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38
38화.
38화
후…… 뿜어내는 숨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섞인 사람들의 목소리로 묻혀 들었다.
“아, 힘들어 죽겠어요. 이거 되기는 되는 프로젝트예요 ”
“뭐 되겠죠.”
“분위기 굉장히 칙칙한 거 아시죠 테스크 포스팀이라, 이거 다들 역적모의하는 듯 가재미눈을 하는데 완전 가시밭길입니다. 야근에 몸이 힘든 거보다 마음이 더 지칩니다.”
“허허, 그럼 되나. 기분이라도 좋아야지. 어디 저녁이나 맛있는 걸로 먹읍시다.”
“우와, 정말이죠 부장님, 어디로 갈까요 ”
누군가가 문을 조심성 없이 열었다. 중앙에 앉아 있는 한혁을 발견하자 사람들의 잡담은 찬물을 끼얹은 듯 일순 멈추었다.
“상무님, 먼저 오셨는지 모르고…….”
“그런 말들을 하는지는 몰랐는데요.”
“죄, 죄송합니다.”
“강 부장님, 실망입니다.”
차가운 말에 강 부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었다. 젊은 직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 버렸다. 하지만 순간이었다. 곧이어 한혁은 보는 사람 누구든 가슴이 두근거릴 만한 매혹적인 웃음을 그렸다.
“강 부장님 통이 크신 줄 알았는데. 고작 저녁으로 사기 진작을 하신다니.”
“네 ”
한혁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서 회의 자료를 폈다.
“회의 마치고 근사한 곳으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술도 음악도 있어야죠.”
한혁이 만들어 내는 웃음을 보며 서진은 주먹을 쥐어 자신도 모르게 깨물고 있는 입술을 틀어막았다. 얼마나 익숙한 거야. 그렇게 감정을 기막히게 가리는 건, 넌 도대체 얼마나 그렇게 살았어.
진 이사가 곧이어 들어왔다. 한혁은 쾌활한 목소리로 저녁 회식을 알렸다. 한혁의 얼굴을 살피는 진 이사에게 싱긋 웃어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강 부장님, 부평백화점 재무 상황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앞에 나누어진 자료를 넘기며 정돈된 목소리를 내는 한혁의 눈이 검푸른 바다의 심연처럼 가라앉는다. 서진은 자료로 눈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심장을 검푸른 눈물이 적신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긴 클럽 안, 파랗게 빨갛게 흩뿌려 대는 조명에 열기가 서서히 타오른다. 순식간에 눈앞을 하얗게 만들었다가 이내 칠흑의 순간으로 떨어뜨리는 자극적인 흰 조명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강렬한 음악이 강남의 화려한 클럽의 공간을 채운다. 끼익, 끼익 박자를 맞추며 LP를 긁어 대는 소리까지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사방에서 쏘아지는 레이저 빔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서진은 이미 취기가 올라 한껏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룸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서진은 생수 한 잔을 따랐다. 룸 안에도 여전히 커다란 소리의 음악이 들려오지만 한결 두통이 가라앉았다.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을 때 문이 열리고 한혁이 들어섰다.
“아직 안 가셨어요 ”
“윤서진, 너 높임말 집어치우라고 했지.”
한혁은 서진을 쳐다보지 않고 위스키를 따랐다.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켰다. 서진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만하세요. 저녁 식사 때부터 계속 몇 잔째…….”
“너, 내 술잔 숫자 세었어 ”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나는 셌는데. 윤서진이 마신 술잔 숫자. 젓가락질 횟수까지 알아. 몇 번 웃었는지도 알지.”
“상무님.”
“좋아, 윤 팀장. 상무님이 주는 술이나 마셔.”
한혁이 온더락스 잔을 내밀었다.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운전하려고요.”
“그래 그럼 술은 하지 말고 뭘 할까 뭐 하고 싶은데, 윤서진 ”
서진은 흐트러진 과일 안주 접시에 남겨진 파인애플 껍질만 바라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노래나 할까.”
한혁이 책자를 성의 없이 넘겼다. 마이크를 잡고서 느린 발라드를 불렀다. 리듬이 해일처럼 쓸고 다니는 플로어와 이질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가슴을 후벼 판다. 한혁이 취기로 흔들렸다. 서진이 일어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만해. 듣기 싫어.”
“내 노래가 별로야 ”
“아니, 잘해. 소름 끼치도록. 가수 해도 밥벌이는 하겠어.”
“그렇지. 화류계 피가 어디 가겠어.”
한혁은 이마께에서 긴 손가락을 까닥이며 시니컬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 한 끝을 비스듬히 올리고 스스로를 조롱하고 있다.
“꼴 보기 싫어.”
서진이 문을 향해 돌아서려는 순간, 한혁이 팔을 붙잡았다.
“놔.”
힘을 다해 뿌리치려던 서진은 오히려 그의 품에 세차게 부딪혔다.
“술 마시는 것도 싫고 노래도 싫고 서진 씨, 그럼 우리 춤이나 출까.”
느리게 말하며 한혁은 의지를 잃은 서진의 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양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귓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왜 더 가늘어졌어 ”
“똑같아.”
“거짓말.”
한혁이 키득거렸다.
“네 몸을 매일 생각하는데. 매일 밤 잠들 때마다 잠 깰 때마다.”
서진이 발끝에 힘을 주고 가슴을 밀어냈다. 움쩍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 들어와.”
“무슨 상관.”
“애처럼 억지 부리지 마.”
“억울하네, 윤 팀장님.”
한혁이 손가락으로 서진의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어 냈다.
“매일, 너 볼 때마다 최대한 어른답게, 상무님답게, 젠틀맨답게, 답게! 또 답게! 이성적으로 참아 내느라 내 이성이 지금 과부하거든 ”
“뭘 참는데 ”
“널 괴롭히고, 울리고 무너뜨리고 싶다는 생각 ”
서진의 눈에 경멸과 분노가 스친다.
“나만 왜, 윤서진 너 때문에 그래야 하는데 ”
서진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변명을 한다.
“그러니 나를 놔 버려. 세상에 사랑은 많아. 전부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많은 것 중 하나일 뿐이야. 영원하고 특별한 사랑은 이 세상에 없어. 그딴 거 존재하지 않아.”
서진은 희미하게 웃었다. 영원한 사랑은 없어.
“너는.”
한혁이 비틀거리며, 붉어진 눈을 하고서 서진을 보았다.
“사랑이 아니야.”
겨울바람 같은 목소리다. 눈밭에 맨발로 서 있는 것처럼 시리다.
“가지고 싶은…… 사람이야. 내 인생에 한 명쯤은 억지 부려도 되잖아.”
가지고, 싶은 사람. 한혁의 말에 마음의 둑이 무너진다. 터진 둑으로 무섭게 밀려오는 감정으로 다리가 후들거린다. 서진은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젓는다.
“가진 자의 오만이야. 한혁 씨, 가진 거 많아. 나 하나쯤은 길 가다 잃어버렸다 생각해.”
“내가, 뭘 가졌어 ”
한혁이 얼굴을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지치고 노곤한 얼굴로 물었다.
“나를 외면한 아버지 평생 나를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큰어머니 아, 행패 부리는 생모 친척들의 냉대, 조소, 손가락질, 그런 거 ”
서진은 앞으로 팔을 모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전이된 슬픔으로 갈비뼈가 짓눌리고 등이 뻐근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등을 쓸어 주며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입을 맞추고 으스러지게 껴안고 싶은 욕망을 누른다.
“내게, 시간을 줘. 아직 너무 혼란스러워. 나, 하지 못한 말도 있어.”
겨울밤 같은 눈에 희미하게 빛이 감돈다. 서진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용기를 좀 더 내어 보기로, 한 번 더, 아니 더 크게 수모를 받고 상처 입어도 한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꿋꿋하게 맞서 보기로 결심한다. 그 전에 정기훈에 대해 한혁에게 먼저 말을 해야 한다. 기훈의 이야기를 한다면 한혁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 무섭다. 그럼에도 어떻게 자신과 밤을 보냈냐고 화를 낸다면 서진은 과거의 덫에 다시 사로잡히고 만다.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서 몸부림치면서 피부가 벗겨지고 뼈가 부러지고 붉은 피를 흘리며, 영원히 자신을 미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다.
***
오전 업무가 한창일 때, 회장실의 호출을 받은 한혁이 조금 급한 걸음으로 움직였다. 인수 작업이 시작 단계부터 삐꺽거리고 있다. 어제, 사기 진작을 한다면서 거나하게 회식 자리까지 가졌지만 팀원들의 확신도 얻기 어려운 상황, 회장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빠르게 정리하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한혁을 반가운 얼굴로 맞이하는 사람은 정 회장만이 아니었다. 등지고 서 있는 햇살보다 더 환한 사람, 기훈은 눈가에 섬세한 주름을 만들며 활짝 웃어 보였다. 편안하고 느긋한 모습, 그는 금방이라도 팔 벌려 한혁을 따뜻하게 품을 듯이 바라본다.
“야아, 최한혁.”
순간적으로 눈앞이 새하얘지도록 찌르는 햇살은 환영이다. 한혁은 굳었던 몸을 풀고 천천히 걸어갔다. 기훈은 맘이 급한 듯 두세 발 다가오더니 오른손을 내밀어 한혁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몸을 다정하게 기울이며 한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훈의 옅은 회색 슈트에서 싱싱한 풀내음이 스쳤다. 회장실의 회색빛 카펫이 기훈의 넥타이 빛깔과 같은 연녹색 잔디가 되어 어른거린다. 여지없이 귓가를 스치는 아득한 목소리…….
‘한혁이지 야아, 너 참 귀엽구나. 형이라고 불러. 어른들한테만 비밀로 하면 되거든.’
한혁은 싱긋 보기 좋은 웃음을 만들어 거꾸로 돌아간 시계를 급히 돌렸다.
“당숙어른, 완전히 귀국하신 겁니까 ”
“응.”
기훈은 다시 햇살처럼 웃으며 한혁의 양팔을 가볍게 쥔 채로 고개를 조금 뒤로 빼어 본다.
“와, 최 상무, 정말 멋있어.”
햇살이 깊어질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자리에 앉아 오렌지 주스를 앞에 두고 이야기가 이어졌다. 왜 이제야 와서 그렇게 애를 태웠냐고 정 회장은 부드럽게 기훈을 나무라고 기훈이 죄송하다며 여유롭게 미소를 보일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서가 문을 열고 훈련된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윤서진 팀장 왔습니다.”
회장실을 절반으로 가르는 소리, ‘윤서진 팀장 왔습니다.’ 얼음이 녹는 오렌지 주스에 맞춰진 한혁의 초점이 크게 흔들린다. 탁자가 물결처럼 일그러졌다. 정 회장의 목소리도 기훈의 답도 곧장 심장을 세게 두드렸지만 깊은 바닷물에 머리를 담근 것처럼 귀에는 둔하게 울릴 뿐이다.
“기훈이, 반가운 사람이지 네 엄마가 언질을 주더라. 참, 감쪽같이 몰랐어.”
“그러셨어요 ”
기훈이 멋쩍게 웃는다. 웃음이 끝나기 전에 서진은 맞은편으로 와서 섰다. 단정한 스커트 아래 드러난 종아리는 탁자에 가려 발목 아래로 잘려 보였다.
“앉아요.”
서진은 조용히 기훈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동그랗게 목선이 파진 흰색 상의도 눈에 들어왔다. 잘록한 허리선이 드러나는 재킷, 긴장한 탓인지 크게 가슴이 오르내렸다.
“두 사람 미국에서 같이 공부했다면서 그럼 몇 년 만에 만나는 건가 ”
“아니요. 얼마 전에 뉴욕에서. 서진이 출장 중에. 우연히 만났습니다.”
“아, 그래 ”
한혁은 처음으로 시선을 들어 서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경악스런 눈빛이 이내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는다. 그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는 쓴웃음을 보였다. 서진은 몸 전체의 혈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무릎 위에 단정하게 모은 손도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출장 삭스백화점 건으로 갔었나 ”
“네.”
“지금 그쪽일 담당으로 있지 기훈아, 윤 팀장 처음부터 최 상무랑 같은 팀에 있었어. 똑똑한 인재야.”
너그러운 웃음을 띠며 자신을 바라보는 회장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서진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서울대서부터 하버드에서도 뛰어났어요.”
“참, 후배 자랑이 넘치는구나.”
은근한 핀잔을 주면서도 흡족한 듯이 정 회장은 웃었다.
“그래, 윤 팀장, 일이 많이 바쁘지 다음에 천천히 시간을 가져 보죠. 이만 나가 봐요.”
정 회장은 편안하게 말을 건넸다.
회장이 한 번만 기훈과의 관계를 물었다면 서진은 이미 끝난 사이라 대답하려 했다. 잔잔한 미소를 띠며 오직 선후배로 칭하는 기훈과의 관계에 서진이 덧붙일 설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회장실을 빠져나가는 서진의 발에 천 근의 추가 달려 있었다.
짧은 점심 식사를 같이한 후 회장은 미리 잡아 둔 예약 스케줄로 병원으로 향했고 기훈과 한혁 두 사람만 마주 앉았다.
“고모님 건강이 안 좋으시다며.”
“네. 안 그래도 걱정이 많습니다. 혈압도 불안정하고 심장 약도 계속 드시기는 하지만…….”
기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세도 많으시고 그렇게 석원 형이 가 버려서……. 잘해 드려.”
“네.”
더운 차를 삼켰지만 가슴까지 그 온기가 내려가지 않는다.
“서진이랑 같이 일한다고 ”
불쑥 치받는 감정을 누르며 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는 거 같았어 ”
“어떻게요 ”
한혁의 말에 채 다 감추지 못한 가시가 있다. 하긴, 누가 봐도 형편없는 사내처럼 굴었다고 기훈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냥, 잘 지냈는지.”
“무슨 생각이죠 ”
“응 ”
서진과 추억으로 젖어 들던 기훈이 눈을 들어 한혁을 보았다. 날이 선 듯한 시선이다.
“윤서진 팀장이랑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
“……찾으러 왔어. 5년 전에 많이 힘들게 하고 보냈거든.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렇게 도망가 버리더라.”
한혁의 얼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한 기색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