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07
907
혁권의 말대로라면 겉만 번지르르하지 알맹이는 외국 부품을 가져와 단순 조립한 것에 불과한 게 되기 때문에 화를 낼 만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빈 살만 왕세자의 신경을 긁기로 작정하기라도 한 듯 부정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정밀 기계 산업 자체가 전무한 상황이기에 그 정도 국산화율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많은 시행착오와 자금이 들어갈 것입니다.”
“공업 기반이 약한 건 아랍에미리트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빈 살만 왕세자의 사납게 일렁이는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혁권이 말했다.
“그러니까 더욱 양국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침착하게 상대를 설득했다.
“무리하게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려는 것보다 서로 일을 분담해서 진행한다면 훨씬 효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외국에서 부품을 들여오는 거하고 그게 무슨 차이가 있지? 오히려 언제든지 적대국이 될 수 있는 아랍에미리트가 유사시에 부품 공급을 중단하면 중요한 무기가 그대로 고철덩어리가 되어 버릴 테니 우리 목줄을 쥐여 주는 꼴이지 않나.”
애초에 외국에서 직도입을 하면 편한 걸 굳이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들여서 차기 전차를 자체 생산하려는 건 방위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시키려는 것도 있지만, 예멘 내전에서 서방 국가들의 무기 금수 조치로 어려움을 겪었던 걸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필요한 무기를 자체적으로 생산 정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호한 대답에 빈 살만 왕세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뭘 믿고 그렇게 자신하는 거지?”
“아랍에미리트가 섣불리 그런 악수를 둔다면 자신들이 운용하는 전차 역시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빈 살만 왕세자가 가볍게 코웃음을 흘렸다.
“독한 마음을 먹으면 못할 것도 없지. 그리고 그리된다면 아랍에미리트보다 훨씬 더 많은 전차를 운용하게 될 우리가 큰 피해를 입게 될 거야.”
하지만 혁권은 여유를 잃지 않은 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제는 합작 계약 때 부품 설계도면과 라이선스 계약을 공동으로 소유하도록 해서 만약의 경우 자체 생산을 하는 걸로 대응하면 될 겁니다. 그리고 생각을 뒤집어서 이렇게 양국이 합작 프로젝트를 진행함으로써 경제적인 이득은 물론이고 그동안 다소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관계 회복의 계기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계속 심드렁해하던 빈 살만 왕세자가 살짝 턱을 들며 관심을 보였다.
“유엔 비상임이사국 선거와 차기 전차 프로젝트에서 서로 협력을 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앙금이 사라지고 예전처럼 좋은 이웃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란을 필두로 시아파Shi’a 국가들이 점점 세력을 키워 나가는 상황에서 수니파Sunni를 이끌어 가는 양국이 반목하고 다투는 건 결국 제 살 깎기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으음.”
“거기다가 합작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협력을 확대시켜 나간다면 사우디아라비아하고 비교해서 규모가 작은 아랍에미리트 경제를 종속시키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빈 살만 왕세자가 눈에서 이채를 띠며 되물었다.
“그게 가능할까?”
시선을 받은 혁권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면서 말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인구는 980만 명가량으로 채 1천만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일곱 개 토후국들을 모두 다 합친 숫자지요. 그에 비해서 사우디아라비아는 3,400만이 훌쩍 넘는 인구에 GDP 규모도 2배에 육박합니다. 가히 다윗과 골리앗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두 나라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면 결국 잡아먹히는 곳이 어디가 되겠습니까?”
“다윗과 골리앗이라······ 마음에 드는 말이로군.”
비유가 적절했는지 빈 살만 왕세자가 내심 흡족해하는 것이 보였다.
세계 4위의 원유매장량과 3위의 가스 매장량을 보유한 경제 대국인 아랍에미리트였기에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처럼 경직적이고 방만하게 국정을 운영하는 덩치만 큰 사우디아라비아가 거꾸로 아랍에미리트한테 끌려 갈 수도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찌 됐건 빈 살만 왕세자는 중동 패권을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이란을 견제할 수니파 연합 전선을 더욱 공고히 하고, 한발 더 나아가서 자꾸만 통제권에서 벗어나려는 아랍에미리트를 옭아맬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단정하게 자른 턱수염을 한쪽 손으로 매만지면서 한참을 고심하던 빈 살만 왕세자는 이내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 보도록 하지.”
딱 잘라서 거부하던 빈 살만 왕세자의 입에서 이 정도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낸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실 거라 믿습니다.”
빈 살만 왕세자와 만남을 끝낸 혁권은 리야드에 있는 호텔로 돌아왔다.
사막을 지나느라 머리카락과 옷에 묻어 있는 모래 먼지들을 빨리 씻어 내고 싶었던 그는 객실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후 물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가운을 걸치고 나온 혁권은 한쪽에 설치된 미니바 냉장고 문을 열고 꺼낸 생수로 갈증을 달랬다.
소파로 가서 등을 뒤로 기대고 편히 앉은 그는 어느새 석양이 져서 온통 붉게 변한 창밖 거리를 쳐다보며 낮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은 건가.”
일단 물꼬를 텄으니 서로 만나 의견을 조율하고 차기 전차 사업을 합작으로 진행할 것인지 결정하는 건 양국 정부의 몫이었다.
양국이 손을 잡아 파이를 더 키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설사 합작이 무산되더라도 최소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진행하는 사업에서 중개 커미션을 챙길 테니 그것만 해도 충분히 이득을 챙긴 거였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탁자에 올려 둔 스마트폰 진동 벨이 울렸다.
한쪽 손을 뻗어서 스마트폰을 집어 든 혁권은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하곤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나요.”
-스텐저입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십니까?
혁권은 느긋하게 기대앉은 자세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말해 보시오.”
-김성균 회장이 흥미로운 제안을 하나 해 와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김인철을 밀어내고 태일그룹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김성균은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새롭게 그룹 회장으로 선임됐다.
여전히 식물인간 상태로 숨만 붙어 있는 김종원 회장은 총수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나 명예 회장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태일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왕자의 난은 큰아들인 김성균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는데, 형제간에 벌어진 아귀다툼으로 인해 둘째는 불의의 사고로 일찍 목숨을 잃었고, 막내인 김인철은 여러 가지 범죄 행위에 연루돼 경찰을 피해 숨어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토록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인 태일그룹 역시 연이은 악재와 경영권 다툼을 벌이느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바람에 매출액과 규모가 동시에 크게 줄어드는 등 상당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당장 내부를 장악하고 그룹을 정상화시키는 것만 해도 일이 벅차고 정신없을 텐데, 김성균이 무언가 제안을 했다고 하니 그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뭘 제안했는지 말해 보시오.”
-오로라 펀드가 가지고 있는 태일산업 주식 6%를 매입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혁권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태일산업 주식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김인철하고 싸움에서 이겨 회장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직접 보유한 지분이 적어서 언제 또다시 경영권을 위협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태일그룹 계열사 지분을 대거 보유한 저희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주사인 태일산업 주식을 확보해 경영권을 단단히 하면서 태일그룹에 대한 오로라 펀드의 영향력을 줄여 놓겠다 이거군.”
-제대로 보셨습니다.
하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뱉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원하는 건 다 챙겼으니까 더 이상 주식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기는 한데 자금 사정이 안 좋은 태일그룹이나 김성균 회장이 지분을 인수할 여력이 되기는 한 거요?”
-저도 그런 의문을 표시했더니 몇 년째 성장이 지지부진한 중국 내 건설 기자재 사업을 정리해서 자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거라면 와병 중인 김종원 회장이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그룹 차원에서 상당히 공을 들여 진했던 사업이지 않소?”
-그렇다고 하더군요.
태일물산에 근무하던 시절 중국 건설 기자재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김종원 회장의 지시로 그룹 계열사들이 전방위 지원을 해 줬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진출 초기 텐진과 항저우에 공장을 잇달아 가동시키면서 중국 건설 기자재 시장에서 20%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건설 경기 침체하고 맞물리면서 겨우 현상 유지만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이 지난 100년 동안 사용한 시멘트의 양을 고작 10년 만에 다 써 버렸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중국의 건설 붐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 듯이 계속해서 이어질 줄 알았던 건설 활황은 슈퍼 파워인 미국과 중국의 경제 마찰로 인해 성장이 한풀 꺾이고, 정부 주도의 경제 성장 정책이 한계에 달하면서 급격하게 식어 갔다.
거기다가 최근에는 경기 활황에 감춰져 있던 대규모 미분양과 부채 문제가 불거지면서 더욱 가라앉고 있는 건설 경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연히 건설 기자재를 공급하는 태일그룹의 사업도 큰 어려움에 빠져들게 됐다.
그래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거래처와 점유율이 있어 아직은 적자가 나지는 않았으나 예전처럼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혁권은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김종원 회장, 아니 명예회장하고 달리 중국 시장에 그리 크게 관심이 없는 김성균 회장이니까 아직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때 서둘러 사업을 정리하려는 속셈인 거군.”
-더불어서 그룹 지배력을 높이고 여유 자금도 확보하고 말입니다.
비록 숨겨진 의도가 불순하기는 했지만 어찌 됐건 불필요한 살집을 줄여 내부를 정비하는 건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전제되어야 될 것이 하나 있었다.
“회사 값어치를 얼마로 보고 있기에 그걸 팔아서 내가 가진 태일산업 주식을 가겨가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리고 경기도 안 좋은 중국 사업을 매입해 갈 곳이 있기는 한 거요?”
원하던 대로 김인철을 몰락시켰으니 더 이상 태일그룹 주식을 손에 쥐고 있을 이유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헐값에 처분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이미 구매 의사가 있는 중국 기업 몇 곳하고, 매각액 12억 달러 선에서 물밑 접촉이 상당히 진전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12억 달러면 한화로 1조 원이 훌쩍 넘어가는 거액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매각 액수에 혁권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중국 쪽 사업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알짜배기였던 것 같군.”
-성장이 둔화됐다지만 여전히 몇 년째 흑자를 이어 오고 있는 기업인 데다가 무엇보다 20%대의 점유율을 가진 것이 크게 작용한 걸로 보입니다.
“하긴 누구든 인수를 하면 그 점유율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으니 매력적인 조건이기는 하겠군.”
-김성균 회장도 그걸 알고 악화된 영업 상황에 점유율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회사를 처분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 꿍꿍이가 숨겨져 있었군.”
생각했던 것보다 머리를 잘 굴리는 김성균 회장의 행동에 그는 내심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분을 판다면 현재 시세에서 주당 20%의 프리미엄을 붙여 줄 의사가 있다고 제안을 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전부 얼마에 매각을 하게 되는 거요?”
-대략 4억 달러 내외가 될 겁니다.
“4억 달러라······.”
한화로 4천억 원이 넘어가는 액수였으니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일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지주회사의 핵심 지분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그리 많은 것 또한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