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50
50. 기차에서 만난 단발 소녀
스르륵, 액정을 훑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최근 경남 지역에 게이트 출현이 잦다는 것은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다.
은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파심에 동생 휴대폰에 위치 추적 어플을 깔아 두었는데, 마지막으로 좌표가 잡힌 곳이 여기, 부산 자갈치시장 근처였습니다.’
바깥 풍경은 시선으로 쫓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열차는 곧 대전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오늘도 저희 KTX를 이용해 주신 고객 여러분, 고맙습니다. We will soon be arriving at Daejeon Station──.」
경쾌한 BGM과 함께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대전이라면 반쯤 온 건가? 전광판을 확인한 은하가 다시 휴대전화에 시선을 돌렸다.
[검색] ▶ 부산역에서 자갈치시장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메시지에서 제휘는 자갈치시장에 도착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라면 분명 그곳일 것이다.
‘……사실 이럴 필요까지는 있을까 싶지만.’
은하는 무릎 위 열차 티켓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금 시간이면 방송국에서는 한창 녹화가 시작된 참이겠지. 매니저와 연락이 되지 않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테니, 아마 곧 실버문과 시우 측에도 연락이 갈 것이다.
즉 굉장한 해프닝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은하는 녹화를 펑크 내면서까지 부산행 열차 티켓을 끊었다.
[박 매니저] [오후 1:02] 도오ㅏ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아무래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은하의 그런 예감은 언제나 맞아떨어졌다.
물론 제휘는 제 몸 하나 정돈 충분히 간수할 수 있는 성인이었다.
다만 나이라는 것은 게이트 내에서는 유효하지 않았다.
만일 여동생을 쫓기 위해 게이트에 뛰어드는 미친 짓을 한 것이라면, 비각성자인 제휘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을 터. 심지어 그것이 언노운 게이트라면 더더욱.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더는 주변의 누군가가 게이트나 몬스터에 의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큰맘 먹고 새마을호보다 빠르다는 KTX를 선택한 까닭은.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편도 요금은 무려 10만 8천 9백 원. 왕복이면 20만 원이 넘는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물가가 올랐다지만 비행기도 아닌 기차 주제에 더럽게 비쌌다. 매사에 초연한 은하조차 멈칫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이 속력이라면 부산까지 3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비싼 데에는 비싼 이유가 있는 걸지도.
“이거 좀요.”
한창 지식인을 통해 부산 정보를 입수하고 있는데, 통로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은하의 양산을 가리켰다.
“요기, 내 자린데.”
방금 정차한 대전역에서 올라탄 승객인 듯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단발머리에 핑크색 야구 모자를 눌러쓴 그녀는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였다. 테디 베어가 그려진 항공 점퍼가 계절에 맞지 않는 인상이었다.
은하는 옆자리에 두었던 검은 양산을 치워 발 아래로 내렸다.
“감사용.”
털썩.
자리에 앉은 그녀는 입고 있던 항공 점퍼 지퍼를 주르륵 내렸다. 덥긴 더운 모양이다.
“어라. 언니, 혹시 컨셉 헌터?”
휴대전화에 시선을 못 박고 있던 은하가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진달래처럼 짙은 분홍의 눈동자가 은하를, 정확히는 은하가 입고 있는 옷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짧게 답한 은하가 다시금 휴대전화를 향해 시선을 깔았다. 그런데 그로써 단절될 줄로만 알았던 대화는 놀랍게도 아주 자연스레 이어졌다.
“응? 아니야?”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레스 차림에 까만 양산을 들고 다니면서 컨셉 헌터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정말 컨셉 헌터가 아니라고?”
“……그렇게 알려져 있기는 한데.”
“아, 역시? 나 컨셉 헌터는 TV에서만 봤는데. 직접 보니까 신기하다.”
컨셉 헌터를 직접 만난 소녀의 눈이 호기심에 빛났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게 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하나 있었다.
“어때? 돈벌이 좀 괜찮아요?”
“…….”
스르륵, 은하가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현대 상식에 무지한 은하조차도, 초면인 상대에게 수익을 묻는 것이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음, 역시 기업 비밀? 그래도 사알짝만 알려 주면 안 돼요? 이거 줄 테니까.”
소녀는 부스럭부스럭 주머니를 뒤적여 사탕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빨간색, 하나는 노란색이다.
두 사탕을 심각한 얼굴로 번갈아 보던 소녀가 결심한 얼굴로 불쑥 노란색 사탕을 내밀었다.
“좋아. 언니는 특별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몬맛으로 주지 뭐.”
“…….”
“음, 그럼 두 개 다 줄게요. 콜?”
……풋. 은하가 저도 몰래 웃음을 흘렸다. 선심 쓰듯 사탕 두 개를 동시에 건네는 소녀가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재밌었다.
“……따로 수익은 없고, 조력 길드에게 계약금을 받기로 했어.”
“아. 그런 거구나.”
소녀는 조력 길드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았다. 그 정도 상식은 있는 모양이었다.
입안에서 도르륵 사탕을 굴리던 소녀가 반가운 듯 미소 지었다.
“계약했다는 걸 보니까 그럼 언니도 프리 헌터겠네?”
“프리 헌터?”
“프리랜서 플러스 헌터! 신조어인데, 몰라요?”
몰랐다. 은하는 소녀가 건넨 사탕 포장지를 뜯고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레몬향이 입안 가득 기분 좋게 퍼졌다. 사탕을 먹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은하는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옆자리 소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주변이 없는 은하를 상대로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 가는 것을 보니, 소녀도 보통내기는 아닌 듯했다.
“언니도 한탕 하러 부산 가는 길이죠?”
한탕 하러 가는 건 아니지만 부산에 가는 것은 맞았다. 은하가 “응.” 하고 대답하자 소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도 돈 냄새 맡을 줄 아는구나? 이번에 두 군데 정도만 대충 뛰어 놔도 당분간은 생활비 걱정 없을 듯. 언니는 어디 가려고?”
“자갈치시장.”
“엥. 자갈치시장?”
돌연 소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 생각하더니 그녀가 한 톤 목소리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
“언니 소문 못 들었어요?”
“언노운 게이트일지도 모른다는 거라면, 들었어.”
소녀는 담백하게 답하는 은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데, 언니 랭크가 뭔데요?”
“F급.”
“아아. F급, 그러면…….”
멈칫.
“으엑! F그읍?”
소녀의 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쩍 벌어졌다. 우물거리고 있던 딸기맛 사탕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커흠! 크허음!”
주변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이크, 소녀는 슬쩍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언니, 아무리 현실이 팍팍하고 삶이 고단해도 그건 아니지. 언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아직 따듯하다고.”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산 것 같았다. 단발 소녀는 열심히 은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라도 괜찮다면 이야기는 들어 줄 수 있어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탁.
제 어깨를 잡고 흔드는 손을 쳐 낸 은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이야.”
“사람?”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조금 오해가 풀린 모양이다. 아까와는 달리 한층 평온해진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케이. 대충 무슨 얘긴지 이해해쓰. 아, 그래도…… 으으으음.”
소녀는 곤란하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데굴데굴 시선을 굴리던 그녀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비추. 어차피 입장조차 못 할걸요? 거기 이미 불멸 길드한테 소탕권 넘어갔다고 하던데.”
“……불멸 길드?”
“제천대성 길드요.”
“제천대성이 누군데?”
“헐. 대박.”
소녀는 마치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은하를 응시했다. 컨셉 헌터들은 그런 것도 모르나? 아까 보니까 프리 헌터라는 단어도 모르고.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데, 어쩌면 엄청난 동안일 뿐이고 실제 나이는 상당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소녀는 검지를 쭉 세우고 말했다.
“제천대성 유환! S급 헌터잖아요. 그 사람이 부산뿐만 아니라 경남권 버스트 게이트 싹쓸이할 거라고 선포했는데,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보니 그런 기사를 본 것 같기도 했다.
“S급이 나선 것도 그렇고, 경매 진행이 안 된 것도 그렇고, 진짜 언노운 게이트일 가능성 X라 높다 이거예요.”
“상관없어.”
“아니, 언니 내 말 듣긴 한 거임? 소탕권 넘어갔다니깐? 아마 내일 아침부터 공략 시작할걸?”
그녀의 말에 은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다지 심각한 얼굴은 아니었다. 턱을 두어 번 쓸던 은하가 초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전에 들어가면 되겠네.”
“……뭐?”
돌연 소녀가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하하하! 진짜 재밌는 언니네.”
그녀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앞 좌석 시트를 팡팡 치며 폭소했다.
“학생, 에티켓 몰라요, 에티켓?!”
결국 참다못한 앞 좌석 승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소녀는 “헙.” 하고 입을 다물더니,
“재성함다.”
배시시 웃었다.
참 이상하게도 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은하의 입가도 느슨해졌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소녀지만,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몇 년 전…… 아니 삼십여 년 전, 은하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반에 저런 타입의 동급생이 있었다.
성적도 별로 좋지 않고 산만했지만 학급 내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하는 데다 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아이였다.
만일 은하가 고등학생 당시에 이 소녀를 알게 되었다면,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열차는 곧 부산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오늘도 저희 KTX를 이용해 주신 고객 여러분, 고맙습니다. We will soon be arriving at Busan Station──.」
시간이 흘러 어느덧 부산역에 도착했다.
은하는 양산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발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지이익.
벗어 두었던 항공 점퍼를 입고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린 그녀는 힐끗 은하를 바라보았다.
“언니, 진짜 가게? 다시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되겠어요?”
이 겁 없는 F급 컨셉 헌터가 꽤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은하의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갈 거야.”
단호한 대답에 “으음.” 짧게 신음을 흘린 소녀는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결국 팟! 고개를 들었다.
“뭐 내가 말릴 일은 아니지. 그래도 이것도 인연이니 한 가지 팁을 줄게요.”
열차에서 내리기 직전까지 소녀는 은하의 뒤를 총총 따랐다.
“만에 하나 불멸 길드랑 마주치게 되더라도 절대 결투는 하지 마요. 절대 절대로. 특히 털북숭이 아저씨는 조심해요. 오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언노운 게이트에 관한 팁이 아니었다.
결투? 털북숭이? 뚱딴지같은 조언에 은하가 스윽 고개를 돌렸을 때.
“그럼 빠빠이!”
공기에 녹아든 아득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발걸음 사이로 파묻혔다. 단발 소녀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팔랑─
구겨진 사탕 포장지만이 공중에서 두둥실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