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44
944
어김없이 온 세상을 태울 듯한 뜨거운 햇살이 내려쬐는 가운데 혁권은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나기 위해 왕세자궁을 찾아갔다.
근신 처분에 많이 가라앉아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왕세자궁은 평상시하고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대리석이 깔린 긴 회랑을 지나 후원으로 들어서자 아랍 전통 복장을 한 빈 살만 왕세자가 애완용으로 키우는 매를 팔에 올리고는 손수 먹이를 주고 있었다.
“전하, 모시고 왔습니다.”
린자위 비서실장의 말에 고개를 뒤로 돌린 빈 살만 왕세자는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그러면서 빈 살만 왕세자는 애완용 매의 부리를 조심히 쓰다듬고서 혁권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보게나.”
매가 마지막 남은 먹이까지 남김없이 다 삼킨 것을 확인한 빈 살만 왕세자는 옆에서 대기 중이던 사육사에게 매를 넘기고서 팔에 찬 토시를 풀며 다가왔다.
“홍차와 스콘을 준비해 놨네. 앉아 쉬면서 이야기하지.”
“그러시죠.”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자 깔끔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고용인이 향기가 좋은 홍차를 찻잔에 따라 주고는 물러났다.
홍차를 한 모금 마신 그는 맞은편에 앉은 빈 살만 왕세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식을 듣고 걱정했었는데 괜찮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러자 빈 살만 왕세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로운 표정을 보였다.
“그 정도로 위축될 내가 아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잠깐 휴가라도 받은 셈 치고 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네.”
“그러시군요.”
의기소침까지는 아니더라도 처음 경험하는 시련에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차분한 모습을 보니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위로를 해 주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날 찾아온 용건이 뭔가?”
“혹시 아랍에미리트 쪽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왜 그쪽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에 그는 자세를 바로하며 만수르 회장한테 들은 정보를 이야기해 줬다.
“프랑스가 아랍에미리트 정부에 은밀하게 내년에 있을 유엔 비상임 이사국 선출을 도와주는 대신 차기 전차 프로젝트에서 지아트사를 밀어줄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걸 멈추며 빈 살만 왕세자가 미간을 좁혔다.
“프랑스 정부가 그런 제안을 했다고? 그거 확실한 정보인가?”
“부총리인 만수르 회장님한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으음.”
혁권이 만수르 회장과 깊은 친분이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빈 살만 왕세자는 낮게 침음을 흘리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프랑스 정부의 행동은 지아트사가 자신과 한 약속을 대놓고 깨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지아트사가 차기 전차 사업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약속을 그리 쉽게 어기다니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군.”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빈 살만 왕세자가 얼마나 분노를 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상황이 공교롭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상대를 쳐다보며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오늘 왕세자궁을 찾아온 진짜 용건을 꺼냈다.
“거액을 받고 지아트사와 대리인 계약을 맺었던 칼레드 왕자가 갑자기 차기 전차 프로젝트 책임을 맡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프랑스 정부를 통해 아랍에미리트에 접근한 것이 마치 미리 짜 맞춰 놓은 것처럼 딱딱 들어맞아서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말뜻을 알아차린 빈 살만 왕세자의 눈동자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다는 건가?”
“이걸 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왕세자님과 절 우롱한 것일 겁니다.”
“맞는 말이야.”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그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클리시 회장이 죽었다더니 그것 때문에 놈들이 생각을 바꾼 건가?”
애써 화를 억누르며 이야기를 하자 혁권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클리시 회장을 죽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지?”
“얼마 전에 절 암살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인물이 누군지 알아냈는데, 예상했던 대로 지아트사에서 이번 입찰을 총괄하던 라파엘이라는 자였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클리시 회장이 급작스럽게 이상한 죽음을 당한 뒤에 새로 지아트사 사장이 된 사람이 바로 라파엘입니다. 그러고 나서 지금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말입니다. 아직까지는 제 추측일 뿐입니다만, 어쩌면 왕세자 전하가 근신 처분을 받은 것에도 놈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자 빈 살만 왕세자가 격노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다그치듯 쏘아붙였다.
“방금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사나운 기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위축되는 것 없이 상대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 넘기면서 말했다.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추측할 만한 근거는 있습니다.”
“그게 뭔가?”
“알아보니 칼레드 왕자가 살만 국왕 전하를 만나러 모로코 탕헤르로 갈 때 중간에 파리를 경유했더군요.”
“······!”
“일반 여객기를 이용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개인 제트기를 타고 가면서 굳이 빠른 길을 놔두고 프랑스로 크게 둘러 갈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파리에 다른 볼일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거기서 라파엘이라는 자하고 날 음해할 음모를 꾸몄다 이건가?”
“예. 아마도 살만 국왕 전하를 분노케 할 뭔가를 넘겨받았겠지요. 예를 들어 비리 내역 같은 것 말입니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에 빈 살만 왕세자는 찻잔을 깨 버릴 듯 꽉 움켜주니 채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랬군. 이제 모든 걸 확실히 알겠어. 감히 날 가지고 놀다니 가만히 두지 않겠어!”
거칠게 숨을 내쉬는 상대를 보며 혁권이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화가 나시겠지만 지금은 상황을 냉정하게 보고 판단해야 될 때입니다.”
그러자 빈 살만 왕사자가 턱을 치켜세우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내가 이딴 놈들 하나 처리를 못 할 것 같나?”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근신 처분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더군다나 살만 국왕 전하께서 신임하는 칼레드 왕자를 직접 건드린다면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겁니다.”
칼레드 왕자를 거론하자 빈 살만 왕세자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만큼 최근 칼레드 왕자가 자신의 대항마로 부상하는 걸 경계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아버지인 살만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큰 어려움 없이 후계자 지위를 착실하게 다져 오다가 뜻밖의 난관을 만나 먼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빈 살만 왕세자는 이내 냉정을 되찾은 얼굴로 그를 봤다.
“설마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라는 건 아닐 테고, 어쩌자는 거지?”
혁권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당연히 그냥 놔둘 순 없지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섬뜩하게 미소를 짓는 혁권을 보며 빈 살만 왕세자가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저한테 맡겨 주신다면 겁 없이 덤벼든 대가를 확실히 받아 내도록 하겠습니다.”
“존슨 자네가 말인가?”
“저도 이번 일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니까요.”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빈 살만 왕세자가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뗐다.
“자신 있나?”
시선을 마주친 혁권은 포식자 같은 눈빛을 번들거리면서 말했다.
“자신이 없다면 애초에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지요.”
빈 살만 왕세자는 언뜻 살기가 내비치는 그의 눈동자를 보곤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한테 맡기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왕세자궁을 나온 혁권은 그 길로 국방부 맞은편 고층 빌딩에 자리를 잡은 코리아 컨소시엄 사무소를 방문했다.
100평이 조금 안 되는 넓은 사무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이 어수선하고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았지만, 입찰이 본격 시작된 지금은 현지 고용인과 한국에서 파견된 직원 들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 벨 소리와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움직임으로 부산스럽기 짝이 없던 사무실에 선글라스를 낀 혁권이 부하들과 들어서자 미리 연락을 받은 김용훈 상무가 서둘러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현장 사무소 책임자로 부임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중임을 맡게 돼서 어깨가 많이 무겁습니다. 대표님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같은 배를 탔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않겠소. 뭐든 도움이 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도록 해요.”
“말씀을 들으니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웃으며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사무실 한쪽에 있는 김용훈 상무의 개인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입찰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소?”
맞은편 소파에 앉은 김용훈 상무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2주 뒤에 발표되는 1차 서류 심사는 무난히 통과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는 심드렁한 태도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프로젝트를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되는지 그리고 제안서 내용에 문제가 될 것이 없는지 정도를 확인하는 게 1차 서류 심사였다.
3.5세대급 전차를 후보로 내놓은 데다가 회사 규모도 경쟁 업체인 제너럴 다이내믹 랜드 시스템이나 KMW하고 비교해도 그리 크게 꿀리지 않는 코리아 컨소시엄이 탈락할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가 혁권과 다바그 왕자가 그동안 양국의 유력자들을 상대로 로비를 한 걸 생각하면 오히려 1차 서류 심사에서 떨어지는 것이 더 어려울 일이었다.
김용훈 상무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슬쩍 눈치를 한번 보고는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서류 심사가 끝나면 한 달 뒤에 실물 전차를 가져와서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서 보름간 현지 테스트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평가 항목 중에 가장 많은 가산점이 매겨지는 데다가 테스트가 꽤 혹독하게 이루어질 거라고 하니까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될 거요.”
“물론입니다. 이미 본사에서 개량 작업을 끝낸 시제 전차 두 대를 만들어서 한창 성능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계속 신경을 써 주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그는 탁자에 놓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내려놓고는 오늘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한 가지 나쁜 소식이 있소.”
보기 드물게 굳은 표정으로 하는 말에 김용훈 상무는 덩달아 긴장된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 정색을 하시니 이거 괜히 무서워지는데요.”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것처럼 너스레를 떨던 상대는 그가 계속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자 점차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눈치를 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지아트사가 이번 입찰에 전력을 다해 임할 것 같소.”
이야기를 듣자마자 김용훈 상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 그쪽은 대충 시늉만 내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을 바꿔 먹은 모양이오.”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이거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군요.”
어느새 김용훈 상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강력한 수주 후보인 제너럴 다이내믹 랜드 시스템과 KMW하고 싸움을 벌이기도 벅찬데 만만치 않은 경쟁자가 하나 더 생겨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소.”
“지아트사를 떨쳐 낼 복안이라도 가지고 계신 겁니까?”
기대 섞인 시선을 받으며 혁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세히 이야기를 해 줄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지아트사가 최종 후보로 선정될 일은 없을 거요.”
너무나 단호하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니 김용훈 상무는 으음, 하면서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일단 그리 알고 놈들이 뒤처진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 전방위로 파상 공세를 펼칠 가능성이 크니까 미리 대비를 해 두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