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46
46화.
46화
강남의 작은 호텔이다.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골목에 있는 호텔에 들어가며 서진은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여기 지하에 있는 클럽으로 가려는데요.”
이름도 없는 클럽을 지칭하며 머뭇거리는 꼴이 더 한심해 보일까 봐 말끝에 힘을 더했다.
“클럽요 ”
“네.”
카운터 직원은 서진을 유심히 아래위로 살피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 잠시 후 검정색 양복을 입은 말끔한 사내 한 명이 올라왔다.
“무슨 일로 오셨죠 ”
“일행이 있어서요.”
“실례지만 어느 분이시죠 ”
“저…….”
서진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세림 최 상무님. 한성 신 이사님과 같이 있다고.”
“아, 네. 따라오세요.”
남자의 얼굴에 설핏 스치는 조소에 서진은 입술을 다시 한 번 꼭 다물었다.
코너를 돌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하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메인 엘리베이터보다 더 화려하게 장식된 엘리베이터다. 카드 키를 인식시키고 지하 2층 문이 열리자 남자가 앞장섰다. 붉은 페이즐리 무늬가 덮인 고급스런 카펫이 연결된 복도를 따라가며 서진의 생각도 판단도 멈추었다. 단지 하나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최한혁을 봐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코너를 꺾어 들어가자 검정색 문이 나왔다. 지하 2층에서 본 유일한 문이다. A, 문 앞에 박혀 있는 작은 금색 글자가 전부였다. 무거워 보이는 문을 노크하자 ‘뭐야!’ 취기에 젖은 큰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90도 각도로 절하고 물러가는 남자를 뒤로하고 서진이 천천히 룸 안으로 들어왔다. 겉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넓고 화려한 공간이었다. 당구대에서 큐를 잡고 있던 남자 둘을 지나, 서진은 곧장 응접세트가 배치된 공간으로 걸어갔다. 룸 안의 웃음소리가 멈추자 밴드의 연주 소리만 정수리에 얼얼하게 꽂힌다. 서진을 향해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얼굴과 몸이 차례로 샅샅이 관찰당하는 기분이다.
“어, 누구시죠 ”
서진은 누군가가 던진 소리를 듣고서 여러 시선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직사각형 흑경 테이블, 화려한 꽃 장식, 줄지어진 양주 병들, 반쯤 비워진 안주들. 머리 위에 자그마한 할로겐 조명의 빛이 길게 뻗어 서진의 눈을 찔렀다. 찡그려 가늘게 뜬 눈으로 제일 중앙 정면으로 한혁의 얼굴이 보인다. 열 기운과 빈혈 때문에 초점이 자꾸만 흐려진다. 눈앞에 색채들이 뭉개지고 등으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서진은 이마에도 배어난 땀을 손등으로 눌렀다. 잠깐 한쪽 입가를 말아 올리던 한혁은 핏빛으로 붉은 벨로아 소파 등받이에 한쪽 팔을 올려놓고 서진을 응시한 채 아무 말이 없다. 옆구리에 닿을 듯 붙어 앉은 여자는 핫핑크 색 칵테일 드레스 차림이었다. 여자의 어깨에 달린 큐빅 장식이 조명을 받아 어지럽게 반짝였다. 여자는 서진을 향해 눈웃음을 흘리더니 좀 더 바싹 붙어 앉았다.
“한혁이 찾아오신 분. 성함이 뭐더라. 암튼 이리로 들어와서 한잔하시죠.”
서진과 통화했던 지성은 한혁을 향해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잔을 들어 보였다.
서진이 얼어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테이블과 소파 사이로 들어서자 지성이 엉덩이를 들썩거려 한혁의 옆자리에 공간을 만드는 시늉을 했다. 굳이 그의 노력 없이도 가운데에 앉아 있는 한혁의 옆자리에 서진이 앉을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공간이 남아 있었다. 서진은 열기로 후들거리는 몸에 힘을 더하며 앉아 있는 사람들의 무릎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걸어갔다. 하얗게 내놓은 여자의 허벅지가 보기 불편하여 고개를 똑바로 들고 움직였다. 그러다가 뭔가에 걸려 휘청하였다.
“아, 미안.”
금색 가죽 줄이 감싸고 있는 샌들 아래 붉은 페디큐어를 한 보드라운 맨발이 까닥거리고 있었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어딘가에서 터져 나왔다. 일부러 길게 빼내 꼰 다리를 무표정하게 보던 서진은 몸을 틀어 한혁의 앞에 섰다.
신지성 이사는 두 사람을 흥미로운 구경거리인 양 바라보았다. 화장기도 없는 얼굴로 하얗게 질려 들어오는 여자. 단정한 이마선과 콧날, 지적인 인상을 더하는 쌍꺼풀이 보일 듯 말 듯 길고 큰 눈에 도톰한 입술. 목소리로 상상했던 모습보다 더 흥미로웠다. 그 여자의 반팔 소매 블라우스 아래 하얀 피부가 긴장으로 조금씩 소름이 돋아 있었다. 여자는 꼭 넘어질 것만 같은 모습과는 달리 한혁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를 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해.”
“앉아라.”
한혁 옆에 달싹 몸을 붙이는 여자의 하늘거리는 핑크색 원피스 자락을 보다가 서진은 그녀가 앉은 반대편 옆자리에 앉았다. 한혁이 소파 등받이에 걸쳤던 팔을 내리며 옆에 붙어 있던 여자를 떼어 내었다. 스트레이트 잔에 위스키가 주르륵 흘러 들어갔다.
“한 잔 할래 ”
한혁은 서진 앞으로 잔을 밀었다. 여자의 손은 이제 와이셔츠 위로 윤곽을 드러내는 탄탄한 그의 팔에 나른하게 머물고 있다. 서진의 시선이 반짝이는 붉은 립스틱으로도 어린 나이를 다 감출 수 없는 여자의 얼굴에서 멈추었다.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서진의 눈을 마주하자, 여자의 얼굴에 좀 전과 같은 웃음이 사라졌다.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려 단숨에 마셔 버리는 서진을 보며 그녀는 한혁에게 머무르던 손을 내렸다. 혀끝부터 식도를 따라 흐르는 쓰디쓴 뜨거움에 서진은 몸을 떨었다.
“천천히 해라.”
한혁은 서진의 빈 잔에 양주를 채워 넣으며 말했다. 지성도 룸 안의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서진와 한혁의 모습에는 관심 없다는 듯 각자의 관심사에 열중하였다. 밴드의 연주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높아졌다. 두 번째 잔마저 깨끗하게 비워 내자 위장 전체가 콕콕 찌르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한기가 든 것처럼 으슬거리던 몸에도 더운 피가 돌았다.
“그만하고 이제 나가.”
“싫어.”
한혁이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서진을 끌어당겼다. 몸이 기울어지며 바싹 가까워졌다. 귓바퀴에 닿을 듯 붙은 입술에서 소름이 일도록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나가. 여기서 네 얼굴 사람들한테 알려 좋을 게 없잖아.”
입안까지 뜨거운 핏물이 차오르는 것 같다. 서진은 한혁을 뿌리쳤다. 이를 다물고 꾹꾹 눌러 말을 밀어냈다.
“싫어, 안 나가. 다 보라 그래. 명함 돌리고 통성명도 할까 ”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한혁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서진의 팔을 움켜쥐었다.
“나와.”
한혁이 거칠게 서진을 잡아끌어 내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 ‘휘익’ 휘파람을 불어 댔다.
“최 상무, 좋은데.”
뒤이어 룸을 메우는 웃음소리는 문이 소리 나게 닫히면서 잦아들었다.
“놔.”
남자의 완력에 서진은 버틸 수도 없이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였다.
“놔! 내가 갈 테니.”
한혁이 손을 풀자 서진은 휘청거렸다.
“당장 나가.”
“이야기 좀 해.”
“뭘 ”
“집 앞에 왔었어 ”
한혁은 질린다는 표정이다.
“오해하지 마.”
“오해라, 내가 무슨 오해를 어떻게 한단 말이지. 설명해 봐.”
낮은 목소리가 경직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네가 뭘 봤는지 모르지만 왜 꽃다발을 버리고 갔는지…….”
갑작스레 양어깨가 잡혔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눈에서 검푸른 불꽃이 터진다. 입술을 밀고 나오는 목소리는 거친 숨소리조차 없이 느리고 조용하여 더욱 두려웠다.
“뭘 봤냐고. 뭘, 봤을 거 같은데……. 정기훈과 끌어안고 입 맞추고 있는 너를 봤어. 거기에 오해할 여지가 뭐가 있을까. 5년을 기다린 그 지독한 인간이랑 잘해 보라 몇 번을 말해. 내가 순애보에 기립 박수라도 쳐 줄 테니.”
“그렇지 않아. 넌 왜, 왜 그렇게 나를, 내 마음을 몰라!”
한혁이 서진의 어깨를 밀치듯 놓았다. 서진의 몸이 무게 없는 인형처럼 벽에 부딪혔다 앞으로 튕겼다. 흔들리는 몸을 곧추세우며 서진은 한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네 맘 말해 봐. 뭐야 절절하게 안겨서 키스하다가 다시 날 찾아 이런 자리까지 와서 사람 곤란하게 하는 그 마음, 한번 들어 볼게. 말해 봐.”
눈 속에 일렁이는 불길을 보며 서진은 목소리를 잃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너랑 정기훈 사이 알려지면 어떻게 할 셈인데 여기 와서 너, 나를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더러운 놈이라고……. 어차피 그딴 소리 상관도 없지만 말야, 이제 제 당숙 여자도 건드리는 놈이라고 광고하려는 거야 나를 도대체 얼마나 쓰레기로 만들어야 해.”
기어이 서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꺼져. 네가, 너 따위가 뭔데 들어와. 왜 나를 헤집고 흔들어! 왜, 내 인생에 끼어들어!”
말은, 잘 벼른 도끼날이 되어 서진의 정수리부터 가슴까지 단번에 찍어 내렸다. 말을 뱉는 한혁도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호흡을 가다듬지 못해 가슴이 들먹이고 있었다. 서진은 경련이 이는 입술을 힘을 다해 떼어 냈다.
“한혁 씨 찾아 온 일, 그렇게 곤란하라고 그런 거 아니야. 바닥에 버려진 꽃다발 보는 순간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못했어. 그래……. 맘에 걸렸던 건 사실이야. 같이 있는 사람들 중 분명 기훈 오빠 아는 사람도 있겠지.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더 왔어.”
서진은 이를 악물어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희뿌연 시야에 겨우 잡히는 한혁의 표정을 살필 수 없다.
“나 그렇게 하면 더, 기훈 오빠랑은 절대 안 될 거니까. 한혁 씨랑 안 된다 해도,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어.”
“미치겠다.”
한혁이 주먹을 쥐어 벽을 내리쳤다.
“알았어. 소원대로 확실하게 해 주지. 기훈 형한테 못 가게.”
두 사람을 살피며 머뭇머뭇 다가서는 웨이터에게 한혁이 지시했다.
“들어가서 내 물건 내오고 룸 키 가져와.”
서진의 눈에 차오르던 눈물이 말랐다.
“소원대로 해 줘. 오늘, 여자는 너로 해 줄게. 어차피 누구든 상관없으니.”
한혁은 바싹 긴장하는 웨이터에게서 그의 윗옷과 호텔 방 키를 잡아채듯 받아 들고 서진을 엘리베이터로 밀어 넣었다. 작은 사각의 공간은 무겁게 침전되었다. 놀랍게도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피는 혈관을 따라 흐르며 폐에도 공기는 공급되고 있었다. 숨이 끊어질 듯 아픈데 끊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서진은 눈을 들어 한혁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조차, 원망보다는 아픔인 사람이다. 다만 아플 뿐이었다. 일렁이는 고통 속에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눈을, 네가 준 상처만큼 깊게 할퀴어 버리겠다고 이를 악무는 모습은 가슴 밑바닥을 헤집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한혁이 갑자기 서진의 어깨를 잡았다.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는 경고하였다.
“윤서진, 그딴 표정으로 보지 마. 네 말, 눈, 마음 이제 단 하나도 안 믿어.”
서진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혁은 파랗게 굳어 버린 서진의 얼굴 따윈 관심도 없는 듯 무자비하게 끌어당겼다. 서진은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끌고 가지 않아도 내 발로 가.”
서진은 흐트러지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초록빛 불이 깜박이며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한혁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섰다. 서진의 뒤로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서진은 문가에 선 채로 한혁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윗옷을 테이블에 던지고 일인용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는 한혁을 보았다. 한혁이 오른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지탱하고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눈을 감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한혁은 몸을 구부린 채 움직임 없이 어깻숨만 쉬었다. 창을 통해 도로를 지나는 차 소리만 희미하게 공간을 진동시켰다. 방 안의 무거운 정적이 서진을 차곡차곡 완전히 잠식시켰을 때, 한혁이 지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가. 보기 싫어. 정기훈한테…… 가 버려.”
시선은 여전히 서진을 향하지 않는다. 눈을 가린 손 아래로 꾹 다문 입술이 보인다.
서진은 더 이상 한혁을 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천천히 손을 올려 흰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마음과는 다르게 고열로 달아오른 몸이 후들거렸다. 감각이 둔해진 손이 몇 번이나 같은 단추를 겨우겨우 쥐어 가며 풀어 내리는 동안 저릿저릿 발끝부터 올라오던 감각들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벌어진 틈으로 한기가 들어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거의 다 풀어헤쳤을 때, 한혁이 고개를 들고 서진을 보았다. 경악스런 얼굴이다.
“너, 뭐 하는 짓이야!”
“이러려고 온 거 아니야 ”
“그만둬.”
“내 말도 눈도, 마음도 못 믿는다니 그럼 다른 걸 믿어 봐.”
하나 남은 단추를 재빠르게 풀었다. 서진의 손에서 블라우스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젠장, 그만두지 못해 ”
한혁은 자리에서 일어서 저벅저벅 서진에게로 걸어왔다. 서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서 바닥에 떨어진 블라우스를 거칠게 집어 던졌다. 서진이 한혁의 와이셔츠 자락을 붙잡았다.
“내가, 미안해. 미안해, 한혁 씨. 이렇게 엉망으로…… 그렇지만 오해야. 정말이야. 그것만 믿어 줘. 제발…….”
한혁의 아랫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싫어. 안 믿어. 지금까지 나한테 했던 말, 행동, 네 눈, 모조리 안 믿어. 승부욕 강한 윤서진 씨. 너는, 나를 한번 완전히 무너뜨려 보고 싶었던 거야. 이제 만족해 ”
한혁은 여태 붙잡고 있는 서진의 손을 차갑게 털어 내고 뒤돌아섰다. 냉정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한혁이 소파 등받이를 짚고 숨을 몰아쉬더니 지갑을 열었다. 명함을 찾는 손이 경련이 일 듯 자잘하게 떨렸다. 붙어 있는 몇 장의 명함들 사이에서 원하는 명함이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듯 몇 번이고 다시 꺼내더니, 한 장의 명함을 집어 들고는 핸드폰 키패드를 툭툭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