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301)
막장드라마의 제왕 301화
몸을 찾은 김철 선배가 사고를 친 지 며칠이 지났다.
금방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와 달리 내 명성(?)은 점점 더 공고한 것이 되어갔다.
열불이 터진 나는 매일같이 전화기 너머로 고함을 쳐댔다.
“대체 선배님은 제게 뭔 원한이 그리 있으신 겁니까?!”
-아니 뭐… 내가 일부러 그랬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어쩌다 보니로 제자를 바이로 만듭니까? 그놈의 어쩌다 보니는 『연극처럼』 트로트 씬 이후로 그치지를 않습니다그려!”
-대체 그거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
“평생 우려먹을 건데 문제 있습니까?!”
그렇게 평소처럼 한참을 씩씩거리며 욕지거리를 주고받던 중이었다. 김철 선배는 문득 입을 다물고 끙끙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꽤 갑작스러운 변모라 스팀이 잔뜩 올랐던 나도 순간 걱정이 앞섰다.
“뭡니까, 선배님? 뭐라도 잘못 드신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선배가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 마음이 편해서 말이지. 환청도 안 들리고.
“예?”
-그… 뭐라고 할까, 아무래도 나는 현석이 네가 필요한 모양이다.
“…진짜로 미쳐 버리셨습니까?”
외전 03. 이도나 엔드
생각해 보면 나도, 선배도 안일해져 있었다.
상황은 다급하고 정신은 없었다는 게 변명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닥쳐오는 상황을 피하기에 급급한 나날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상은 했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김철 선배가 내 이름을 공개적으로 언급했을 때부터 이 결과는 필연적인 것이었는데도.
“…그래서.”
이도나가 느릿하게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두 분이 나 몰래 알음알음 알고 지내셨다는 모양이던데, 맞나요?”
“…….”
“…….”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서늘하다 못해 얼음장과도 같았다.
나와 김철 선배는 서로 꽁꽁 얼어붙은 채 시선을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사실, 사태는 돌이켜볼 필요조차 없이 단순했다.
발단은 이도나의 초대였다.
장연철 PD 덕에 간신히 사태가 가라앉기 시작한 사이, 이도나는 내게 잠깐 만나고 싶다고 요청해 왔다. 장소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본인의 별장이었다.
병원에서 이후로 변변한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 게 켕겼던 나는 응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도나의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이후 박진태를 통해 내 메시지인 것처럼 속여 김철 선배에게도 몰래 연락을 보냈던 것이다.
나에게 전화라도 한 번 해보면 그만일 것을 멍청한 선배님은 여기에 멋지게도 낚이고 말았다.
“……?”
“……?!”
별생각 없이 왔다 삼자대면을 하게 된 나와 선배는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위에 이도나가 장군처럼 버티고 선 건 물론이었다.
“속인 건 미안해요.”
이도나가 눈곱만큼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요즘 두 분 사이가 너무 시끄럽더라고요.”
“아니, 그…….”
“이렇게 쫄래쫄래 뛰어오신 걸 봐선 보통 사이들은 아니신 것 같고… 눈곱만큼도 관련 없는 나한테 사정이나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유구무언.
나는 침을 꿀꺽 삼켰고 선배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바빴다. 사실 우리가 뭔 설명을 해도 들어먹을 표정이 아니었다.
김철 선배와 내가 시선으로 열심히 책임을 떠넘기던 사이 이도나가 흐응,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눈빛 교환하는 게 아주 십 년 묵은 부부인 양 척척이네.”
“…아뇨, 이도나 씨. 이건.”
“나보다 저 사람이랑 죽이 더 맞겠어요. 아예 소문처럼 사귀지 그래요? 나랑 헤어지고.”
“…….”
내가 말을 잇지 못하던 중 김철 선배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
“뭐죠?”
“십 년은 아니고 오 년 좀 안 되었는데.”
“…더럽게 좋겠네요. 나보다도 빨라서.”
눈치도 없고 코치도 없었다. 이도나의 눈은 더욱 더 싸늘해졌다.
이후의 전개는 그야말로 식은땀이 나는 것이었다.
나와 선배는 근 5년 가까이를 서로 붙어 지냈고, 자연히 은연중 서로에게 몹시 익숙해져 있었다.
이도나는 그걸 캐치해 집요하게 추궁했다. 당연히도 납득시킬 도리가 없던 나와 선배는 계속해서 궁색한 변명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간신히 추궁이 멈췄다.
“…그래요. 사실 다 아무래도 좋은 얘기죠.”
이도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훨씬 더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이어진 목소리 역시 딱딱했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말씀하십시오.”
“알고 있었죠? 저 인간하고 내가 무슨 사이인지.”
“…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이도나의 입술이 질끈 깨물렸다. 아니길 바랐다는 눈빛이었다.
“알고도 나한테 숨겼다는 거군요.”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요?”
이도나는 고개를 돌려 김철 선배를 쏘아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컸으며,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바닥에 뛰어들었다. 이도나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일지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본래라면 훨씬 더 신중하게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음.”
김철 선배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얼굴에 이내 어떤 결심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간신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낸 것처럼.
선배는 그대로 넙죽 엎드렸다.
“…뭐 하는 거죠?”
“미안하다, 도나야!”
김철 선배가 오체투지를 한 채 절절하게 외쳤다.
“내가 죽일 놈이다! 계속 사과하고 싶었다! 용서해다오!”
“…….”
이도나는 말이 없었다.
2.
김철 선배의 고해는 절절했다.
하기는, 그렇지 않았다면 죽어서까지 그런 집념을 품고 있지는 않았으리라.
김철이라는 인간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악할 정도로 선배는 계속해서 비루하게 빌었다.
“그래서요?”
하지만 가해자의 어떤 진심도 피해자에게 닿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난 아무래도 좋아요. 엄마가 들으면 뭐라고 할까요?”
“…도나야.”
“이름 부르지 마세요. 소름 끼치니까.”
이도나는 표정이 없었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이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생각하세요?”
“…….”
이도나.
그 이모에게 듣기론 도나란 ‘도나캐나’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보통은 되나캐나 정도로 변형되는 이 말은 ‘아무렇게나’, ‘어떻게든’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도나의 어머니는 딸을 낳을 무렵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그녀의 걱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아무리 괴롭더라도 어떻게든 살아주었으면, 그게 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어요.
그리하여 나온 이름이 도나.
영어 이름도 아니고 한자 이름도 아닌 그냥 도나였다.
“이제 와서 아빠 노릇 하겠다는 헛소리는 하지 마세요. 당신이 나한테 뭘 해줬죠? 뭘 해줄 수 있고요?”
“…원한다면 내가 가진 건 뭐든.”
“그딴 건 트럭으로 줘도 필요 없어요.”
보이는 건 완연한 무표정이었다. 마치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엄마, 살려낼 수 있나요?”
“…….”
“할 수 없다면 헛소리는 집어치우세요.”
김철 선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선배의 염원을 해결할 첫 시도는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미안하다.”
셋 중 하나가 사라진 자리엔 불편한 정적만이 남았다.
이도나는 말이 없었고, 나는 거기에 무어라 보탤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깼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게 편안하진 않으실 것 같군요.”
“…….”
“하지만, 그… 제가 말씀드리기는 뭐합니다만 김철 감독님은 진심으로 후회하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점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외투를 걸쳤다. 그녀가 그토록 혐오하는 아버지와 연루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내 얼굴을 보기조차 싫겠지.
그렇게 최대한 빨리 돌아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내 옷자락이 꾹 잡혔다.
“…이도나 씨?”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다예요?”
“저……?”
“나한테 할 말, 그게 다냐고요.”
뭐예요, 그게- 손아귀의 힘이 점점 조여들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악무는 듯한 소리가 났다.
“지금, 우리가 얼마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야…….”
나는 가만히 기간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도나는 어째선지 더욱 힘을 주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기,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대체? 왜?”
이도나는 한 손으로 옷자락을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내 가슴을 쳤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걱정했다고요!”
“…….”
“당연하잖아요……!”
나는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걱정? 나를?
왜?
“…계속 연락 드렸잖습니까.”
“연락? 그 잘난 연락?!”
머리가 내 가슴을 들이받았다.
“그렇게 헤어지고, 병원 검사도 제대로 안 받고, 전화로는 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나 하고. 그런 걸로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잖아요! 바보예요?!”
“…….”
“도대체 당신이 나한테 어떤 몹쓸 장면을 보여줬는지 알기나 하고……!”
머리칼이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도나는 한동안 내 가슴을 쾅쾅 때리기만 했다.
“생뚱맞게 이상한 소문이 나질 않나, 내가 여기 있는데 저 사람만 신경 쓰질 않나, 그대로 돌아가려 하질 않나……!”
“이도나 씨.”
“사람의 마음도 좀 알라고요……!”
가만히, 나는 눈을 깜박였다.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간 이도나가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대개 술의 힘을 빌렸다거나 다른 무언가의 영향이 있던 경우였다.
아니, 그저-
단순히, 나는 내 앞에서 이도나가 흐느낀다는 걸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제발…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반의 반만이라도 날 생각해 줄 수 없어요?”
무언가가 흘렀다.
그간의 어떤 연기에서도 보지 못했던 푸르고 진한 감정이었다.
‘…….’
어느 순간, 나는 이해했다.
어떤 변덕인진 몰라도 나는 살아났고, 김철 선배도 살아났다. 심지어 그 와중의 일로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벌였던 건지, 어떤 결과를 감내하려 했던 건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이제 와서.”
“전 괜찮습니다. 아주 멀쩡합니다. 이대로 마라톤도 뛸 수 있습니다.”
“…….”
증명하듯 손을 꽉 잡았다. 이도나는 잠시 입을 닫고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밤마다 당신 장례식에 있는 꿈을 꿨어요.”
“예.”
“비몽사몽할 때마다 어디가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고요.”
“잘못했습니다, 정말로.”
나는 묵묵히 이도나의 화풀이를 들어주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며 해온 것의 몇 배나 되는 사과를 하면서.
나에게는 그럴 의무가 있었다.
계속해서 쏟아지던 불평이 멎었다. 손바닥을 파고들었던 손톱이 흐트러졌다.
“사실은…….”
“네.”
이도나는 잠시 입을 닫았다. 입술이 거듭 달싹였다.
“사실은, 오늘 그 인간을 봤을 때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어요.”
“…….”
“원망하고 복수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당신을 보니까 너무나도 마음이 놓여서, 그냥 다 풀어져 버릴 것 같아서, 그게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서…….”
“예.”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았다.
모든 감정이 세월과 더 큰 감정에 스러지곤 한다. 이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신이 저 사람 편을 들었을 때는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았어요.”
“…미안합니다.”
“사정을 안다면서요. 당신만큼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만큼은 내 편을 들어줘야 할 거 아니에요.”
나와 김철 선배의 소식을 듣고, 이도나는 몹시 싫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끔찍하게 싫은 생각이었다고 했다.
“저 인간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다면, 친분이 있었다면… 어쩌면 당신이 나를 받아준 건 그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
“그렇다면, 정말로 그런 거라면… 나한테는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서…….”
결국, 단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도나는 오늘을 준비하고 연기했던 셈이었다.
나는 입을 닫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답이었다. 나는 이도나를 들어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외의 모든 것들에서는 아니었다.
그리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머잖아 나는 모든 정리를 끝냈다.
“거 정신 나간 생각을 다 하셨습니다.”
“…아닌 거죠, 그런 거?”
“물론이지요.”
“정말로?”
“정말로.”
이도나가 정말로 묻고 싶은 건 명확했다.
그림자를 겹치며, 나는 계속해서 원하는 답을 돌려주었다.
3.
“잊어요, 오늘 일은.”
이도나가 새빨개진 눈으로 말했다. 나는 뺨을 긁적였다.
“아니, 잊으라고 해도…….”
“잊으라고요.”
“…예.”
시간은 어느샌가 밤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있는 것도 민폐가 될 것 같아 나는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이도나가 그런 나를 붙잡았다.
“돌아가긴 너무 늦었잖아요. 버스도 끊겼고.”
“…차 타고 왔는데요.”
“전철도 끊겼고.”
“그러니까 차를…….”
결국 내가 졌다.
저 표정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어딘가의 카페 주인장 수준의 악한밖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대충 씻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왔다. 내 몸에 맞는 옷이 있을 것 같진 않으니 불편해도 대충 걸치고 자는 수밖에 없겠지.
반면 이도나가 욕실에 들어가 있던 시간은 길었다.
그리고, 이도나가 나왔을 때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뭔가요?”
“그런 옷은 좀 아니지 않습니까?”
“왜요, 편한데.”
그야 하늘하늘해서 편해 보이긴 하는데, 뭐라고 할까… 눈 돌릴 데가 없으니 말이지.
나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내렸다.
“그럼 잡시다.”
“확실하게 좀 말해요. 이 옷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데요?”
“그야…….”
“네?”
그런 태도에는 나도 살짝 반발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입을 열었다.
“참기 힘들게 되잖습니까.”
“…….”
이도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잠시 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참아도 되는데.”
“…….”
“…….”
이도나 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