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35
935
파리, 지아트사 본사.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방산 업체 수장이 사용하는 곳답게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회장실은 아주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직접 손으로 짠 값비싼 페르시아산 수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수십억을 호가하는 인상파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 한쪽 벽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마호가니 장식 선반에는 일본 고유의 외날 곡도인 카타나 두 자루가 검집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역시나 원목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책상 앞에 앉은 클리시 회장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엘리제궁 비서실장과 진지한 얼굴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에 클리시 회장 부탁을 들어준다고 대통령께서 직접 빈 살만 왕세자하고 통화까지 하셨습니다.
“더욱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수주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건 좋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지요. 만약에 사건이 외부로 알려졌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지아트사는 물론이고 프랑스 전체가 손가락질을 받게 됐을 겁니다.
질책이 담겨 있는 말투에 자존심이 상한 클리시 회장은 순간 울컥해서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금방 이성을 되찾곤 화를 내는 대신 수화기를 붙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잘해 보려 했는데 밑에 있는 부하 직원들의 의욕이 너무 앞선 것 같군요.”
양 측의 관계에 있어서 분명히 우위는 상대편에 있었다.
특히나 지금은 리야드에서 벌어진 문제로 엘리제궁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더욱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클리시 회장은 그 점을 계속해서 머리에 새기며 애써 떨떠름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채 통화를 계속 이어 갔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꼭 그래야 될 겁니다.
비서실장은 거만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르끌레르 전차 개량 사업 축소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엘리제궁(대통령 관저)을 움직여서 빈 살만 왕세자를 설득해 사건을 무마시키는 대신 지아트사에서 내놓은 것이 바로, 예정되어 있는 르끌레르 전차 개량 사업 계획 수정을 정부안대로 군말 없이 수용하는 거였다.
사업 액수도 컸지만 무엇보다 전차 생산 라인을 축소시키거나 멈추지 않고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경제 악화로 재정 부족을 이유로 엘리제궁에서 개량 사업 규모를 축소하려고 들자 국방부는 물론이고 정부와 정치권에 전방위로 로비를 펼치면서 어떻게든 물량을 지켜 내려고 노력 중이었다.
실제로 로비가 어느 정도 먹혀들어 가서 엘리제궁에서 처음 계획했던 숫자보다 축소 물량을 절반 가까이 줄이는 것에 거의 합의가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리야드에서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니, 지아트사와 클리시 회장으로서는 너무나도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제궁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게 되면서 입게 된 손해만 4억 유로가 넘었고 전차 생산 라인 축소로 인해 대규모 구조 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로 인해서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됐지만 리야드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회사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약속을 한 거였기에 클리시 회장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약속을 어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믿고 이만 끊겠습니다.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이 먼저 전화를 끊자 클리시 회장 역시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놨다.
“제길!”
굴욕감에 클리시 회장은 입술을 비틀면서 욕설을 뱉어냈다.
그러다가 어느새 필터 앞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거칠게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서 끄고는 책상 한쪽에 설치된 인터폰을 눌렀다.
-네, 회장님.
“라파엘 전무를 호출해서 당장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잔뜩 짜증이 나 있는 목소리에 비서실 여직원이 긴장한 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몸을 뒤로 기댄 클리시 회장은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연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노크 소리와 함께 라파엘 전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회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책상 너머에 서 있는 라파엘 전무를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4억 유로야.”
“3….”
“이번 개량 사업 축소로 회사가 당장 입게 될 손해액이야. 대규모 구조 조정과 생산 라인 축소가 실행되면 액수는 몇 배로 더 늘어나겠지.”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자네가 회사에 입힌 피해가 큰지 알겠어!”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따가운 질책에 라파엘 전무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금방 고개를 들어 책상에 앉아 있는 클리시 회장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듯 호소했다.
“하지만 진행 중인 차기 전차 사업을 수주하게 된다면 이번에 입은 손해를 전부 만회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클리시 회장이 콧방귀를 뀌고는 사납게 윽박질렀다.
“이딴 식으로 사고를 쳐 놓고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우리 정부하고 거래를 해서 입을 다물기로 했지만, 리야드에서 폭탄 테러를 저지르려고 했는데, 순순히 입찰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실세인 칼레드 왕자가 우리 편이니 좀 더 적극적으로 로비를 벌인다면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을…….”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지만 냉정하게 자르면서 클리시 회장이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딴 소리가 나와!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칼레드라는 자한테 보수로 5억 달러를 그것도 선금으로 지급했지?”
“그건 회장님께서도 승인을 해 주신 일이지 않습니까?”
“물론 그랬지. 하지만 네놈이 이런 식으로 사고를 칠 줄 알았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거야! 150억 달러짜리 사업을 통째로 날리고 10억 달러나 되는 손해를 입게 만들다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아직 입찰이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어떻게든 사업을 따내도록 하겠습니다.”
필사적으로 설득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대답뿐이었다.
“그걸 날 보고 믿으라고?”
“회장님.”
“자넨 해고야. 당장 차기 전차 사업에서 손을 떼고 회사를 나가도록 해!”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라파엘 전무는 클리시 회장의 말이 마치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이대로 절 버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정도로 끝내는 걸 고맙다고 생각해야 될 거야. 당연한 거지만 퇴직금 지급도 없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이 클리시 회장은 의자를 돌려 라파엘 전무를 외면했다.
잔인하다 생각될 정도로 냉정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라파엘 전무는 배신감과 굴욕으로 몸을 떨었다.
얼마 전까지는 사장 자리를 약속하며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더니, 이제 와서 이따위 취급인가 싶어 눈앞이 분노로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알겠습니다.”
라파엘 전무는 남은 자존심을 내세워 마지막엔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돌아서기로 했다.
짧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온 라파엘 전무를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스태판이 급히 달려와 맞이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러자 라파엘 전무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그 반응으로 단번에 회장실 안에서 어떤 대화가 이루어졌는지 짐작한 스태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라파엘 전무가 차가운 얼굴로 쏘아붙였다.
“지금 그딴 소리를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
“죄송합니다.”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라파엘 전무는 독기에 가득 찬 눈을 번들거리면서 말했다.
“르가노비치하고 연락이 되지?”
눈을 동그랗게 뜬 스태판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세르비아 마피아 보스 말씀이십니까?”
“그래.”
“한동안 뜸하기는 했지만 원하신다면 연결이 가능합니다.”
“오늘 안으로 은밀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봐.”
무언가 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걸 알아차린 스태판은 힘없이 처져 있던 어깨를 바로 하며 얼른 대답했다.
“예. 지금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넓은 복도를 걸어가면서 라파엘 전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 모든 걸 다 잃고 비참하게 끝낼 수는 없었다.
클리시 회장이 자신을 버린다면 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날 저녁 클리시 회장은 파리 중심가에 위치한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지아트사 대주주이자 자신과 친분이 깊은 찰스 방델을 만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방델 가문은 로렌 지방에서 제철소를 운영하며 막대한 부富를 쌓아 올린 철강 재벌로,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정․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대부호의 반열에 오른 유서 깊은 재벌 가문이었다.
1978년 프랑스 철강 산업이 국유화될 때 미리 사업을 정리하고 나와서 지금은 투자회사를 세워 직접 기업을 경영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재계에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찰스 방델은 이런 방델 가문의 직계 후손 중에 한 명이었다.
날 때부터 상류층인 사람답게 찰스 방델 역시 호사스러운 취미를 몇 개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미식이었다.
스스로 미식가라 자처하는 인물이라 클리시 회장은 그와 약속을 잡을 때마다 평판이 좋은 레스토랑을 고르느라 골머리를 썩었다.
행여나 찰스 방델의 까다로운 음식 취향에 하나라도 어긋나면 하루 종일 기분 나빠 하니 아무리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다지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대주주 가운데 한 명이었기에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찰스 방델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흠. 약간 산미가 강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와인이로군. 부르고뉴산인가?”
빈 와인 잔을 채워 주기 위해 테이블로 다가온 소믈리에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정중하게 ‘예.’ 하고 답했다.
“양지바른 땅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잘 자란 포도로 만든 것입니다. 양조장 근처에 꽃이 자생하는 토양이 많아서 그런지 플로럴 향이 은근히 묻어나면서 부드러운 목 넘김이 특징이지요.”
찰스 방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절반만 따른 와인을 가볍게 흔들었다.
“어쩐지 코코뱅(닭고기와 야채에 레드와인을 넣고 졸여서 만드는 요리)에서 제법 흥취가 느껴진다고 생각했지. 소박하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군.”
클리시 회장 역시 와인을 즐기긴 했지만 찰스 방델처럼 이것저것 세세하게 따져 가면서 마시진 않았다.
어쨌든 입맛에 맞은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클리시 회장은 와인을 마시느라 잠깐 식사가 중단된 틈을 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르끌레르 개량 사업이 크게 축소될 것 같네.”
“지난번 이사회에서는 로비를 해서 물량을 최대한 지키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담담한 얼굴을 한 채 날카로운 물음을 툭 던지자 클리시 회장은 내심 앓는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표시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여러 가지 문제들도 있고 무엇보다 엘리제궁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다 보니 다른 방도가 없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