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10
10화.
10화
서진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서훈을 보았다.
“MBA 그런 거 말고 경영학 박사로 가.”
“누님, 무슨 전공으로 가리오. 전략 파이낸스 아님 마케팅 천 명씩 뽑는 하버드 MBA 가기도 하늘에 별 따기요. 국내 학사 가지고 경영학 박사는 하버드가 아니라 이름만 붙은 대학 가려 해도 하늘에 별 하나도 아닌, 두 다스쯤 따서 끈에 줄줄 꿰어 목걸이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거든. 수재라는 미국 애들이 다 몰리는 데야. 자식들, 돈 되는 건 바싹하게 알아 가지고.”
“너 수재잖아. 나랑 다른 천재. 그 머리 왜 그런 컨설팅 회사 같은 데서 썩혀 그거, 단물만 빨리는 일이야.”
“어허, 누님 위험한 말씀 하시네.”
건성건성 농담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서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가슴에 맺힌 말이었다. 잠긴 목소리로 서진은 말하였다.
“제발…… 원래 네가 경제학을 갔어야 했어. 네가 경제학 박사도 가고, 그랬어야 했다고.”
서훈이 서진에게 한 발 다가갔다.
“누나.”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한 눈빛이다.
“네가 갔어야 했어. 그러면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지 마. 누나, 이제 털어 버릴 때도 됐잖아.”
서훈이 서진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아버지, 아버지 때문에.”
“그만둬. 아버지 인생은 인생이고, 누나는 할 만큼 다 했어. 어이, 하버드 경제학 석사! 안 그래 ”
서훈이 무릎을 구부려 고개를 떨어뜨린 서진과 눈을 맞추었다.
“그래도 퀄(qualification, 논문자격시험)도 겨우 통과할까 말까 때려치운 발칙한 학생한테 대단한 하버드 경제학 석사 학위라도 인정한 게 어디야.”
서훈은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서진을 툭툭 쳤다.
“그래, 하바드, 듣기 좋고 부르기도 좋고 기억하기도 좋은 하.바.드. 경제학 석사인데 울 아버지 날 너무 미워한다. 체.”
서진은 싱겁게 말하고 일어섰다.
“그거 알아 누나 박사 때려치고 난 뒤 성격도 아주 변했어.”
“그래 ”
“원래도 워낙 이중성격이었지만 진지한 아버지 성격이 많았는데 요즘은 완전 엄마 판박이다. 아주 시간이 갈수록 심각하게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지는 거 알지 ”
“어이없다. 뭐래니. 뭐, 그러는 너는 남자 매력이 넘치는 줄 알아!”
서훈이 등에 있는 영광의 상처를 내어 보이려는 듯 등짝을 들이밀었다.
야아! 서진은 서훈의 등을 밀어내고는 방문을 소리 나게 닫으며 나갔다.
작은누나는 나이는 대여섯 더 먹고도 훨씬 귀여워졌어, 서훈이 웃으며 중얼거렸지만, 서진의 표정이 맘에 걸려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니가, 경제학 박사도 가고 그래야 했다고…….’
아무리 괜찮은 척 살아도, 괜찮아지지 않는 상처가 있다. 서진에게 보스턴과 경제학은 그러한 상처이다.
더운물에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눕자마자 온몸이 욱신욱신 피로와 통증을 호소했다. 기절할 만큼 피곤했지만, 몸을 펴고 침대에 드러누운 뒤에도 서진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내일 아침의 허리 상태를 위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하지만 무지근한 허리의 통증보다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박사를 마치지 못해 아버지께 느끼는 부담감이었다.
‘백화점이나 왔다 갔다 하는…….’
서훈도 이해 못할 일인데, 아버지는 더하시겠지.
‘그래, 오늘은 명품 박스를 들고 불이 나게 뛰다가 공주님 별 비위도 다 맞췄지. 하지만 꼭 나쁘지는 않아. 경제학 공부할 때보다 더 좋은걸.’
문득 정신없던 하루를 되새겨 보다가 서훈과 닮은 듯한 한혁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닮았다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서훈은 냉정한 듯 건들거려 보여도 삼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낌없이 받았던 사랑이 차곡차곡 뼛속 깊이까지 가득 차 있는 놈이었다. 그에 비해 한혁은 웃을수록 서늘해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심장을 긁어 대던 그의 허스키한 웃음소리가 떠오르자 서진은 고개를 흔들며 뒤척였다.
‘나랑 종류가 다른 사람이야.’
밀어내려 해도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자꾸만 되새김질되는 한혁의 우울한 눈빛을 떠올리면서 눈을 감았다.
택시를 잡아 주던 남자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팔을 높이 들어 올리고, 멈춰 선 택시 문을 열어 주었지만 눈은 맞추지 않았다. 잘 들어가라는 평범한 인사도 없었다. 그저 겨우 알아챌 정도로만 고개를 까닥했을 뿐이었다.
‘이태원 하이아트 뒤편요.’
서진은 행선지를 말하고 사이드 미러에 비치는 남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응시했다. 남자는 상념에 빠진 듯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다. 택시를 잡을 생각도 없는지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먼저 태워 보낼걸.
꼭 아이를 떨어뜨리고 온 책임감 없는 어른처럼 느껴져 스스로 어이없었다.
서진은 다시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 밤이다.
***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으응, 서진은 뒤척이며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다시 노크 소리가 좀 더 선명하게 들린다. 아아, 작게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응 서진은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 알람 스누즈 버튼을 계속 누르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베개로 얼굴을 묻었더랬다.
“으악!”
서진이 머리를 헝클이며 비명을 질렀다.
“서진아, 아침 먹어.”
“아뇨, 아뇨. 아뇨!”
서진의 방문을 열어 본 소양이 웬일로 늦잠이야, 하는 표정으로 눈만 크게 떠 보였다.
“엄마, 아우. 나 어떡해. 늦었어요.”
서진이 화장실로 뛰어간 사이에 소양이 장롱 문을 열고 스타킹과 실크 나염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꺼냈다. 스커트와 색을 맞춰 보며 도톰한 베이지 색 카디건과 풍성한 쉬폰 스카프 하나를 꺼내어 침대에 올렸다.
“엄마 땡큐우우.”
서진이 방에 들어서다가 계단을 향해 목을 빼며 인사했다. 스타킹을 신다가 급한 마음에 손가락에 걸려 쭉 뜯어졌다. 아우우, 서진은 스커트를 포기하고 바지를 꺼냈다.
아무렇게나 스카프를 두르고 카디건을 껴입으며 우다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엄마, 서훈이 어디 ”
“지금 막 현관으로 나갔는데.”
“아우, 안 돼. 나 데려가야 한단 말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엄마.”
급하게 현관문으로 내빼며 말했다.
서진은 말끔한 블랙 슈트 차림으로 대문을 나서는 서훈을 간신히 불러 세웠다.
“서훈아! 윤서후운!”
“어, 작은누나 ”
“나 태워서 가라.”
서진은 뒷머리를 모아 쥐어 검정 고무줄로 묶느라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말했다.
“누나 차는 어쨌어 ”
“그리됐어.”
서진이 먼저 서훈의 차 조수석 앞에 다가가 섰다. 서훈이 리모컨으로 버튼을 눌러 잠금 장치를 풀자 서진이 급히 올랐다.
“빨리 가자.”
“아직 출근 시간 여유 있는데 ”
“아침에 팀원들 미팅 있어. 여유롭게 사무실 도착하고 싶다고.”
“알았습니다, 누님. 팀장의 품위를 지켜 드리겠어.”
“자아, 너의 운전 실력을 보여 다오! 출발.”
서진은 대쉬보드를 탕탕 경쾌하게 두드렸다.
빠른 속도로 차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도로를 한참 달릴 무렵 서진이 생각난 듯 물었다.
“너 어디로 가지 클라이언트사로 가 ”
“빨리도 물어 주십니다.”
서훈은 느긋하게 턱을 쓸어내렸다.
“오전에 일이 있어 사무실로 가.”
“다행이네. 그럼 나 울 회사까지 태워 주라. 아유, 이쁜 것.”
서진이 서훈의 옆모습을 보면서 헤헤거렸다.
“왜 그래, 어설픈 애교는 떨지 마라. 남자들이 질색한다.”
“아, 됐네. 알았다고. 나 애교 안 떨어.”
흘끗 쳐다보니 서진은 금세 뿌루퉁한 얼굴을 하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서훈은 어릴 때부터 큰누나보다는 서진을 훨씬 잘 따랐다. 인형같이 생긴 큰누나 서연의 얼굴보다는 서진의 가느다랗고 지적인 얼굴이 주는 청명한 이미지가 좋았다.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가족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 유학을 실패로 끝내고 돌아온 서진은 오히려 넉넉한 여유와 넉살이 생겼다. 하버드 경제학 박사를 목표로 하던 날카로운 수재 여학생이었던 시절보다 지금의 서진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다.
“차는 어디다 뒀어 ”
“어제 회사에다가 두고 퇴근했어. 그럴 일이 있었거든. 말도 마라. 우리 팀에서 VVIP 마케팅으로 기획한 한국 한정판 라인이 있었는데, 강남점에 제품 넣는 타이밍이 서로 엇갈려서 공주 한 분이 길길이 뛰고 내가 그거 들고 차 빼고 어쩔 틈도 없어서 택시 타고 날랐잖아.”
서진이 팔을 주무르며 어제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말도 마. 차는 꽉 막혀서 백화점을 코앞에 두고 주차장이지, 전화는 계속 오지, 내가 택시에서 내려서 뛰었잖아. 혹시 몰라서 다른 거까지 세트로 몇 개 맞춰 가느라 상자가, 상자가 얼마나 무겁던지.”
“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서진의 어제 하루가 그려지자 서훈은 가슴이 저린다. 윤서진은 아버지 뒤를 이어 대학에서 당연히 경제학과 교수를 할 줄 알았다. 누구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미래였다.
“그런데 막 뛰다가 박스 하나가 바닥으로 점핑했네. 오 마이 갓, 빗물 바닥이었거든 내가 길 중간에 서서 딱 돌아 버릴 지경인데, 그런데 말야 갑자기…….”
“작은누나!”
서훈이 서진의 말을 끊었다.
“어. 왜 ”
싫은 내색을 누르려 핸들을 쥔 손에 힘을 더했지만 참지 못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서훈은 결국 듣기 싫은 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누나, 정말 왜 그래 서연 누나도 아니고 작은누나가 그러고 다니는 거 난 아직도 도무지 상상이 안 돼. 왜 그런 거야 ”
갑작스레 다그치는 통에 서진은 당황스런 눈으로 서훈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버렸다.
“그만해.”
“보스턴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
“말하지 마.”
“작은누나!”
“너, 한마디도 하지 마!”
“좋아.”
서훈은 회사 앞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 벙긋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운전 실력을 보여 주며 여유로운 시간에 세림백화점 본사 앞으로 도착했다.
“……고마워.”
서진이 차문을 열었을 때, 서훈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진, 5년이나 지났는데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힘들어 ”
“서훈아.”
“50년이 지나 죽을 때까지 그럴래 ”
목소리만큼 냉정한 얼굴이었다. 찬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조심해서 가.”
서진이 조용히 차문을 열고 내렸다. 녀석은 대답도 없다. 꼴도 보기 싫다는 건지,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엑셀을 밟았다. 서훈의 차는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서진은 천천히 건물에 들어서며 상념에 젖었다.
‘50년이 지나 죽을 때까지 그럴래 ’
걸음을 멈추고 긴 숨을 쉬었다. 못났구나, 내가 정말.
그래, 서훈의 말대로 그럴지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이대로.
그때는, 이런 것쯤이야 하고 넘길 만큼 강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얼마간 아프고 나면 그땐 그랬어, 하며 가벼이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약하고 어리석었던 과거의 자신은 시간이 흘러, 5년이나 지났지만 그 일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자라지 못했다. 박제가 되어 버린 것처럼.
***
5년 전 겨울, 보스턴…….
주황색 불빛이 반질반질한 나무 테이블 위로 둥글게 떨어졌다. 연말 분위기다운 떠들썩한 펍, 마음껏 취해 보려는 학생들의 시끌시끌 떠드는 소리가 거대한 공처럼 한 덩이로 뭉쳐지고 커다란 음악이 주위에 흩뿌려졌다. 평소와 달리 요란스런 분위기가 거슬리지 않았다. 서진은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이대로 춤을 출 수도 있을 만큼 즐거웠다. 테이블에는 서진이 거푸 비워 낸 생맥주 잔이 바닥을 드러냈다.
“와아, 이제 제일 힘든 건 끝이야, 끝!”
해방이라는 기쁨에 젖어 양손을 높이 치켜들며 서진은 소리쳤다.
“그래, 이제 다음 주 구술 하나만 남았나 ”
기훈도 들뜬 목소리로 답하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
“옵스켈트 교수님이랑 하는 구술이지 그래도 힘든 건 다 끝났어. 그 교수님이랑은 전에부터 준비했던 페이퍼 분석 자료 위주로 말하면 될 텐데 뭐.”
“오빠, 아우으, 퀄이 원래 이렇게 긴장되는 거야 나 죽는 줄 알았어.”
“그래, 많이 힘들었지 ”
“모두 다 거치는 통과의례 같은 거라 생각한 퀄이 이렇게 숨통을 조일 줄 몰랐어.”
“그래도 보란 듯이 잘해 냈잖아.”
기훈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만큼은 귓가를 찢을 듯이 울리는 음악소리에서도, 한 덩이로 뭉쳐진 커다란 소음에서도 명확하게 분리되어 들어왔다.
“원래 퀄리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아. 더구나 일 년 반 만에. 우리 천재 서진이한테는 통과의례같이 보였겠지만.”
“천재는 무슨. 나 머리 나뻐. 알잖아, 억지로 공부한 거.”
“아니야, 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천재야. 옵스켈트 교수도 인정하지 않았나 옵스켈트 교수는 국제 경제뿐 아니라 경제학 전체에서 그 입지가 대단하신데 말야.”
“어쩌다가 눈에 들었을 뿐이야. 거짓말인 거 아는데, 오빠한테 예쁘다, 천재, 그런 말 들으면 너무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