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09
909
킹 살만 공군기지.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넓은 기지 활주로는 아침부터 한국에서 날아온 수송기 편대 때문에 소란스러웠다.
아스팔트가 깔린 주기장 옆에는 사막 위장 색이 칠해진 군용 트럭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가운데 지게차가 바쁘게 오가면서 AN-26과 C-130 수송기 두 대에서 커다란 화물 상자들을 내리고 있었다.
바로 새로 계약을 맺고 납품하기로 한 KGGB 한국형 GPS 유도폭탄 1차 인도분이 도착한 거였다.
위이이잉.
“안쪽으로 더! 그래. 이제 천천히 내려.”
한쪽에 GPS 유도폭탄이 들어 있는 커다란 화물 상자들이 지게차로 옮겨져 차곡차곡 쌓이는 가운데, 혁권은 함단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공군에서 나온 검사관을 안내해 화물이 제대로 도착했는지 확인 작업을 했다.
“이게 좋겠군요.”
소령 계급장을 단 검사관이 화물 상자 하나를 지목하자 병사 두 명이 배척을 가지고 와서 단단히 못을 박아 둔 나무 뚜껑을 열었다.
끼릭.
스티로폼 보충제를 걷어 내자 짙은 하늘색의 폭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련번호와 폭탄의 상태를 한참 동안 꼼꼼하게 확인해 본 검사관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옆에 서 있는 혁권을 봤다.
“보관 상태가 아주 좋군요.”
검은색 레이벤 선글라스를 낀 혁권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말했다.
“한국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된 따끈따끈한 물건을 바로 가져온 거니까, 하자가 있는 것이 더 이상한 걸 거요.”
“다른 상자도 체크해 보시겠습니까?”
함단의 물음에 검사관이 화물 상자 더미를 힐끗 쳐다보고는 가볍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굳이 안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요.”
검사관은 사인을 한 뒤 클립보드에서 서류를 빼 혁권에게 내밀었다.
“여기 인수 확인서입니다.”
서류를 받아서 챙긴 그가 턱짓을 하자 함단이 손에 들고 있던 은색 알루미늄 가방을 검사관에게 줬다.
“약소하지만 성의를 조금 준비했습니다.”
“흠흠. 뭘 이런 걸 다······.”
말과는 달리 손은 익숙하게 가방을 받아 챙기는 모양새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닌 듯했다.
“그럼 전 이만······.”
몸을 돌려 멀어지는 검사관의 뒷모습을 보면서 함단이 입을 열었다.
“잠깐 와서 둘러보고 5만 달러를 챙겼으니 아주 입이 째지겠군요.”
“그 대신 다음에 들어올 물량도 검사를 깐깐하게 굴지 않고 넘어가 줄 테니 그거면 돈값을 충분히 하는 거지.”
“그건 또 그렇군요.”
오랫동안 무기고에 묵혀 둔 재고가 아니라 공장에서 그대로 출고해서 가져온 신품인 데다가 수송기에 적재하기 전에 철저히 테스트를 했기 때문에 불량이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하지만 검사관이 일부러 작정하고 트집을 잡으려고 들거나 깐깐하게 굴면 여러 가지로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 전에 미리 손을 써서 관계를 부드럽게 해 두는 것이 나았다.
확인 절차가 끝나자 지게차를 끌고 와서 화물 상자를 덮개가 씌워진 군용 트럭에 실고 있는 군인들을 보면서 혁권이 말했다.
“다음 물량은 언제 들어온다고 그랬지.”
“3주 후에 100발이 추가로 가져올 예정입니다.”
“그러면 오늘 들어온 것까지 합쳐서 전부 300발을 납품한 게 되겠군.”
“예. 딱 절반입니다.”
“최종 납품을 다 끝내려면 앞으로 몇 달은 더 걸리겠군.”
“서둘러도 두 달은 걸릴 겁니다.”
주문을 넣고 나서 한국에 있는 공장 라인을 풀가동시키고 있었지만, 생산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국 정부와 국방부에서 전시 비축 물자 보충을 위해 새로 생산 중이던 KGGB GPS 유도폭탄 물량을 이쪽으로 급히 돌려주지 않았다면 첫 인도가 지금보다 훨씬 뒤로 늦어졌을 터였다.
“그것도 최대한 앞당긴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지금도 원래 요구했던 일정보다 더 빨리 GPS 유도폭탄을 인도하고 있어 사우디아라비아 측에서 아주 만족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머리를 끄덕인 혁권이 작업을 지켜보고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벨이 울렸다.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받자 차기 전차 합작 프로젝트 협상을 위해서 리야드에 와 있는 만수르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세.
“바쁘실 텐데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기쁜 일이 있어서 연락을 했네.
만수르 회장의 말에 그는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혹시 협상이 잘 진행된 겁니까?”
그러자 상대가 껄껄 크게 웃으면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했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 맞네. 방금 사우디아라비아 측하고 차기 전차 사업을 양국이 함께 진행하기로 합의를 끝냈네.
희소식에 혁권은 반색을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축하드립니다.”
-다 자네가 판을 잘 깔아둔 덕분일세.
“아닙니다. 협상을 이끄신 회장님의 공이 제일 크지요.”
-하하하. 듣기에 기분은 좋구먼. 국왕 전하의 재가까지 떨어져서 오늘 오후쯤에 공식 발표가 있을 테니 그리 알고 있게.
“그렇게 빨리 발표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합의가 다 이루어졌는데 미룰 이유가 없지 않겠나. 그리고 자체 생산을 하려면 준비 기간이 상당히 필요할 테니 서둘러서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 나을 테고 말이야.
“그건 그렇군요.”
후보 전차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 보고 최종 선택을 한 뒤에 기술 이전을 받고 자체 생산 설비까지 갖추려면 못해도 2~3년은 필요할 터였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만큼 빨리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길 바라는 양국 정부였기에 초도 물량 생산까지 기간을 최대한 단축시키길 원했다.
-최종 후보가 결정돼 계약이 이루어지면 자넬 중개인으로 끼워 넣기로 이야기가 다 됐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듣고 싶던 이야기에 그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통화를 끝낸 혁권이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자 조용히 옆에 서 있던 함단이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만수르 회장입니까?”
뭘 궁금해하는지 알았기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합작 프로젝트로 차기 전차 사업을 진행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군. 조금 뒤에 공식 발표가 있을 거라고 해.”
“정말 잘됐군요. 예멘까지 가서 타리크를 붙잡아 온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의 확정됐다고 하지만 아직 커미션을 받은 건 아니니까 정식으로 계약이 이루어질 때까지 혹시라도 변수가 생기지 않게 자네가 계속 남아서 관련 인사들을 잘 관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함단이 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날 오후 만수르 회장이 귀띔을 해 준 대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정부는 차기 전차 사업을 양국이 합작 프로젝트로 진행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확정된 양산 대수만 1,300대에 이르고 사업비는 무려 150억 달러나 되는 메머드급 무기 도입 사업이었다.
한화로 계산하면 17조 원이 훌쩍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냉전 이후 단일 전차 생산 사업으로는 최대 액수와 물량이었는데, 나중에 계약이 모두 끝나 봐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혁권이 챙기게 될 중개 커미션 역시 수천만 달러가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보니 사업 발표와 동시에 전 세계의 전차 생산 업체들이 큰 관심을 보이며 어떻게든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많은 무기 중개상들 역시 거액의 커미션을 노리고 한 다리를 걸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빈 살만 왕세자와 자이드 국왕이라는 양국의 최고 권력자들을 양옆에 낀 혁권이 먼저 자리를 선점해 둔 상태라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군침만 삼켜야 했다.
그래도 혹시 몰랐기에 빈 살만 왕세자와 만수르 회장을 차례대로 만난 혁권은 중동에서 일을 모두 마무리 짓고 귀국길에 올랐다.
탁탁 가벼운 발소리를 내면서 러닝머신을 뛰는 소현의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소현은 손등으로 땀을 닦아 내곤 여전히 곧은 자세로 쉬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신나는 걸 그룹 댄스 음악으로만 가득 채운 플레이리스트가 연속 재생되어 흘러나왔고, 소현의 발이 바닥을 박찰 때마다 위로 높게 묶은 머리카락 끝이 박자에 맞춰 흔들거렸다.
그렇게 계속 앞만 보면서 열심히 40분째 러닝머신을 뛰고 있는데 어쩐지 시선이 느껴진다 싶더니 한 남자가 슬쩍 다가와 할 말이 있는 듯 기웃거렸다.
“뭐예요?”
러닝머신의 속도를 반으로 줄인 뒤 소현이 대뜸 묻자 마침 잘됐다는 것처럼 남자가 팔걸이에 몸을 은근히 기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같은 헬스장 다니는 사람인데······ 제 얼굴 모르시겠어요?”
가끔 가다 눈인사도 한 적 있다며 남자가 살갑게 말을 붙였지만 소현은 차갑게 반문했다.
“아뇨.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쪽은 저 아세요?”
“하하, 자주 마주쳐서 이름은 몰라도 낯은 익을 줄 알았죠.”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인데······.”
냉랭한 대꾸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운동 다 하시면 저랑 같이 커피 한 잔 어떠세요? 헬스장도 같은데 서로 운동 친구 하면서 자세도 봐 주면 좋지 않습니까.”
남자는 일부러 손목에 찬 명품 시계를 보여 주려는 것처럼 시계 판이 햇빛에 잘 비치게 움직이면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본인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느끼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마주하자 순식간에 기분이 바닥을 치면서 불쾌감이 올라왔다.
소현은 대뜸 러닝머신의 속도를 올리고 한쪽 귀만 빼 놓았던 이어폰을 다시 꼈다.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노골적인 무시에 당황하는 남자를 무시하고 소현은 다시 운동에 전념했다.
남자가 앞에서 몇 번 더 말을 붙였으나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안 보이는 사람처럼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지쳐 나가떨어진 건지 시야에서 사라졌다.
괜히 몸만 식어 버렸다며 속으로 투덜대면서 한 5분쯤 더 달렸을까, 이번엔 누군가 팔꿈치를 툭툭 쳐 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진짜! 관심 없다고 했잖아요!”
소현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곤 러닝머신을 아예 멈춰 세우고 보관대의 물통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오늘 운동은 망친 거나 다름없으니 그냥 집에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만약 앞으로도 남자가 계속 추근거린다면 헬스장 회원권까지 해지해 버릴 생각으로 홱 돌아서는데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무슨 관심?”
“오빠!”
소현은 혁권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놀란 표정과 함께 와락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러다 한창 땀 흘리고 있던 게 생각났는지 꺅, 짧게 비명을 지른 후 후다닥 떨어져선 손부채를 부치며 당황스러워했다.
“어떡해. 나 냄새 많이 나요?”
“아니, 전혀.”
그래도 신경이 쓰인 소현은 코끝을 찡그리면서 서둘러 수건을 챙겨 들었다.
“얼른 샤워하고 나올게요, 10분만 기다려요!”
재빨리 샤워장 쪽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혁권은 입가의 웃음을 지우고 옆으로 고개를 슥 돌렸다.
덤벨 운동을 하는 척하면서 거울로 이쪽을 훔쳐보고 있던 사내가 혁권과 눈이 마주치자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흠칫하여 바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괜히 남친이 있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다가 걸렸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정쩡한 인간이 남자 친구라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으나 누가 봐도 사내와 혁권은 비교가 안 되었다.
사내는 단박에 혁권이 몸에 걸치고 있는 고급 양복과 구두, 시계가 대충 얼마짜리인지 알아차리고선 기가 죽은 듯 꼬리를 살살 말고 구석으로 사라졌다.
그 모양새에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혁권은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치곤 소현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