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37
937
무려 150억 달러에 달하는 사업이었기에 예상했던 대로 전 세계 전차 생산 업체들이 너도나도 군침을 흘리면서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함량 미달의 업체들도 일단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덤벼드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가지 개량을 거쳐 3세대 전차 성능을 발휘하는 우크라이나의 T-84 Oplot는 그나마 봐 줄 만했지만, 중국은 탱크 바이애슬론에서 고정 표적도 제대로 맞히지 못하고 심지어 주행 중에 바퀴가 하나 떨어져 나가는 망신을 당했던 96식 전차를 후보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였기에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사업비 또한 부족하지 않았기에 큰 이변이 없는 한 요구 성능에 못 미치는 이런 전차들이 1차 심사를 통과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였다.
“무엇보다 평가단 내부에서 코리아 컨소시엄이 제시한 기술이전 규모와 수준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우리한테는 유리한 요소요.”
“다른 세 곳과 비교한다면 확실히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요.”
“맞는 말이오.”
“시험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계속 힘을 좀 써 주십시오.”
그러자 ‘하핫.’ 하면서 다바그 왕자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린 이미 한배를 탄 사이 아니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감사하다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혁권은 다바그 왕자에게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약한 뒤 펜트하우스를 나와 직통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미리 앞에 나와 있던 부하가 열어 주는 문을 통해 차 뒷좌석에 앉으니 함단이 옆에 따라 타면서 태블릿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보스, 잠깐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뭔데 그래?”
액정 화면엔 프랑스 유명 일간지의 영문판 일면 기사가 띄워져 있었다.
태블릿을 받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헤드라인과 사진을 본 혁권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건…….”
“지아트사 클리시 회장이 어제저녁에 파리 시내 중심가에 있는 최고급 레스토랑 화장실에서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혁권은 눈썹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함단을 쳐다보면서 되물었다.
“코카인 과다 복용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현장에서 투약을 하는 데 사용한 일회용 주사기와 다량의 코카인이 발견됐고 몸에는 주사 자국도 있었다고 기사에 나와 있습니다.”
“으음.”
그저 그런 인물도 아니고 클리시 회장 같은 거물이 이런 일로 갑자기 사망을 하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믿기지 않는 얼굴로 태블릿 PC에 띄워져 있는 클리시 회장의 사진을 잠시 내려다보던 혁권은 이내 의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소 코카인을 몰래 복용했는지는 모르는 거지만 하필이면 지금 이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너무 수상하지 않습니까.”
함단이 지적한 대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면 누가 손을 쓴 거지.”
“거물급 인사였던 만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겠지.”
오랫동안 거대 방산 업체 수장으로 있었으니 굳이 뒤져 보지 않아도 온갖 은밀하고 추잡한 일에 연관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당장 이번에 그와 연관된 사건만 해도 그랬는데 만약 외부로 알려진다면 지아트사뿐만 아니라 프랑스 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을 뒤흔드는 대형 스캔들이 될 터였다.
그 때문에 프랑스 정부나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서 입을 막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잠깐 했지만, 이내 머리를 가로저었다.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사건이 드러나면 지아트사 역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거였기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클리시 회장 같은 거물을 암살할 이유가 없었다.
혁권은 팔짱을 낀 채 고심을 하다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아무래도 찝찝하군. 어찌 된 건지 알아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혁권은 피곤한지 푹신한 가죽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파리 센Seine 강변.
오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데다가 야심한 시간이라 조명까지 거의 다 꺼져 왠지 삭막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운데 승용차 한 대가 환한 전조등 불빛을 밝히면서 나타나 도로 한쪽에 세워져 있는 벤츠 뒤에 멈추어 섰다.
엔진과 함께 전조등을 끈 승용차 뒷좌석에서 검은 인영 한 명이 내려 주위를 둘러보고는 벤츠 쪽으로 걸어갔다.
강변을 따라 세워진 가로등 불빛에 얼굴이 드러난 인영의 정체는 바로 라파엘 전무였다.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차창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가 앉자 코끝에 담배 냄새가 스쳤다.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파엘 전무는 옆에 앉은 사람을 향해 매우 정중하게 예의를 차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살짝 열린 차창 사이로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뱉어 낸 사내가 라파엘 전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린 사내는 놀랍게도 찰스 방델이었다.
찰스 방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잠시 지그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먼저 하나 묻도록 하지. 이번 일 자네가 뒤에서 손을 쓴 건가?”
“…….”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대답이 됐다.
“키우던 개한테 물려서 불명예스럽게 생을 끝내다니 클리시 그 친구 지옥에 가서도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겠구먼.”
자신을 개라고 표현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라파엘 전무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니,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비아냥거림쯤은 얼마든지 들어 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 라파엘 전무를 향해 상대가 싸늘한 투로 말했다.
“나하고 만나는 자리에서 그런 더러운 수작을 부리다니 베짱이 아주 좋군. 아님 날 우습게 본 건가?”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라……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결과에 따라서 그를 그냥 놔두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에 라파엘 전무는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어차피 내친걸음인 데다가 이제 와서 다시 되돌릴 수도 없었기에 마음을 굳게 먹었다.
찰스 방델은 손목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는 파텍필립 시계를 힐끔 쳐다보곤 그를 향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회사를 위기에서 구할 그 방법이라는 게 뭔지 바로 얘기해 보게.”
“알고 계시겠지만 프랑스 육군의 전차 개량 사업이 크게 축소된 상황에서 MGCS 프로젝트가 본격 시작될 때까지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르끌레르 전차의 해외 수출뿐입니다.”
“그거야 누구나 지껄일 수 있는 말 아닌가?”
심드렁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라파엘 전무는 위축되지 않고 사뭇 진지한 태도로 상대를 설득했다.
“그만큼 단순하면서도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담배를 입에 문 찰스 방델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에서 진행 중인 차기 전차 사업을 어떻게 해서든 수주해야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당장 부족한 일거리를 확보하는 건 물론이고 중동 지역 국가에 르끌레르 전차를 추가로 수출할 길이 활짝 열려 수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클리시 회장님은 회사의 명운이 걸린 이런 중요한 입찰을 중간에 포기하려고 하셨지요.”
은근슬쩍 클리시 회장을 깎아내리자 찰스 방델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라파엘 전무를 쳐다봤다.
“내가 알고 있기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문제가 있어 입찰을 따낼 가능성이 아주 낮다고 들었는데, 물론 자세한 내용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숨겨진 내막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말투에 그는 흠칫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실망이군.”
라파엘 전무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의욕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 실수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찰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망친 장본인이 바로 라파엘 전무였지만 찰스 방델은 굳이 그걸 지적하지는 않고 넘어갔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것이 뭔가?”
“저한테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 입찰을 반드시 따내 오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썹을 찡그리고는 어느새 필터 앞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차창 밖으로 버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시간낭비를 한 것 같군.”
찰스 방델이 실망감을 감추지 않은 채 대화를 끝내려고 하자 라파엘 전무가 다급하게 이야기를 했다.
“만약 판을 뒤집을 카드가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직계 왕족이자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세 가운데 한 명인 칼레드 왕자한테 거액의 보수를 주고 대리인으로 내세운 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 봤자 차기 국왕인 빈 살만 왕세자한테 찍힌 이상 입찰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노쇠한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국정을 이끌어 가고 있는 데다가, 국방장관직을 겸임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빈 살만 왕세자의 뜻에 따라 차기전차 사업이 결정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클리시 회장도 회사에 큰 타격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욕심을 버려야 했다.
그런데 라파엘 전무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업을 따내겠다고 하니,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유력한 왕위 계승자인 건 맞지만 아직 빈 살만 왕세자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지난 카리니 암살 사건과 지나치게 실권을 휘두르면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행동에 압둘아지즈 국왕이 상당한 불쾌감을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평소 데리고 다니는 수행경호원 전체를 갑자기 교체했다더군요. 경호원 가운데 일부가 자신이 아닌 빈 살만 왕세자한테 충성한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찰스 방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설마 빈 살만 왕세자를 끌어내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어느새 여유를 찾은 라파엘 전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입지를 단단히 굳히고 있는 빈 살만 왕세자를 제가 어떻게 낙마시키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불화가 있다고 해도 반역을 하지 않는 이상 압둘아지즈 국왕이 친아들을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뭘 어쩌겠다는 거지?”
짜증을 내며 말한 찰스 방델은 이어진 이야기에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실각을 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칼레드 왕자를 통해 한동안 근신을 하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겁니다. 그사이에 승부를 건다면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말을 다 끝낸 라파엘 전무는 한쪽 손을 들어 잘 정돈된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잠긴 찰스 방델을 초조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결정을 내렸는지 찰스 방델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빈 살만 왕세자를 차기 전차 사업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만들 계획인지 자세히 들어 봤으면 좋겠군.”
이야기가 먹혀 들어갔다는 생각에 라파엘 전무는 반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