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67
867
태일증권, 트레이딩 센터 회의실,
장이 열리기 전 센터장의 소집에 긴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던 여섯 명의 치프 트레이너들은 위에서 내려온 지시에 잔뜩 얼굴을 굳혔다.
“그러니까 태일정유 주식을 매집하라는 겁니까?”
제일 나이도 많고 경력이 오래된 트레이너가 한쪽 손가락으로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리면서 확인하듯 되묻자 중년의 센터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가격에 상관없이 최대한 많은 물량을 확보하라는 것이 윗선의 지시야.”
“혹시 어제 태일건설에서 올린 공시 때문에 그런 겁니까?”
치프 트레이너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었기에 센터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사실대로 말해 줬다.
“맞아. 자네들도 대충 짐작을 하고 있겠지만 건설 쪽에서 태일정유 경영권을 가져가는 걸 막아 내는 것이 맡겨진 임무야.”
그러자 한 명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건설에서 이번에 꽤 많은 태일정유 지분을 확보하긴 했지만, 그래도 위협이 될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트레이너들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런데 골치 아프게도 같이 움직이는 세력이 있어.”
“오로라 펀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잘 알고 있군.”
“아······.”
“끄으응.”
매일 밥 먹고 하는 일이 주식 시장을 살피는 것인 만큼 오로라 펀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트레이너들은 짧은 탄성과 신음을 토해 내며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입 아프게 말을 하지 않아도 사안이 심각한 건 다들 알았을 테고, 빠른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주식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
“총알은 얼마나 주시는 겁니까?”
“일단 7천억에 상황이 진행되는 것에 따라 추가로 자금이 더 지원될 거야.”
“그렇군요.”
적지 않은 액수였지만 태일정유처럼 덩치가 큰 기업의 경영권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수준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자사주를 매각하면서 거액의 실탄을 확보한 데다가 규모가 큰 헤지펀드까지 끼어들었기에 쉽사리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센터장이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며 트레이더들을 독려했다.
“초반에 주도권을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거야. 지분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알려지면 매물이 줄고 주가가 크게 뛸 테니까, 그 전에 충분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도록 자금을 아끼지 말고 쏟아붓도록 해.”
“알겠습니다.”
얼추 회의가 끝나는 분위기가 되자 다들 빳빳하게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을 풀고 조금씩 편한 자세를 취한 채 커피를 마셨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에 출근했기 때문에 잠을 깨우려고 각자 손에 커피 한 잔 정도는 쥐고 있던 터였다.
옆자리에 있던 동료와도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한 몇 분 정도 잡담을 나누다가 이제 슬슬 한 사람씩 자리를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해산하는 것이 평소의 패턴이었다.
그렇게 이완된 분위기 속에서 문득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크게 울렸다.
“들어와.”
센터장의 말에 부하 직원 한 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태일건설에 대한 최신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이리 줘.”
쪽지를 건네받아 빠르게 읽어 내려간 센터장은 낮게 침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들어 회의실 안에 있는 치프 트레이너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태일정유에 대한 동시호가 주문이 폭증하고 있다는군.”
“그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린 치프 트레이너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상대의 공격이 시작됐다는 거지. 이제부터 전쟁 시작이니까 다들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해.”
“예.”
태블릿 화면엔 붉고 푸른 선들로 이루어진 그래프와 숫자 들이 가득했다.
스크롤을 내리며 태일정유 주가 차트를 유심히 살피던 혁권은 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태블릿을 다시 앞좌석과 연결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장 시작과 동시에 벌써 상한가를 치는 걸 보니 김 부회장 쪽에서도 눈치를 채고 경영권 방어에 나선 모양이군.”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덕현 전무가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필요한 지분을 매집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거 아닙니까?”
퍼스트 클래스처럼 편안한 좌석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양쪽 다리를 쭉 뻗은 혁권은 여유 가득한 태도를 보였다.
“경영진 교체에 필요한 지분은 이미 다 확보해 놨으니까 상관없어.”
“예? 그럼 바로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하면 될 텐데, 왜 출혈을 감수하고 주식 매수 싸움을 벌이는 겁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저 그런 잡주도 아니고 태일정유 같은 대형주가 단번에 상한가를 칠 정도면 어마어마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잘못된 판단으로 대규모 적자를 내고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의혹까지 받고 있는 현 경영진을 국민연금이 편들어 주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표 대결에서 확실한 우위를 가져갈 수 있도록 주식을 매입해 두려는 거지. 그리고 주도권을 우리가 쥐고 가는 걸 김성균 사장이 경계하는 것도 한몫을 하고 말이야.”
실제로 오로라 펀드가 동원 가능한 태일정유 지분이 25%를 훌쩍 넘긴다는 걸 알게 된 김성균 사장은 자칫 나중에 자신이 똑같은 수에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 적극적으로 지분을 매집했다.
“난 슬쩍 같이 움직이는 척만 하고 둘이서 피 터지게 싸움을 벌이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여유 자금마저 이번에 다 털어 넣게 만드는 거지. 이게 바로 일석이조一石二鳥 아니겠어.”
혁권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자 김덕현 전무는 내심 감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는 건지 대단하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론 만약 그가 적이 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상대가 될 것인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탄 롤스로이스 컬리넌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부드럽게 멈추어 섰다.
특별히 방탄 처리가 되어 더 두꺼운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눈앞에 구름을 뚫고 하늘 위로 높이 솟아 있는 초고층 건물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이번 거래로 완전히 혁권의 소유가 된 용산드림타워였다.
그사이 공사가 계속 진행돼서 이제 꼭대기 최상층 부분만 제외하곤 웅장한 위용을 거의 다 드러내고 있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멋지군.”
한참을 올려다봐야 될 정도로 높은 이 엄청난 마천루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에 새삼 짜릿한 성취감이 들었다.
“대단하군요.”
김덕현 전무 역시 이마 위로 손차양을 만들고 고개를 쭉 뻗어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뒤늦게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 어서 오십시오.”
홍정기 이사를 비롯한 현장 간부들은 머리에 쓰고 있던 안전모를 벗고는 눈치를 보며 먼저 인사를 했다.
두 번째 방문이었기에 혁권을 못 알아보는 실수를 하진 않았지만, 하루아침에 건물 주인에서 단순히 공사를 맡아서 진행하는 하청 업체로 위치가 바뀐 것이 쉽사리 적응 안 되는지 어색한 모습이었다.
만약 운동선수였다면 다들 한가락 할 법한 덩치를 가진 건장한 사내들을 거느리고 당당히 중앙에 서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혁권을 보니, 안 그래도 위축되어 있는데 더욱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혁권은 여유로운 얼굴로 한쪽 팔을 내밀어 앞에 있는 홍정기 이사와 악수를 나눴다.
“수고가 많소.”
“아닙니다. 여긴 번잡스러우니 현장 사무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그것보다 공사 현장을 한번 둘러보고 싶은데, 괜찮겠소.”
“아. 예. 물론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홍정기 이사는 내심 떨떠름한 속내를 감췄다.
갑자기 불쑥 찾아온 것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공사 현장까지 돌아보고 싶다고 하니, 마치 이제부터는 자신들이 주인이라는 걸 부러 확인시켜 주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미 상처 난 자존심에 소금까지 뿌리니 혁권의 방문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럼 이 쪽으로 가시죠.”
직원 한 명이 급히 가져온 안전모를 머리에 쓴 혁권은 앞장 선 홍정기 이사를 따라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는 한창 인부들이 쓰고 있는 중이어서 그리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말라붙은 페인트 자국이나 바닥에 깔아 놓은 박스 뭉치 같은 것들이 다소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고 코를 찌르는 접착제 냄새 같은 것도 풍겼지만, 아무래도 공사 중인 현장이니만큼 그 정도는 감안해야 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자 맨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콘크리트 기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현재 올린 것 중에선 가장 높은 층입니다.”
이 위로는 아직도 계속 작업을 진행 중이며 꼭대기까지 완성하고 내부 마감 공사까지 거치려면 족히 반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홍정기 이사가 말했다.
혁권은 정리가 덜 되어 조금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을 구둣발로 걸으면서 상층에서 보이는 경치를 감상했다.
70층이 훌쩍 넘어가는 높이에 발아래 있는 고층 건물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서 있으니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군.”
“최상층 전망대가 완성되면 거기서는 서울 시가지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을 겁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에 홍정기 이사가 잠깐 머뭇거리다 혁권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저, 그런데 남은 공사 대금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지분을 100% 다 인수하면서 아직 남아 있는 공사 대금도 혁권이 책임지는 걸로 계약이 되어 있었다.
“그건 관례에 따라 공사 진척 상황에 맞춰서 대금을 지급하기로 했는데, 이야기를 못 전해 들었소.”
“그렇기는 한데 협력 업체들 쪽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와서······.”
“그게 무슨 소리요?”
미간을 찡그리며 쳐다보자 홍정기 이사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갑자기 소유주가 바뀌니까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공사 대금을 못 받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김덕현 전무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니, 그런 걸 관리하라고 그쪽 사람들이 있는 거 아니요.”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수차례 이야기를 했지만 도통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실토하는 거였기에, 홍정기 이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유동성 위기가 계속되면서 이미 몇 번이나 공사대금 지급을 미루었다가 정산해 주는 걸 반복해 불만이 쌓여 있는 상황에서, 이제는 아예 발주처가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외국계 헤지펀드로 바뀌었다고 하니, 협력 업체들로서는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걸 전부 감안하더라도 명색이 국내 도급 순위 상위권에 들어가는 1군 건설사가 협력 업체 관리 하나 못하고 쩔쩔맨다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쯧.”
혁권은 짧게 혀를 차고는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달에 지급할 공사 대금이 모두 얼마요?”
“270억 원가량 됩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김덕현 전무를 보며 지시를 내렸다.
“방금 들은 액수를 오늘 안에 지급해 주고 앞으로는 김 전무가 책임지고 매주 감리 보고를 받아 공사를 진행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홍정기 이사는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가 혹시나 두 사람이 볼까 싶어 황급히 딴청을 부렸다.
공사 대금 문제가 해결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앞으로 하나하나 이런 식으로 감시받을 생각을 하니 절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이미 제 손을 떠난 일인데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홍정기 이사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삼키는 사이 곁눈으로 그 모양새를 다 살피고 있던 혁권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면서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