 합쳐서 처분을 해 주시오.”
-현물까지 있다면 더욱 좋지요. 그런데 아무리 태일정유가 큰 기업이라고 해도 존슨 씨가 가지고 계신 원유 선물을 전부 다 매입하긴 버거울 겁니다.
선물 매입 가격만 한화로 4조 원이 넘는 데다가 지금 이 시간에도 가격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기에, 스텐저의 이야기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특히나 최근 생산 시설을 대규모로 확충한다고 자금을 엄청나게 쏟아부었기에 몇 년째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태일정유의 자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그러면 현물을 포함해서 가능한 많은 물량을 태일정유에 넘기고 나머지는 시장에서 처분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매각을 끝내면 되겠습니까?
이란이 봉쇄를 풀기 직전까지 쥐고 있으면 가장 비싸게 원유 선물을 팔 수 있겠지만 항상 변수를 염두에 둬야 했다.
“사흘 안에 전부 정리해 줬으면 좋겠소.”
-흐음. 조금 촉박하지만 시장에 매물이 거의 사라진 상황이니 처분하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알아서 하겠지만 태일정유하고 거래를 할 때 이쪽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 주시오.”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통화를 끝낸 혁권은 느긋한 얼굴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미끼를 던졌으니 이제 태일정유라는 대어가 걸려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독이 든 사과라는 걸 모른 채 미끼를 덥석 물 걸 생각하며 그는 입가에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페르시아만 봉쇄로 비상이 걸린 태일정유 본사는 대부분의 사무실에 불이 환하게 켜진 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최상층에 위치한 사장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오차돈 사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다들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소파에 둘러앉아 있었다.
벌써 몇 개째인지 모르는 담배를 탁자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서 끄며 오차돈 사장이 입을 열었다.
“원유 재고가 얼마나 남았나?”
그러자 구매담당 이사인 문병기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 200만 배럴이 채 안 됩니다.”
“겨우 그것 밖에 안 남았단 거야!”
오차돈 사장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죄인처럼 머리를 숙인 문병기는 연신 눈치를 보면서 변명을 했다.
“알고 계시다시피 제2공장이 가동되면서 원유 소비가 크게 늘어난 데다가 하필 저장 시설 보수 공사를 진행하느라 탱크를 절반이나 비웠을 때 중동에서 일이 터지는 바람에 상황이 더 어렵게 됐습니다.”
“누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당장 며칠 뒤면 공장이 멈출 판인데, 어떻게든 원유를 구해 놔야 될 거 아냐!”
“그게,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앉아 있던 소파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오차돈 사장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입만 나불대지 말고 원유를 구해서 탱크에 채워 넣으라고!”
“죄송합니다.”
다른 임원들도 다 앉아있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질책을 당한 문병기 이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이도 꽤 있는 사람이 그런 꼴을 당하니 몇몇 임원들의 표정에 안쓰럽다는 기색이 떠오르기도 했으나 오차돈 사장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담배를 피워 댔다.
방금 피운 담배 연기가 채 사장실 내부를 다 빠져나가지도 않았는데, 또 불을 붙이자 탁한 공기가 더욱 사람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오차돈 사장은 하루하루 줄어드는 원유 재고량을 보고받을 때마다 몸속에 있는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뻑뻑 피워 대고 있을 때 박창근 재무이사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울산으로 오고 있는 유조선이 두 척 있다지만 그거 가지고는 얼마 버티기 어려우니 지금이라도 제2공장 가동을 완전히 멈추고 나머지도 생산량을 대폭 줄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몇몇 임원들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오차돈 사장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공장을 멈추면 얼마나 큰 손해가 발생하는지 알고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일정 부분 피해를 감수하고 시간을 최대한 버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중동 사태가 얼마나 더 오래 갈지 모르는 상태에서 박찬근 이사의 말대로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오차돈 사장의 입장에서는 섣불리 그런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란의 페르시아만 봉쇄와 그로 인한 국제 유가 폭등은 천재지변처럼 그가 어쩔 수 없는 악재였다.
그렇지만 저장 시설 보수 공사로 인해 원유 재고를 충분히 확보해 두지 않아서 막대한 자금이 투자된 제2공장이 가동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멈추어 선다면 그건 온전히 사장인 자신의 책임이었다.
아무리 김인철에게 임기를 보장받았다고 해도 상황이 그렇게 되면 오차돈 사장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아직 그룹을 완전히 다 장악하지 못한 김인철이 그를 주주들의 불만을 누르러뜨리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어렵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런 식으로 쫓겨나듯 반평생을 받친 회사에서 나갈 수는 없었다.
“제2공장을 멈춰 세울 수는 없어!”
“사장님······.”
더 이상 다른 말은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고집 센 표정으로 외치는 오차돈 사장에게 박창근 재무 이사가 다시 한번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오차돈 사장이 문병기 구매 담당 이사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원유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진짜 없겠어?”
“아, 그것이······.”
갑자기 질문을 받은 문병기 이사는 곤혹스러운 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채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재촉해 봐도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 어떻게 대답을 해 줄 수가 없는 거였다.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힘없이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입을 뗐다.
“애를 쓰고는 있지만 원유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있는 데다가 다른 정유사들까지 모두 달라붙어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라 물량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저장 탱크가 텅텅 빌 때까지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거야!”
“아, 아닙니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오차돈 사장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국제 유가가 배럴당 얼마라고 그랬지?”
“82달러 30센트입니다.”
“끄으응. 이러다가 정말 100달러를 넘길지도 모르겠군.”
오르는 기세가 심상치가 않고 가팔랐기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답답한 분위기 속에 다들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 갑자기 스마트폰 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시선이 집중되자 문병기 이사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회의에 들어올 때는 전원을 끄거나 진동을 바꿔 놨어야지.”
“그만 깜빡했습니다. 바로 끄겠습니다.”
“급한 연락일 수도 있으니까 받아 봐.”
“······예.”
문병기 이사가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려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무슨 일이야?”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으나 실내가 워낙 조용한지라 모두의 귀에 대화 소리가 다 들렸다.
물론 전화 너머의 목소리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상대방이 뭔가 빠르고 급한 투로 말을 쏟아 내는 듯했고, 이내 잔뜩 움츠러들었던 문병기 이사의 허리가 위로 곧추세워졌다.
“아, 알았어. 금방 다시 전화를 할 테니까 상대를 꼭 붙잡고 있어!”
그러고는 오차돈 사장을 쳐다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하면 원유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짜증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던 오차돈 사장이 눈을 치켜뜨고는 상체를 바로 했다.
“예.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문제라니?”
“컨텍된 것이 원유도 포함되어 있지만 한달 뒤에 현물을 받아 볼 수 있는 선물 옵션인 데다가 매입 가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으음.”
선물이라는 말에 오차돈 사장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장 쓸 수 없는 선물이라는 것이 조금 걸렸지만 지금은 그것도 구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중동 사태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물이라도 일단 물량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낫겠지.”
옆에 있던 임원 한명이 얼른 말을 보탰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닙니다.”
“맞아.”
작게 머리를 끄덕인 오차돈 사장은 다시 문병기 이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량이 얼마나 돼?”
“현물 110만 톤에 선물 옵션은 1,300만 배럴가량 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물량에 오차돈 사장뿐만 아니라 모여 있던 임원들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매입 가격이 만만치 않겠는데 얼마야?”
그러자 문병기 이사가 약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현제 시세로 계산하면 10억 달러가 약간 넘을 겁니다.”
“10억 달러라고!”
“국제 유가뿐만 아니라 선물 가격도 엄청나게 뛰어오른 상황이라······ 그나마 내일이 되면 이 가격에도 매입하기 어려울 겁니다.”
“끄으응.”
정말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올 만큼 거액이었다.
하지만 악몽 같은 오일쇼크 가능성까지 심각하게 거론되고 시장이 미쳐 돌아가는 걸 감안하면 이것저것 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박 이사,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자금이 얼마나 있나?”
시선을 받은 박창근 재무이사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페르시아만이 막히면서 지급이 유예된 원유 구매 대금이 7억 달러가량 있고 조금 무리를 한다면 10억 달러를 맞출 수 있을 겁니다.”
“그나마 총알은 부족하지가 않군.”
“그렇지만 여유 자금을 다 긁어서 쓰는 거라 한동안은 회사 재무 상황이 어려워지게 될 겁니다.”
우려 섞인 이야기에 오차돈 사장은 어느새 필터 앞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비벼서 끄며 말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 당장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래도, 하면서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박창근 재무이사 역시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음을 알고 입만 벙긋대다 그냥 다물어 버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은 오차돈 사장은 문병기 구매이사를 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다른 데서 채 가기 전에 바로 계약을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문병기 구매이사는 얼른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