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420)
426화 96. 도서관(6)
와들와들 몸을 떠는 신령을 보면서 이성민은 가학적인 유쾌함을 느꼈다.
제니엘라의 표정이 일그러졌을 때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는데, 신령이 저러는 것을 보니 즐거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애초에 비교 대상이 못 된다. 그 당시의 제니엘라가 굉장히 짜증 나고 열 받았던 것은 사실이고, 이성민에게 직접적으로 여러 가지 피해를 끼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의 뒤에는 신령이 있었다. 이성민이 겪은 대부분의 일이 신령의 안배로 인한 것이었다.
“어쩔 셈인가?”
마령이 조심스레 물었다. 칼자루는 이성민에게 있었다. 지금 이성민이 쥐고 있는 칼은 투신전의 주인이 직접 쥐여준 칼이다.
사육장을 탈출한 이 세상에 더 이상의 관리자는 필요 없다.
“생각 중이야.”
이성민은 겁에 질린 신령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마령에게는 딱히…… 악감정이 없었다.
비록 그가 꾸민 안배가 이성민의 죽음을 전제로 둔 것이라고 해도, 종언을 막기 위한 마령의 노력은 진짜였고, 자신의 안배가 틀어졌을 때도 마령은 포기하지 않고 종언을 막으려 했다. 다만, 준비가 부족했을 뿐이다.
만약 모든 것이 마령의 안배대로 되었다고 해도. 위지호연이 이성민을 죽이고, 그에게 숨겨두었던 도서관의 열쇠가 위지호연에게 주어져, 그녀가 도서관에 들어오는 것이 성공했다고 해도.
마령이 생각했던 것처럼, 위지호연이 종언의 운명을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서관의 기록은 위지호연을 고정된 운명을 강제로 바꾸고, 필멸의 굴레에서 탈출시킬 정도로 대단하지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해 오며 쌓이고 기록된 지식의 가치는 분명 값진 것이나, 그 이상의 가치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위지호연이 이곳에 머무르며 종언을 계속 붙들고 있다면, 도서관을 엿보고 있던 초월적 존재들이 강림하여 위지호연을 죽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이곳에 온 것이 위지호연이 아닌 이성민이기 때문이었다.
에리아의 투자자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이 세계에서 탄생할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인 이성민이었다.
고오오오오!
백색 공간이 요동쳤다. 마령이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 둘. 이윽고 셀 수 없이 많은 빛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성민은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도서관에 기록되고 남아, 윤회하지 못해 고여 있던 모든 혼이 해방되고 있었다.
서로 빛을 내던 혼령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흐름이 되어 도서관 너머,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아주 먼 곳.
죽은 혼들이 당연히 가야 할, 윤회의 굴레로 향해갔다.
이성민은 우두커니 서서 혼들이 해방되는 것을 보았다. 사라지던 혼 중 몇 개가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혼들은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성민은 다가오는 혼에게서 반가움을 느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혼들을 맞이했다.
“고맙네.”
여러 목소리가 뒤섞였다. 그들에게 많은 시간은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한마디 말을 건네는 것이, 죽은 그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였다.
이성민은 뒤섞인 목소리에서 광천마와 아벨, 검선을 느꼈다. 그는 살짝 머리를 숙여 주었다.
“……미…… 안…….”
엔비루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는 그 말을 끝내지 못하고 혼의 흐름에 뒤섞여 사라졌다.
이성민은 그런 엔비루스에게 자그마한 동정심을 느꼈다. 공간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혼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이성민은 입을 열었다.
“너는 어쨌으면 좋겠지?”
이성민은 마령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마령은 그 시선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윤회를 원한다.”
마령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혼이 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맑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죽여 달라는 건가?”
“그래…… 솔직히 말해서, 관리자의 권한을 잃고 육체를 갖게 된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즐거울 수도 있잖아.”
“그렇기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마령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관리자였을 때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 진짜 몸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그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필멸자로서의 삶을 즐기기에는…… 너무 늦었지.”
마령이 바라는 것은 안식이었다. 에리아는 사육장이 아니라 진짜 세계가 되었다.
여태까지 이 세계에서 죽었던 이들은 도서관의 기록으로 묶여 있었으나, 진짜 세계가 되면서 모든 혼은 윤회의 굴레로 흘러 들어갔다.
“네가 원한다면 기억을 지워줄 수도 있어.”
“아니, 그냥 죽여 줘.”
마령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모든 것을 잊고 싶다. 내가 이 세계의 관리자였다는 것도. 내가 보아 온 무수히 많은 반복도. 그 모든 것을 잊고…… 윤회의 굴레로 들어가,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것이 내 바람이다.”
마령은 뜻을 바꾸지 않았다. 애초에 마령이 종언을 끝내고자 했던 이유가 결코 탈출할 수 없는 관리자로서의 삶을 끝내고 싶어서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짜 신격. 므쉬와 데니르가 이성민을 돕고 백소고를 화신으로 삼으며 종언에 대항하고자 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모두가, 반복되는 사육장에서의 삶에 지쳐 있던 것이다.
“자살할 생각은 없나?”
“그건 좀 무섭거든.”
마령이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죽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이 몸뚱이로 자살을 결심하는 것 자체가 두렵네. 내가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 너무 두려워. 물론,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두려워할 새도 없이 빠르게 자살하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 하지만 그것보다는, 네게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지.”
이것도 어떻게 보면 자살이겠지만. 마령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마령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남기고 싶은 말은?”
“위지호연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마령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네게도.”
“됐어.”
이성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덕분에 이렇게 된 것이니까.”
그 대답에 마령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에 이성민의 손이 움직였다.
마령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의 몸이 기우뚱 쓰러졌고, 이성민은 쓰러진 마령의 몸을 받아 주었다.
마령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고 죽었다. 마령은 최후에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었고, 만족을 느끼며 죽었다.
죽는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으니 고통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성민은 마령의 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혼은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하늘을 가로질러 향하는 거대한 흐름 속으로 사라졌다.
“……갔군.”
갇혀 있던 혼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이 만든 은하수는 사라지지 않고 하늘에 쭉 이어져 계속해서 흘렀다. 이성민은 경외감을 느끼며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아프지?”
아까부터 아래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너무 아파서 울고,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해 보려 하지만 그러기에는 또 너무 아파서 주저하고, 그래도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아서 다시 시도하고.
“혀 깨무는 거로는 못 죽어.”
이성민은 쯧쯧거리며 신령을 내려 보았다. 영매의 몸을 한 신령은 피가 줄줄 흐르는 입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냥 아프기만 할 뿐이야.”
이성민은 신령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신령이 입에서 피거품을 물고서 뭐라 소리를 냈다.
입안에 피가 가득 차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성민은 신령의 얼굴을 잡고 턱을 벌렸다.
피가 꾸역꾸역 나오는 혀에 이빨 자국이 선명했지만, 반도 잘리지 않아 있었다. 이성민은 마법으로 신령의 입안을 씻어내고 치료 마법을 걸어 주었다. 절단되지 않은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주, 죽여…… 죽여 줘…….”
신령이 애원했다. 이성민은 무뚝뚝한 눈으로 신령을 바라보았다. 혀를 깨물고 자살.
고전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의 자살이지만, 신령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유일한 해방이었다. 지금 죽으면 마령처럼 윤회의 고리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는데…….
혀를 깨문 것이 너무 아팠다. 어떻게든 용기를 내어 더 강하게 씹으려 해 보아도, 이 몸은 처음 느껴보는 고통을 너무 쉽고 빠르게 학습했다. 도저히 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죽일 생각은 없다.”
이성민은 손에 묻은 신령의 피를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그것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어, 어쩔 수 없었어!”
신령이 비명처럼 외쳤다. 애원하듯 말했지만 바라는 대로 쉽게 죽지 못할 것쯤은 신령도 알고 있었다.
“나, 나는 결국 관리자에 지나지 않았다.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나, 나는 애초에 그런 존재로 만들어졌단 말이다……!”
이성민은 신령이 외치는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신령이 계속해서 외쳤다.
“마령이…… 마령이 이상했던 것이다. 관리자인 우리에게 그런 행동은 존재해서는 안 되었어. 아, 아니. 어쩌면 마령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투자자들의 설계였을 지도 몰라. 결국, 결국에는 마령이 그렇게 행동한 덕에 성과를 거두었으니까……!”
그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마령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가 신령의 뜻에 반하였기 때문에 이번 사육장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마령이 종언을 끝내는 것에 실패했다고 해도, 마령의 행동으로 인한 성과는 그대로 남는다.
하지만 인제 와서 그 진실을 알 수는 없었다. 마령은 이미 죽었고, 그의 혼은 저 거대한 흐름에 속해 윤회의 굴레로 향했다.
“그, 그래. 결국, 우리 모두가 놀아났을 뿐이다. 나는 내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그리고, 그리고…… 너…… 너는 나에게 감사해야 해. 나는 여태까지 몇 번이고 너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았어……!”
“성과를 거두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내…… 내 덕분에…….”
신령의 얼굴에 절망감이 번졌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건 이성민을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성민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신령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니엘라가 너를 죽였어야 했어…….”
신령이 중얼거렸다.
“너…… 너를 더 빨리 죽였어야 했어…… 너를 남겨서…… 그래서……! 허, 허주나 사마련주, 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위지호연도, 백소고도, 스칼렛도, 다, 다른 모두도. 다 죽여서…… 병신 꼴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였어야…….”
“나를 화나게 하고 싶나?”
신령이 내뱉는 말을 다 듣고서, 이성민은 그렇게 물었다.
“왜. 네가 하는 말을 들으면, 내가 참지 못하고 욱해서 너를 죽일 것 같아?”
신령의 말문이 막혔다. 이성민은 큭큭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욱해서 손이 나간다고 해도, 널 죽일 만큼 힘 조절이 서투르지도 않고.”
“으…….”
신령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런 기분이군. 이성민은 품 안에 있는 제니엘라의 영혼석을 떠올렸다.
굳이 희망을 주고, 그 희망의 불씨가 눈앞에서 꺼져가는 것을 보는 것. 희로애락을 느끼는 감각이 망가질 정도로 미쳐버린다면, 이런 행위에라도 중독될 수밖에 없다.
이성민은 피식 웃었다. 조금 넘어가는 척이라도 해주었을까. 슬며시 드는 그런 후회감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아 역겨웠다.
신령이 크게 입을 벌렸다.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고, 신령은 있는 힘을 다해 혀를 깨물려 했다.
콰직!
신령의 이가 혀를 씹기 전이었다. 이성민의 발이 신령의 윗니와 아랫니를 부수고 입에 틀어박혔다.
“아으으극!”
신령이 입에 박힌 발을 붙잡으며 버둥거렸다. 이성민은 천천히 힘을 주어 신령의 턱을 부수고 발을 뽑아냈다. 신령이 얼굴을 손으로 붙잡고 흐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이건 너무하잖아.”
이성민은 투덜거리며 신령을 보았다. 신령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관리자였던 그녀는 단 한 번도 진짜 육체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월후나 영매의 몸을 빌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릇이고 잘 움직이는 인형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신령은 고통을 모른다.
“고문도 못 하겠군.”
이성민은 투덜거리며 신령의 머리채를 잡았다. 신령이 덜덜 떠는 눈으로 이성민을 보았다.
몸뚱이를 고문한다면 신령의 나약한 정신이 붕괴해 버릴 것이다. 그건 이성민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작은 아쉬움을 느끼며 신령의 눈을 들여 보았다.
“제니엘라는 잘 알지?”
“으…….”
“그녀의 말동무나 해줘.”
신령의 혼이 빠져나왔다. 이성민은 그녀의 혼이 다른 혼들의 흐름에 섞이기 전에 확실히 붙잡았다. 그리고 품에 있는 제니엘라의 영혼석을 꺼냈다.
“다 들었지?”
영혼석 안에서 제니엘라의 혼이 요동쳤다.
“네가 바라는 종언은 결국 오지 않았어. 네가 먼 옛날부터 바라던 모든 것들은, 네 스스로 바라던 것이 아니라 신령의 바람이었지.”
제니엘라의 혼이 절망에 찬 고함을 질렀다.
“앞으로 사이좋게 잘 지내봐.”
신령의 영혼이 제니엘라의 영혼석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곳이 너희들의 지옥이다.”
영혼석 안에서 두 개의 혼이 요동쳤다. 제니엘라의 혼이 신령의 혼에게 저주의 말을 쏟아냈고, 신령의 혼은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이성민은 영혼석을 품에 넣고서 하늘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고 길었던 혼들의 은하수에 끝이 보이고 있었다.
이성민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 거대한 흐름의 끝이 윤회의 굴레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한 번 죽음을 겪었다고 해도, 이성민은 ‘진짜’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죽은 혼이 향한 윤회의 굴레가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이 어떤 곳이건 간에, 도서관의 기록으로 남아 안식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또, 이성민은 잘 알고 있었다. 투신전으로 가게 될 자신이 윤회의 굴레로 향할 일은 없을 것임을.
“……환생이라…….”
이성민에게는 인연이 없는 말이었다. 이성민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태어나서, 에리아에 소환되서 살다가 죽고, 다음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각해 보면, ‘시작’이라는 것은 참으로 불공평하고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는 태어나면서부터 손에 금수저를 쥐고 있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 돈 많은 놈 불알의 정자로 만들어졌고, 운이 좋아서 돈 많은 여자의 뱃속에 잉태되어 태어난다.
노력? 그런 놈들에게 있어서 노력이란, 다른 정자들보다 빠르게 꼬리를 흔들어 앞으로 달려나간 것뿐이다.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면서부터 재능을 쥐고 태어난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 흙수저를 금수저로 만들어 준다.
그러한 시작의 부조리함은 이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영된다. 어떤 놈은 무공을 익혀 오고, 어떤 놈을 마법을 익혀 온다. 스타트 라인이 다르단 말이다.
‘나는…….’
쥐뿔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무공도, 마법도 익히고 오지 않았다. 재능은 평범보다 못했다.
우습게도 쥐뿔도 없던 처지였기에 안배로서 선택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까지 왔다. 쥐뿔도 없었지만, 운명의 가호를 받았다.
재능이 없었기에 타인에게 받았다. 이성민을 이곳까지 오기까지 많은 것들이 그를 지탱해 주었다.
“그래도.”
이성민은 윤회의 굴레로 사라지는 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기왕이면 금수저 물고, 재능도 가지고. 그렇게 태어나기를.”
그것이 윤회할 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이제는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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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화 에필로그
이성민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 도서관은 다시 탐이 되었다. 탐은 더 이상 세상 모든 것을 먹어치우려 들지 않았다.
이성민은 탐이 허공에 흩어지며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탐의 파편을 잡으려 시도해 보았지만, 이성민의 능력으로도 소멸하는 탐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뭐. 손에 넣어봤자 쓸 일도 없겠지만.’
과욕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이성민은 탐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 몸을 돌렸다.
결계가 사라진 잠자는 숲은 평범한 숲이 되었다. 들어오는 자를 현혹시키고 미치게 하는 귀명도 이제는 없다.
귀명을 낼 혼들이 모조리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결계도 없고, 탐도 없다. 숲을 지키는 일족의 맥도 끊겼다.
‘얌전히 있어 줄까?’
이성민은 위지호연을 떠올렸다. 저 공간에 위지호연과 함께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때로써는 위지호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공간이동으로 위지호연을 휴잴 산맥의 정상에 있는 마령정으로 보내 버렸다.
요정의 숲으로 보낼 생각도 했었지만, 위지호연과 숲으로 돌아간 일행들이 상황을 전해 듣고 요정마로 돌아올 가능성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종언을 끝낸 것은 후련했지만 자잘한 걱정이 들었다.
위지호연이 화를 내면 어떡하지, 같은 소인배스러운 걱정이었다.
이성민은 그런 별것 아닌 일에 걱정하는 자신이 우스워 피식 웃었다. 위지호연이 얌전히 있어 주기를 바라며 공간이동을 펼쳤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촤악!
이성민을 반긴 것은 차가운 물세례였다. 대뜸 면전에 물 따귀를 얻어맞았지만, 이성민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너무 쉬웠다. 그럼에도 하지 않은 것은, 괜한 행동을 해서 안 맞아도 될 매를 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응이 재미없어.”
위지호연이 투덜거렸다. 그녀는 맑은 호수에 반쯤 잠겨 있었다.
몸에 달라붙은 피와 살점, 역한 냄새 등을 씻어내기 위해 목욕을 한 모양이었다.
이성민은 물기에 젖은 위지호연의 피부와 머리카락을 보며 낮게 헛기침을 했다.
보통, 목욕을 할 때에 옷을 입지 않는다.
위지호연은 그런 의미에서는 보통 사람과 똑같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신이었다.
이성민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위지호연이 풋 하고 웃었다. 그녀는 물에 잠겨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물에 젖은 장발을 위로 한 번 들었다가 털었다.
“그런 반응은 재미있구나.”
“옷이나 입지 그래?”
이성민은 곁눈질로 위지호연을 보며 말했다. 10년 전과 비교해서 거의 변하지 않았…… 아니, 가슴이 조금 커졌나?
그 짧은 순간에 이성민의 눈은 위지호연의 몸에 일어난 자그마한 변화를 눈치챘다. 그러한 관찰력은 이성민 정도의 고수에게는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눈치챘나?”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으스대듯 웃던 위지호연이 허리를 약간 뒤로 젖히며 날개 뼈를 가운데로 모았다.
가슴을 쭉 내밀어 손으로 허리를 짚은 위지호연이 턱 끝을 살짝 들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세였다.
“풍유환은 먹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조금 커진 자신의 가슴을 과시하며 이성민에게 선언했다.
“어느 순간, 조금씩 커지더구나. 어쩌면 앞으로 더 커질지도 모른다.”
“그, 그래…….”
어지간한 눈썰미가 아니고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미세한 변화이기는 했지만, 위지호연은 자신의 가슴이 그 정도나마 조금 커진 것에 굉장히 만족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는 안 벗을 생각이냐?”
위지호연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질문에 이성민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멍청히 눈만 끔벅거렸다.
“……왜 벗어야 하지?”
“내가 벗고 있으니까.”
“그게 무슨…….”
“아니면 그럴 마음이 안 드나?”
위지호연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취하고 있던 오만하기 짝이 없던 자세를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시큰둥한 얼굴로 몸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었다. 이성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위지호연을 보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닌데.”
“됐다.”
위지호연의 몸이 위로 떠올랐다. 수면 위에 선 그녀는 남은 물기를 모조리 증발시켰다.
그리고는 아공간 포켓에서 새 옷을 꺼내어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런 위지호연의 모습을 보며 이성민은 뒤늦은 후회를 느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것이냐.”
“그…… 옷 안 벗어서.”
“괜찮다. 당장 그럴 기분이 안 드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목욕이 다 끝나는 중에 네가 와버려서 벗고 있던 것이 전부다.”
위지호연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며 옷 안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꺼내어 한 번 털었다. 그리고는 무심한 눈으로 이성민을 보았다.
“끝난 거냐?”
“응.”
“전부?”
“그래.”
이성민의 대답에 위지호연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 보았다. 잠깐 동안 침묵하고 있던 위지호연의 입술이 열렸다.
“이곳에 있던 마령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마령은…… 죽음을 원했어. 죽어서, 윤회의 굴레로 들어가…… 모든 것을 잊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마령의 바람이었지. 그래서 그 바람을 들어주었다.”
“윤회…… 그렇군.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구나. 너는 종언을 막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에 성공한 것이었어.”
위지호연의 대답에 이성민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위지호연이 천천히 머리를 내려 이성민을 보았다.
“마령의 존재가 사라진 것뿐만이 아니야. 나에게 주어졌던 가호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
“이 세상은 사육장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위지호연에게 주어진 가호는 마령이 부여한 것이고, 이 세상이 사육장이었기에 가능했던 가호다.
에리아가 사육장이었을 때에는 부조리한 재능을 강제로 부여하고, 존재의 격을 고정해 두는 것이 관리자의 권능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고 관리자가 사라지면서, 그러한 것들이 사라졌다.
지금의 위지호연은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부조리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존재의 격이 인간으로 고정되어 있지도 않았다. 물론, 그 부조리한 재능이 사라졌다고 해서 위지호연이 둔재나 범재가 된 것은 아니다.
마령의 가호를 갖고 있기 전에도, 위지호연은 천재였다. 그것은 그녀가 안배로 선택되지 않았던 이전 전생들에서 위지호연이 보낸 삶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래.”
위지호연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져나갔다.
“내가 억지로 갖고 있던 운명과, 책임감과,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것이구나.”
이성민도 위지호연과 함께 웃었다.
“처음 에리아에 소환되었을 때. 나는…… 내가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마교의 소교주라는 신분에서도, 교주라는 아버지의 그늘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나’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위지호연은 수면 위를 걸으며 천천히 이성민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니었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운명이 나를 움직이게 하였고, 운명은 내가 바라지도 않던 사명과 책임을 강요했지. 결국,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자유롭지 않았다.”
위지호연의 걸음이 이성민 앞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크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이성민의 어깨를 잡았다.
“이번에도, 네가 나의 처음을 가져가는 구나.”
이성민은 바로 앞에 있는 위지호연의 눈을 마주보았다. 웃음으로 휘어진 그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한 빛을 담고 있었다.
“네가 나를 처음으로……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어.”
이성민은 말없이 위지호연을 끌어안아 주었다. 위지호연은 저항 없이 이성민의 품에 안겼다.
고마워.
위지호연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성민은 위지호연을 내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잠시 동안 이성민의 품에 안겨 있던 위지호연이 입을 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다른 여자는 없었나?”
“……응?”
그 말에 등골이 싸늘해졌다.
“대답하는 꼴을 보니 있기는 한 모양이군. 어디까지 갔지?”
“가기는 어딜 가?”
“그럼, 만나기만 했나?”
위지호연이 머리를 들었다. 감정을 읽지 못할 정도로 깊은 눈이 이성민을 보았다.
“내가 했던 말은 기억하나?”
“……언제 했던 말?”
“요정의 숲에서 너와 함께 나와, 헤어지기 전에 한 말.”
“첫 번째면 괜찮다는…….”
“그래. 지금도 똑같아. 네가 나의 처음이니, 네 처음은 무조건 나여야만 해. 그거면 된다. 네가 다른 여자를 만나도 상관없고, 첩을 들여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정실은 나다. 무조건, 정실은 나야. 네가 다른 여자를 사랑해도 되지만, 무조건 나를 제일 사랑해야 해. 알겠나?”
“……당연히 그럴 거야.”
“물론 나는 네 마음을 읽을 수는 없다. 그러니, 너는 나에게 항상 표현하고 알게 해줘야 해. 네가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나를 첫 번째로 여긴다는 것을. 만약…… 내가 그것을 의심하게 된다면.”
위지호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네가 나보다 강하니 해봤자 의미가 없군.”
“그런 일은 절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건 지켜봐야 아는 법이지.”
위지호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의 품을 빠져나왔다.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이성민은 뭐라고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가 대었다.
이윽고 이성민의 기억 중 일부가 빠져나와 위지호연에게 날아갔다.
“이건 뭐냐.”
“내 기억이야.”
“그걸 왜 보여주지?”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네가 보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는 말주변이 그리 좋지 않거든.”
“치사하고 비겁하군.”
이성민의 대답에 위지호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입장에서의 기억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는 싫어도 네 상황에 이입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잖나.”
“……그럴 생각으로 주려한 것은 아니야. 불쾌하다면 그만둘…….”
“아니.”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말을 끊고서, 그의 기억을 양 손으로 받았다.
“보고 싶고.”
위지호연의 얼굴에 얇은 미소가 번졌다.
“느끼고 싶어.”
그녀는 만져지는 느낌이 없는 빛을 손으로 소중히 감싸 쥐었다.
“내가 모르는 너를 알게 되는 것이니까.”
위지호연은 주저 없이 이성민의 기억을 받아들였다. 그것에는 위지호연과 헤어지고, 이성민이 겪은 모든 일이 담겨 있었다.
위지호연은 가만히 서서 이성민의 기억을 느꼈다.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성민의 기억을 모두 보고서, 위지호연은 풋 하고 웃었다.
“가자.”
위지호연이 이성민의 손을 잡았다.
“나도 만나고 싶어졌어.”
위지호연이 웃으며 말했다.
* * *
“이 새끼. 뭔 짓을 하느라 여태 안 오는 거야?”
손톱을 잘근잘근 씹던 스칼렛이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요정의 숲, 오슬라의 호수 주변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잠자는 숲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지 못했지만,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종언의 운명이 바뀌었다.
멈추는 것도, 유예를 얻는 것도 아니라. 아예 운명이 바뀌어 버렸다.
이곳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유는 오슬라 때문이었다. 본래 그녀는 요정의 숲을 나갈 수 없었다.
정령의 여왕이 직접 강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요정의 숲에 존재가 얽매여 있는 것이 이 세계에서 오슬라가 가진 주박이었다.
그 주박이 사라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숲에서 기다리던 중, 오슬라는 요정계에서의 지령을 들었다.
“확실한 거죠?”
초조함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던 백소고가 결국 그렇게 묻고 말았다. 숲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을 힐긋거리던 오슬라가 화들짝 놀라 머리를 끄덕거렸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당장이라도 숲 밖을 나가보고 싶었다. 평생을 이 숲을 나가지 못하고 살았다.
바깥이 어떤 곳인지는 충분히 알았지만, 숲 밖의 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응. 이 세상에 더 이상 종언은 존재하지 않아.”
“그런데 왜 안 오는 거야?”
참다 못한 스칼렛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 할 일 다하고 죽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건 나도 몰라.”
오슬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스칼렛은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흑룡협이 물었다.
“정 궁금하면, 직접 가보면 되지 않나?”
“우리 도움이 필요 없다고 혼자 가버린 놈인데. 뭐가 예쁘다고 가서 환영해 줘요?”
결국 자존심 문제였다. 백소고는 그런 스칼렛을 조용히 흘겨 보았다. 사실 그녀는 지금이라도 잠자는 숲에 가서 이성민을 만나보고 싶었다.
만나서,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손을 잡아주거나 끌어 안아주며 사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뭘 봐. 안 갈 거야. 가고 싶으면 너 혼자 뛰어서 가.”
스칼렛은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했다. 요정마는 스칼렛에게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칼렛이 요정마를 태워주지 않는다면 그 먼 잠자는 숲까지 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오지 못할 상황이라 오지 못하는 걸 수도 있잖나.”
로이드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 곁에서 루비아도 열심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어쩌면 반쯤 죽어가면서 저희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머리가 날아가도 살아나는 놈인데 무슨.”
“어쩌면 저주를 받았을지도……”
테레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말을 듣고 있으니 스칼렛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스칼렛은 헛기침을 하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러면 일단 가서 확인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호수 상공에 거대한 마력이 모였다. 로이드와 스칼렛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슬라도 머리를 돌려 호수 상공에서 벌어지는 마법을 응시했다. 잠깐 당황하기는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서 공간이동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명뿐이다.
“얼씨구.”
스칼렛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성민은 자신에게 향하는 많은 시선을 느끼며, 위지호연의 손을 잡고 호수 수면 위로 내려왔다.
그는 이쪽을 향하는 매서운 적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뭐야?’
특히 스칼렛의 눈이 매서웠다. 스칼렛만큼은 아니었지만 백소고의 시선도 그리 우호적인 감정이 많지는 않았다.
테레사와 루비아는 서로 시선을 맞대며 고개를 가로 저었고, 흑룡협도 낮게 헛기침을 했다.
로이드는 괜히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듯 불편한 다리로 한 발 물러섰다. 오슬라조차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왜 그러십니까?”
이성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저런 시선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이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가는 종언을 막고, 세상의 운명을 완전히 바꾼 영웅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를지라도 저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노려보는 것일까?
“뭐? 오지 못하는 상황?”
스칼렛이 씨근거리며 내뱉었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중상? 저주? 개뿔이!”
스칼렛이 빽 고함을 질렀다.
“뭐하느라 늦나 했더니……!”
“아니…… 잠깐…….”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이성민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이쪽을 향하는 적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위지호연은 고요한 눈으로 이곳을 보는 모두를 보았다.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위지호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이 백소고에게 향했다.
오래전 같은 던전에 있기는 하였지만, 위지호연은 백소고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 당시의 위지호연에게 있어서 묵섬광 백소고의 이름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저들 중에서 위지호연이 그나마 실제로 면식이 있는 것은 오슬라 정도였다.
“다, 누군지 알겠어.”
위지호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보았다.
묵섬광 백소고, 적색 현자 스칼렛 레시르, 흑룡협 래곤, 교회의 성녀 테레사, 금색 마탑주 로이드, 인공 정령 루비아, 요정의 여왕 오슬라.
이성민의 기억 일부를 받은 덕에, 위지호연은 그들 모두를 알았다. 자신이 없는 동안, 이성민의 곁에서 그와 함께 종언을 막기 위해 맞선 이들. 위지호연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나는 위지호연이다.”
무덤덤한 소개였다. 그 갑작스러운 소개에 누구 하나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위지호연은 그들의 침묵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에, 보란 듯이 손가락을 들어 이성민을 가리켰다.
“이 녀석의 첫 번째다.”
“허…….”
위지호연의 당당한 선언을 듣고서, 로이드가 긴 침묵을 깨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참…… 당돌한 아가씨로군…….”
백소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두 눈만 깜빡거렸다. 스칼렛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머리를 몇 번 끄덕거렸다.
“아, 예.”
잔뜩 비꼬는 투로 중얼거렸다. 테레사와 루비아는 얌전히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소녀처럼 두 눈을 빛내며 상황을 바라보았다. 팝콘이라도 들면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기.”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오슬라가 목소리를 냈다.
“나, 숲 밖에 나가봐도 돼?”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런 대화보다는 숲 밖을 구경하는 것이 더 즐겁고 설레었다.
* * *
잔뜩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서, 위지호연은 호숫가를 떠났다. 예전에 지내던 꽃밭을 다시 보고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같이 가겠냐는 물음에, 이성민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다음에.”
앞으로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당장 그녀와 함께 꽃밭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앞으로 얼마든지 위지호연과 꽃밭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대답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아주 눈치가 없지는 않나 봐.”
위지호연이 사라지고서, 스칼렛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서 이성민을 노려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눈에서 안광이 번뜩거렸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은데. 다 설명해 줄 수 있어?”
“물론이죠.”
이성민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말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 빠르다는 생각에 이성민은 자신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것을 본 스칼렛이 눈썹을 찡그렸다.
“다 안 보여줘도 돼.”
“예?”
“네가 저 잘난 첫 번째님이랑 물고 빨고 한 것은 안 보여줘도 된다고.”
“물고 빨고 한 적 없습니다.”
“하긴.”
이성민의 항변에 스칼렛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했다. 곁에 선 백소고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스칼렛을 흘겨 보았다.
“왜 괜한 말을 하고 그래요?”
“뭐가 괜한 말이야, 너도 궁금했으면서.”
“안 궁금했어요.”
“거짓말 안 하기로 한 것 아니었어?”
스칼렛이 놀리듯 말하자 백소고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스칼렛은 낄낄 웃었다.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짓궂은 말은 하지 마요.”
“알았어, 알았어. 내가 괜히 놀려대지 않아도 충분히 예민하다는 거지?”
그 말에 백소고가 입술을 꾹 다물고서 스칼렛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스칼렛은 슬쩍 턱을 당기며 이성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물고 빨고 한 것 치고는 빨리 오기는 했지. 설마 조루는 아닐 테고.”
“아닙니다.”
“그으래애?”
이성민이 눈썹을 찡그리며 답하자, 스칼렛이 말을 길게 늘리며 놀려댔다.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루비아와 테레사가 수군거렸고, 흑룡협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만약 그렇다면 큰 문제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흑룡협의 중얼거림을 들은 이성민이 빠르게 내뱉었다. 멀찍이 선 로이드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그는 가정도 없고 연인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로이드야말로 진정한 대마법사였다.
로이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리며 긴 한숨을 흘렸다.
“덧없는 일이로다…….”
궁상맞은 중얼거림이었다. 이성민은 한 순간 욱했던 마음을 가다듬고서 기억을 뽑아냈다.
괜한 소리를 들은 탓인지, 이성민은 위지호연과의 일은 뽑아내지 않았다. 저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것에는 도서관의 기억만으로 충분했다. 이성민이 마법을 쓰는 것을 보며 스칼렛이 킬킬 웃었다.
“마법은 참 편하지?”
“예.”
“앞으로 넌 나를 많이 도와줘야 할 거야. 나는 말이지, 네가 쓰는 마법에 굉장히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거든. 용언 마법이라고는 로이드 님에게 들었는데…… 후후. 드래곤도 아닌 네가 용언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것을 알면, 모든 마탑이 너를 모르모트로 삼으려 들걸.”
“협조해 줄 생각 없습니다.”
“나한테도?”
“하는 것 봐서요.”
이성민은 그렇게 말해 주고서 뽑아낸 기억을 모두에게 전해 주었다. 숲 밖으로 나갈 생각에 들떠 있던 오슬라도 얌전히 이성민의 기억을 읽었다.
“……맙소사.”
그리고 가장 먼저 그녀가 경악하여 중얼거렸다. 그녀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성민을 돌아보았다.
놀란 것은 오슬라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이런 방법으로 세상의 운명이 바뀌었음에 놀랐다.
“……요정계가 협력할 수밖에 없지. 결국 우리는 손해를 보지 않으니까.”
오슬라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투신전이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로이드가 오슬라를 향해 물었다. 이성민의 기억을 통해 보기는 했지만, 오슬라와 이성민을 제외한 나머지는 투신전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슬라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대단하고…… 위험하지. 봐. 사절로 보냈던 공포의 마왕이 너무 쉽게 소멸당했잖아. 그런데도 대마계의 마신은 그 순간에 아무 대응도 할 수가 없었어. 대마계로서도 당장 투신전과 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는 거야.”
만약 대마계의 마신이 도서관에 강림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까. 이성민은 그것에 어떠한 답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도서관은 마신의 강림을 감당할 공간도 못 되었다. 투신전의 주인이 직접 강림할 수 있었던 것은, 명확한 실체가 없는 투신전이 이성민에 의해 강제적인 공간침식을 벌인 탓이었다.
“대마계로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 뼈아프겠지만, 결과적으로 요정계와 정령계는 손해를 보지 않았어. 우리는 계속 이 세상을 구성하는 것에 힘을 보태고 있고, 이 세상의 기록을 도서관을 통해 열람할 수 있으니까.”
오슬라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잠시 침묵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에게는 잘된 일이다.
만약 예정대로 종언이 이행되었더라면, 오슬라는 오랜 약속을 어긴 대가로 소멸보다 더한 억겁의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련주는 바보야.”
오슬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안부를 전해주라니. 그런 말은 부족해. 예전이나 지금이나…… 련주는 바보야.”
사마련주는 요정의 숲에서의 보내던 시절을 그리움으로 여긴다고 했다.
오슬라는 머리를 돌려 사마련주의 무덤을 보았다. 찔끔 배어 나온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천외천이로군.”
흑룡협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성민의 기억을 통해 본 창왕의 모습을 떠올렸다.
투신전.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천외천이었고, 창왕이 바라마다지 않는 세계였다. 조금씩 전진하는 창왕의 모습을 떠올리며 흑룡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가야겠어.”
X을 뽑아버려라.
그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은 창왕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흑룡협은 괜스레 손을 내려 사타구니를 가렸다.
민망한 표정의 테레사와 눈이 마주치자, 흑룡협은 재빨리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벨 님과 스승님은…… 윤회의 굴레로 들어가셨군.”
로이드는 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잠시 동안 그들과의 기억을 되짚던 로이드는, 이성민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고맙네. 두 분의 혼을…… 해방시켜 주어서.”
“주인님…….”
루비아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떨구었다.
“……광천마 할아버지도…… 좋은 곳에 가셨겠죠.”
“그럴 겁니다.”
광천마와 여행했던 것은 이성민과 루비아 뿐이다. 루비아는 호탕하게 웃던 광천마의 웃음을 떠올렸다.
처음 타본 기차가 신기하고 재밌어서.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을 보며 연신 탄성을 내지르던 그 모습을.
한때의 인연을 위한 복수에 성공하고 결국 죽어버린 그를.
“종교를 만들라니.”
스칼렛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대단한 분께서도 터무니없는 일을 시키셨네. 종교가 뭐, 뚝딱 하고 만들어지는 건 줄 아나?”
“열심히 전도하면 되겠지요.”
이성민은 은근한 눈으로 테레사를 보았다. 그 시선에 테레사가 화들짝 놀랐다.
“저, 저는 모시는 신이 따로 있어요.”
“교회는 다신교 아닙니까? 종교 하나 추가해 주십시오.”
“저에겐 그런 권한이 없다고요…… 개교(開敎)가 쉬운 일도 아니고요.”
“어느 정도 힘은 써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신도도 없고…….”
“신도가 왜 없습니까?”
“그런 식으로 개교해서 교회에 소속된다면, 세상에는 온갖 잡스러운 종교가 넘쳐날걸요.”
테레사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생각처럼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고, 마찬가지로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다.
제각각 고민에 빠진 이들을 보며 이성민은 슬며시 뒤로 물러섰다. 각자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느라 이성민에게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이성민의 의도한 일이었다. 덕분에 그는 위지호연이 던지고 간 파격적인 발언으로 인한 어색한 분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사제.”
몸을 빼려던 이성민을 향해 백소고가 말을 걸었다.
“예…… 예? 사저. 무슨 일이십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백소고가 크게 숨을 삼켰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머뭇거리고 싶었다. 하지만 백소고는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만나게 되면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그것은 이성민에게 한 약속이었고, 백소고가 자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기도 했다.
“나는 사제가 좋아.”
이성민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워어…….”
설마 이 상황에서 말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스칼렛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냈다.
“……사저.”
“사형제로서 좋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백소고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텅 빈 한쪽 팔의 소매를 꽉 잡으며 말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어. 어쩌면, 므쉬의 산에서 어린 사제를 만났을 때. 죽어가는 사제를 보고 품었던 동정심이 시작이었을 지도 몰라.”
그것에 대해서는 백소고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감정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변하는 법이다.
“산에서 둘이 함께 보냈던 시간. 사형제로서의 정…… 응, 처음에는 분명 그랬을 거야. 그리고…… 내가 먼저 산에서 내려가고. 검귀 어르신이 죽었던 날, 사제를 다시 만났지. 사제는…… 산에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 검귀 어르신의 시체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서…… 나는 그때의 사제가 너무 안쓰러웠어.”
그때의 일은 이성민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자신도 모르게 펼친 수법으로 검귀를 죽이고, 이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며 울부짖으며 죽어가던 검귀를 앞에 두면서.
이성민은 자신의 나약함에 절망했었다.
그때 백소고와 재회했다.
“그리고 던전에서도. 사제는…… 나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사제는 내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었어.”
“……사저.”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이성을 잃고 날뛰는 사제를…… 게르무드에서 제압했을 때. 그리고 뱀파이어 퀸의 저택에서 사제가 나를 구했을 때. 절망감에 주저앉은 나를 사제가 일으켜 세워주었을 때.”
웃고 있는 백소고의 두 눈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솔직히…… 계기가 너무 많아. 대체 언제부터 사제에게 이런 감정을 품었는지 모르겠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제를 사제로서 대하는 것이 힘들어졌고…… 사제에게 사형제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기 시작했어.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해서 감정을 외면했고, 거짓말을 했지.”
“사저.”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백소고가 호흡을 끊으며 내뱉었다.
“위지호연. 그녀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제를 알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그녀가 모르는 사제를 알아. 사제와 그녀 사이에 내가 모르고, 끼어들 수 없는 유대가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나에게도 그런 것은 있을 거야.”
이성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백소고는 그 어느 순간보다 진실된 모습이었다. 악을 멸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 터무니없는 이상을 신념으로서 떠들 때보다.
지금, 저렇게 말하고 있는 백소고야말로 진짜 그녀의 모습이었다. 백소고의 신념을 위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신념이 만들어진 것은 백소고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갖게 된 가치관 때문일 것이다.
백소고는 좋은 사람이다. 너무, 좋은 사람. 불의를 보면 앞으로 나서고, 의와 도리를 중히 여긴다.
지금의 백소고는 그녀가 평생토록 가지려 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으려 한 감정에 충실했다.
“……사제가 나를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아.”
백소고는 가슴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 눌러 삼키며 웃었다.
“그래도.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어. 거짓말은…… 옳지 않으니까.”
“……고맙습니다, 사저.”
이성민은 천천히 웃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사저에게 거짓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이상한 기분이야…….”
백소고는 하나뿐인 팔로 자신의 가슴을 꾹 눌렀다.
“후련하면서도…… 답답해. 아파…….”
“사저가 말한 것처럼.”
이성민은 천천히 백소고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위지호연과 어떤 유대를 가진 것처럼, 사저 역시 저와 유대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이곳의 모두가 그래요.”
“……응.”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과분하다고 생각해요. 사저는……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이성민은 백소고의 앞에 섰다. 백소고가 억지로 지은 미소를 떨면서 이성민을 보았다.
이성민은 양팔을 벌려 백소고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아파하지 마세요, 사저.”
“……그러고 싶어.”
“왜 아파하는 겁니까. 사저가 싫다고 한 적도 없는데.”
그 말에 백소고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테레사와 루비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흑룡협은 떨떠름한 눈으로 이성민을 보며 내심 생각했다.
‘결국 양다리 아닌가?’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예전에, 김종현의 첫 번째 토벌전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저놈은 인성이 참 못돼 먹은 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도 결혼하고 싶군.’
로이드는 침울한 눈으로 이성민을 보았다.
‘아니. 연애라도…….’
위지호연도 어디 내놓아도 극찬을 받을 미인이고, 백소고도 위지호연과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다.
왜 운명은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 둘을 한 남자에게 주어졌단 말인가. 이것조차 안배된 운명인가?
왜 나에게는 저런 안배가 없는 것일까. 로이드는 괜스레 자신의 머리를 더듬었다.
‘그래도…… 머리털은 아직 풍성해.’
주름이야 마법으로 지울 수 있다. 진짜 청춘은 아득하게 지나갔지만, 아직 황혼의 때는 오지 않았다.
마음이 청춘이라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로이드는 내일부터라도 마탑의 인맥을 활용해 여자 마법사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곁에 있는 스칼렛은 후보조차 되지 않았다.
“사제…… 그, 그렇다는 건…….”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이성민은 백소고의 등을 쓸어내려 주며 말했다.
“더 이상 종언은 없어요. 우리에게…… 시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사저의 전부를 알지 못합니다. 사저가 제 전부를 모르는 것처럼. 사저는 예전에, 사저와 만나지 않았던 때의 저를 알지 못하겠죠. 위지호연도 그럴 겁니다.”
이성민은 백소고의 눈을 내려 보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함께 알아 가도록 하죠. 서두르지 말고…… 서로, 조금씩.”
“……응.”
백소고가 환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스칼렛은 지긋지긋하단 표정을 지으며 이성민과 백소고를 노려보았다.
“그냥 마법이랑 결혼하련다.”
언젠가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저 꼴을 보고 있자니, 독신 선언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 * *
기억 속의 장소는, 예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니엘라와 인외들이 숲을 습격하면서, 과거 이성민과 위지호연이 1년을 살았던 꽃밭은 폐허가 되었다.
후에 오슬라의 능력으로 다시 재건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예전과 똑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위지호연이 실망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1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만한 시간이 흘러 돌아온 장소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았더라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나는 거의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위지호연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꽃밭으로 들어갔다. 이름도 모르는, 여러 들꽃의 향기가 뒤섞여 자욱했다.
꽃의 이름이라도 외워볼까. 위지호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좋아하는 꽃의 이름 정도는 알아두고 싶었다.
“앞으로 많이 변할 거야.”
위지호연은 꽃밭 위를 노니는 나비를 보았다. 그녀는 10년 전을 떠올리며 꽃밭의 중심에 앉았다.
그 시절에, 그녀는 언제나 이곳에 있었다. 이성민이 사마련주에게 수행을 받을 때, 위지호연은 이곳에 앉아 명상했다.
후각이 꽃의 향기에 익숙해질 즈음에 위지호연의 의식은 깊고 깊은 곳으로 내려가, 아득하게 펼쳐진 의식의 세계에서 무(武)의 극한을 추구했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 즈음에.
“네가 돌아왔어.”
위지호연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
꽃밭의 너머에 이성민이 서 있었다. 발간 노을을 등진 그를 보며 위지호연은 10년 전을 떠올렸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변한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같은 것 같아.”
위지호연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이성민은 꽃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위지호연은 움직이지 않고 서서 이성민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이야기는 잘 끝냈어?”
“응.”
“몇 번이고 말했지만, 나는 첫 번째를 양보할 생각은 없어.”
“양보해 달라고 하지도 않아.”
이성민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위지호연이 쿡쿡 웃는 소리를 냈다.
“나는 말이야.”
위지호연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이성민의 손을 잡았다. 위지호연의 뺨이 노을빛과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너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꾸욱. 위지호연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야. 네가…… 죽지 않고, 내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덕분에 우리는, 앞으로 살아갈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미련을 남기지 말고, 즐길 것을 모두 즐기며, 행복하게. 허주의 말을 떠올리며 이성민은 환히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여태까지.
계속, 무언가를 위해 살아왔다. 위지호연이라는 목적을 두었을 때도, 종언의 존재를 알았을 때도.
이성민이 속한 운명은 그에게 평온과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싸워야 했고, 목숨을 위협받고,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그 운명의 마지막은 결국 이성민의 죽음을 강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운명은 사라졌다. 이 세상은 이제 그 어떤 운명에도 속해있지 않다.
이성민도, 위지호연도, 세상도.
모두가 구원받았다.
“안아 줘.”
위지호연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요구하는 모습을 보며 이성민의 가슴이 살짝 떨렸다.
그는 양팔을 펼쳐 위지호연을 안아주었다. 위지호연은 얌전히 이성민의 품 안에 안겨 눈을 감고 웃었다.
오래전, 제나비스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갑작스런 소환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나비스의 중앙 광장 분수대 앞에 서 있었다.
지금 이것이 꿈이 아닌지, 어떠한 술법에 현혹된 것이 아닌지 적잖게 당황하고 있던 중에 묘한 시선을 느꼈다. ‘나’를 확실히 인지하고 쳐다보던 시선이었다.
이봐.
왜 나를 보고 있었느냐?
경계를 담아 그렇게 물었다. 상대는 또래의 어린아이였고,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너. 이름이 뭐냐.
이성민.
나이는?
열넷.
나는 위지호연이다. 나이는 열셋이고.
그렇게 서로의 이름과 나이를 알았다. 위지호연은 그때의 만남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일어났을 운명이라고 해도. 이성민이 의도적으로 우연한 만남을 가장한 것이라고 해도.
위지호연은…… 그 만남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때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위지호연은 이성민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소곤거렸다.
“나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이성민에게 있어서 이 삶의 시작은 위지호연이었다.
그녀와 만났기 때문에, 지금의 이성민이 있었다. 위지호연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으려 하다가…… 잘 되었을까? 아마 잘되지 않았을 것이다.
명확한 목적도 없었다. 가진 재능도 부족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역량이 못 되었다.
하지만 위지호연을 만났기 때문에.
“너와 만난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어.”
지금의 이성민이 위지호연을 만나 이렇게 변했고,
지금의 위지호연이 이성민민을 만나 이렇게 변했다.
서로가 그 사실을 느끼며 눈을 맞대었다.
‘아.’
이성민은 가슴에 차오르는 행복감을 느끼며 위지호연의 몸을 강하게 안았다.
평생 행복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여태까지 살았던 삶 중에도 드문드문 행복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1.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에 성공했다고 자랑하러 온 거냐?”
“설마요. 그냥, 알려나 드리러 온 겁니다.”
프라우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르무리의 유곽가, 청루의 최상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반 나신으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뚱한 눈으로 담뱃대를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깊게 들이마신 연기를 내뿜으며, 프라우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진짜 해낼 줄은 몰랐어.”
“저도 몰랐습니다.”
“한 사람의 운명이 아니라, 세상 전체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는 법이구나.”
프라우는 흩어지는 연기를 보며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프라우가 큭큭 웃었다.
“설마. 그때 널 돕지 않았다는 것을 두고 쪼잔한 짓을 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알려드리러 온 것이라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프라우 님의 말이 옳았습니다. 그때, 저와 얽혔던 사람들은 결국 모두…… 어느 정도 불행해졌거든요.”
이성민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제니엘라와의 싸움으로 모두가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고, 창왕이 죽었다.
“프라우 님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결국, 선택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세상을 구한 영웅 나으리. 그 외에 이 겁쟁이 주술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
“개인적인 부탁이나 드릴까 합니다.”
말이 부탁이지. 프라우는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 웃으며 말하는 이성민의 눈은 거절을 용납하고 있지 않았다.
프라우는 지금 자신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진짜 인간인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르무리에서 지내며 많은 요괴를 보았지만, 이성민이 풍기는 기질은…… 그 어떤 요괴보다 흉포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프라우는 이성민을 보며 온갖 것이 뒤섞인 혼돈이 인두겁을 뒤집어쓴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뭔데?”
“프라우 님은 대 주술사죠.”
“그렇지.”
“남쪽의 대부족들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실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그들 중 적당한 곳을 골라, 토착 신앙을 하나 퍼뜨릴까 합니다.”
“너…… 토착 신앙이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짧게는 수백 년 동안 그 부족에 이어져 내려온 것이 그들의 토착 신앙이다. 그런데, 뭐? 토착 신앙을 퍼뜨려?”
“내가 보는 것은 지금이 아닌, 앞으로 수백 년 뒤입니다. 빠르면 수십 년도 괜찮고. 프라우 님이 도움을 주신다면, 제가 나서는 것보다 빠르게 토착 신앙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충고 하나 할까?”
프라우가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이라면 말이야. 네가 가서, 부족 몇 개를 몰살시키는 것이 더 빠르고 쉬울걸. 그런 압도적인 공포에서도 신앙은 탄생하는 법이거든.”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요.”
이성민은 웃으며 대답했다. 프라우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당장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야, 야! 잠깐! 적어도 신의 이름은 말해주고 가야 할 것 아니야?!”
프라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아. 이성민은 머리를 돌렸다.
대답해 주려는 순간, 이성민은 자신이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투신전의 주인의 이름이 뭐지?’
이성민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그 순간이었다. 공간이 부르르 떨렸다. 프라우가 기겁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투신전의 천마]그것뿐이었다. 공간의 진동이 멈추었고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프라우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 바…… 방금, 뭐야?”
“……신입니다.”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키며 말했다.
2.
허주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때, 야나는 이번에도 많이 울었다. 이성민은 흐느끼는 야나를 보며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막막하지는 않았다. 이성민은 허주를 닦달하여 야나에게 전할 말을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감사합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야나가 이성민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분의 말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허주는 마지막까지 당신의 행복을 기원했습니다.”
이성민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야나는 홀린 것만 같은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위지호연에게 주어진 강제적인 재능은 사라진 것처럼, 마령의 힘으로 구미호가 된 야나는 상당한 힘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나가 하찮은 존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마령의 도움 외에도 어르무리의 지배자로서 상당한 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저 역시, 그분과 같은 길을 걷도록 노력해야겠군요.”
“아…… 그리고…….”
결의를 다지는 야나를 보며, 이성민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야나는 눈물로 얼룩진 눈가를 닦으며 이성민을 보았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
머리를 갸웃거리는 야나를 보며 이성민은 쓰게 웃었다.
요괴의 신앙도 신앙으로 사용될 수 있을까?
그것이 조금 의문이기는 했지만, 부탁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3.
“대부분의 마법사는 무신론자야.”
이성민이 써내려 가는 책을 옆에서 눈이 빠져라 보고 있던 스칼렛이 내뱉었다.
요정의 숲 근처의 마탑. 그곳의 최상층에 스칼렛과 로이드, 이성민이 앉아 있었다.
이성민은 두 마법사가 보내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디면서 마법을 통해 책을 쓰고 있었다. 일일이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힘들지는 않지만, 솔직히 귀찮았다.
“바로 눈앞에 신이 나타난다고 해도, 무조건적인 신앙을 보내기보다는 저게 대체 뭐 하는 놈인지, 왜 저런 놈이 있는 것인지 탐구하려는 것이 마법사라고. 그런데, 대뜸 신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
“스칼렛의 말이 맞네.”
로이드는 콧잔등에 걸친 안경을 손으로 올렸다. 대화를 해 나가면서도, 둘은 이성민이 쓰고 있는 마법에 대한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현실감도 그다지 없고. 신이라고는 해도,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와 닿지 않는 이야기야. 어차피 서두를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지요.”
이성민도 지금 당장 확실한 종교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민간 신앙이었다.
한순간 확 뜨고 사라지는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앞으로 오랫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앙.
당장 명확한 형태를 갖추지 않아도, 긴 세월 이어진 민간 신앙은 언젠가 거대한 종교가 될 것이다.
“지금은 신화를 만들어가는 단계죠.”
“신화는 이미 하나 있잖나. 세상의 멸망을 막았는데.”
“모두가 아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굳이 떠벌리고 싶지도 않아요.”
“패닉 때문에?”
“그것도 있죠. 공표해 봤자 사람들은 헛소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것이 걱정이라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스칼렛이 이죽거렸다.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성민도 스칼렛이 어떤 방법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프라우에게 조언을 듣지 않았는가. 압도적인 공포에서도 신앙은 탄생하는 법이다.
“서두를 이유가 없잖아요.”
“괜스레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잘 알았어. 좀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거잖아.”
스칼렛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굳이 긍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성민이 어떤 삶을 바라고 있는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압도적인 공포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
이성민이 가진 힘이라면 막상 저지르는 것은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 뒤가 귀찮다.
“솔직히 봐도 이해를 잘 못 하겠어.”
이성민이 써 내려간 글들을 쭉 읽던 스칼렛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대부분이 용언에 기반해 있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 인간인 우리는 용언을 다룰 수가 없어.”
“용언을 술식으로 대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네요. 마법이랑 결혼할 생각이었는데, 아주 잘 됐어요. 평생 머리를 부여잡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주제가 손에 들어왔으니.”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며 이성민을 흘겨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이성민은 낮게 헛기침을 했다.
“굳이 마법과 결혼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으응? 뭐어라고?”
“……아닙니다.”
스칼렛의 눈에 불이 켜졌다. 이성민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들의 곁에서 로이드의 얼굴은 죽상이 되어 있었다.
이성민은 말을 돌릴 수 있는 기회다 싶어서 로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로이드 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응?”
“최근에 선 보지 않으셨습니까?”
“푸하하!”
로이드의 얼굴은 더욱 썩어들어 갔고, 스칼렛이 배를 잡고 웃었다.
“말도 마. 이 아저씨, 선 자리에 누가 나왔는지 알아?”
“누굽니까?”
“원로원의 늙다리 중 하나야.”
“나이야 크게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로이드 님 나이도 있는데…….”
“얘가 뭘 모르네. 물론, 저 나이 먹고 짝 없는 마법사는 많지. 문제는 그 마법사가 원로원의 늙다리라는 거야.”
“원로원이 대체 왜…….”
이성민은 마법사 길드의 원로원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모른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집단이라는 것만 대충 알고 있을 뿐이었다.
스칼렛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려 하자, 로이드가 급히 끼어들었다.
“이미 끝난 일일세.”
“로이드님은 욕심이나 좀 버려요. 그 나잇대의 마법사 중에서 순수한 마법사가 몇이나 될 것 같아요? 괜히 마법사랑 사귀려 하지 말고, 어느 도시의 평범한 여자나 찾아 구애하라고요.”
로이드는 뭐라 반박해 주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로이드가 괜한 로망을 갖게 된 것은 흑룡협과 테레사 때문이었다.
나이도, 종족도 초월한 사랑. 로이드가 보기에는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아니면 루비아는 어때요?”
“제가 싫어요.”
찻잔을 정리하던 루비아가 질색하며 대답했다. 혹시나 싶었던 로이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4.
예화는 잘 지내고 있었다.
“딸이 예쁘군요.”
이성민이 건네는 말에 예화는 살며시 웃었다. 한때 사마련주의 친위대이자, 친위대 중 유일하게 사마련주의 죽음을 보았던 예화는 10년의 세월이 지나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예화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은 지난번 혈맹을 정리하기 위해 헤도르에 왔을 때 알았었다. 하지만 예화가 결혼했고, 자식까지 낳았을 줄은 몰랐다.
“련주님의 말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화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성민은 자신의 품 안에서 옹알이를 하는 아이를 내려 보았다. 생각해 보면, 갓난아기를 품에 안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성민은 조심스레 아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것이, 만지면 만질수록 더 만지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닙니다. 잘 지내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공자님 덕분입니다.”
혈맹이 무너지고 나서, 헤도르는 분란 없는 평화로운 도시가 되었다.
본래 사파의 본거지였던 덕에 길거리에 파락호들이 많았지만, 이성민이 찾아와 혈맹을 무너뜨린 이후로는 질 나쁜 사파 모두가 헤도르에서 철수했다.
괜히 분란을 일으켰다가는 혈맹처럼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저어…….”
예화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녀는 혹 자신이 하는 말이 이성민에게 누가 될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예화의 감정을 읽은 이성민은 빙그레 웃었다. 예화와는 인연이 있다. 그 외에도, 예화는 사실상 사마련주의 양녀라 해도 좋을 인물이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신 것이라면 언제고 말씀해 주십시오.”
“아…… 네, 감사합니다. 그게…… 혹시 괜찮으시다면, 공자님이 그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실 수 있는지요?”
의외의 부탁이었다. 이성민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예화의 얼굴과 자신의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의외긴 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성민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뇨,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제게 이런 부탁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이름이 뭡니까?”
품에 안고 있었지만, 아직 아이의 이름도 모른다. 이성민의 질문에, 예화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장일천이라고 합니다.”
그 대답에 이성민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예화의 남편은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아이의 성씨가 장인 것을 보니 장씨 성의 남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일천?
“……여자아이 아닙니까?”
“예.”
“일천이라는 이름은…….”
“련주님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여자아이의 이름이 장일천이라…… 중성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름 아닌가.
아니, 그보다. 이성민의 얼굴이 굳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뺏겼다.’
“공자님은 아직 혼인하지 않으셨지요?”
“아, 예.”
“상대는 있으십니까?”
“예…….”
이성민의 대답에 예화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기대 어린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아직 자식은 낳지 않으신 겁니까?”
“예…….”
이성민은 시무룩한 기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언젠가 자식을 낳을 때를 대비해서, 두 개의 이름을 생각해 두었다.
이일천.
이허주.
그중 일천이라는 이름을 빼앗겨 버렸다.
5.
가주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남궁희원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는 급히 허리를 더듬어 칼자루를 쥐었다.
동작은 빨랐지만, 남궁희원은 자신의 행동이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문 너머에서도 방 안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었다. 남궁희원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인사나 하러 온 겁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남궁희원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칼자루를 쥐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귀창?”
그 말에 이성민은 빙그레 웃었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이성민을 보며 남궁희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귀창이라고 부를 수도 없군. 칭하는 별호가 너무 많아져서.”
“흑천제일마라고는 부르지 마십시오.”
“그것도 예전 별호지. 최근 자네를 칭하는 별호 중 가장 많은 것은 마왕이야. 알고 있나?”
그 말에 이성민은 쓰게 웃었다. 성벽 근처에서 무신과 월후를 압도하고, 무신이 떠든 말 덕분에 많은 이들이 이성민을 마왕이라 부르고 있었다.
“사정도 모르는 이들이 떠드는 잡소리일 뿐입니다.”
“그건 나도 아네. 내가 아는 자네는 마왕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니.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도 잘 모르겠군. 작금의 세상에 자네만큼 마왕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제 인성이 그렇게 나쁩니까?”
“인성 문제가 아니지.”
남궁희원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이성민이 적의를 품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긴장이 풀리지는 않았다. 초월지경인 남궁희원은 이성민의 경지를 겉핥기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저만한 힘을 가진 존재를 마왕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마왕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는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인사차 왔다고. 가주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축하를 전하기에는 너무 늦은 겁니까?”
“아니, 아닐세. 많이…… 당황했을 뿐이야.”
남궁희원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성민은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소림으로 가는 길에 만났던 남궁희원은 자신감이 가득한 청년이었다.
형님이라 부르며 으스대던 남궁희원과 지금의 남궁희원 사이의 괴리감이 컸다.
‘내가 너무 변한 것이겠지.’
이성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잠깐 주저하던 남궁희원이 물었다.
“차라도 한잔하겠나? 아니면 술?”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 들른 것뿐이라.”
“……자네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어떤 것입니까?”
“흑룡협이 자네와 함께 있지 않았나.”
그 말에 이성민은 남궁희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남궁희원이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는 오랜 악연에 대해 묻고 있었다.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
이성민은 그렇게 질문했다. 모용서진과 제갈태령을 죽게 한 것은 무림맹의 무사였고, 그들에게 지시를 내린 것은 흑룡협이었다.
남궁희원은 이성민의 질문에 잠깐 침묵했다.
“자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모용서진의 원수는 이미 죽었습니다.”
“흑룡협이 죽었다는 말인가?”
“아니요, 흑룡협은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이용당했을 뿐이고…… 죗값은 치렀습니다.”
“내가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는데?”
남궁희원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말에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물을 겁니까?”
“……뭐……?”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믿고 말고는 당신의 몫이었고. 만약 당신이 여전히 복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그를 벌하려 한다면…… 당신은 죽을 겁니다.”
이성민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주었다. 사실이었다.
남궁희원이 초월지경의 고수라고 해도 10년 전의 흑룡협보다 못하다. 지금의 흑룡협에게 싸움을 건다면, 남궁희원은 죽는다.
“직접 보십시오.”
이성민은 남궁희원을 보며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이성민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일부가 빠져나왔다.
남궁희원은 다가오는 기억을 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천외천이라는 단체와, 무신과, 영매와, 신령의 존재. 그 모든 것이 그것에 담겨 있었다.
남궁희원은 머뭇거리며 이성민의 기억을 받아들였다. 빛이 사라지고, 남궁희원은 멍하니 서 있었다.
“……하하하…….”
남궁희원이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이걸…… 믿으라는 건가?”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성민의 질문에 남궁희원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았다.
이성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흑룡협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영매, 신령이었다. 천외천의 수장이었던 무신은 죽었고, 영매 역시 육체를 잃고 혼만 남아 이성민이 만든 지옥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하…….”
남궁희원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혼을 구원해 주어…… 고맙네…….”
남궁희원은 두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도서관에 가두어졌던 모든 혼을 해방시켰다.
그 속에는 모용서진의 혼도 있었다.
남궁희원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에게 복수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이성민은 그런 남궁희원을 씁쓸한 눈으로 보다가 몸을 돌렸다.
“……투신전…….”
등을 돌린 이성민을 향해 남궁희원이 중얼거렸다.
“……나도 갈 수 있을까…….”
복수를 떠나 무인으로서의 열망을 가진 것일까. 이성민은 굳었던 표정을 풀어 남궁희원을 돌아보았다.
“자격이 있다면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남궁희원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여태까지 복수를 위해 살았고, 인제 와서는 목적을 잃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목적이 필요했다.
“고맙네.”
남궁희원이 깊이 머리를 숙였다.
“정말…… 고마워…….”
그 감사를 들으며, 이성민은 남궁희원의 방에서 사라졌다.
6.
“이성민 님.”
예전의 기억을 쫓아 산길을 걷던 중. 이성민은 반가운 얼굴과 재회했다. 이성민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지학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민 머리였고, 두 눈은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깊고 맑았다.
“오랜만입니다.”
이성민이 그렇게 말하자, 지학은 포권을 취하며 꾸벅 머리를 숙였다. 지학에게는 조금의 긴장이나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성민은 지학에게서 느껴지는 맑은 기운에 내심 감탄을 흘렸다. 지학이 초월지경에 들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의 실력은 이성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높았다.
“제가 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선사께서 손님이 올 것이라 하셨습니다.”
불영대사에게 얘기를 전한 적은 없다. 이성민은 작은 호기심을 느끼며 지학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지학이 쿡쿡 웃었다.
“선사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다행이로군요. 지학 님도……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저를 부끄럽게 하지 말아주시지요.”
지학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이성민 님이야 말로 대단하십니다. 저는 이성민 님의 무위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이성민과 지학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불영대사가 거하는 석굴로 올라갔다. 그곳에 도착하자, 지학은 합장을 하면서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저는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소림을 들러주십시오.”
“비무 때문입니까?”
이성민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 질문에 지학이 하하 웃었다.
“비무라니요. 그저, 몇 수 가르침을 받고 싶을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지학이 웃으며 물러났다. 이성민은 석굴의 새카만 입구 앞에 섰다. 멀리 보이는 소림에서 향냄새가 올라왔다. 수십 년 만에 오는 곳이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그만한 세월이 흘렀으면 충분히 천수를 누려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소림의 불영 대사가 죽었다는 소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생불(生佛)이라도 되실 생각입니까?”
이성민은 석굴 안쪽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 말에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늙은 목소리였지만 더없이 맑았다. 이성민은 그 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이쯤이나 살았으면 생불이라기보다는 요괴라 해야 옳지 않겠느냐?”
“내가 아는 요괴는 선사와는 다릅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눔아. 농담이나 던지러 왔느냐?”
“잘 지내고 계시나 인사나 하러 왔습니다.”
“맨손으로?”
그 말에 이성민은 피식 웃었다.
“시주는 선사께 하는 것이 아니라 소림에 해야지요.”
“끌끌! 되었다, 네가 한 푼 더하지 않아도 돈 궁할 일 없는 놈들이다. 그러니 이 늙은이에게도 매 끼니 밥을 주는 것이지.”
이성민은 정정한 불영대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소림을 떠난 후, 단 한 번도 소림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소림은 이성민에게 있어서 여러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이곳에서 들었던 매미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많은 일을 하였더구나.”
“알고 계셨습니까.”
“이 시커먼 곳에서 벽을 들여 본 것이 수십 년이다. 깨달음은 얻지 못했지만 잡스러운 재주 몇 가지는 얻었지. 최근 하늘이 완전히 바뀌었더구나. 이전의 밤하늘을 채웠던 것은 아무래도 별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지금의 하늘이 싫으십니까?”
“진짜 별은 참 아름답더구나. 오래 산 보람이 있었어.”
불영대사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간간이 들려오던 신령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뭐, 그것이 아쉽지는 않다.”
불영대사에게 말을 전했던 것은 신령이 아닌 마령이었다.
이성민은 그 사실을 굳이 불영대사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석굴 속에서 불영대사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세간에 너에 대한 소문이 시끄럽더구나.”
“소문을 믿으십니까?”
“끌끌. 네가 마왕이라는 웃기지도 않던 소문 말이냐? 글쎄다. 당장은 믿지 않지만, 네가 앞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믿을 수밖에 없게 될지도 모르지.”
이성민은 불영대사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알았다.
“네가 마왕이 되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서 대체 누가 너를 막을 수 있겠느냐?”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또 세상을 구한 것이로구나. 멍청이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불영대사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조금 뒤에, 불영대사가 물었다.
“아직도 매미가 되고 싶으냐.”
“이곳에 있었을 적에도 매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 마왕도, 매미가 아니라면. 저 높은 곳을 나는 봉황이나 용이 되고 싶으냐?”
“날아서 뭐합니까. 그냥 땅 걷는 인간이면 족합니다.”
이성민의 대답에 불영대사가 다시 웃는 소리를 냈다.
“많이 변했구나.”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지학을 어떻게 보느냐.”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당의 청명도 예전에 보았지만, 지학 님은 그보다 높은 곳에 있더군요. 이미 지금 수준으로도 정파제일인이라 불리기에 충분할 겁니다.”
“천하제일은 못되겠구나.”
“그것을 논하기에는 넘어서야 할 산이 많습니다.”
“늙은이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느냐?”
“제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불영대사가 잠깐 숨을 내뱉었다.
“마왕이 되지 말거라.”
“예.”
“그리고, 가능하다면 지학의 목표가 되어다오. 소림은 더 이상 저 녀석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
“간간이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잠시 뒤에.
“고맙구나.”
이성민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석굴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멈칫하고서 먼 하늘을 보았다.
멀리서 매미 우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7.
“마왕이라니.”
거창하기 짝이 없는 별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써먹기는 좋을 것 같았다.
취걸은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보다 조금 아래에 모여 있던 개방 장로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때, 귀창…… 아니, 마왕과 싸운 이들이 나눈 대화가 사실인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종언이 어쩌고 하던 것? 장로는 그런 헛소리를 믿는 건가?”
“믿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하루아침에 멸망한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입니까?”
취걸의 질문에 장로가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때 성벽에 모인 사람 중, 종언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생각 없는 겁쟁이들이나 덜덜 떨고 있을 뿐입죠.”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왕을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가 보여 준 힘은 너무 위험합니다.”
“정파와 무림맹의 체면도 있습니다.”
장로들이 떠들었다. 취걸은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체면, 체면이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마왕 이성민은 몇 달 전, 무림맹이 있는 도시 크론으로 쳐들어와 무림맹에게 큰 망신을 주었다.
그 일은 이미 에리아 전역으로 소문이 나, 정파와 무림맹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다.
특히나 난감해진 것은 개방 거지들이었다. 현 무림 맹주가 전대 개방 방주인 무걸개이기도 했고, 개방의 본방은 이곳 크론이다.
어린 거지들에게서 동냥질이 시원찮다는 보고는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여론을 만들지.”
취걸은 장로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이런 일이야말로 개방의 전문이기도 했다.
개방의 거지들은 에리아 전역에 퍼져 있다. 그들이 마음먹고 소문을 만들기 시작하면, 거짓도 진실이 된다.
게다가 이번 일은 딱히 거짓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성민이 10년 전에 김종현과 데스나이트의 군주를 쓰러뜨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 그가 보인 행보는 세인들이 바라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작은 소문부터 시작해서 크게 부풀리면 됩니다. 어쩌면 마왕 이성민이 정말로 세상을 멸망시킬지도 모른다는, 그런 소문 말입니다.”
“그가 얌전히 있어 줄까요?”
장로 중 하나가 불안한 의견을 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마왕이 보인 무위는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만약…… 그가 정말로 마왕다운 행동에 나선다면. 도대체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인간일 뿐이다. 또, 초야에 묻힌 고수 중에서…… 어쩌면 마왕에 준하는 힘을 가진 고수가 있을지 어떻게 아나?”
“여론이 형성되면 토벌대가 조직되겠지.”
“어마어마한 희생이 날 거요.”
“그렇다면 그가 정말 마왕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 아니겠나?”
“중요한 것은 마왕을 공적(公敵)으로 만드는 것이야. 그 과정에서 구겨진 체면도 조금 세울 수 있을 것이고.”
장로들이 떠들었다. 취걸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잠시 백소고를 생각했다.
지금 그녀는 아직도 이성민과 있을까? 알아보고 싶어도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세상 널린 것이 거지인데, 만족스러운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과격한 여론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취걸이 입을 열었다.
“작은 의구심 정도면 충분하겠지. 마왕은 정말 마왕인가? 세상은 정말로 멸망하는 것인가? 그 정도만 던져두면 소문은 세상이 바라는 대로 흘러갈 거요.”
“방주, 재고해 주십시오. 적어도 전대 방주…… 맹주님께 상의라도…….”
“현 방주는 나요. 흑개 장로,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요?”
“얌전한 괴물을 괜히 건드리는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괴물이 얌전하다고 해서 괴물이 아닌 것은 아니오. 풀어놓는 것보다는 확실히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편이 나아. 어쩌면 이 일로 괴물에게 사슬을 씌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취걸은 무림맹 앞에서 보이던 이성민의 태도를 기억했다. 소문 정도로 그가 날뛸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론을 만드는 것은 민심을 무림맹에게 되돌리기 위함이오. 마왕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진다면, 대중이 알아서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주겠지. 그리고…….”
그리고…….
취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좌중의 모두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끔찍한 공포감을 느끼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친 숨소리도 마음대로 낼 수가 없었다. 이곳 모두가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공포로 그들을 침묵시킨 이성민은 조용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취걸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이성민을 보았다.
대체 언제?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돌았다. 이곳은 크론 깊은 곳에 숨겨진 장소다. 대체 누가 이 장소에 대해 불었단 말인가?
“회의 중인 것 같아 얌전히 들어주려 했는데.”
이 장소로 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굳이 거지 하나를 붙잡고 본거지를 말하라 심문할 필요도 없었다.
이성민은 취걸과 만난 적이 있었고, 그의 기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쫓아 왔을 뿐이다.
“더 들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이성민은 뚜벅뚜벅 걸었다. 취걸은 덜덜 떨면서 다가오는 이성민을 보았다. 모든 장로가 간신히 눈알만 들어서 이성민을 보았다.
“마왕이라 불린다고 해서 마왕인 것은 아니지.”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들었다. 길게 뻗은 검지가 취걸에게 향했다.
그를 보는 취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벌어진 입술은 떨리기만 할 뿐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본보기는 있어야 할 것 같아.”
제발 협상, 아니, 변명이라도. 취걸의 사타구니가 축축하게 젖었다. 하지만 취걸의 간절한 마음과는 다르게 이성민의 두 눈은 무심했다.
그는 굳이 취걸의 변명이나 사과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별 감정이 없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대신할 존재는 얼마든지 있었다.
퍼억.
작은 소리와 함께 취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 순간에 좌중을 위압하고 있던 이성민의 기세가 사라졌다.
장로들이 막힌 숨을 토해내면서 목을 부여잡았다. 몇몇 이들은 내상을 입어 검은 피를 토해내기도 했다.
그들은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이성민을 보았다. 바로 조금 전에 방주가 죽었지만, 장로들에게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다.
“흑개라고 했나?”
“예, 예……!”
유일하게 반론을 제기했던 장로가 겁에 질려 대답했다. 이성민은 턱짓으로 취걸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앞으로는 당신이 개방 방주야.”
“그…… 그게 무슨…….”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그 말에 흑개의 얼굴이 울기 직전으로 변했다.
“누구나 알기 쉬운 본보기를 보였으니, 앞으로 수작질 부릴 생각은 하지 마.”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모든 장로를 둘러보았다. 사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개방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기 위해 온 것이었는데, 하필 재수 없게 저런 이야기를 떠드는 것을 들어 버렸다.
“자, 회의를 계속하지.”
이성민은 취걸의 시체 곁에 털썩 앉았다.
“여론…… 여론이라. 그래, 그것도 생각해야겠어. 마왕 취급당하기는 싫거든.”
“예…….”
중구난방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성민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사실, 그것 말고…… 따로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꼴을 보니까, 부탁보다는 협박이 더 잘 먹힐 것 같아.”
취걸은 죽었지만, 각지의 거지들을 통해 소문을 만든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이성민이 개방에 부탁하고자 했던 일도 그런 일이었다.
“무…… 무엇을 바라십니까?”
새로이 방주가 된 흑개가 땀을 줄줄 흘리며 물었다.
이성민은 어떤 소문으로 시작해야 투신전을 하나의 민간신앙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8.
에레브리사와의 중개인은 더 이상 불러들일 수가 없었다.
종언이 끝나고 세상의 운명이 바뀌면서, 영체로 변했던 드래곤들은 다시 육체를 되찾았다.
애초에 에레브리사의 존재 목적은, 운명의 변수라고 할 만한 이들을 후원하여 세상의 운명을 바꾸는 것에 있었다.
목적이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 에레브리사가 존재할 이유는 없었다.
‘고맙다는 말도 안 하다니.’
이성민은 호메루소스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렇지만 괘씸하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그들로서도 갑작스런 변화에 대응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인사를 전할 겨를도 없이 에레브리사가 붕괴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조금 정이 들었는데.’
단말에 지나지 않던 네블을 떠올리며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에레브리사가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이성민에게 큰 곤란함은 없었다.
더 이상 이성민은 에레브리사에게서 얻을 것이 없었다. 편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와서 에레브리사가 없다고 곤란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부탁 하나를 하기 위해 갔다가 개방을 통째로 손에 넣었다. 그곳에 있던 장로와 새로운 방주에게 경고도 단단히 했고, 혹시 몰라 머리에 단말까지 심었다.
‘셀게루스 님에게도 인사해야 하는데.’
솔직히 미안해서 아직 찾아가지 못했다. 그토록 공들여 만들어 준 창을 또 부숴 먹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나중에라도 찾아가 볼 생각이다. 물론 빈손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비늘은 없고…… 화로라도 하나 만들어 줄까.’
깔깔 웃는 요정들의 웃음소리가 시끄러웠다. 오슬라가 여왕이라는 체면도 잊고서, 숲 밖에 나가 어린 요정들과 노는 소리였다.
이성민은 요정들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숲길을 걸었다. 멀리서 흑룡협의 존재가 느껴졌다.
테레사가 교회로 돌아가고서, 흑룡협은 멈추었던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창왕의 말이 자극된 덕분이다. 그런 주제에 밤이 되면 몰래 테레사를 만나러 간다. 덕분에 요정마는 밀회를 즐기는 흑룡협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호수를 지났다. 이성민은 사마련주와 창왕의 무덤을 힐긋 보았다. 둘은 과연 어디까지 갔을까.
내가 투신전의 외길을 걸을 즈음에, 그들은 과연 얼마나 먼 곳에 있을까.
아니.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말자. 당장 조급해할 이유는 없으니까.
넓게 펼쳐진 꽃밭에, 집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오늘 하루는 무척이나 바빴다. 그래도, 당장 해두어야 할 것은 다 해두었으니.
당분간 오늘처럼 바쁜 날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컷 돌아다닌 덕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하늘이 발간 노을로 물들었다.
최근, 위지호연은 요리에 취미를 붙였다.
사실 그녀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백소고가 요리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해보겠다며 백소고에게 배워가고 있을 뿐이다.
눈썰미도 있고 손재주도 좋으니 솜씨는 빠르게 늘어갔다. 덕분에 백소고도 바쁘게 되었다.
그녀는 날마다 새로운 요리책을 구해다 도전했고, 위지호연에게 가르쳐야만 했다.
이성민은 꽃밭을 걸었다.
에리아에 소환되기 전, 대한민국 서울에서 살았을 적에는 언제나 돌아갈 집이 있고, 가족이 있었다.
C급 용병으로 살았을 때도 돌아갈 집은 있었다. 가족은 없었다.
이번 생에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돌아갈 집도 없던 시절이 많았다. 아버지 같았던 존재도, 형 같던 존재도 있었지만…… 그들과 가족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이성민이 도착하기 전에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 안 어울리는 앞치마를 두른 위지호연이 있었다.
그녀의 뒤에서 백소고가 이성민을 향해 웃었다.
“밥은?”
“안 먹었습니다.”
“빵이다.”
백소고와의 대화하는 중에, 위지호연이 툭 내뱉었다.
“아침도 빵이었잖아.”
“다른 종류의 빵이니까 괜찮다.”
위지호연이 대답했다.
‘먹고 왔다고 할걸.’
뒤늦게 후회감이 들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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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끝났습니다.
정말 끝났네요. 17년 1월 19일에 연재를 시작했으니, 일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길게 쓸 줄은 몰랐어요. 쓰다 보니 쓰고 싶은 장면이 더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생각했던 장면은 잘라내고……
솔직히 처음 쓸 때에는 이렇게까지 많은 분들이 봐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소설 하나를 실패했고, 전업이다 보니 어떻게든 차기작을 써야했어요. 그래서 급하게 생각하고 쓴 글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관심을 받아 당황했습니다.
그 관심에 모두 부응하지는 못했겠지요. 독자님들이 바라는 전개와 소설의 전개가 다른 적도 있었을 것이고, 멍청한 주인공에 답답해 떠난 독자님도 많으셨을 거예요.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항상 생각하지만, 참 힘든 것 같아요.
사실은 조금 더 구르고 처절한 장면을 많이 쓰고 싶었습니다. 글을 써가면서 몇 개의 엔딩을 생각해 두었고, 배드 엔딩 쪽으로도 마음이 많이 기울었습니다.
처음 정해 놓았던 엔딩은 루프 엔딩이었어요. 결국 성민이는 종언을 막는 것에 실패하고, 모든 기억을 가지고 다시 한 번 과거로 돌아가서 위지호연을 만나는 장면에서 끝나는. 그런 엔딩을 쓰려 했죠.
근데 그러면 왠지 똥 싸다가 끊긴 것 같잖아요…… 그래서 그 엔딩은 폐기했습니다.
다음은 몰살 엔딩을 쓰려 했습니다. 최후에 최후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하나 둘 쓰러지고, 마지막에 성민이도 죽는…….
물론 폐기했습니다. 독자님들에게 욕 잔뜩 먹을 것도 무섭고, 성민이도 불쌍하잖아요.
해피엔딩이라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모두가 각자의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사족을 조금 달자면, 원래 백소고는 죽을 예정이었습니다.
죽이겠다는 떡밥도 잔뜩 뿌렸죠. 신의 화신이 된 것 자체가 죽게 될 떡밥이었는데…… 막판에 마음이 기울어져서 못 죽였네요. 덕분에 백소고의 캐릭터가 굉장히 애매해졌어요.
뭐 그래도, 쓰면서 즐거웠습니다.
이런 주인공을 쓰는 것은 오랜만이라 더 그랬어요. 더 답답하고, 더 찌질하고, 그러면서 처절하고, 노력하고. 그런 캐릭터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항상 있었는데, 쓰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습니다. 최후에는 인성민이 되어버렸지만요 ㅎㅎ…….
댓글도 항상 즐겁게 읽었습니다. 꾸짖어주신 독자님들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그런 댓글은 글이 폭주하지 않게 억제해주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댓글창에서 서로 싸우지 말아주세요. 저에게는 모두가 소중한 독자님들이에요.
길게 썼으니 조금 쉬고 싶지만, 쓰고 싶은 소재가 너무 많네요. 쉬엄쉬엄 차기작 분량을 채우고 돌아오겠습니다.
차기작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두었는데, 아마 생존물이 될 것 같아요. 아니면 예전에 망한 해결사 김은동을 다시 써볼 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전업인 이상, 둘 다 실패하면 새로운 글을 써야겠죠…… 제가 쓰면서 재미있다고 여긴 글을 독자님들도 재미를 느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성민이 같은 주인공을 1년 동안 쓰면서, 즐겁기도 했지만 답답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차기작은 시원시원한 놈으로 가려 합니다. 어떤 소재로 쓸지는 모르겠지만, 성격은 확실히 정했어요.
제가 너무 쓰기 좋아하는, 싸가지 없는 놈으로 갈게요. 어쩌면, ‘또?’ 라고 생각하실 독자님들도 있겠지만……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런 성격의 주인공이 너무 좋아요…….
아직 1월이라 다행이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