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36
936
가볍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찰스 방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맞은편에 앉아 있는 클리스 회장을 바라봤다.
“사우디아라비에서 문제가 생겨 자네가 엘리제궁하고 거래를 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 모양이군.”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나?”
“지금은 많이 퇴색됐지만 그래도 200년 넘게 재벌로 이어져 내려온 가문일세. 그만큼 정․재계에 거미줄처럼 이어진 연줄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당연히 엘리제궁에도 친분이 깊은 이들이 있고 말이야.”
“으음.”
이미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클리시 회장은 살짝 굳어진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
“르끌레르 전차 개량 사업 축소가 공식 발표되면 주가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치는 건 물론이고, 회사 경영에도 타격이 클 텐데 대책은 있는 건가?”
그러자 클리시 회장이 생각해 둔 계획을 이야기했다.
“한동안은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 같으니 선제적으로 이시레물리노 공장을 완전 폐쇄하고 구조 조정을 실시해 긴축 경영을 할 생각이네.”
파리의 위성 도시인 이시레물리노는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한때는 군수산업과 화학 공장이 밀집한 대표적인 공업지역이었다.
지아트사 역시 이곳에 냉전시대 때부터 공장을 두고 AMX 13 경전차를 비롯한 수천 대의 전차를 생산했었다.
프랑스 남부에 새로운 대규모 공장을 건립하면서 지금은 생산 라인 대부분이 멈추어져 있는 상태였지만,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군수업체인 지아트사의 전통과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공장을 스스로 폐쇄시킨다는 건 구조 조정만큼이나 회사에 큰 충격을 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보수적인 주주들은 물론이고 노조에서도 반발이 아주 클 텐데…….”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한동안 주가가 바닥을 기겠군.”
“몇 년은 힘들겠지만 곧 주력지상전투체계(MGCS) 개발이 시작되니, 사업이 본격 진행되면 다시 반등할 수 있을 걸세.”
주력지상전투체계(MGCS) 프로젝트는 NATO와 유럽권에서 유일한 현용 전차 대체 사업으로 러시아의 4세대 아르마타 전차에 맞설 최신형 전차를 개발 배치하는 것이 목표였다.
독일과 프랑스의 공동 사업으로 우선은 레오파트2와 르끌레르를 일괄 대체하는 계획이지만, 개발에 성공한다면 다른 유럽 국가들로 도입 국이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더군다나 최근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커지면서 그동안 군축을 벌였던 유럽 각국이 급격하게 군사력을 복구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주력지상전투체계(MGCS) 프로젝트의 미래는 상당히 밝았다.
하지만 찰스 방델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알고 있기로 5년 뒤에야 상세 작전 요구 성능이 나오고, 대량 양산은 거기서 또 8년 뒤 아닌가?”
“흐흠. 맞네.”
“그리고 양산이 결정된다고 해도 독일 측 파트너인 KMW(크라우스마페이베그만)하고 물량을 나눠야 되고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도입 국이 늘어난다면 충분히 수익을 확보할 수 있을 걸세.”
클리시 회장의 말에 상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 뒤로 몸을 기댔다.
“장기적으로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사이에는 어떻게 할 건가? 설마 정말로 100대 남짓밖에 안 되는 르끌레르 전차 개량 물량으로 버티려는 건 아니겠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던 클리시 회장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차기 전차 사업을 수주할 수만 있다면, 공백 기간을 메우고도 남을 것 같은데 어떤가.”
“그리되면 좋겠지만 경쟁자들이 워낙 만만치 않은 데다가 자네도 아까 이야기를 했듯이, 이번에 불미스러운 일까지 있어서 수주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상황일세.”
“설마 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찰스 방델의 물음에 클리시 회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큰 반전이 없는 이상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힘들 것 같네.”
“대주주로서 상당히 실망스럽군.”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순간을 견딜 수가 없었던 듯 클리시 회장이 먼저 핑계를 대며 일어섰다.
“잠시 손 좀 씻고 오겠네.”
클리시 회장은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서 무릎에 있던 냅킨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은은한 아이리스 향과 천장에 달린 할로겐 조명,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덕에, 화장실보다는 신사들이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휴게실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공간이었다.
칸막이가 질러져 있는 바로 옆 자리엔 보통 여성들이 쓰는 파우더룸처럼 4인 소파와 널찍한 테이블에 재떨이까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 불필요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용변이 급했던 건 아니기에 클리시 회장은 금색 테두리가 둘러져 있는 세면대 앞에 서서 일부러 천천히 손을 씻었다.
불쾌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다시 식사 테이블로 돌아가면 대주주인 찰스 방델을 어떻게 설득해서 계속 자신을 지지하도록 만들지 고민하며, 느릿하게 종이 타월로 물기를 닦아 내는데, 누군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한 명이 안으로 들어오는 걸 앞에 있는 거울로 본 클리시 회장은 이내 관심을 끊고 젖은 종이 타월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사내가 뒤에서 와락 그를 덮쳤다.
“으읍. 읍!”
눈을 부릅뜨며 마구 버둥거렸지만 입이 틀어막힌 클리시 회장은 사내에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거울에 비치는 사내의 얼굴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일 정도로 냉혹했다.
“금방 편안해질 테니까 얌전하게 있어.”
싸늘하게 웃으면서 내뱉는 말에 그의 눈동자에 공포감이 가득 차올랐다.
더욱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 뭔가 따끔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거울을 쳐다보자 사내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만년필처럼 생긴 물건 끝에 나와 있는 뾰족한 바늘을 그의 팔뚝에 찔러 넣고 있었다.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발버둥을 치던 클리시 회장은 이내 사지를 축 늘어뜨리면서 힘없이 머리를 아래로 떨궜다.
목덜미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사내는 숨이 완전히 끊어진 걸 확인하고는 양팔을 붙잡고 화장실 끝 칸으로 시신을 끌고 갔다.
하얀색 변기 위에 클리시 회장을 앉히고는 윗도리를 벗겨 벽에 있는 옷걸이에 걸고 오른쪽 와이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일회용 주사와 코카인이 들어 있는 작은 파우치를 꺼내 변기 물통 위에 놔뒀다.
사내는 클리시 회장의 앉은 자세를 자연스럽게 고친 뒤 변기 칸에서 나왔다.
마무리를 하는 동안 아무도 화장실 안에 들어온 사람이 없는 것을 증명하듯 레스토랑 홀에서 들려오는 낮은 음악 소리를 빼고는 매우 조용했다.
죽은 클리시 회장이 했던 것처럼 세면대 앞에서 제 얼굴을 한번 비춰 보고는 옷매무새를 점검한 사내는 가죽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그대로 걸어서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아랍에미리트에서 돌아온 혁권은 지난번에 갔던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다바그 왕자를 만났다.
“프랑스 정부하고 거래가 있었던 모양이오.”
“지아트사가 아니고 프랑스 정부하고 말입니까?”
미간을 좁히며 묻자 맞은편 소파에 앉은 다바그 왕자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도대체 뭘 제시했기에 이번 일을 덮어 준 겁니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터키에서 죽은 카리니의 두 번째 부인과 아들이 프랑스로 망명해서 현재 파리에 머물고 있소.”
“……!”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혁권이 눈썹을 찡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바그 왕자는 대답 대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선 찻잔을 기울였다.
천천히 차로 입술을 축인 뒤 탁자에 잔을 내려놓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동안 인권단체와 여러 언론들하고 계속 접촉해서 애써 묻은 카리니 사건을 들춰내는 바람에 왕실 입장에서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었지만, 프랑스 정부가 보호를 하고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지켜보는 눈들이 많아 함부로 손을 쓸 수도 없어 속만 끓이고 있었는데, 그걸 해결해 주기로 했다고 들었소.”
“어떻게 말입니까?”
“안전을 핑계로 외부 활동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인권단체나 언론과의 접촉을 막아 주기로 했소.”
“빈 살만 왕세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 주는 것이겠군요.”
“그러니까 그런 큰일을 조용히 묻어 준 것 아니겠소.”
“으음.”
모든 것이 명확해진 혁권은 얼굴을 굳힌 채 작게 침음을 내뱉었다.
카리니 암살 사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을 거의 다 장악하고 차기 왕위 계승자로서 입지를 확실히 굳힌 빈 살만 왕세자한테 아킬레스건 같은 일이었다.
실제로 국내외에서 비난 여론이 쏟아지고 수도인 리야드 한복판에서 빈 살만 왕세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등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의 제안은 앓던 이가 빠지는 일이었을 테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했을 것이 분명했다.
“거래를 없던 일로 되돌리는 건 힘들겠지요?”
안 될 걸 알면서도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것처럼 혁권이 묻자 아니나 다를까 다바그 왕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려울 거요.”
역시나 예상했던 대답에 혁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죠, 그럼 포기하는 수밖에.”
깔끔하게 손을 털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바그 왕자는 칭찬하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잘 생각했소, 무리해서 끼어들려고 하면 빈 살만 왕세자의 화만 살 테니까.”
속이 쓰렸지만 다바그 왕자의 말대로 이미 다 끝난 일을 가지고 괜히 빈 살만 왕세자의 신경을 거슬러 봤자 이쪽만 손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그것도 두 번이나 노렸던 걸 잊겠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지아트사는 이번 입찰에 더 이상 나서지 못하겠군요?”
“아마도 그럴 거요. 조용히 넘기기로 했다지만 이미 빈 살만 왕세자한테 찍혔으니 사업을 수주할 가능성은 이제 거의 없다고 봐야 되지 않겠소.”
그나마 강력한 경쟁자 중 하나였던 지아트사가 낙오를 하게 됐으니 얻은 것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다른 걸로 바꿨다.
“곧 있으면 사업 참가 신청이 마감되는데, 평가단 분위기는 좀 어떻습니까?”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중국북방공업주식회사(NORINCO)까지 끼어들어서 사업 신청을 접수한 업체가 스무 곳이 넘지만, 어차피 요구 성능을 충족시키기가 어려워서 대부분 성능 평가 전에 탈락하고, 3.5세대 전차를 내민 4개 업체가 각축전을 벌이게 될 거요. 물론 우리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테고 말이오. 아, 지아트사가 그리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는 삼파전이 되겠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