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08
908
잠시 고심을 한 혁권은 어느새 필터 앞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탁자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서 끄며 말했다.
“스텐저, 당신 생각은 어떻소?”
-솔직히 현재 태일그룹의 상황으로 볼 때 주가 상승 요인이 거의 없기에 주식을 계속 보유하고 계실 것이 아니라면 이번 기회에 지분을 처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룹의 떠받치고 있는 핵심 계열사인 건설과 정유 그리고 증권이, 경영권 싸움 과정에서 크게 망가진 상태라 당분간은 어려움을 겪게 될 거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었다.
특히 태일증권은 불법 행위로 인한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그로 인한 대규모 인출 사태와 고객들이 집단소송까지 내면서 상당한 위기에 내몰려 있었다.
저력이 있으니 이번 위기를 잘 넘긴다면 다시 예전의 위상을 되찾게 될 수도 있었지만, 그걸 바라고 막대한 자금을 태일그룹 주식에 묻어 두는 것보단 차라리 다른 투자처를 찾아 자금을 굴린다면 더 많은 이득을 거둘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새롭게 총수가 된 김성균 회장이, 그룹 내부를 추스를 생각은 하지 않고 중국 사업을 정리해서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시킬 생각만 하는 것에 미래가 어둡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면 스텐저의 의견대로 이번 참에 태일그룹 주식을 일부라도 털어 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프리미엄을 붙여 준다고 해도 태일그룹을 장악하는 데 핵심인 태일산업 지분을 이대로 쉽게 넘겨주는 건 어쩐지 조금 아쉬웠다.
그새 수염이 자라 까칠해진 턱을 한쪽 손으로 매만지면서 머리를 굴린 혁권은 이내 스마트폰을 고쳐 쥐며 입을 떴다.
“장내에서 거의 거래가 되지 않는 주식인데 프리미엄을 고작 20%만 붙이는 건 너무 낮은 것 같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프리미엄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 내길 원하십니까?
“얼마 가능할 것 같소?”
거꾸로 되묻는 말에 스텐저 변호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 대답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100%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2배를 내라는 건데, 상대가 요구를 들어주겠소?”
살짝 염려를 내비치는 그와 달리 스텐저는 오히려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김성균 회장 쪽이니까요. 중국 사업을 정리하면 12억 달러나 되는 거액이 들어오는 걸 아는데 굳이 매각 액수를 낮출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겠지만 결국은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꽤나 만족스러운 대답에 혁권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군. 그럼 거기다 조건 하나를 더 붙이는 건 어떻겠소?”
-어떤 걸 말씀이십니까?
“보유 중인 태일정유 주식 가운데 10%를 패키지로 묶어서 함께 매도했으면 좋겠소.”
이야기를 들은 스텐저가 난색을 표시했다.
-그렇게 하려면 중국 사업을 정리해서 들어온 자금을 몽땅 다 털어 넣어도 부족할 텐데, 조금 무리이지 않겠습니까?
“주식 매각 대금을 현금이 아닌 채권으로 받는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소.”
-채권이라고 하셨습니까?
“현재 상황에서 정유가 단기간에 실적을 개선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렇다고 지분을 전량 매각하자니 가뜩이나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데 물량 폭탄까지 터지면 주가가 그대로 곤두박질 쳐 버리지 않겠소.”
-우리가 보유한 태일정유 지분이 20%나 되니까, 아무리 쪼개서 분할 매각을 한다고 해도 시장에서 물량을 다 소화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아주 크지요.
“그러니까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주식을 계속 들고 있지 말고 채권으로 바꿔서 이자를 받아 챙기자는 거요. 물론 담보는 확실히 잡고 이율도 은행권 대출보다 높게 설정해서 말이오.”
주가 변동하고 상관없이 나중에 만기가 되면 전부 현금으로 상환받을 수 있으니 여러 가지로 이득이었다.
의도를 파악한 스텐저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쉽지는 않겠지만 잘만 협상을 하면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권으로 전환하고 남은 지분은 시한을 두고 천천히 처분하면 되겠군요.
그러자 혁권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역시 스텐저 당신은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아.”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태일그룹과 협상을 해 보고 나중에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겠소.”
스마트폰을 탁자에 내려놓은 혁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게 손에 넣었던 태일그룹 지분을 처분한다고 생각하자 이제 김인철과의 싸움도 끝이라는 생각에, 홀가분하면서도 마지막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에 찝찝한 기분이 가슴 한구석을 맴돌았다.
이틀 뒤, 부총리직을 맡고 있는 만수르 회장이 직접 아랍에미리트 관리들을 이끌고 리야드에 도착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차기 전차 합작 프로젝트에 대해 협상을 시작했다.
혁권은 더 이상 할 역할이 없었지만 거액의 커미션이 걸린 일이었기에 리야드에 계속 머물며 양국의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조용히 지켜봤다.
새롭게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본사로 집무실을 옮긴 김성균은 자신의 측근으로 이번에 태일산업 사장이 된 오재중의 보고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프리미엄을 100%나 요구했다고, 거기다가 태일정유 지분까지 얹어서 가져가라 했고 말이지.”
그러자 오재중 사장이 힐끔 눈을 들어 그의 안색을 살피면서 소심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이것들이 아주 바가지를 씌우려고 작정을 했군.”
짜증이 가득 난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혁권의 요구대로 해 준다면 태일정유를 빼더라도 태일산업 지분을 매입하는 데 8천억 원이 넘는 거액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무리한 요구라고 거부했지만 그 정도 프리미엄을 받지 않는다면 지분을 매각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쯧. 칼자루를 쥔 건 자신들이라 이거군.”
이번 기회에 처분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혁권으로서는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
반면 함께 손을 잡고 김인철을 밀어낸 우호 세력이기는 했지만 지주사인 태일산업을 비롯한 각 계열사 지분을 상당수 보유한 오로라 펀드의 존재 자체가 아주 껄끄러웠다.
막말로 오로라 펀드가 다른 세력과 연합해서 딴마음을 먹을 수도 있었고, 지분을 가지고 그룹 경영에 깊숙이 관섭하려고 들지도 몰랐다.
설사 그러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해도 김성균 입장에서는 옆에 상전을 한 명 두고 있는 것처럼 계속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인상을 쓰고 앉아 있자 이번에 같이 그룹 본사로 자리를 옮긴 구민재 재무이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일산업이 그룹 지주사인 걸 감안한다면 아주 터무니없는 요구는 아닙니다.”
그러자 단박에 김성균 회장이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세게 내리쳤다.
“자넨 대체 누구 편이야!”
“아, 아닙니다.”
움찔한 구민재 재무이사는 황급히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분명 무리한 요구이기는 하지만 오로라 펀드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걸 말씀드린 겁니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그렇다고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김성균 회장도 더 이상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태일정유 지분까지 패키지 딜을 하자는 건 뭐야?”
그러자 오로라 펀드하고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오재중 사장이 대답을 했다.
“태일정유 지분 10%를 함께 묶어서 매각하되 현금이 아닌 회사채로 치환하자는 겁니다.”
“회사채라고?”
“예. 대신 지주사인 산업이 지급 보증을 서고 금리도 평균보다 높은 15%를 지급하는 조건입니다.”
“그건 정크 본드 수준의 금리잖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채권보다 높은 건 사실입니다.”
“어쨌든 비싼 건 사실이잖아?”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한테 유리한 부분도 있습니다.”
“뭔지 말해 봐.”
“우선 금리가 부담되기는 하지만 당장 큰 자금을 들이지 않고 태일정유 주식 10%를 되찾아 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패키지 딜을 할 태일산업 지분 6%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서 그룹 경영권 안정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으음.”
그룹 경영권을 더 확실하기 쥘 수 있다는 이야기에 김성균 회장은 굳어 있던 얼굴을 조금 풀었다.
“만약 태일산업 지분을 넘긴 오로라 펀드가 정유를 비롯한 다른 계열사 주식을 대거 시장에 내놨을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쏟아진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 그룹 계열사 주식이 크게 폭락을 해 버릴 겁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구민재 재무이사도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이야기를 보탰다.
“이제 막 회장직에 오르셨는데 주가가 떨어진다면 주주들의 원망이 쏟아질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룹을 이끌어 나가시는 데 상당한 부담이 될 겁니다.”
김성균 회장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주가가 떨어지면 지분을 소유한 오로라 펀드도 손해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이걸 가지고 상대가 얼마든지 협상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주가를 매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대주주 신분을 이용해서 언론에 부정적인 기사만 내도 저희 쪽에는 상당한 타격이 될 겁니다.”
“끄으응.”
주도권을 상대편이 잡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머리론 이해해도 도저히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지 김성균 회장은 입술을 아플 정도로 깨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 김성균 회장의 모습에 측근들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고심하던 김성균 회장이 고개를 들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회사채로 바꾼다면 액수가 얼마나 되는 건가.”
그러자 오재중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협상에 따라 변동이 있겠지만 대략 7,500억 원가량이 될 겁니다.”
“7,500억이라······.”
적지 않은 액수였지만 태일정유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그리 많은 건 아니었는데, 연이은 악재와 적자로 인해 주가가 크게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재무 상태가 안 좋은데 아무리 당장 현금이 안 들어간다고 해도 높은 이자를 고스란히 다 내면서 태일정유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태일정유의 재무 상태를 크게 악화시키고 주가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좋은 성과를 보여 줘서 주주들의 지지를 계속 받아야 되는 김성균 회장 입장에서 그건 그다지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그건 여력이 있는 계열사들을 통해 분산해서 회사채를 발행하게 만들면 되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정유에서 자사주로 보유하는 것과 달리 주주총회 때 의결권도 행사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일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김성균 회장은 눈에서 이채를 띠며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계열사들을 내세우자고?”
“그렇습니다. 건설을 포함해서 네 곳 정도를 골라 지분을 인수하도록 하면 총액이 나누어지는 효과가 있어서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럼 대략 계열사 한 곳당 2천억 정도를 떠안게 되겠군.”
“예.”
“구 이사, 자네 생각은 어때?”
김성균 회장의 물음에 구민재 재무 이사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오재중 사장을 힐끔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당장은 조금 부담이 되겠지만 나중을 생각한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팔짱을 끼고 골몰하던 김성균 회장은 잠깐 그렇게 있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다들 의견이 그렇다니 매입 가격을 최대한 낮추는 쪽으로 해서 협상을 계속 진행하도록 해.”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오재중 사장은 한고비를 넘긴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