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cult leader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20
제220화 – 본편 완결 – 김연수는 비범한 게임 폐인이었다. 뭐 예전에는 가끔 직장을 잡고는 했으나 가상현실게임, 『사이비 교주 시뮬레이터』를 접한 이후로 그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다.
게임사에서 대회까지 열어서 해피 엔딩을 찾는 사람에게 상금을 준다고 했으나…….
그건 결국, 사기로 밝혀졌다.
클라이언트를 뜯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 것이 없다고 했으나 게임사는 호언장담했었다.
그래서 안심한 사람들은 다들 그 게임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런 대회의 끝에, 그들이 한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게임에는 해피 엔딩이 없었다. 그간 달려온 김연수의 허탈감은 너무도 컸던 것이었다.
그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꿈속에서 그는 어느새 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응?’
뭔가하고 보니, 아무런 이유 없이 대뜸 그런 능력이 생겨났던 것이었다. 그는 꿈을 조종하는 능력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아서 꿈속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현실의 그는 점점 자금도 말라갔으며 영 좋지 못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꿈속에서는 무적의 존재였으며 동시에 주인공이었다.
꿈을 꾸면 꿀수록 현실은 점점 더 구체화되어갔고 도저히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자 그는 코마 상태에 빠졌다.
그는 곧 병원에 옮겨졌다.
바깥에 대해 인지할 수는 있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는 계속해서 꿈을 가공했다.
그리하여, 그는 관리자와 선각자를 만들고, 원탁과 렘 노인, 그 제자들 등을 만들어냈다.
이 설정은 원본 게임에는 없던 설정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사이비 교주 시뮬레이터를 기반으로 한 꿈속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 세계를 무한하게 시뮬레이션해서 세상을 계속 반복시키면서 놀았다.
슬슬 질릴 때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 자신의 기억을 담은 새로운 주인공을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자신의 기억을 담은 새 주인공이 빙의된다는 설정이다. 근래에 유행한 웹소설 설정이랑 똑같으니 재밌을 것 같네.
그리고 이왕 빙의시키는 김에, 이 세상의 운명을 뒤틀어보는 건 어떨까? 온갖 전투를 치르고 경험을 겪게 된 끝에, 결국 4차원의 벽을 뚫고 그를 만들어낸 창조주와 만나게 되는 것이지.
-어때?
샤를은 그 이야기를 듣고 눈이 흔들렸다. 이게,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뭐야, 그럼……나는.”
-넌 내가 만든 주인공이야.
샤를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래서.”
-응?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뭐야, 좀 더 당황하거나 놀라도 괜찮은데. 너무 냉철한 성격으로 만들었나.
“이 이후에 나와 만나서 뭔가 하겠다는 것이 있었잖아.”
-어, 그게 말이야. 너와 만난 뒤에는 그다음 스토리는 생각 안 해뒀거든. 일단 소원을 들어줄까 하는데.
“그렇게 하도록 해.”
-어?
샤를은 들뜬 김연수의 표정을 보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나, 어차피 더 충격받을 일도 없었다.
“그래. 난 이제 너의 꿈으론 만족할 수 없게 되었거든. 우리에겐 우리의 현실이 필요해.”
-…….
“꿈을 포기해.”
-내가 공들여서 만든 건데.
아이처럼 우울해하는 김연수의 어조에서 그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거야. 그리고, 여기가 네 이야기의 끝이다.”
-……후. 그래. 결국 놔줘야할 때도 있는 거지.
김연수는 그래도 싱긋 웃었다.
-아무튼, 그간 즐거웠어. 널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거든.
“그런가.”
-응.
김연수는 샤를을 그대로 꿈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잘 지내.
“너도.”
두 사람은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작별했다.
샤를을 보내자마자 김연수는 그대로 눈을 떴다.
“즐거운 꿈이었어.”
그리고나서 김연수는 다짐했다. 샤를의 얘기를 보면서 느꼈다.
“성형하러 가야지.”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얼굴이 장땡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잘생기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 전에.”
김연수는 자신의 꿈을 뽑아낸 뒤, 작은 유리구슬에 보관했다. 유리구슬 안의 소용돌이 치는 무언가가 보였다. 이것이 그가 만든 세계다.
“더는 지켜볼 수 없겠지만, 이러면 그 세계는 안전할 거야.”
그 구슬 옆에는 문글로즈가 그려져 있는 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 카드를 보면서 김연수가 말했다.
“좀 기다려봐. 널 어떻게 구체화할지는 생각 좀 해볼 테니까.”
그의 능력이 좀 더 강해 진다면 가능할 것이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
샤를은 눈을 떴다. 어느새 그는 자신의 침실에 누워있었다. 절대자-김연수와의 대담은……. 마치 신기루 같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이 보인다.
헤르메스의 명령을 받고 떨어져 내라고 있었던 그 거대한 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었다.
렘 노인도, 문글로즈도 없었다. 석판의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꼬르륵.
“어라, 배고픈데.”
뱃속에서 나는 소리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샤를은 반신으로서 힘을 행사해왔다. 그런데,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존자와의 연결점도 엄청나게 멀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심상 세계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프세요?”
“어? 플로나?”
어쩐 일인지, 플로나가 샌드위치를 들고 샤를의 침실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설명을 해줄래? 내가 정신을 좀 놓고 온 것 같아서.”
“설명이요? 음.”
샤를의 입에 손수 샌드위치를 넣어주는 플로나의 손에서 샌드위치를 넘겨받은 샤를이 입을 오물거리면서 먹자 플로나가 말했다.
“그 의식을 치른 뒤에 그냥 없어졌어요.”
“우물우물. 없어져?”
“네. 모든 게 꿈이었다는 것처럼요. 주문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이전처럼 제대로 주문을 쓰지도 못했고, 기이한 현상도 점차 사라졌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시간이 꽤 지났다는 느낌이 드는데.”
“네. 샤를 님께서 잠드신 지 벌써 7일째거든요.”
“뭐? 그렇게나 오래 지났다고?”
이상한 시간의 흐름에 샤를이 침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무튼, 이제야말로 끝났어. 모든 게.”
앞으로는 세상이 멸망한다거나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샤를은 비로소 이제야 자신의 삶을 되찾은 것이었다.
좀 기운이 풀렸다.
“잘 먹었어. 고마워 플로나.”
“저도 먹고 싶은 게 있는데.”
“응? 저녁 안 먹었어?”
“샤를 님을 간호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구나. 미안해. 가서 뭐 좀 먹고 와.”
“배는 안 고픈데요.”
“응? 그럼 뭘 먹겠다는…….”
샤를은 왠지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플로나의 붉은 눈에서 안광이 튀어나오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
『해피 엔딩 이후의 세계』라.
샤를은 늘 갈구해왔던, 자신의 등을 계속해서 밀어댔던 조급한 마음이 사라졌다.
이전보다는 좀 더 느긋해졌고, 조금 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래서 그는 근래에 들어서 책을 집필하고 있었다.
돈이 많이 생긴 이후부터는 취미 생활이랄까.
샤를은 이야기를 썼으나, 발간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그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벌써 엔딩 이후 – 20년째니까.
그는 절대자와 만난 이후로 점차 늙기 시작했다. 배고프고, 졸리는 생리적인 활동이 계속 일어났다. 반신의 몸뚱이가 아니라, 이제는 늙어 죽는 필멸자의 몸이었다.
그래서 수염도 기르고 있긴 했다.
절대자와의 대담 이후, 플로나와 결혼해서 샤를은 3남 1녀를 보았다. 더는 비밀 세계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삶을 살기로 했다.
무명 교단은 에세나에게 물려주었다. 원래부터 에세나가 담당하다시피 했으니, 에세나도 기회가 되면 다른 자에게 넘겨줄 것이다.
근래 들어 비밀 세계의 힘이 점점 약해져 갔다.
아직까지도 사악한 것들, 신비스러운 주문이나 능력이 남아있긴 했으나 그건 현실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능력의 크기가 줄어들자, 영성자들의 숫자도 덩달아 줄었다.
이 추세라면 60년 이내로 완전히 주문이나 마법 같은 것들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계와의 연결도 거의 사라졌다. 이제 괴물이나 이족은 현실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돈 많은 부자의 삶을 영위하던 샤를은, 자신이 아는 아이디어를 이용해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다.
아이디어는 그가 제공했으나 사실상 돈을 불린 건 유마지만 뭐, 어차피 나중에 챙겨줄 생각이다.
다만 좀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다. 이 세상은 지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역사였다.
그러니 지구의 1930년대라…….
“이제 곧 2차 세계 대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 세계도 마찬가지로 1910년대에 1차 세계 대전이 한 번 터졌다.
끔찍한 전쟁의 참화는 비밀 세계와 완전히 연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 전쟁에서 샤를은 군인으로 복무하진 않았지만, 사업가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세계 대전의 참혹함을 보아왔다.
그는 그 전쟁을 말리고 싶었지만, 역사라는 건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샤를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요? 여보?”
플로나가 옆에서 다가왔다. 아이들의 엄마가 된 플로나는 이전의 광기가 조금 누그러든 듯했으나 여전히 샤를은 그녀에게 잡혀 살곤 했다.
“응, 아니야. 애들은?”
“다들 자요. 근데 문제가 있어요.”
“뭐가?”
“프레드가 전쟁이 난다면 입대하겠다고 말해요.”
“뭐라고?”
샤를은 눈썹을 찌푸렸다. 프레드는 그의 첫째 아들이었다. 이제 곧 20살이 되는 아이였는데.
“절대 안 된다고 해.”
샤를은 그렇게 말하고는 플로나를 옆으로 끌어당기면서 같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런 삶이 그가 바라던 것이었다. 이런 소소하고 가끔 화도 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행복한……. 그는 소원을 이뤘다. 해피 엔딩의 대가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하지만 이후, 전쟁이 터지자마자 프레드가 집에서 가출해서 입단하는 바람에 샤를을 끔찍하게 고뇌에 빠뜨리게 되지만 그래도, 그건 앞으로 몇 년 뒤의 이야기였다.
이어서 외전이 연재됩니다.
외전 1화 – 프레드 헥센은 헥센 가문의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이제 20살이 된 그의 키는 190cm가 넘는 장신이다. 이 부분은 누구도 그 이유를 모른다고. 친가도 외가 쪽도 이렇게 키가 큰 사람은 없었으니 프레드 혼자만 돌연변이인 셈이다.
얼굴은 아버지를 닮아서 말끔한 인상이었고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며 눈동자는 금색이었다. 금색 눈도 일종의 돌연변이겠지.
어릴 때부터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지만, 그는 그의 저택을 돌아다닐 때면 늘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친숙한 저택에서 위화감을 느낀다니 표현이 이상했지만 실제로 그랬다.
저택 내부를 돌아다닐 때, 이상할 정도로 오싹오싹했다.
가끔 무언가 돌아다니는 것 같기도 했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한데 이상한 것은 자신만 그런 것을 느끼는 듯했다. 동생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의례 어떤 가정이든 불화가 없을 수는 없으나,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하고 싶어 하는 건 모두 다 들어주곤 했다.
프레드가 유년사관학교에 들어간 것도 그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어렸을 때부터 삼촌에게 사업체 몇몇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서 경영해보았지만 아무래도 프레드 본인은 경영에 재능이 없는 것 같아서 걱정하던 차에 유년사관학교 모집을 보고 뭔가에 이끌리듯 그 학교에 들어갔다.
부모님은 다른 명문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프레드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었다.
그게 벌써 5년 차. 해마다 집에 돌아오곤 했지만, 이번에는 졸업하고 나서 20살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었다.
“음. 돌아왔군.”
수도 인시그니아보다는 못하지만, 메트로폴도 그럭저럭 발달된 도시였다.
그들의 저택은 메트로폴 교외에 있었으나, 도시 전체가 조금씩 확장도면서 메트로폴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공기.”
메트로폴 전체에 도는 이상한 공기…….
이 도시는, 다른 도시와는 선명하게 다르다. 도시 자체에 뭔가 기이한 냄새 같은 것이 있다.
위화감은 저택에 돌아오면서 더 선명해졌다. 친밀한 저택이지만 역시 위화감을 품고 있다고 할까.
“프레드 도련님 오셨습니까?”
집사 제이크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많이 늙어서 60대의 나이지만 아직도 허리는 꼿꼿하고 정정하다.
“제이크!”
프레드는 제이크에게 가서 포옹했다. 제이크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주인님 내외는 지금 메트로폴을 비우셨습니다. 신대륙에 가셨답니다.”
“편지로 얘기는 들었어. 그랜드 캐니언인가? 그걸 보러 가셨다면서?”
두 분은 여행이 취미다. 아무 이유 없이 잘 지내다가 줄곧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이 잦다.
하지만 장남이 5년 만에 집에 돌아오는데, 그래도 있으면 좀 덧나나.
그렇게 툴툴거린 프레드는 자신의 짐을 하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맡겼다.
옆에 있던 하인들이 프레드의 짐을 들고 사라지는 동안 프레드가 제이크에게 물었다.
“잘 지냈어?”
“물론입니다. 프레드 도련님이야말로 1년 동안 늠름해지셨군요. 근데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하하. 나야 늘 그렇지. 다친 데는 없고.”
풋볼을 하다가 뼈가 박살 난 것 말고는 뭐 별 것 없다. 금방 붙기도 했고.
“제이크 나 배고파.”
“하인들을 시켜서 준비하겠습니다.”
프레드는 웃으면서 저택으로 들어갔다. 안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예술품이 몇 개 좀 늘어나고 가구의 위치가 변한 걸 빼면 저택은 예전이랑 똑같았다.
거실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생들은?”
“두 분 도련님은 곧 귀가하실 겁니다. 에르메스 아가씨는 주인님과 함께 여행을 갔고요.”
“그럼 이 저택에 있는 건 나 혼자뿐이네.”
하인들이 가져온 점심을 먹고 난 후 그는 의자에 앉아서 등을 기댔다. 막상 돌아오고 나니 심심하군.
천성이 밖에 나가는 걸 즐기는 그는 뭘 해볼까 싶어서 생각하던 차에,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응……?”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지금, 뭔가 들리지 않았어?”
이상하다는 듯 돌아보는 제이크를 머쓱하게 일별했다. 그가 듣지 못하더라도 분명히 프레드의 귀에는 지금도 들리고 있었다.
그는 저택을 내부에서 계속 들리는 이 이상한 소리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 방향의 끝에는 아버지의 서재가 있었다. 어릴 때, 동생들과 함께 놀다가 아버지의 서재에 몇 번 들렸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난 이후로부터 프레드는 절대로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하인들도 서재에 들어가는 걸 본 적은 없다. 어째서인지 이 서재는 저택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선 어째서인지 터부시되었다.
‘그러고 보니 왜 다들 이 서재는 안 들어갔던 걸까?’
하지만 지금 들리는 이 기이한 속삭임이 그를 이끌었다. 마치 누군가 귀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도저히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의 언어 같기도 했고 광장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소리가 들리는 데 확인해보지도 않고 나가는 건 프레드의 성미에 어울리지 않았다.
서재는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자 퀴퀴한 책 냄새가 났다.
아버지가 예전에 교수로 지냈다는 것은 프레드도 알고 있었다. 보통 교수들의 서재가 이런 느낌이겠지.
“음. 뭐지?”
별로 이상할 건 없어 보이는데. 프레드는 주변을 더 살펴보았다. 그냥 서재에 있을 법한 것뿐인데?
아버지는 담배도 피지 않았으므로 재떨이나 뭐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터벅. 터벅. 서벅. 터벅.
“응?”
그때, 프레드는 미묘하게 바닥의 소리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앉아서 바닥을 살펴보다가, 카펫을 당겨서 안을 확인해보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다락방 계단 같은 것을 보면서 프레드는 침을 삼켰다. 이걸 확인해봐야 할까?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된다.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비밀의 방이라면 뭔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숨어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지. 한 소리를 듣더라도 내려가 보자.
“우와.”
다락방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비밀스러운 공간을 발견했다.
이 아래에는 조명이 설치되지 않아서 매우 어두웠다. 그래서 그는 라이터를 꺼내서 등불의 대용으로 했다.
여긴 특이한 것들이 가득했다. 기괴한 모양의 석상. 황금으로 도금된 듯한 타로 카드,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이한 생물의 박제품.
심지어 중세 시절 사용했을 법한 거대한 쯔바이핸더나 판금 갑옷도 있었다.
“와, 오싹오싹해졌는데. 무슨 오컬트 그런 건가?”
평소에 아버지가 이런 것에 연관되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프레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특이한 모양의 석상을 발견했다. 이상한 석상이야 비밀 서재 안에는 많았지만 그건 모양이 특이했다.
손으로 쥘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석상은 팔이 3쌍이었다. 입, 눈, 귀를 가린 팔은 마치 무언가를 봉인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아래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그 소리는 이 책에서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석상을 손으로 들어서 옆으로 밀어냈다.
먼지가 쌓인 책을 털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제목은……고 헤르메스 어로 적혀 있었다.
프레드는 고 헤르메스 어를 전혀 할 줄 몰랐으나, 어째서인지 그 제목을 읽을 수 있었다.
“파기나레코르?”
무슨 오컬트 마도서 같은 건가? 프레드는 호기심에 책을 펼쳤다.
“뭐야? 아무것도 안 적혀 있잖아.”
어느새 이상한 귓속말 같은 소리는 사라졌으나 문제가 생겼다.
-어서 와라. 필멸의 존재여.
“……어? 뭐야?”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프레드는 너무 놀라서 굳었다. 이게 혹시 악마와의 계약서 같은 게 아닐까? 그는 악마를 꺼내버린 것이고.
-안녕! 앞으로 네 동료가 될 파기나레코르야─★ 잘 부탁해.
털썩.
프레드는 그 책을 내려놓았다. 본인이 미친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이 정말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책을 내려놓자마자 또 심해지는 웅성거림에 어쩔 수 없이 프레드는 다시 책을 들었다.
그러자 책 위로 조그만 금발 머리의 소녀 한 명이 나타났다. 악마라고 하기엔 너무 가녀린 모습이었다. 요정 뭐 그런 것 같은 건가?
-그렇게 매정하게 날 버리면 어떡해?
“너, 뭐야? 악마인지 악령인지 뭐 그런 거냐?”
-나? 마도서의 자아인데? 너희 아버지한테 못 들었어?
“전혀…….”
-에헴. 그럼 내가 설명해주지.
파기나레코르는 자신이 마도서고, 꽤 오랫동안 샤를과 모험을 했으며 동료였다고 한다.
“근데 왜 여기 있는데.”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옛날 기억은 흐릿흐릿하거든. 마치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프레드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만약 이 파기나레코르라는 녀석의 말이 맞다면 이상하다.
이 녀석은 이상한 조각상에 의해 봉인되어 있었다.
그럼 뭔가 사악한 일을 하려다가 봉인 당한 것이 아닐까?
-음. 뭔가 대단한 존재의 명령을 받고 관리자라는 이름의 직책을 맡았던 것 같은데 음. 뭐 했더라?
“어, 그래 그럼 잘 있어. 나 간다?”
프레드는 얼른 책을 내려놓고 도망치려고 했다.
-잠깐! 나도 밖에 나가고 싶은데? 같이 데려가 줘. 나 이제 못 날아다닌단 말이야.
“내가 왜?”
-이 메트로폴에서 지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지.
프레드는 그 말을 듣고 흘리려다가 마침 도시로 오면서 느껴진 이상한 위화감을 떠올렸다.
그것에 대해 파기나레코르에게 설명하자 책 위로 나타난 소녀가 손을 불끈 쥐었다.
-역시 뭔가 이상하지? 그러니까 나랑 같이 이 도시의 이상한 부분을 파헤치는 게 어때? 난 바깥세상 구경을 하고 넌 너의 궁금증을 풀고 말이야.
이런 위험한 존재와 거래를 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건 파기나레코르를 봉인하고 있던 작은 조각상을 주머니에 넣은 뒤의 일이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프레드는 저택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제이크에게 책에 관해서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갑자기 책에서 소녀가 나와서 말을 건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당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버지에게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그의 아버지, 샤를 헥센의 저택에서 나왔으니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현명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여행을 가면 3개월 4개월 집을 비우는 것이 평균이었다.
“제이크. 나 세인트 생셔로 갈건데.”
“운전기사를 준비해둘까요?”
“아냐, 내 차를 끌고 갈게.”
어쩔 수 없이 그는 뭐라고뭐라고 지껄이는 책을 자신의 슈트케이스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일단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유마 삼촌이라면 이 책이 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삼촌은 지금 도심지에 있을 터였다.
프레드는 자신의 방 벽면에 걸려있는 람보르기니 키를 꺼내서 밖으로 나갔다.
옆 좌석에 슈트케이스를 올려두고 시동을 걸려던 차에, 슈트케이스에서 빠져나온 소녀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오호! 간만의 바깥 생활이네!
“야, 어, 얼른 들어가.”
-어차피 너 말고는 아무에게도 안 보일걸?
그 말대로, 옆에 있는 하인들은 파기나레코르를 못 보는 것 같았다.
일단 프레드는 시동을 걸고 도심으로 향했다.
외전 2화 – 메트로폴은 그간 너무나도 변하고 있었다. 새로운 빌딩이 생겨나고 더 많은 차가 돌아다닌다.
20년 전에는 마차가 가끔 차도를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지금은 마차 따위는 우스갯소리로 취급할 뿐이었다.
세인트 생셔 거리는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지로 변해버렸다.
-오와. 여기 많이 변했네
“너도 여기 온 적 있어?”
-옛날에.
파기나레코르의 얘기를 들을수록 아리송하다. 슬슬 목적지에 도착하자 목표로 한 빌딩 옆에 무명교회 본부의 빌딩이 보였다.
광명교는 세를 잃고 있었다. 요즘은 무명교가 대세였다.
뭐, 아직도 수도 인근에서는 광명교가 많긴 하지만 무명교보단 아니었다. 어차피 그는 종교에 딱히 관심이 없어서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이 건물이 예전에는 크라이슬러 빌딩이라고 불렸다고 했다. 그 소유주는 역시 아버지의 것이고.
근데 딱히 아버지는 무명 교단에 귀의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별로 관심도 없는 듯하고. 여기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큰 관심은 없다.
프레드는 무명교회를 지나쳐서 옆 건물에 차를 댔다. 무려 102층짜리 빌딩이다. 월드 엠브리오 빌딩. 이 도시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프레드는 자신의 명함으로 출입 자격을 보인 다음,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안내원이 인사를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안내원은 프레드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최상층을 눌렀다.
비서가 프레드를 보고 바로 회장실에 연락을 넣었다.
조금의 시간 뒤에, 최상층에서 전화 중인 유마 헥센을 만날 수 있었다.
“응. 그렇게 처리하도록 해. 그럼 잘 부탁해.”
“삼촌!”
“오! 프레드! 돌아왔구나?”
유마 헥센은 끔찍할 정도로 동안이어서 아직도 20대로 보였다. 아버지 말로는 이전엔 소년처럼 보였다고 했다.
지금은 미소년 같지는 않지만, 선이 고운 듯한 청년처럼 보였다. 뺨이 좀 홀쭉한 걸 빼면 별 것 없어 보인다.
“이제 막 돌아왔어요.”
“그래, 그래. 다친 데는 없고?”
둘은 반갑게 포옹했다. 프레드에게 있어서 삼촌은 어떤 부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나, 어렸을 적부터 늘 그를 귀엽게 봐주는 사람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제이크보다 더 믿음직한 사람이기도 했고.
“저요? 멀쩡해요. 당연히 다치지 않았죠.”
“응. 응. 잘됐네. 난 또 미식축구를 하다가 다리뼈가 부러진 줄 알았잖니.”
“아, 아닌데요.”
프레드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아니라고 부정했으나 이미 들통났을지도 모르겠다.
한동안의 안부 인사가 끝나고 나서 프레드가 본론을 꺼냈다.
“삼촌, 혹시 말이에요….”
“왜?”
“아버지 서재에서 이상한 걸 찾았는데 이게 뭔지 아세요?”
슈트케이스에서 꺼낸 파기나레코르를 유마에게 보여주었다. 평소 헤실헤실 웃는 낯이었던 유마는 그 책을 보자마자 안색이 굳어졌다.
“그, 그건…….”
“여, 역시 악마의 책이라던가? 저주받은 사악한 책 그런 건가요?”
“아닌데? 옆에 줄을 매달아서 형님이 늘 들고 다니던 책이야.”
“이, 이게 뭔지 아세요?”
“음. 어디 보자.”
유마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하나 물어보자. 형님의 비밀 서재에 들어갔었니?”
“……네.”
“흠. 형님은 예전부터 네가 이런 일에 엮이지 않기를 원하셨는데, 네가 스스로 알아서 찾아가니 이 건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가 없겠지.”
유마는 그렇게 혼잣말하고는 이어서 말했다.
“오컬트라고 알고 있니?”
“뭐, 흑마법 같은 거 말하는 거죠? 영화에서 봤어요. 마녀 돌리틀의 이야기 같은 거라던가.”
“실제로 존재한다. 비밀스러운 의식이나 마법 같은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들은 비밀 세계라는 이름 아래 음지 깊숙한 곳에 존재한단다. 그리고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책은 그 오컬트의 잔재고.”
“그럼 아버지도 오컬티스트인가 뭔가 그런 거였어요?”
“정확히는 영성자라고 한다.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능력이 극에 다다르면 주문을 사용하거나 특별한 힘을 낼 수 있지.”
“그 대가로 악마에게 뭐 피나 영혼을 바쳐야 해요?”
“글쎄.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난 영성자가 아니었거든. 하지만 적어도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얘기와는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 비밀스러운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프레드의 내면에 이상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렇게까지 감탄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그 비밀 세계라는 건 어떻게 알아보죠?”
“그건……. 내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심지어 나도 제대로 모르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유마는 무언가 떠올리는 바가 있는 듯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샤를의 아이들은 무명교와는 전혀 얽히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 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 마도서라는 녀석은 결국 나쁜 녀석은 아니란 거네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근데 봉인되어 있었단 말이지. 프레드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재킷 옆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석상을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고마워요. 삼촌. 이만 돌아가 볼게요.”
“술은 적당히 먹거라.”
“아 안 마신다니까요.”
유마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프레드는 아직도 자신을 질풍노도의 시기에 다다른 청소년인 줄 아는 삼촌에 대해서 불평을 투덜거리더니 곧 밖으로 나갔다.
물론 술은 마시러 갈 거지만. 차 키를 꼽고 운전하려는 프레드가 좌석에 앉자마자 슈트케이스에서 파기나레코르가 솟아올랐다.
-자, 내 뒷조사는 다 했어?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됐는걸?”
프레드는 파기나레코르의 면상을 옆으로 치우면서 슈트케이스에 담긴 장갑을 꺼내서 손에 꼈다.
-장갑은 왜 껴?
“내가 약한 결벽증이 있어서.”
일종의 강박증 비슷하다고 하는데 프레드는 손에 다른 사람의 신체가 직접적으로 닿는 걸 싫어했다.
가족 중에서는 그 혼자만이 가진 정신병이라고 할까.
-후음. 그럼 일단 아무 데나 돌아다녀 봐. 내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가르쳐줄게.
“그럴까?”
아무 데나 돌아다녀 보란 말인가. 흠. 프레드는 좀 고민하다가 곧바로 술집으로 차를 몰았다.
만나야 할 사람도 있고 말이지.
테네시 바라는 이름의 주점에 도착한 프레드는 주차하고 중절모를 썼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재즈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는 가수……뭐더라? 예술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 셋째인 제레미는 그를 보면서 뒤틀린 청각을 가지고 있다고 어쩌고 했다.
“오, 이게 누구야?”
바 앞에 서서 유리병을 닦고 있던 험상궂은 얼굴의 흑인이 그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반쯤 하얘진 그 근육질의 남자는 존 브라운, 주점의 주인이었다.
“꼬마 프레드가 이렇게 커서 오다니 말이야.”
“잘 지냈어요?”
“또 술 마시러 왔군?”
존 브라운은 어린 프레드가 술을 마시러 와도 덥석덥석 술을 내주는 주인장이었다.
“술만큼 인생의 낙이 없는데요.”
“애송이가 나이 다 먹은 노인처럼 말하는군.”
“맨날 마시던 거로 주세요.”
껄껄거리는 존은 프레드가 좋아하는 럼주를 꺼내서 올렸다.
“네놈의 뒤틀린 미각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돈도 많다면서 좋은 거 좀 사서 마셔. 우리 가게 매상 좀 올려보자.”
“싫은 데요? 얼른 피쉬 앤 칩스 주세요.”
존 브라운은 여전히 이상한 놈이라면서 투덜거리고는 메뉴에도 없는 피쉬 앤 칩스를 만들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대충 저녁을 해결하던 프레드는 그의 앞에 누가 털썩 앉는 걸 보면서 인상을 찌푸릴 뻔했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반색했다.
“테사?”
“오랜만이네.”
검은색 단발 머리카락에 날씬한 몸매의 여성이 앉았다.
테사 플리테타는 어린 시절부터 같은 학교에 다닌 소꿉친구였으나 그가 유년사관학교로 떠난 이후엔 잘 만나지 못했었다.
“못 알아볼 뻔했잖아.”
“나도 말이야. 꽤 멋진 남자가 됐네. 여전히 미각이 뒤틀린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테사는 프레드의 앞에 놓인 바구니에서 감자튀김을 하나 뺏어 먹었다.
프레드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테사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여자가 되어 있었다.
특유의 그 안경은 여전히 끼고 다니는 듯하지만, 관능적인 몸매가 프레드의 눈길을 끌었다.
“헤에. 어딜 봐?”
“가슴.”
“이게, 어디서 처맞으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사는 낄낄거리면서 자신도 술을 하나 시켰다.
-와, 너 진짜 너희 아버지랑 성격이 다르구나?
“그걸 이제 알았냐?”
“응? 누구랑 얘기해?”
“아, 아니 아무것도.”
이러다 미친놈 취급당하겠군. 프레드는 앞으로 파기나레코르가 뭐라고 하던 무시하기로 했다. 테사는 위스키를 마시면서 프레드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유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왔어. 오늘이 첫날.”
“장교로 입대할 거야?”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육군으로 갈지도 모르겠어. 선배가 육군 쪽에서 자꾸 꼬드기더라고. 탱크가 멋있지 않냐면서.”
해군이 강세인 나라에서 육군으로 간다는 건 그만큼의 각오가 필요하기도 했다. 승진도 어려울 테니까.
“너는?”
“나? 대학에 들어갈 것 같은데? 미스트위버 대학에. 고문서학 전공은 근처에서 미스트위버만한 곳이 없거든.”
“흐음 그래?”
테사는 안경을 벗으면서 하품을 했다. 벌써 옆에 술병이 10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
“흐아암. 술을 꽤 오래 마셨나 봐. 슬슬 졸리는데.”
안경을 벗은 테사를 본 프레드는 몸이 굳었다. 얘가 이렇게까지 예뻤나 싶다.
“아, 요즘 공부하느라 엄청나게 졸리거든.”
“그래? 좀 쉬다 갈래?”
“호텔?”
“응.”
“그럴까.”
-뭔데 이 패턴?
파기나레코르의 물음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프레드는 목이 말라서 주전자를 찾았다. 어젯밤 테사랑 얘기하다가 ‘실수’를 저지른 건 기억이 나는데. 또 나중에 아버지가 호통을 칠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는 컵에 물을 받아서 마셨다. 침대 옆을 보니 테사는 보이지 않았다.
“음?”
시계를 보니 아직도 새벽이었다. 이 시간에 나갔을 리는 없을 테고, 화장실이라도 갔나?
프레드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장갑을 고쳐서 쓰고는 화장실 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소름 끼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가 기대한 대로 나체의 테사가 화장실에 있긴 했다. 하지만 등에서 나비 날개 같은 것이 자라고 있었다.
총 천연의 날개 색깔은 마치 태평양의 해변에 있는 남국의 섬 풍경처럼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이상한 종류의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테사는 마치 속죄하는 자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서 양손을 모은 채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나비 날개는 점차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프레드가 굳어진 표정을 하는 동안, 테사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야, 너, 드, 등에 그거 뭐, 야?”
프레드는 평소 이상으로 동요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외전 3화 – “등에 날개 달린 거 처음 봐?”
테사의 말에 프레드가 정신을 차렸다.
“무, 무슨 소리야?”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테사는 양손을 펼치면서 섰다. 그리고 천천히 프레드에게 걸어왔다.
“어……테사야? 가까이 오지 말고 거기 서 있어봐.”
“너, 되게 맛있어 보인다.”
“아까 많이 먹었잖아? 거기 일단 서 있어보라니까.”
테사는 프레드의 음담패설이 섞인 경고에도 무시하고 어딘가에 홀린 표정으로 계속 걸어왔다.
나체를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할 법한데 등에 달린 기이한 날개 때문에 오히려 무섭다.
테사는 가까이 다가오면서 요염한 표정으로 프레드에게 말했다.
“다시 할래? 너한테서 갑자기 좋은 냄새가 나.”
“아, 거기 서 있으라고!”
퍽!
프레드는 오른손을 꽉 쥐고 테사의 턱을 날려버렸다.
풀썩 쓰러진 테사를 보면서 프레드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와, 깜짝이야! 너무 무서워서 때려버렸네.”
쓰러진 테사를 발로 툭툭 건드려봤다. 정확하게 스트레이트로 들어갔다.
프레드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떠오른 것을 찾았다.
“야! 야! 파기나레코르!”
-우응. 뭐야?
슈트케이스에서 꺼낸 파기나레코르에서 소녀의 모습이 스르르 풀려나왔다. 잠을 자고 있었는지 눈을 비비고 있었다.
“지, 지금 테사의 등에서 갑자기 나비 날개가 나오기 시작했거든? 이거 뭐야? 내가 미친 거야?”
-아, 그건 계몽주의자라고 있어. 근데 아직도 계몽주의자가 남아있었나?
“그게 뭔데?”
-꿈에서 깨어나게 하려는……. 어라? 근데 계몽주의자가 있으면 안 되는데. 애초에 이 현실이 꿈이 아니라 현실로 바뀐 지 20년이나 지나기도 했고.
“뭐라는 거야? 설명 좀 제대로 해봐. 너 혼자만 아는 설정 얘기하지 말고.”
파기나레코르를 들고 위아래로 마구 흔들자 소녀의 형상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 알았어. 제대로 설명해줄 테니까 기다려 봐.
“기다릴 것 없는걸?”
그때, 파기나레코르와 프레드의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혹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테사였다. 그녀는 자신의 턱을 한 손으로 대고는 다른 손으로는 탁자에 놓인 자신의 안경을 꺼내 들고 있었다.
“난 그 계몽주의자 같은 게 아니니까.”
“너, 너 멀쩡하냐?”
“아니, 네가 때린 곳이 엄청 아픈데?”
그러면서 테사는 프레드를 노려보았다.
“아니, 나는 그냥 네가 갑자기 미쳐서 날 잡아먹으려는 괴물이 된 줄 알았지?”
“나한테 설명할 기회를 줄래?”
“해 봐.”
“뭐, 옛날에는 그런 것들이 좀 있긴 했는데, ‘세계의 분화(分化)’이후에는 모든 계몽주의자는 이제 없어졌어.”
“세계의 분화는 뭐고 계몽주의자는 뭔데.”
-계몽주의자는 옛날옛적에 살았던 고대 종족이야. 그리고 인간을 매우 싫어해서 벌레 취급해.
파기나레코르가 설명하자 테사는 눈을 찡그리면서 파기나레코르를 흘겨보았다.
-뭐? 보면 어쩔건데.
“나는 그 사람들과는 달라.”
파기나레코르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나도 한물간 모양이네. 영성이 뛰어난 존재는 나를 볼 수 있잖아.
뜻 모를 말을 하는 파기나레코르를 내버려 두고 테사가 말했다.
“원래 이 세상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꿈 일부였거든. 하지만 20년 전의 어떤 사건 이후로, 모든 것이 현실이 되었어. 그 이후로 계몽주의자들은 현실에 순응해서 잘살고 있어. 인간이랑 비슷한 다른 종족이라고 보면 돼. 인간을 혐오……한다는 건 옛날 계몽주의자들이지 난 아니야.”
“넌 아니야?”
“그래. 모든 인간이 다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잖아?”
20년 전 이후로 세상에 남아있는 아주 소수의 계몽주의자는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일부는 여전히 인간을 증오했지만, 그들은 무명 교단에 의해서 제거됐어.”
“나머지 유화적인 일부는 지금의 현생 인류에 대해서 인정하고 인간 사회에 섞여서 그냥 살고 있지. 나도 그중 하나고.”
“으흠?”
“그 사건 이후로 계몽주의자들의 힘도 대부분 약해졌거든. 내 등에 날개도 오락가락하고.”
그러면서 등의 날개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뭐 나쁜 짓은 안 한다는 거지?”
“응. 나쁜 짓은 안 하고 야한 짓은 할 생각인데.”
“나야 좋긴 한데.”
프레드는 눈을 이리저리 돌려서 파기나레코르를 바라보았다.
파기나레코르는 하품하면서 말했다.
-요즘 젊은것들은 에잉 쯧쯧. 별일 없으면 나한테 말 시키지 마렴. 좀 자야겠으니까.
그러면서 마도서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잘 자라고 슈트케이스 안에 넣어둔 프레드가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 날개는 어떻게 접을 수 없어?”
“가끔 제멋대로 튀어나오거든.”
다음 날 아침까지 폭풍 같은 밤을 보낸 프레드는 눈을 뜨자마자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부스럭거리면서 일어난 뒤, 옆에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오래간만에 재밌었어. 혹시라도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라페르테 거리 339번지로 와. 내가 도와줄 테니까.]밑에는 립스틱이 잔뜩 발린 입술 자국이 찍혀 있다.
“완전 멋져.”
당장 청혼해야지. 프레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부스럭거리면서 일어났다.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파기나레코르를 꺼냈다.
-나 파기나레코르는 프레드에게 실망했도다. 저녁에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지.
“슈트케이스라는 독방에 넣어드렸는데요.”
-너희 고릴라 둘이 밤새도록 내는 소리가 슈트케이스를 뚫고 들어오더구나.
“너무하구만. 고릴라라니. 침팬지라고 해줘.”
-너 어딘가 이상한 거 아니냐?
프레드는 하품하면서 옷을 갖춰 입었다. 집에 돌아가기는 너무 이르다.
늦었지만 브런치를 주문했다. 이상한 표정을 지은 직원은 음식을 내려놓았다.
“주문하신 음식입니다. 손님.”
“아, 여기 두고 가요.”
“…….”
직원이 나가자마자 파기나레코르가 질색했다.
-으엑, 뭐야 이게?
“브러언───치.”
마마이트를 듬뿍 바른 식빵에 오이를 넣고 옆에 정어리 파이를 먹는다. 후식으로 대추와 파인애플이 들어간 케이크.
-너 이 새끼, 뭔가 뒤틀려 있구나.
“꺼억.”
트림을 한 프레드가 입을 열었다.
“내 미각은 정상인걸? 그래도 가죽 벨트를 먹지는 않잖아?”
-대체 무슨 교육을 받고 자란 거니?
“그래서, 뭔가 찾은 거라도 있어? 요 근처를 돌아봐도 이상한 건 없었잖아.”
-없진 않았지. 어젯밤 그 여자의 등에 달린 날개는 넘어간다 쳐도, 차를 타고 도시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못 느꼈어?
“음…….”
기억을 되살려봤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고 먹고 마시고 한 것밖에 기억이 안 난다. 도시야 원래랑 똑같았고.
“모르겠는데?”
-어떤 놈인지 모르겠는데, 사람 머리에 벌레를 넣은 사람이 있어. 가끔 행인들의 머릿속에 벌레가 들어 있었어.
“벌레라니?”
-방금 들어왔던 직원의 머리에도 있었어.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이계에 사는 종 같은데.
“엥? 방금 음식을 가져왔던 사람? 별 느낌 없었는데.”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남자였을 텐데.
프레드가 뺨을 긁적거리자 파기나레코르가 말했다.
-방금 그 남자, 정상은 아니었어.
“아니 무슨.”
띵동.
갑자기 벨이 울렸다. 프레드는 자신이 어떤 음식을 시켰었나? 잠깐 생각해보고는 그런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벌써 나갈 시간이 됐나? 오후 4시쯤에 체크아웃하게 해놨을 텐데.”
고개를 갸웃하고 문을 여니, 조금 전의 종업원이 문 앞에 와 있었다.
“주문하신 음식이 왔습니다.”
“네? 아무것도 안 시켰는데요.”
그때, 프레드는 종업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종업원의 눈은 양쪽으로 뒤틀린 사시……였는데 눈알이 카멜레온처럼 완전히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우락부락한 핏줄이 치솟아 있었고 뺨은 근육이 불거져서 번들거렸다.
“자, 으득, 여깄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안 시켰다니, 까.”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의 은 뚜껑을 열었다.
뚜껑 위에는 두께가 손목마냥 두툼한 하얀 애벌레 수십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프레드는 접시를 보고 말했다.
“뭐, 먹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저 음식 안 시켰다니까요?”
“으득, 으드드득, 여기서 시키신 게 맞는 데요?”
어딘가 뼈가 뒤틀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근원지는 직원의 몸통에서 나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의 깔끔한 연미복 안으로 마치 배가 꿀꺽꿀꺽 거리는 것처럼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프레드는 순간적으로 좆됐음을 깨달았다.
“아, 안 사요. 나가주세요.”
“아, 여기서 시키신 게 맞는 데.”
“나가라고요.”
단호하게 말하자 직원이 꿈틀거리면서 말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지 왜…….”
“못 들었어? 나가라고. 씨발.”
“뭐, 씨발?”
직원은 으드득거리면서 척추측만증환자처럼 자신의 척추를 꺾더니 입에서 애벌레 하나를 뱉어내서 접시 위에 올렸다.
“이 새끼가. 욕을 해?”
“……입에서 벌레가……?”
“너 음식으로 맞아본 적 없지?”
뿌득, 뿌득. 뿌드드드드득.
직원이 몸을 이리저리 뒤틀자 그의 옷 사이로 애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의 오른팔 근육이 부풀어 오르면서 벌레가 담긴 쟁반을 들어 올렸다.
프레드는 뒤로 물러나면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문 옆에 놓인 옷걸이의 길이가 꽤 길다. 곧바로 잡아서 그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뒤로 한층 물러나서 그를 밀어붙였다.
“야 파기! 저 새끼 뭐야?”
-나도 모르겠는데?
“왜 나한테 저러는 건데?”
-음. 혹시 암살자가 아닐까?
“무슨 암살자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원한 관계에 의한 암살자일지도.
“난 어제 메트로폴에 왔단 말이다!”
그때 직원이 벌레가 담긴 접시를 프레드에게 집어 던졌다. 프레드가 기겁하면서 벌레들을 피해냈다.
바닥에 떨어진 애벌레들이 꿈틀거리는데 그 아래로 보라색 흔적이 남았다.
-아, 나 저 벌레가 뭔지 알았어.
“뭐?”
-포도뿌리혹벌레야.
아버지가 재배하는 포도나무 밭이 있어서, 프레드는 그 벌레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해충은 이렇게 크지 않았단 말이다. 이놈은 몸통은 손목만 하고 길이는 손바닥 정도였다.
“손님! 음식을 바닥에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우리 주방장이 공들여서 만든 음식인데요.”
“씨바아아알!”
프레드는 옷걸이를 그대로 밀어붙여서 놈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복도 끝에 가서 놈을 벽에다 붙여버렸다.
바닥에는 놈이 흘린 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직원은 양손으로 그 옷걸이를 쥐고 프레드와 힘 싸움을 벌였지만, 훈련으로 다져진 프레드를 이길 수는 없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괴성을 지르는 것에 놀란 손님들이 살짝 문을 열고 고개만 돌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지는 벌레와 아직도 직원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애벌레들을 보고 기겁을 해서 소리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프레드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잠깐 돌렸다. 그 사이, 직원이 옷걸이를 옆으로 홱 밀쳤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면서 달려들었다.
외전4 – 외4
학교에서 배운 유술로 달려드는 직원의 어깨를 꽉 붙잡고 발로 배를 밀면서 뒤로 굴렀다.
제힘에 오히려 날아가는 격이 된 직원은 뒤쪽 침대에 그대로 부딪혀서 한쪽 목이 뒤틀렸다.
우드득. 목이 꺾이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릴 지경이었다.
일반인이라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는 전신에서 벌레를 쏟으면서 삐걱거리면서 일어났다.
“공포영화 같군.”
오히려 어설픈 공포영화 분장으로는 따라가기 어려운 그런 그로테스크함이 섞여 있었다.
놈이 쓰러진 틈을 타서 그대로 슈트케이스를 챙기고는 떨어진 모자까지 알뜰살뜰 챙겼다.
프레드는 바닥에 떨어져서 제멋대로 꿈틀대는 벌레들을 최대한 밟지 않게 당장 그곳을 탈출했다.
이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하기 어려웠으나 일단 살고 볼 일이다.
“야, 파기! 너 뭐 마도서 같은 거라면서 마법 같은 거 못쓰냐?”
-마법 쓰는 마도서 봤어?
“애초에 마도서 자체를 처음 보는 데.”
-뭐, 실제로 마법을 쓸 수 있었던 적이 있긴 한데, 그때는 주인이 짱짱 쌔서 할 수 있었던 거고. 너는 영성자도 아니잖아?
“썩을! 그럼 그 벌레에 잡아먹힌 놈들이 다가오면 경고라도 해줘.”
분명히 음식을 내올 때만큼은 직원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그 벌레에 잠식된 인간들은 정체를 드러내기 전까지 프레드가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알았어!
계단을 내려가면서 외투를 뒤적거리던 프레드는 카운터에 키를 집어 던지다시피 하면서 지갑에서 돈을 마구 꺼냈다.
숙박비 이상으로 꺼낸 것 같지만 지금 그게 알바냐.
“남는 돈은 팁입니다!”
“에? 저, 손님? 손님!?”
카운터에 대충 키와 돈을 던지듯이 하고 뛰쳐나온 프레드는 당장 차에 시동을 걸었다.
시동을 걸자마자 카운터 직원이 헥헥 대면서 그를 쫓아 나왔다.
“저 여자도 벌레에 잠식됐어?”
-아니?
“헉! 헉! 저, 손님. 일전에 어떤 신사분께서 당신께 이걸 전달해드리라고…….”
여직원이 고급스러운 문양이 그려져 있는 접힌 봉투를 들어서 프레드에게 전달했다.
프레드는 편지를 억지로 뜯고 나서 곧바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한 손으로 운전하면서 쪽지를 읽는다.
『문제가 생긴 것 같네요? 봉투에 첨부된 물건을 이용하세요.』
“뭐야? 누가 대체……”
프레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이 사건과 연관된 사람일지도.
아무튼, 봉투 안쪽을 살펴보니 웬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이야, 그리운 물건이네.
“뭐야, 파기 넌 이게 뭔지 알아?”
-그건 괴테의 만년필이라는 물건이야. 네 아버지가 쓰던 거지.
“아버지가 쓰던 물건이라고?”
-응. 근데 왜 다른 사람 손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네. 상의 주머니에 꽂아두면 그 능력이 뭔지 알 수 있을 걸?
파기나레코르의 조언대로 프레드가 외투 상의에 만년필을 꽂아두자, 기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프레드는 람보르기니 페루치오를 끌고 세인트 생셔와 래보 거리를 통과하는 13-99번 국도를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추격자들을 피해서 빠르게 차를 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엔리 조세프(잠식자 36호)가 엔진 룸에 집어넣은 포도뿌리혹벌레mk.4가 꿈틀거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뭐?”
프레드는 당장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차를 멈췄다. 마치 누군가 서술하듯이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으나 그 말이 정말이라면 차 안에 위험한 그 벌레가 있다는 것이다.
[포도뿌리혹벌레mk.4는 미리 입력받은 정보대로 엔진을 파괴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강렬하게 진동시키면서 엔진부에 열을 가하며 스스로 불살라 오르기 시작했다.]깜짝 놀란 프레드는 당장 슈트케이스를 들고 차에서 빠져 나왔다. 진짜건 가짜건 그 결과, 자동차가 폭발할 수도 있다.
저 차는 엔진에서 연료통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차였으니까.
조금의 시간 뒤에 엔진부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그 불길은 곧 연료통에 닿아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꺄아아아아악!”
“차가 폭발하다니?”
주변의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 멍해진 프레드는 입을 벌리고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기나레코르의 영체가 슈트케이스에서 스르르 빠져나오더니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건 원한 관계에 의한 공격이 분명해.
“워, 원한? 대체 누가 날 공격하는데.”
전혀 짚이는 게 없다. 그는 5년 동안 수도 인시그니아에서 살았다.
유년사관학교를 다니면서 만들어진 악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암살을 시도할 정도로 사이가 나쁜 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너의 원한이 아니라 너희 아버지 대에서 내려온 원한일 수도 있지. 샤를이 참 원한 살 짓 많이 하면서 살았거든.
본인이 들으면 어처구니없어할 비방을 가한 파기나레코르는 고개를 돌려서 프레드에게 조언했다.
-일단 도망쳐서 누가 널 공격하는지 알아보기 전에, 비밀 세계에 널 지켜줄 세력부터 찾는 게 좋겠는걸?
“세력이라니…….”
그런 건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는 장교로 입관하기 전에 잠시 고향에 들렀을 뿐이고 애초에 지금 상황 자체가 황망하기 그지없다.
“난 그런 건 전혀 몰라. 아버지도 그런 비슷한 얘기는 한 적이 없고.”
-흐음. 그럼 내가 대신 생각해줄게. 보자. 누가 널 공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에게 조력자가 있는 건 알겠어?
“그래. 이 괴테의 만년필? 이라고 했나. 이 물건을 전달해준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지금쯤 운전 도중에 폭발한 자동차 때문에 죽었겠지.”
-무명 교단은 어때?
“무명 교단? 갑자기 그건 왜?”
-어라? 샤를이 얘기 안 해줬어? 무명 교단은 샤를이 만든 건데?
“처음……듣는 얘기군.”
파기나레코르가 한 말은 파격적이었지만 그 말만 믿고 갑자기 문을 두들길 수는 없는 노릇.
-그쪽이 맘에 안 들면 어젯밤에 너랑 쿵떡쿵떡하던 여자애를 찾아가 보던가.
“테사를?”
-응. 걔 엄청나게 쌜걸? 계몽주의자는 사람을 막 찢어.
그 가녀린 테사가 그런 일을 한다니? 파기나레코르의 말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지만, 아무튼 오늘 아침에 테사가 남겨두고 간 쪽지가 있었으니 그쪽으로 가기로 했다.
혹시 모를 인연을 찾느니 당장 알고 있는 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낫다.
택시를 자아서 주소지에 적힌 곳으로 가자 테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어젯밤 일이 마치 없었다는 것처럼 테사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네 도움이 필요해.”
테사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프레드를 방안으로 불렀다.
그리 넓지는 않은 방이었으나 수십 권의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었고 있을 만한 집기는 다 있어 보인다.
앉아서 테사에게 오늘 일어났던 일을 다 말하자 테사가 팔짱을 꼈다.
“원한 관계로 인한 보복으로 보이는데.”
-내 말이.
“대체 누가?”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너 집에 전화는 했어?”
“응? 겨를이 없어서 아직.”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난 이후부터 도망치느라 전화 걸 시간 같은 게 없었다.
“연락하고 와. 동생들은 괜찮은지 확인하고.”
그 말이 맞는 말이라, 프레드는 곧바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네, 헥센 가 입니다.”
“제이크. 나야.”
“프레드 도련님?”
“그래. 다들 문제없지? 토마스나 윌리엄은?”
“두 분 동생들께서는 별문제 없습니다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어? 아, 아니야. 토마스나 윌리엄한테 오늘은 집에 있으라고 해도 될까?”
“알겠습니다. 어젯밤에 프레드 도련님이 오셨다고 전해드렸지만 안 돌아오셔서 다들 난감해하던 차였습니다.”
“응. 그래. 오늘 저녁에 봐.”
프레드는 복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내려뒀다. 생각해보니 집에 와서 동생들과 마주치지도 않았었다.
아무튼, 상황이 묘하게 된바. 오늘 안에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고민이었다.
전화를 끝내고 나서 돌아서자 거기엔 파기나레코르와 테사가 서로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단 프레드에게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힘은 필요하지 않을까? 영혼의 힘을 깨워야지.
“영성을 익히게 하자고? 그걸 익히게 해도 어차피 당장은 도움 안 돼. 오히려 정신이 산만할 뿐이지. 쟤는 단순해서 마법 무기를 손에 쥐여주는 게 나아.”
-근데 마법 무기를 어떻게 구하게?
“음. 그건.”
“둘이서 무슨 얘기 하냐?”
“아. 일단 호신용 무기부터 챙겨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영성을 배우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당장 무기라도 필요해서 말이야.”
“음. 그런 거라면.”
프레드는 아버지의 비밀 서재에 있는 수많은 무기와 기이한 물건들을 떠올리고 말했다.
“그런 것들이 있긴 한데 난 뭐, 영성? 마법? 주문? 뭐시기고 그런거 하나도 모르니까, 우리 집에 가서 확인해 줘.”
“너희 집에?”
테사가 떨떠름하게 묻자 프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어릴 때도 온 적 있잖아?”
“응. 알았어.”
프레드가 한숨을 쉬는 동안 테사는 빠르게 화장을 끝마치더니 밖으로 나섰다.
-이야, 완전 다른 사람이네.
“…….”
역시 예쁘다. 프레드는 이 사건이 끝나면 꼭 테사에게 청혼하겠다고 마음속에 다짐하면서 테사와 함께 헥센 가의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오후가 되었다.
프레드는 택시 기사에게 삯을 치러주곤 저택으로 들어갔다. 테사는 저택 입구에서 잠시 묘한 표정으로 헥센 가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뭐해? 안 들어오고.”
“응. 오랜만에 오니까 이 저택이 조금 달라 보이네.”
“그런가? 저택 자체는 그다지 바뀐 게 없는 것 같은데?”
프레드는 모르고 있었지만, 테사는 이 저택 내부에 걸린 어마어마한 수의 중첩 결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수년 동안 더욱 공고해진 마법적 보호 장치는 이 저택에 악의를 가진 자를 들이는 것을 완벽하게 봉쇄하고 있었다.
테사는 프레드를 따라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프레드는 무사히 돌아온 것에 안도하면서 일단 동생들을 찾았다.
“톰! 윌!”
“어? 형?”
“형 왔다!”
꼬꼬마 두 녀석이 프레드에게 달려왔다. 각자 정확히 4살씩 차이나는 이 두 동생에게는 오늘 프레드에게 일어났었던 일이 일어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프레드는 동생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지냈냐?”
“응!”
가족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토마스와 윌리엄에게 내일부터 학교에 가지 말 것을 주문했다.
왜냐고 둘이 물어봤지만, 프레드는 대충 얼버무렸다. 벌레에 잠식된 괴인이 우리 가족을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간 그 즉시 미친놈 취급받아서 정신 병원에 끌려갈 게 뻔했다.
“이럴 때 부모님이라도 연락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랜드 캐니언이라는 곳은 오지라, 산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전화가 가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부모님께 연통은 넣어두기로 했다.
그렇게 집안을 단속한 프레드는 다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외전5 – “누나 누구예요?”
“누나는 우리 집에 왜 왔어요? 어? 예전에도 온 적 있었다고요? 난 기억 안 나는데.”
“누나는 남자친구 있어요? 없다고요?”
“프레드 형 좋아해요?”
“야 이것들아! 아까부터 저녁 먹는데 무슨 소리냐!”
토마스와 윌리엄의 무한한 질문 공세는 순진무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프레드가 한소리를 하고 난 이후에야 이 곤혹스러운 질문 공세는 끝이 났다.
투덜거리긴 했지만, 꼬마들의 관심은 테사가 다 예쁜 탓이라고 생각하던 프레드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고는 곧이어 식기를 내려놓았다.
제이크가 토마스와 윌리엄을 데려가자마자 프레드는 테사를 데리고 샤를의 서재로 향했다.
“여기 들어가도 되나?”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물건들은 아버지 서재에 있거든.”
어째서인지 자꾸 들어가도 되는지 조금 긴장한 눈치인 테사를 보고 프레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나도 아버지 서재에 허락받고 들어간 건 아닌데, 네가 말하는 그 ‘신비한 물건’들이 다 저기 있을 걸 어떻게 해?”
탓하려면 후환을 남긴 아버지 자신을 탓하십시오. 프레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비밀 서재의 문짝을 따버렸다.
계단을 내리고 들어갔다. 이번에는 라이터 대신에 집구석을 뒤져서 손전등을 들고 왔으므로 이전보다 주변은 환했다.
“옛날 사람들은 등불을 썼다는데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응? 왜 안 내려오냐?”
“아, 내려갈게.”
“너 아까부터 이상하게 멈칫멈칫한다? 아버지가 알아도 뭐라고 안 할 거라니까.”
“너희 아버지가 비밀 세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알아?”
“아니. 우리한테는 그런 얘기는 하나도 안 했거든.”
비밀 세계고 괴물이고 그런 건 다 미신이 아닌가 싶었는데 아버지가 깊게 연관되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나.
“하긴, 그러니까 그런 거겠지. 아무튼, 이왕 이렇게 됐으니 무기가 될만한 걸 찾아보자.”
“야, 파기. 너도 뭐 물건 좀 찾아봐. 되도록 센 걸로.”
-진짜로? 부작용은 무시해?
“뭐야, 부작용도 있어?”
“몇몇 유물은 부작용이 없지만, 대부분의 유물은 최소한 한 개씩 부작용이 있어. 하지만 마도구 정도로 약한 물건이라면 부작용이 없어.”
-샤를은 그 부작용으로 매일매일 파인애플을 먹고는 했지. 그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 삭제하긴 했지만.
“파인애플? 그건 대체…….”
프레드의 동공이 흔들리는 도중에 물건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테사가 하나 찾아서 꺼냈다.
“이건 어때?”
“검인가?”
마치 피를 머금은 것 같은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화천지옥검이잖아? 오랜만에 보네.
“이게 뭔지 알아?”
-엄청나게 강한 무기. 근데 네가 쓰면 안 돼. 조금만 들고 있어도 환청과 환각이 들리기 시작할걸? 부작용은 나도 잘 몰라.
그러나 테사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프레드라면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프레드는 영성자가 아니야. 검의 능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없어.
“프레드는 헥센 가문의 사람이잖아. 거기다 이계와의 연결이 끊겨버렸으니 더는 이 검의 주인인 혈주찬상에게서 압박을 받지 않을 테고.”
-아무튼, 영성에 입문도 하지 못한 녀석이 보물을 쥐는 거? 나는 반대.
“나는 찬성인데 어떻게 할래?”
프레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 물건이 매우 강력한 무기고 쥐고 있기만 해도 위험해지는 물건인듯싶다.
“까짓거 해보지.”
선택한 건, 검에서 강렬한 끌림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테사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프레드에게 건네주었다.
“위험할 때가 아니면 검을 뽑지마. 검을 뽑으면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집어넣어.”
“알았어.”
검집 채로 검을 쥐자 프레드는 가슴 한구석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총 같은 건 없을까?”
“그 괴물에게 총이 먹힐 것 같아? 총을 쏘는 사용자의 영성이 거대하다면 모를까.”
-샤를의 주 무기는 총이긴 했지만, 그건 샤를이 예외였지. 수제작한 마탄을 직접 사용했거든. 쏠 때마다 영성을 담아서 쐈고.
“그런가……. 테사 너도 하나 골라.”
테사는 될 대로 되라는 듯한 숨을 내뱉고는 오르골을 하나 골랐다.
“그게 뭐야?”
“계몽주의자의 오르골……. 소리를 듣기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모두 멈춰버리거든. 주인을 배반하는 부작용이 있지.”
“물건이 주인을 배신한다구?”
“응. 하지만 그거야 주인이 ‘인간’일 때인 거고. 나는 유물을 제작한 종족과 같은 종족이니까 상관없어. 부작용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테사는 오르골의 능력을 확인한 다음 대처법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청각을 막으면 이 능력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귀마개를 들고 다녀야겠네.”
“응.”
-자, 무기는 다 골랐어? 출발해야지.
“지금?”
-그럼 언제까지 기다릴 건데. 이 저택이 안전하다고 해도 언제까지 여기 숨어 살 수는 없잖아? 적들도 네가 대비하고 있다는 것쯤은 이제 알았을 테고 말이야.
“그러네.”
듣고 보니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프레드의 스타일과 딱 맞다.
오밤중에 나간다니. 대비를 좀 해야겠지. 슈트케이스에 이런저런 물건을 넣었다. 거기다 화천지옥검은 그냥 들고 다니기엔 위험해 보이니 바이올린 케이스에 넣고 다니기로 했다.
“제이크. 오늘은 밖에 있다가 올 거야.”
“플리테타 아가씨랑 같이 나가십니까?”
“어, 어쩌다 그렇게 됐어.”
제이크는 무슨 생각인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오해를 하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니 그다지 오해랄 것도 없었으므로 프레드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먼저, 아까 그 만년필이 뭐랬어?
파기나레코르가 묻자 프레드가 턱을 괴고 말했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엔리 조세프 잠식자 36호라고 말이야. 포도뿌리혹벌레는 마치 무슨 물건을 개발한 듯 mk.4라고 적혀 있었고.”
테사가 안경을 추켜세우고 말했다.
“아마도 전문적으로 실험한 것 같은데. 잠식이라고 하면 보통 그 벌레 같은 것에 감염된 것이 맞는 말이겠지. 포도뿌리혹벌레는 일종의 감염 병기고.”
“너 마치 사람을 실험한다는 듯 말한다?”
“영성자들 중에는 윤리의식이 완전히 맛이 가버려서 광기에 휩쓸린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야. 인간을 실험하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쥐를 실험하는 거랑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돼.”
-응. 오히려 그런 녀석들이 대다수기도 하지. 뭐, 정상적인 녀석들도 많이 있긴 하지만 걔네들은 자기들의 ‘선’을 극단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강박주의자들이거든.
“요컨대 영성자들 중에 멀쩡한 사람은 거의 없단 말이군.”
그렇게 압축하자 파기나레코르나 테사 플리테타나 둘 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했다.
“하다 하다 미치광이에게 노려지는 것이라니.”
밖에 나가서부터는 습격당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휘황찬란한 간판들이 아직도 불빛을 번쩍이고 있다.
“정확한 목표는 있어?”
프레드의 물음에 테사가 말했다.
“알고 있는 탐정이 하나 있어. 은퇴한 탐정인데, 영성자의 일에 관해서 잘 알고 있지.”
“그쪽으로 데려다 줘.”
프레드는 람보르기니가 맛이 갔으니 페라리의 키를 꺼냈다. 이번에는 만년필에 집중해서 차가 깨끗한 것을 읽어냈다.
[페라리 디노다. 6기통 엔진을 차체 중앙에 탑재한 미드쉽 구조……]그냥 제품의 설명 정도만 나타나는 정도.
그때, 프레드는 문득 궁금해져서, 만년필의 방향을 테사와 파기나레코르에게 돌렸다.
[테사 플리테타는 여전히 이 공간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메트로폴의 지배자, 계몽의 학살자, 무명교단의 주인……. 샤를 헥센의 저택에 들어와 있다는 것 자체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비록 프레드 헥센에게 초대 받아서 들어왔긴 했지만, 영 꺼림칙하고 얼른 이 저택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파기나레코르는 간만에 느껴보는 스릴에 행복해했다. 자, 이제 프레드를 공격하는 놈을 갈기갈기 찢어서 개먹이로 넘겨주거나 오체 분시, 능지처참해서 젓갈로 담가…….]“씨바.”
파기나레코르를 읽는 것은 그만두었다. 이녀석 외모는 귀엽게 생겼던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튼, 테사가 별로 헥센 가의 저택을 좋아하지 않으니 밖으로 나갔다.
차를 끌고 낮처럼 밝은 거리를 돌아다닌다. 테사의 인도를 받아 운전하는 프레드가 도착한 곳은 평범하게 생긴 주택가였다.
테사와 프레드가 차에서 내린 다음, 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더그. 저에요.”
“테사?”
문을 열자마자 한 노인이 나타났다. 신체 건장한 노인은 몸 관리를 잘했는지 전신이 근육질이었다.
그리고 애꾸인지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 있었다. 하나 남은 눈은 흉흉하고 매섭게 보였다.
“그쪽은 누구신지?”
그 노인이 고개를 돌려서 묻자 프레드가 자기소개를 했다.
“프레드 헥센입니다.”
“헥센……? 그쪽은 이런 일에서 손뗀 게 아니었나?”
노인이 갸웃하더니 일단 둘을 안으로 들였다.
프레드는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쭉 훑었다. 가지런히 놓인 집기. 왼쪽 작은 탁자에는 이런저런 가족 사진들이 찍혀 있었다.
차를 타온 노인이 말했다.
“내 소개부터 하지. 난 더글라스 헨치라네. 은퇴한 탐정이지.”
“은퇴한 것 치고는 현역처럼 보이시는 데요?”
흰색 면티 너머로도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이는데 웬만한 젊은 남성들보다 더 강해 보였다.
“하하. 그거야, 탐정으로 일할 때 너무 고생이 많았거든. 그때 이후로 몸 관리는 꾸준히 하고 있다네.”
웃으면서 홍차를 마시는 더글라스가 곧 날카로운 눈초리로 테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밤 중에 날 찾아온 거면 이유가 있는 모양이군.”
“아저씨, 잠식자라고 아세요?”
“메트로폴 전역에 늘어나는 곤충 기생체들 말하는 거냐? 알고는 있다.”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에 프레드가 살짝 놀라면서 더글라스에게 물었다.
“그놈들이 왜 나타난 건지도 아십니까?”
“어젯밤에 엔리 조세프라는 사람에게 프레드가 습격받았거든요.”
테사가 이어서 보충설명을 해주자 더글라스가 턱을 괴었다.
“프레드 헥센을 노린 공격이 확실한가?”
“예.”
“어지간히 간이 큰 놈이군. 메트로폴에서 헥센 가의 사람을 습격하다니. 그런 놈이라면 필시 짙은 원한이 있는 놈일 거다. 어디 보자, 엔리 조세프라는 놈의 이름은 들어본 것 같다.”
더글라스가 손을 뻗었다. 아쿠아마린이 박혀 있는 팔찌가 눈에 띈다.
저 멀리서 서류 뭉치가 날아오더니 그중에서 딱 한 장만을 골라냈다. 이 신기한 현상에 프레드가 감탄할 때쯤, 더글라스가 서류를 쓱 훑어보고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원래라면 의뢰는 안 받지만, 샤를 헥센에게는 빚이 좀 있거든. 그걸 값는 셈 치면 되겠지. 엔리 조세프는 헥센 와이너리의 전(前) 직원이다.”
“예? 아버지 회사요?”
당연하게도 프레드가 샤를이 하는 모든 사업은 알지 못한다. 다만 헥센 와이너리가 20년도 더 전에 세워진 곳이고 맛좋은 포도를 키워내고 그것을 양조하는 곳이라는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헥센 와이너리의 포도가 이상해진 적이 있었지. 그냥 팔아도 비싼 값에 팔아치울 수 있는 포도들이, 죄다 맛이 이상해졌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와이너리가 한동안 문을 닫기도 했지.”
“그……렇군요.”
사실 사업 쪽은 젬병이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근데 포도 맛이 이상해진 거랑 습격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지?
“그쪽을 조사해보는 게 좋겠군.”
“아저씨가 도와주시면 안 돼요?”
테사의 물음에 더글라스가 혀를 찼다.
“나 은퇴했다니까?”
외전6 – “이건 노인 학대야.”
그렇게 투덜 거면서도 더글라스는 무장했다. 역삼각형 등판이 다 비치는 하얀 와이셔츠에 X자형 서스펜더 홀스터를 걸친다.
권총 2정을 끼워두고 그 위로 검은색의 품 넓은 재킷을 걸쳤다.
“출발하지.”
시가를 피우면서 금방이라도 토미건을 난사할 것 같은 노인네군.
프레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를 따라 움직였다.
“대개 이런 부류의 찌꺼기들이 스며드는 곳이 있지.”
“거기가 어디죠?”
프레드가 묻자 더글라스가 답했다.
“선데이크 거리.”
“거긴 저번에 철거된 빈민가 아닌가요?”
신문으로 본 적 있다. 8년 전쯤이었나? 선데이크 거리가 도시의 미형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메트로폴의 시장은 강제 철거 명령을 내렸고 빈민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했다.
“빈민들을 밖으로 추방되었지만, 그들이 살고 있었을 적에 만들어둔 비밀 세계의 근거지는 그대로 있다. 미리 인프라가 깔려둔 덕분에 계속 남아있게 된 셈이지.”
인식이란 그다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선데이크 거리를 방문했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선데이크 거리를 빈민가라고 생각했고 그 점 때문에 비밀 세계의 인프라도 계속 남아있었다.
“그럼 결국 해고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 때문에 날 습격한 건가?”
“글쎄. 프레드, 이전에 네가 말했었지. 그 사람의 뒤쪽 칭호에 잠식자라고 떴다고.”
“어.”
“그 벌레에 잠식되었기 때문에 해고당했을 수도 있지. 아직은 확실한 것이 없어.”
“그렇긴 해.”
하지만 포도뿌리혹벌레. 와이너리에서 해고된 직원.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을 거라는 것이 계속 생각났다.
선데이크 거리는 예전에 빈민가였다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깔끔하고 깨끗한 외관으로 바뀌었으나 사람은 그다지 많이 돌아다니지 않았다.
“음.”
몇몇 양아치들이 슬금슬금 밤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타겟을 발견한 것인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근데 어두운 곳에서 걷는 세 사람을 보고는 갑자기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서는 도망치는 게 아닌가.
“뭐지?”
“저놈들도 아는 거지. 이런 구성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인간 중에 정상이 없다는 걸.”
테사가 가볍게 말했다. 선데이크 거리의 양아치들은 학습이 되어 있어서 여자 혼자 길거리를 걸어가거나, 이상한 구성(젊은 남녀와 노인)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면 기가 막히게 도망간다고.
“그 정도로 막장인가.”
곧이어 더글라스는 한쪽 골목으로 걷기 시작했다.
“프레드 헥센. 이쪽 주점에서부터 놈을 살피는 게 좋을 거다. 난 나대로 아는 사람을 만나서 조사해볼 테니까.”
“여기서 헤어진다고요?”
“테사랑 같이 다녀라. 만년필로 이리저리 훑다 보면 쉽게 찾을 거다.”
그 말을 마친 더글라스가 사라지자 프레드는 그의 조언을 따라서 골목에 있는 주점으로 들어섰다.
몇십 년 전에 만들어졌을 법한 기묘한 목조 건물에는 딱 봐도 수상한 사람들 여럿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프레드가 안으로 들어서서 만년필을 사용해버리려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우, 뭐야 이거 대체.”
너무 많고 가공되지 않은 정보가 머릿속으로 쑤셔 넣어지고 있어서 혼란스럽다.
멀리서 보려고 하지 말고 차근차근, 가까운 사람 하나하나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주인장. 술.”
젊고 예쁜 테사가 손을 까닥거리자 한쪽 팔이 의수인 주인이 맥주를 꺼내오면서 두 사람을 살폈다.
“댁들은 처음 보는군?”
“알 것 없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조심하쇼. 댁들을 눈여겨보고 있는 친구들이 좀 있는 것 같군. 주점 안에서는 싸우지 않겠지만.”
그 말대로 몇몇 두건을 쓴 인간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사는 무표정하게 술을 마시려다가 프레드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대충 보여?”
“……어.”
프레드는 조금 안색이 창백해졌다. 만년필의 능력으로 주점을 훑어본바. 잠식자라는 이름의 괴인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좀……많은데.”
다들 낄낄대면서 카드놀이를 하거나 아니면 술을 마시고 무어라 떠드는 평범한 취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같이 감염되어 있다.
그들의 몸에는 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진행 속도가 각자 다르다.
“그리고 맥주에도 있어.”
“……?!”
아무래도 잠시 살펴보러 온 곳이 빙고였던 것 같다.
맥주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프레드의 만년필은 그 안의 구성 성분까지 적고 있었다.
[포도뿌리혹벌레mk.4의 알이 들어가 있는 맥주. 섭취 후 10일 안에 증식하며 15일이면 잠식자로 변한다.]“일단 나가자.”
“좋아. 그냥 나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이쿠. 어디 가시나?”
주점의 주인이 손을 비비면서 음흉하게 웃었다.
“술은 마시고 가야지 친구들.”
“너희 뭐야?”
“위대한 그분의 미식(美食)을 위한 존재라네.”
“……미식?”
“우리는 여태까지 포도를 먹어오면서 그분을 먹고 있었으니 이제 그분이 우리를 맛보실 차례지.”
정신이 이상한 놈인데. 수상해지자마자 프레드는 바이올렛의 케이스를 열어서 검을 꺼냈다.
주점의 손님으로 있던 놈들이 슬슬 본색을 드러내려는지 놈들의 몸에서 벌레가 한두 마리씩 나오기 시작했다.
프레드는 옆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한 남자의 얼굴을 발로 걷어차고 길을 열었다.
“가자.”
“그래.”
“쫓아라! 그분의 식탁 위에 가장 첫 번째로 놓일 포도송이다!”
골목을 가로지르는데 앞을 가로막는 놈이 하나 있었다. 덩치는 엄청나게 크고 전신의 살더미가 죄다 벌레로 이루어진 끔찍한 자였다.
“우오아앗!”
프레드가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고 나서는 들고 있는 검을 휘둘렀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검에 베인 남자는 베인 열상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엄청난 불길이 치솟으면서 놈의 몸을 태워버렸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끔찍…….”
첫 살인의 충격이 상상 이상이었는지 프레드가 잠깐 멈칫하자 테사가 프레드의 등을 떠밀었다.
“머뭇거릴 틈이 없어. 도망쳐야 해.”
“어, 어. 알았어.”
미친 듯이 쫓아오는 잠식자들이 땀 대신 벌레를 흘리면서 쫓아온다. 놈들의 수가 너무 많은데다가 신체 능력이 탈 인간 급이라 위험하다고 느껴졌다.
그때, 멀리서 총소리가 울리더니 그들의 앞으로 연막이 깔리기 시작했다.
푸시이이이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프레드와 테사의 뒷덜미를 낚아챈 더글라스가 그들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검을 휘두를 뻔했던 프레드는 더글라스가 그를 놓아주고 나서야 웬 캐비닛 안으로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더글라스가 검지를 들어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지나갈 길에 잠식자들이 우르르 몰려서 지나갔다. 그 뒤에 한 놈이 나타났다.
덩치 크고, 정장을 입은 자였는데 양쪽 눈에 눈알 대신 기이한 애벌레가 나와서 눈을 대용하고 있었다.
“어서 놈들을 찾아라! 디노님께서 그자의 생명을 원하신다.”
그 명령에 잠식자들이 우르르 흩어져서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모두 다 사라져서 한숨 돌린 그들은 곧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선데이크 거리로 온 건 실수 같구나. 은퇴한 이후로 감이 영 안 좋아서 말이다.”
“그래서, 아저씨는 뭔가 알아낸 게 있나요?”
프레드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데 테사는 여전히 분위기가 똑같다.
“방금 지나간, 양쪽 눈이 벌레로 된 놈 있지?”
“네.”
“그놈이 엔리 조세프다. 이번에 새로 나타난 ‘포도 침례의 증거품 구원성공회’라는 교단의 간부지.”
“……뭡니까 그건. 사이비교?”
“그렇다. 이제는 끊겨버린 이계의 신에게 계시를 받았다면서 영성을 사용해서 여기저기 교단을 형성한 상태더군.”
더글라스가 알아온 정보는 놀라웠는데, ‘세례’라면서 벌레를 몸에다 넣고 그들의 신체를 벌레로 바꾼다.
몸 일부가 벌레로 바뀐 순간부터 ‘포도 성체를 받드는 자’라는 신에게 종속되며 신체 전부가 벌레로 바뀔 때까지 그렇게 지배당한다고 한다.
“그렇게 전신이 벌레로 변해서 죽으면 그게 그들에게 있어서는 ‘희생’이며 그 행위로 인해 그들은 ‘포도 성체를 받드는 자’의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하더군.”
“미친놈들인데요?”
“그냥 미친 게 아니라서 문제다. 그들의 교단을 받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다 강제로 벌레를 주입하고 ‘개종’이라고 한다거나, 시중에 판매되는 커피에 벌레를 탄다든가 한다.”
어지간히 미친 게 아니었군.
“그럼 이걸 대체 어떻게 막죠?”
“무명 교단에 연락해라.”
“아버지가 만들었다는 그곳이요?”
“그래. 무명 교단은 20년 동안 사회에 해가 되는 것들, 사이비 교단이나 괴물들을 처단하고 다녔지. 이 포도 뭐시기 하는 교회 놈들도 처단 대상에 포함될 거다.”
그때,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프레드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서 공격을 받아쳤다.
챙!
손등에는 기이할 정도로 길게 나 있는 발톱 같은 것이 눈에 보인다.
“이런, 이런. 신고? 당신들은 여기를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거기 엔리 조세프가 있었다. 그리고 골목 여기저기서 잠식자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젠장, 너무 오래 있었군.”
“야! 너희 대체 뭐야? 사이비고 나발이고, 왜 나한테 벌레 같은 걸 보내는 건데.”
심지어 프레드에게 보낸 벌레는 잠식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그를 죽이기 위해서 자폭했다.
프레드가 검을 그에게 겨누면서 외치자 엔리 조세프가 말했다.
“오호호호! 바보 같긴! 댁이 우리의 최악의 적수. 샤를 헥센의 아들이었기 때문인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자가 메트로폴을 비운 동안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있다고.”
엔리 조세프는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잠식자들이 더 가까이 접근했다.
“오홋홋. 아무튼 잘 됐군. 제발로 우리 소굴에 기어들어오다니.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그때, 테사가 프레드를 바라보면서 눈짓을 했다.
프레드는 그 눈빛을 기가 막히게 읽고는, 귀마개를 들어서 양 귀를 막았다.
테사가 오르골을 열었다. 기고만장하면서 웃던 엔리 조세프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다른 잠식자는 물론이고 바닥에 떨어져서 꿈틀거리는 벌레들도 순식간에 멈춰버렸다.
“문제는 더글라스 아저씨도 멈춰버렸다는 거지만.”
테사가 중얼거리면서 꽁꽁 얼어버린 것 같은 더글라스를 바라보고 일단 그의 옆구리에 파고들어서 부축하듯이 그를 옮겼다.
모두가 멈춰버린 틈을 타서 프레드는 엔리 조세프의 미간에 화천지옥검을 꽂아 넣었다.
“……!”
“운이 좋냐?”
그 즉시 불길이 치솟으면서 놈의 신체를 전부 태우기 시작하자 프레드는 검을 수납했다.
“끝냈어!”
“이제 빠져나가자!”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지만 대충 눈치껏 옆으로 다가가서 더글라스를 아예 둘러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멀어지자마자 곧바로 오르골을 닫는다.
“푸합! 됐다! 이제 내려줘! 그 오르골은 또 뭐야?”
더글라스는 그대로 털썩 내린 다음에 인상을 썼다.
“이거 노인 학대라니까?”
그리고는 권총을 뽑아서 뒤쫓아오는 잠식자 하나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놈들은 계속 추격해오고 있었다.
“우두머리를 죽였는데도 잘 따라오다니…….”
프레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이 잠식자라는 놈들의 명령 체계에 더 윗선이 있는 것 같다.
외전7 – 뚜루루. 뚜루루루.
유마는 살짝 고개를 돌려서 비서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모양을 보니 프레드인 것 같다.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쳤는지 볼까.”
전화기를 들어서 귀에 가져다 댔다.
“무슨 일이냐?”
“삼촌! 혹시 와이너리에서 전에 해고된 사람 알아요?”
꽤 다급한 목소리였으나 어째서인지 뜬금없는 질문에 유마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되물었다.
“누구?”
“정식 이름은 모르겠고. 엔리 조세프라는 사람이 그 사람을 디노라고 불렀는데.”
“엔리 조세프? 누군지 모르겠다만.”
“헥센 와이너리 직원이었대요.”
그 말을 듣고 유마는 곧바로 기억 속에서 그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거라면 기억 나는 일이 있다. 저번에 불미스러운 일로 사장직에서 퇴출당한 남자가 하나 있다. 이름은 베르나르도 프로벤짜노. 초창기 와이너리 설립자다.”
“왜 퇴출 됐는데요?”
“여태까지 포도 제작 기술을 우리에게서 속이고 있었거든. 그런……방법으로 포도를 재배하고 있을지는 몰랐다.”
유마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속이 영 안 좋아져서 약이라도 한 알 삼키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해고했다.”
“어디 사는지는 알아요?”
유마는 그 말을 듣고 기억을 떠올렸다. 주소를 불러서 적어다 주니 프레드가 고맙다면서 말했다.
“삼촌. 그 디노라는 사람이 지금 완전 맛이 간 것 같거든요?”
“뭐?”
“그래서 삼촌한테 복수한다고 갈지도 모르니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마라. 근데, 프레드.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거니?”
“다 끝나고 나서 다시 전화 걸게요. 그럼 이만! 삼촌 정보 고마워요!”
뚜. 뚜. 뚜.
“…….”
다급하게 끊은 전화를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유마는 왼쪽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서 핑커톤 탐정단에게 프레드의 위치를 좀 파악하고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의뢰를 하기로 했다.
똑똑.
“들어와요.”
보니까, 검은색 복장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서 있었다. 경호팀장이다.
“빌딩 내부로 이상한 물건을 반입하려는 자를 발견했습니다.”
“이상한 물건이요?”
“알약처럼 생겼지만, 벌레의 유충으로 보입니다. 영성이 깃들어 있고요.”
유마는 안색을 굳혔다. 의뢰 조건을 변경해야겠다. 단순 조사에서 호위로.
*
탕! 탕! 탕!
“놈들이 거의 다 왔다!”
쫓아오는 잠식자들에게 권총을 마구 갈기는 더글라스가 고함을 쳤다.
프레드는 공중 전화의 부스에서 다급하게 빠져 나왔다.
“됐어요! 가요!”
“대체 뭘 알아보려는 거냐?”
“조금 전에, 놈들이 디노라는 이름을 꺼냈었잖아요? 혹시 몰라서 알 법한 사람에게 전화했죠.”
“그래서 결과는?”
“찾아냈어요. 여기 주소.”
더글라스는 주소를 보자마자 안색을 굳혔다.
“여기가 어디죠? 처음 보는 거리인데.”
“이 도시에서 중요한 곳 중에 하나긴 했었지.”
잠식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윈즈강 반대편으로 건너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프레드는 근처에 자신의 요트를 대어 두었다는 것을 흐릿한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가 타지 않더라도 관리인이 관리를 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서 타기만 하면 된다.
“저쪽 저쪽!”
“어디?”
어둠 속의 선착장에서 5년 전 기억을 더듬어서 자신의 요트를 찾아낸 프레드는 일행을 데리고 요트에 올라탔다.
“키가…….”
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열쇠고리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너무 많아서 기억이 안 나는데 분명히 이 열쇠였다.
엔진에 시동이 걸리자 프레드는 재빨리 요트를 몰아서 강으로 벗어났다.
“따돌렸나?”
“그런 거 같아. 더 안 쫓아와.”
“후아. 진짜 죽을 뻔했네.”
“네가 전화 건다고 부스에서 시간을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놈들의 수괴가 사는 주소는 알아냈잖아?”
“그 집에서 설마 살고 있겠어?”
“……그렇긴 하지만.”
더글라스가 주변을 살피는 것을 그만두고 다가왔다. 완전히 따돌려서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 주소를 알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내가 점술을 좀 사용할 줄 안다.”
“점술이요?”
뭐 아스트롤라베나 타로 카드같은 걸 써서 미래를 엿보는……그런 건가?
여전히 비밀 세계인지 뭔지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프레드에게 있어서 더글라스의 말은 신빙성이 없긴 했다.
“아직 못 믿는 모양이군. 점술을 사용하면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뭐, 어쨌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린츠 거리였다.
“여긴……예전에 경매장이 있는 곳 아닌가요?”
테사가 뭔가 알 것 같다는 듯 더글라스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이다.”
주소지를 찾아가 보니 평범한 2층 주택처럼 보인다.
“흐음.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더글라스가 턱을 쓸면서 생각하는 동안 프레드가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가서 문을 두들겼다.
“계십니까?”
“아니, 이봐. 헥센 군. 대체 뭐 하는 건가?”
“그 디노라는 자가 여기 있으면 우리 목적은 성공이고 여기도 잠식자 소굴이라면 도망치거나 맞서면 되잖아요? 일반 민가면 아무 문제도 없고.”
“…….”
너무 무계획이 아닌가 싶지만 이미 정문으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지.
끼이이익.
“어라? 문이 열려 있는 데?”
여기저기 처져 있는 거미줄, 먼지가 가득한 집기들을 통해서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탄 흔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옆을 더듬어서 전원을 켜니 그래도 전기는 연결되어있는지 불이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선 일행은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프레드도 마찬가지로 주변을 살폈다.
“별로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이는…….”
프레드는 바닥을 밟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곳과 다르게 이 안쪽은 비어 있는 것 같다.
발로 바닥을 내려치자 곧 바닥에 구멍이 보인다.
“뭐야?”
“잠깐 옆으로 가 봐.”
다가온 테사를 살짝 밀어내고 아예 화천지옥검을 꺼내서 바닥에 꽂자, 마치 공업용 절단기처럼 그대로 바닥 장판을 잘라냈다.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보이는데.”
프레드가 다짜고짜 통로를 보자마자 내려가려고 하자 더글라스가 제지했다.
“아래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무턱대고 내려가는 건가?”
“뭐라도 있겠죠.”
프레드는 그렇게 말하고 쏙하고 통로 아래로 떨어졌다. 옆면이 거칠어서 여기저기 잡고 내려가니 오히려 편했다.
“테사야. 저놈의 대체 저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거냐.”
“프레드가 어렸을 때부터 저러긴 했거든요.”
테사가 살짝 웃으면서 프레드를 따라 내려갔다. 미리 내려간 프레드가 테사의 손을 잡아서 내려줬다.
아 물론, 더글라스는 그대로 뛰어내리게 내버려 뒀다.
“차별이 느껴지는구나.”
“아까보니까 잘 뛰시던데요. 뭘.”
“내가 괜히 도와주겠다고 했어. 에잉 쯧쯧.”
주변은 마치 무언가의 실험실처럼 보였다. 거대한 유리로 벽이 쳐진 공간들이 보였는데 조명이 어둡게 되어 있었다.
“뭐지?”
“포도……같은데.”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서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흘러나왔다.
“뭐야? 거름 냄새인데 이거.”
프레드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품에서 손전등을 꺼냈다.
그리고 안을 비추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무슨……비료가.”
프레드는 유마가 조금 전에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급하기도 했고 언급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캐묻지는 않았지만, 베르나르도 프로벤짜노라는 자가 여태 헥센 가문을 속여왔다고 했었다.
손전등에 비친 곳에는 커다란 대야에 흙과 이름 모를 부패한 것들이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뼈가 있다.
“저건 시체 아니야?”
“사람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긴 한데.”
온전히 남은 두개골이 하나 있었다. 뼈의 형태로 보건데 사람의 것은 아니었지만 익히 알던 어떤 짐승의 것들과도 달랐다.
“저게 무슨 짐승이지?”
“흐음. 나도 처음본다만. 테사 너는 어떠냐?”
“……저거 이계의 생물이 맞긴 해요. 아르고스……였나?”
그게 뭔지 물어보니, 사람을 잡아먹고 사는 이계의 짐승이라고 했다.
물론 그 짐승만 있는 것은 아니고 처음 보는 여러 짐승이 함께 섞여 있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있었는지 여전히 냄새는 좋지 않다.
“이런 생물들을 비료로 사용해서 여태 포도를 재배하고 있었다는 거였나.”
“그리고 그동안 몰래 포도 뭐시기 교를 만들고 벌레들을 개량해왔던 건가.”
그 말에, 더글라스가 생각하고 말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 디노라는 자는 아주 오랫동안 은밀하게 행동해왔을 거다. 샤를 헥센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깊숙한 곳에서 남들에게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만 해왔던 거겠지.”
그러다가 이제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행동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제 점술을 치러야겠다. 적의 근거지를 찾아야겠으니.”
“근데 아저씨, 정말로 할 수 있어요?”
“쯧쯧. 날 뭐라고 보는 거냐.”
테사가 고개를 돌려서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어, 솔직히 말해도 돼요?”
“아니. 말하지 마.”
맨 처음에는 완전 터프하고 하드보일드한 생활을 겪고 난 뒤 은퇴 형사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냥 동네 할아버지 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더글라스가 손바닥을 내밀어서 바로 원천 차단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적당히 떨어진 천 조각을 발견해서 그것을 손에 넣었다.
“저게 뭐야?”
“점술을 사용할 촉매 같은 거라고 보면 돼.”
테사가 덧붙이자 프레드가 영 미덥잖다는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더글라스는 품에서 주문서와 아스트롤라베를 꺼냈다.
“집중해야 하니 좀 기다려다오.”
그리고 잠시 뒤에 빛이 반짝거렸다.
*
디노는 자신의 곱슬머리를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돌리다가 기묘한 느낌에 서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잠식된 부하 하나가 물어보자 디노가 답했다.
“누군가 날 찾고 있군.”
“점술사가……?”
“실력 좋은 놈은 아니지만, 이 위치는 들킨 것 같다.”
이 점술은 아마도 그의 옛 실험실 쪽에서 발동된 것으로 추정된다.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군. 일단 이 실험은 마저 하고.”
포도의 종자 개량을 위해서는 이런저런 모든 방법을 강구한다.
그 개량에 이런저런 방법을 가한다. 때론 해충이라도 나무에는 이로울 때가 있지.
그런 의미에서 잠식자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포도뿌리혹벌레MK.5는 이전의 성능보다 몇 배는 뛰어났다.
포도 뿌리에 붙어서 자신이 잡아먹고 큰 인간의 영육을 불어넣는다.
디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아주 거대한 포도나무를 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크기가 몇백 미터에 이를 법한 거대한 포도나무에는 주먹보다도 더 커다란 포도들이 몇만 송이나 달려 있었다.
아직 양분이 부족한 모양인지 그 크기는 매우 작았다.
“자, 벌레들을 붙여봐라.”
잠식자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에게 헌신하고 모든 신체가 벌레로 변한 뒤에는 그가 키운 이 포도나무에 헌신한다.
벌레들은 꿈틀거리더니 포도나무에 달라붙었다. 곧 뿌리쪽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영육을 공급할 터.
“크크. 크크크크. 크크크큭.”
저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인간의 미각의 한계를 넘어서 영혼마저 감미롭게 만드는 위대한 포도주가 될 것이었다.
외전8 – 점술을 끝마친 더글라스가 말했다.
“됐다. 이제 넌 돌아가도 된다.”
“네에?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라고요?”
“이건 영성자들의 싸움이야. 넌 있어도 도움이 안 될 거다. 이제 앞으로 남은 일은 무명 교단에 맡기고…….”
“그런 게 어딨습니까? 먼저 선빵 친 놈이 있는데? 복수해야지.”
“……?”
더글라스는 프레드라는 인간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이거……. 꼴마초놈이군.
“자, 놈들을 줘 패러 갑시다.”
“아니 적어도 다른 곳에 연락은…….”
“알아서 하고 오세요. 테사 너는 어쩔 거야?”
“나도 끝까지 가야지. 근데 정말 괜찮겠어?”
“물론이지.”
우려 섞인 눈빛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당장 이놈들을 처치하지 않으면 어쩌면 그가 아는 지인들도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후……그래. 어쩔 수 없군.”
*
주변에 담장이 쳐져 있는 건물이 보인다. 높지는 않지만 지키는 자가 꽤 있다.
“음. 어떻게 할까.”
프레드는 골몰히 생각했다. 정면으로 쳐들어가면 위험하겠지. 주변을 둘러보는데 테사가 말했다.
“저쪽에 환기구가 있어.”
“역시 테사야.”
“아니, 이보게 저기로 들어가겠다고?”
“사람 한 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만 한데요?”
담장 옆쪽에 환풍기가 여러 대 돌아가고 있다. 그중 하나는 고장이 나 있는지 속도가 느리다.
프레드는 만능 공구로 활용 중인 화천지옥검을 들어서 환풍기에 가져다 댔다.
손에 걸리는 건 없는 느낌인데 그대로 환풍기의 날개가 우수수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환풍기를 아예 해체한 프레드는 포복으로 환풍기 입구를 기어갔다.
“이상 없음.”
프레드가 손을 까닥거리자 테사가 뒤따라 들어갔고 맨 마지막에 더글라스가 따라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간다. 이 환풍구는 꽤 깊숙한 곳까지 연결된 것 같다.
그때,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건물의 경비원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대화하고 있다.
“그게 사실이야?”
“건물주가 미친 건 사실이지. 후.”
길게 담배를 내뿜은 경비원이 말했다.
“거기 들어가는 게 사람 사체라고?”
“내가 알기론 그래, 온몸을 칭칭 감고 들어오는데 여기저기 살점이 없다고 하더군.”
“대체 그런 걸 왜 운반하는 걸까?”
“낸들아리? 신경 쓰지 말자. 우리는 그냥 돈이나 받고 일이나 하면 되는 거야.”
“그래. 이제 슬슬 복귀하자고.”
잠깐 보이는 틈 사이로 경비원들의 무장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허리춤에는 권총까지 걸려 있었다.
언제든 준비되면 쏠 준비가 된 자들이다. 꽤 위험할 테고.
환풍구를 조금 더 기어가다가 독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대충 검으로 옆면을 잘라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환풍구를 빠져 나왔다.
“여긴 회의실 같네.”
프레드를 따라서 테사가 내려왔다. 다들 서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앞을 쓸다시피 해서 들어온 프레드가 제일 더러워졌지만, 유년사관학교에서 훈련할 때는 이것보다 더 심했다.
회의실 옆쪽에 칠판이 보인다. 온갖 기호와 낙서 같은 공식들이 적혀 있었다. 그곳에는 생각보다 고급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거, 단순히 회의 내용을 기록한 것만은 아닌 것 같군.”
“이게 뭔데요?”
“연구 자료다. 포도뿌리혹벌레를 영성을 불어넣고 어떤 방식으로 개조하냐는 것이지.”
더글라스가 자료를 찾아볼 때, 이 벌레를 개량하는 것은 온갖 생물을 통해서 이뤄진다.
“비료 통에서 우리가 봤었던 아르고스라는 생물 알지?”
“네.”
“그 녀석에게 벌레를 감염해서 잠식자로 만든다. 그리고 거기서 태어난 벌레가 mk.2고 이런 식으로 여러 번의 순환을 걸쳐 나온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벌레’ 같다.”
생물의 틈에 들어가 영혼과 육신을 전부 먹어치운 벌레는 다시 새로운 영육을 먹어치우는 식으로 개량되었다.
“끝내 인간의 영육을 잡아먹고 mk.5 버전이 된 거야.”
“그럼 위험한 건가요? 막 괴물로 변하고?”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단순히 영육을 끝없이 흡수해서 아주 꾸역꾸역 압축하는 것 같군.”
“……영육 압축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벌레를 공양하는 거야.”
테사가 그렇게 말하자 더글라스가 그녀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럼 이건 ‘제물’인 셈이군? 그럼 처음부터 제물로 설계한 것일까?”
“아마도요. 하지만 다음 개량에서 뒤바뀔 가능성도 있습니다.”
프레드는 이제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는 것은 글렀다고 생각한 뒤에 만년필을 들어서 정신을 집중하며 주변의 정보를 습득했다.
[베르나르도 프로벤짜노의 회의실. 그가 일전에 필기해두던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건물 구조도.] [지하 온실의 구조도.]“여기 지도 찾은 것 같은데요.”
프레드가 손전등을 비추자 벽면에 지도가 붙어 있었다.
건물 전체의 지도와 지하 온실이라고 적힌 부분의 지도였다.
왜 지도가 나누어져 있나 궁금했는데, 조금 지도를 살펴보니 알 것 같았다.
지하 온실이 엄청나게 크다.
“이런 규모의 온실이 있을 수가 있나……?”
지도의 크기를 보고 프레드가 중얼거리자 테사가 말했다.
“아마도 마법으로 공간을 증폭시킨 것일지도. 이 정도의 규모로 지하를 만들려면 어렵거든.”
“내 생각도 그렇다. 이런 지하를 만드는 건 시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을 거야.”
안 그래도 메트로폴 지하는 복잡한데. 그렇게 덧붙여 중얼거린 더글라스가 프레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이제 뭘 어쩔 셈이냐?”
“음. 살금살금 숨어 들어가서 디노를 쥐어패기?”
“놈들의 부하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이런 중요한 실험실이면 충분하다 못해 과도할 정도로 대비가 되어 있을 테고.”
“걱정하지 마세요. 이걸 응용하면 충분히 조용히 들어갔다가 조용히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
프레드는 자신 있게 만년필을 두들겼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썼고, 그다음에는 정신을 집중해야 했지만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숙련도가 늘어나고 있다.
“다들 조용히 따라오세요. 천장을 돌아다니는 바퀴벌레처럼.”
“비유가…….”
“샤샤샤샤샥.”
프레드가 헛소리하면서 움직였다. 복도를 나가서 조금만 더 걷자 곧이어 경비병들이 보였다.
“경비 두 놈. 완전히 방심 중. 그대로 보내버린 뒤에 다음 골목에서 왼쪽으로 꺾죠.”
그런 방식으로 경비병 16명을 따돌렸다.
프레드가 유물에 적응하는 속도가 더글라스나 테사가 생각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다.
“역시 헥센 가문의 피가 흐른다 이건가.”
더글라스가 중얼거린다.
곧이어 철문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년필에 의하면 이 너머가 온실이라는 곳의 승강기라는 데요?”
승강기 앞에 네 명의 경비병이 철통같이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제압하지 않고는 못 내려가요.”
“내가 하지. 시선 좀 끌어주게.”
더글라스가 장갑을 끼고 하얀 와이어를 꺼내 들었다.
떠밀린 프레드가 당당하게 그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어?”
“뭐야?”
“안녕하십니까?”
하품하면서 경비를 서던 경비병들은 당당하게 나와서 인사를 하는 프레드를 보고 오히려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누구냐?”
“무기 내려놔!”
“네.”
검을 떨어트리고 당당하게 양팔을 벌렸다. 이 영감이 아직도 안 움직이나 속으로 생각할 때쯤, 맨 뒤에 있던 경비병이 픽하고 쓰러졌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다른 경비병이 돌아설 때쯤, 긴 와이어가 그들의 목을 굴비처럼 감쌌다.
총알을 발사할 틈도 없이 조여오는 목을 느끼자마자 반사적으로 총을 내팽개치고 양손으로 목을 조여오는 와이어를 감싼다.
그사이 나타난 테사가 발차기로 명치를 걷어차서 경비병들을 침묵시켰다.
“와……. 너무 예쁘고.”
프레드가 멍청하게 바라보는 사이 천장에서 더글라스가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제압 끝났다.”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면 되겠네요.”
프레드는 승강기의 버튼을 보고 만년필을 꺼내 들어서 정보를 받아들였다.
[지하 온실로 향하는 승강기.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어 지하 온실로 갈 수 있다. 보안을 위해 매일 아침 9시와 저녁 9시에만 가동된다.]“입구가 이것뿐인데, 지금 작동하면 들킬 거예요.”
“여기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지.”
검을 챙겨 든 프레드는 쓰러진 경비병들의 장비를 뒤졌다. 사우어 사의 기관단총이라, 비싼 걸 쓰고 있었군.
수류탄이랑 방탄복까지 알뜰하게 챙긴 프레드는 방탄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방해된다고 거부했다.
승강기를 작동하고 내려간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음침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불길한 기운을 느낀 듯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띵.
도착하자마자 총알 세례가 나올 것 같아서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으나, 이 아래는 매우 조용했다.
“뭐지?”
“조용하군. 일단 들어가 보게나.”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따뜻해진 것을 느꼈다.
저 멀리 엄청나게 큰 스포츠 구장같이 생긴 곳이 보이고 대낮처럼 환하게 조명을 몇백 개나 켜둔 게 보인다.
조금 걷자, 그 조명이 비치는 거대한 포도나무가 보였다.
포도는 덩굴 식물이라 수많은 장대를 세워서 재배해야 하는데 이 장대들은 전봇대처럼 컸다.
거대한 포도나무가 보인다. 가까이 가자 포도나무에 하나씩 열린 포도들이 보였다.
“……뭐야 이게?”
포도는 아직 다 익지는 않은 것처럼 새파랗지만 한 알마다 마치 사람의 얼굴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베르나르도 프로벤짜노가 ‘감미와 산미의 신’이라고 이름 붙인 포도나무. 이계로 가는 경계선이 닫히기 전에 들여온 이계종으로, 생물이 영육을 받아먹고 인면포도를 만들어낸다.]“프레드. 잠깐, 멈춰 봐.”
테사가 제지하자 프레드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포도 뿌리가 있어야 할 그 바닥에, 어마어마한 수의 포도뿌리혹벌레가 보였다.
[포도뿌리혹벌레mk.5 – 베르나르도 프로벤짜노를 통해 5번째로 ‘개량’된 벌레종. 인간의 살점을 뜯어먹고 영혼을 흡수한다. 오랫동안 그 몸속에서 기생하다가 덩치가 커지게 되면 빠져나온다. ‘감미와 산미의 신’의 포도뿌리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미친……. 그 벌레들을 어디다 사용하나 싶었더니, 포도 나무에 양분을 공급하려고?”
“음.”
더글라스가 턱을 괴더니 말했다.
“이건 단순한 포도가 아닐 걸세. 옛 신들이 만들어냈다는 넥타르가 바로 이런 식으로 인간의 희생을 통해 제조되는 걸로 알고 있다네.”
“넥타르?”
“어떤 병이든 치유할 수 있는 궁극의 음료라네. 그리고 그 맛은 영혼이 천상에 도달할 정도로 지극하다고 하더군.”
짝. 짝. 짝.
그때, 멀리서 정장을 입은 한 중년이 손뼉을 치면서 걸어왔다. 이탈리인으로 보이는 구릿빛 피부의 남자는 자기네 나라 언어로 정확하다고 말했다.
“정확하다네. 친구들. 산미와 감미의 신에게 바치기 위해 우리 교가 존재한다네.”
“당신 미쳤어? 그럼 여태까지 사람들을 벌레로 감염시킨 이유가 겨우 포도나무에 영양분을 주려고 했다는 거냐?”
“프레드 헥센. ‘겨우’라고 했나? 이건 겨우가 아니야. 저 신이 만들어낼 어마어마한 포도주를 상상해 보게나.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궁극의 음료가 만들어질 거야.”
이 세상에 이것 말고 더 가치 있는 일이 있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디노를 보면서 프레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미친놈이군.”
외전9 – 인간이 사는 이유가 뭘까?
이 철학적인 질문은 아주 오래전, 인간이 존재해왔던 시절부터 모든 인간이 질문해왔고 그 누구도 해답을 얻지 못한 명제였다.
일부 인간들은 자신들이 사는 이유를 찾고는 한다. 때론 애국적인 일을 위해서, 때론 자기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그리고 베르나르도가 선택한 삶의 이유는 최고의 포도주를 위해서였다.
비밀 세계와 영성의 존재는 그 광기를 함축하고 일률적으로 전개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자 도구였다.
“윤리라는 얇고 붉은 선 하나를 건너면 인간은 생각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생각해보게. 우생학을 극한으로 연구한 학자가 만들어낸 우수한 과학자가 있다면 어떨까?”
인간을 짐승으로 보고 무수한 교배 끝에 위대한 과학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라네. 무수한 포도의 교배 끝에, 이 방법이 제일 우수한 포도를 만들어낼 제일 좋고 혁신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선지자지.”
“자화자찬하면 그것만큼 추한 게 없는 데 말이야.”
프레드는 실실 웃으면서 놈의 성질을 긁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만년필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좌우에서 바글바글하게 잠식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 잠식자들은 다른 잠식자들과는 달랐다.
[개조된 잠식자(50호) 일전에 윌리엄 윌포드라는 이름의 남자였으나 잠식자가 된 이후에는 전투용으로 개조되어서 베르나르도 프로벤짜노의 호위 병력으로 사용되고 있다. 단단한 등껍질을 보유.] [개조된 잠식자(51호)……]일부는 다른 벌레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마귀의 앞발이 달린 잠식자가 있는 한편, 양팔에 캐논 같은 것을 달고 다니는 잠식자도 있었다. 만년필로 읽어보니, 폭탄 방귀벌레의 일부라나.
만만찮은 놈들이 여기저기서 계속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너희들은 왜 내 아름답기 그지없는 온실에 더러운 흙이 묻은 발로 걸어 들어왔나?”
“어이가 없네. 먼저 날 공격한 게 누군데?”
“흐음. 나는 그냥 헥센 가의 여러 놈을 처리하려고 했을 뿐이야. 너에게 개인적인 사감은 없다. 아마 지금쯤 헥센 가의 저택에도 내가 전달한 선물들이 보내졌겠지. 후후.”
프레드가 갑자기 실실 웃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으니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후후후. 너 내 신조가 뭔지 아냐?”
“……?”
“당하면 복수한다.”
“당하면 복수한다?”
“크크. 당하지 않아도 복수한다!”
“……응?”
“본 적 없는 놈에게도 복수한다!”
“뭐야……!?”
칼 들고 달리기 시작한 프레드는 누구도 말릴 수가 없는 사이에 쏜살같이 이미 디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디노의 옆으로 등껍질이 단단한 반인간, 반곤충의 생물이 나타나서 화천지옥검을 받아냈다.
하지만, 프레드의 눈에 어린 광기를 보고 디노가 뒷걸음질 쳤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누구 하나 내 눈에 보이면 복수한다!”
화천지옥검의 검날에 불꽃이 어리기 시작하면서 단단한 등딱지를 가진 잠식자를 그대로 반토막 내버리자 초록색을 물든 체액이 쏟아졌다.
프레드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화천지옥검의 사용 방법을 저절로 익히고 있었다.
“손에 더러운 물이 닿았잖아!”
검은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축축한 체액이 기분 나쁘다. 프레드는 반 토막 나 있는데도 아직 서 있는 잠식자를 발로 걷어찼다.
“노, 놈을 막아라!”
“배상해!”
당장이라도 장갑을 벗어버리고 싶지만, 프레드는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장갑을 말려 버리자.’
화천지옥검의 일부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염으로 이뤄진 검신으로 달려드는 잠식자들을 토막 내기 시작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더글라스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성물 급의 유물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쓰는 게 정상적인 일인가?’
유물에 특화된 전문화를 익혔다고 하더라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일 텐데…….
더글라스는 잠깐 감탄과 동시에 당황했지만, 곧 정신 차리고 뒤에서 쌍권총을 뽑아서 프레드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권총에서 대구경의 마탄이 쏘아지자 달려드는 잠식자들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테사야. 그 유물 다시 쓸 수 있겠냐? 오르골.”
“아니, 쓰지마!”
멀리서 싸우던 프레드가 대답하는 걸 보고 더글라스가 놀라서 돌아보았다.
“이 녀석들, 다 대비가 되어 있어.”
그 말대로, 잠식자들은 언제든지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준비가 된 상태였다.
계몽주의자의 오르골은 굉장히 위협적인 물건이지만 그 대처법을 알고 있으면 생각보다 그다지 효용이 없다.
프레드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든 것처럼 보여도, 만년필을 사용하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탄환이 떨어지자마자 재장전을 했다. 그러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뭘 하려는 거냐?”
테사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웠다.
“전 저 나무에 불을 지를게요.”
“빨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놈들이 증식하고 있어.”
테사는 나뭇가지를 들고 그 위에 자신의 외투 일부를 찢어다가 돌돌 감았다.
마법적인 불꽃을 일으키면서 포도나무의 깊숙한 곳을 향해 들어갔다.
“막아!”
잠식자 하나가 소리치자 테사를 뒤따라서 다른 잠식자들이 달려갔다.
그렇게 우르르 사람들이 빠져나갔지만 대체 어디서 나타나는지 이 잠식자들은 계속해서 그 수를 늘려나가고 있었다.
디노는 뒤로 물러나서 그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디노라는 놈 자체의 전투력은 거의 없는데.’
프레드는 뒤에서 그를 바라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이놈이 만든 반인간, 반곤충인 이 잠식자들은 하나같이 다양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뻥!
양손으로 캐논을 쏘듯이 발사한 공격을 보고 깜짝 놀란 프레드가 화천지옥검을 들고 정면으로 검신을 들어서 막았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으나, 불길이 저절로 일어나면서 전면으로 쏘아진 화학 약품을 그대로 불태워버렸다.
그대로 검을 휘둘러서 불꽃을 날려 보냈으나 폭탄 발사구를 가진 잠식자는 단단한 등껍질을 가진 다른 잠식자의 뒤로 다시 숨었다.
그리고 정면에서는 사마귀의 앞날을 가진 잠식자가 달려들었다.
화천지옥검의 고열 칼날에도 맞부딪힐 수 있는 앞날을 가지고 있었다.
“후후후. 그 녀석의 칼날은 용광로에 넣어도 분해되지 않는다.”
“그럼 거기만 안 때리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검을 휘둘러서 재차 사마귀 앞날에 휘둘렀다.
힘 싸움을 하는 동안, 검의 밑동에서 붉은색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불꽃으로 형상화한 채찍이 형성되더니 검의 궤적과는 완전히 상반된 방향으로 날아갔다.
초고열의 채찍이 잠식자의 허리를 그대로 끊어버렸다. 반토막이 난 잠식자의 두개골을 향해 검을 찔러넣어서 태워버리고는 다시 검을 들었다.
뒤에서 재차 원거리 견제가 들어올 뻔했으나, 뒤에서 사격 중인 더글라스의 대구경 권총에서 발사된 탄환이 원거리 공격을 가하려는 잠식자의 두개골을 관통했다.
“이제 끝났어.”
“자, 잠깐…….”
디노는 뒤로 물러나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베르나르도 프로벤짜노는 잠식자들이 쓰러져가는 상황에, 자신이 준비한 두 번째 방어기제를 믿고 있었다. 그건, 이미 아직 덜 익은 포도를 이용해 만든 포도주 일부를 마신 자를 뜻했다. 교단에서 그들은 성혈을 마신 자라고 표현되었다.]“아무래도 간단히 끝날 것 같지는 않네.”
하늘 위를 날아온 한 남자가 보였다. 등에 달린 벌레의 날개로 비행 중인 남자는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리면서 프레드와 디노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전신은 갑각류의 갑피를 입은 것 같았고 날개가 달리지 않은 등에서는 창날처럼 뾰족한 다리들이 솟아나서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게의 다리처럼 보이는 그 여덟 개의 다리 끝에는 벌처럼 뾰족한 침이 달려 있었다.
[성혈을 마신 자. 덜 익은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마시고 그 힘과 능력이 증폭된 잠식자. 8개의 창과도 같은 벌레 다리는 접힌 관절을 피면 약 3m까지 늘어난다. 인간을 넘어선 근력, 날개 비행, 재생 능력 보유.]“만만찮은 놈이 나왔군…….”
“자, 놈을 죽여라!”
명령이 떨어지자 성혈을 마신 잠식자가 달려들었다.
프레드는 검으로 놈을 쳐내려다가 잠시 현기증이 느껴졌다.
‘뭐, 뭐지?’
그대로 잠식자의 주먹에 얻어맞은 프레드가 뒤로 날아갔다. 더글라스가 깜짝 놀라면서 성혈의 잠식자에게 총알을 당겼다.
“영성을 너무 많이 소모한 거다.”
“크윽. 영성이라고요? 저는 그걸 아직 각성하지 못했다면서요?”
“아무래도 자연적으로 영성을 각성한 것 같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초자연적인 물건의 옆에 있다가 자연적으로 각성한 영성자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더글라스의 말에 프레드는 배를 움켜쥐면서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썩을.”
“일단 뒤로 물러서서 휴식을 취하고 있어라.”
더글라스는 앞으로 나서면서 자신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대검을 언제든지 뽑을 준비를 했다.
“안 썼으면 좋겠는 물건을 꺼내게 되었군.”
*
포도나무의 중심부로 걸어가는 테사는 그녀를 뒤따라오는 잠식자들을 손쉽게 따돌리고 계속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심도 높은 영성이 느껴졌다.
그 포도에 미친 자가 신으로 받드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 나무는 자체적으로 인격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먼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테사에게 불길한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 무시하고 손에 든 횃불을 나무의 밑동에 내려놓았다.
불꽃이 밑동에 달라붙으면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신성한 나무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죄악! 죄악이다!”
뒤늦게 그것을 파악한 잠식자들이 다가와서 괴성을 질러댔다. 불을 끄려고 다가오고 있다.
테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제 프레드와 더글라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든지 날개를 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프레드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프레드와 함께 잔 날 밤에는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날개를 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프레드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진짜 모습을…….
등 뒤에서 나비 날개가 활짝 펴졌다. 날개의 화려하고 기하학적인 무늬가 실시간으로 꿈틀거리면서 움직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그리고 달려드는 잠식자 하나의 목을 잡아다가 그대로 꺾어서 목등뼈를 뽑아냈다.
벌레에 덕지덕지 잠식된 몸뚱이는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또 다른 잠식자가 다가오자 그자의 팔을 뜯어내고 염동력을 투사해서 내장을 긁어냈다.
이 잔혹한 모습은 그녀의 종족이 가진 본성이었다. 그리고 테사는 그 본능이 툭툭 튀어나올 때마다 희열감과 동시에 죄악감을 느꼈다.
살육과 쾌락……. 벌레 같은 하등 생물을 짓누르는 것. 이놈들은 심지어 반은 인간에 나머지 반은 벌레였다.
“꺄하하하하.”
스스로도 자신이 낸 광기 어린 목소리에 잠시 놀랄 정도였으나, 이내 주변에 아무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테사는 완전히 내면에 있는 광기를 해방하기로 했다.
옆에 있는 나무의 밑동에 붙은 불길은 점점 그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외전10 – ‘진짜 노인 학대라고.’
더글라스는 상의를 벗어 던졌다. 상의에는 꿈틀거리는 그의 근육질 몸매가 드러나는 흰색 셔츠 한 장.
일전에 온갖 ‘사건’에 엮여서 결국 영성자가 된 뒤로 더글라스는 부지런히 단련했다.
마도서를 읽고 주문을 사용하거나 의식을 치르고 점을 보는 등의 온갖 기술을 익혔다.
더글라스는 MI7을 나온 이후 탐정이 되었다. 그간 익혀온 기술로 먹고살기 좀 쉬워졌나 했으나…….
오히려 탐정이 된 이후에 그는 더 바빠졌다.
이런저런 비밀 세계에 얽힌 일들을 겪고 신체를 일부를 잃고 난 뒤로 그는 젊었을 적보다 더 강해졌다.
온갖 비술을 익히고 마법으로 강화해온 결과가 바로 지금의 몸뚱어리.
‘성혈을 마신 자’가 달려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직선상의 공격. 발을 떼는 순간 물리 법칙을 벗어난 속도로 돌진해오는 짐승에 맞선다.
예전이라면 피하거나 도망쳤겠지. 하지만 더글라스는 달려드는 그자를 정면으로 막아냈다.
돌격을 이길 수 없어 뒤로 밀리지만 결코 놓아주거나 밀리지 않았다.
그대로 관성에 이기지 못해서 함께 바닥을 굴렀다. 더글라스가 뽑아 든 짧은 대검이 순식간에 성혈을 마신 자의 등 어귀를 찔렀다.
날갯죽지에 정통으로 꽂힌 대검에서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그 부위가 날개가 젤리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성혈을 마신 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나온 다리 같은 것들로 더글라스의 신체 여기저기를 찔러댔다.
인간의 피륙 따윈 그대로 찢어버릴 수 있는 날카로운 갑각류의 다리들은 마치 강철이라도 찌른 것처럼 제대로 파고들지 못하고 일부를 찌르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수십 군데에 상처가 났다.
날개 하나를 완전히 망실한 성혈을 마신 자는, 균형을 잃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더글라스를 버리고 한쪽 콘크리트 벽에 처박혔다.
콘크리트가 우수수 부서지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철근마저 박살 낸 뒤에 벽에서 멈췄다.
더글라스도 만만찮은 충격을 입었다.
“커헉.”
더글라스는 그동안 익힌 충격을 일시 분산하는 주문을 사용했다.
그 충격의 대부분은 집 차고에 고이 모셔둔 바윗돌에 전달 되었을 테지만 아무리 충격을 분산해도 그 짧은 사이에 몇십 번이나 찔린 상태였다.
그의 흰 셔츠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꽤나 강하긴 하군.”
더글라스가 상처 중에서 가장 깊은 아랫배의 상처를 감싸면서 일어났다.
반대쪽 벽에 처박힌 성혈을 마신 자도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런데, 성혈을 마신 자는 상처도 없어 보이는 데 오히려 더 비틀거렸다.
“어떠냐, 중동에서 가져온 저주의 단검이다.”
무려 피라미드를 털고 나온 부장품이었는데 그의 손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성혈을 마신 자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 등에서 지독한 독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단한 갑피는 녹아버렸고 등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던 갑각류의 다리들은 죄다 그 발악을 멈췄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디노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생물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당한 것을 보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정신이 돌아온 프레드가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속죄할 준비는 됐나?”
“뭐? 속죄? 난 어떤 것에도 속죄할 생각이 없다……! 내 모든 행동은 정당해!”
“미치광이의 말을 듣기로 한 내가 잘못이지. 맥밀런 정신 병원은 어때?”
화천지옥검을 들었다. 이전처럼 불길이 치솟지는 않지만 검은 그 자체로도 흉기인 셈.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러는 동안 디노는 몇 걸음씩, 그가 만든 포도나무가 있는 곳으로 물러섰다.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이렇게는…….”
“안 죽이고 정신 병원으로 보내준다니까?”
“어쩔 수 없지.”
“오? 체념하는 건가?”
잠깐 그렇게 생각했었으나 프레드는 디노의 광기를 예상하지 못했다.
“제대로 와인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디노는 포도나무에 달린 주먹만 한 포도알 하나를 땄다.
포도알에는 아기의 얼굴이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어째선지 귀엽기는커녕 극도로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그 포도를 그대로 뜯어 먹기 시작했다.
“무, 무슨…….”
“오, 오……! 오오오……!”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프레드는 걸음을 멈췄다.
포도를 먹어치우는 디노가 점점 변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형의 존재처럼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등뼈에서 팔 두 개가 새로 자라났다. 그리고 얼굴이 여러 개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삼두육비의 괴물로 변한 디노가 더 많은 포도알을 따서 먹기 시작했다. 디노의 몸뚱이는 인간의 것을 벗어난 근육으로 꿈틀거렸다.
“대, 대체 뭘로 변하는 거냐.”
“이렇게 진미(眞味)라니……. 이걸 왜 여태까지 먹지 않았을까? 인생의 대부분을 손해 봤다!”
프레드는 어떻게, 검이라도 휘둘러봐야 하나 생각하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더글라스가 옆에 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만둬.”
“지, 지금이라도 저 인간을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완전 미친놈인데 저거. 더 기괴한 모양의 괴물이 되면 어떡합니까?”
“아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자멸할 거다.”
“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계속 먹으면 체하지. 포도 한 알을 먹고서 절제할 수 있었다면 모를까. 저렇게 미친 듯이 영육을 탐한다고? 신성의 씨앗을 보유한 게 아니라면 괴물이 되겠지.”
더글라스가 침음성을 흘리면서 프레드를 잡은 어깨에 힘을 주고 그를 살짝 뒤로 물러나게 했다.
프레드는 저항하지 않고 물러났다. 왜냐면 디노가 점점 더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온갖 곳에 살점이 붙기 시작하더니 도저히 인간이라곤 봐줄 수 없는 형태로 변이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이 자연적으로 발화하더니 제 몸에 스스로 불을 붙였다.
늘어난 지방 덩어리들은 아주 활활 타고 있지만 계속해서 늘어난 살들이 포도나무에 달린 포도들을 따 먹고 있었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데.”
“네놈도 그런 생각을 하느냐? 나도 마찬가지다.”
더글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런 미친 일에 익숙한 영성자들이라도 저런 걸 보고 나면 계몽 수치가 미친 듯이 치솟곤 한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테사가 붙인 불같다.
나무가 타오르면서 가지마다 불길이 전염되기 시작하자 디노는 이제 생물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덜 익은 포도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불길 쪽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자신의 몸에서 타오르는 불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저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도 물러나지.”
“테사는 괜찮을까요?”
“네가 가봐라. 저쪽 어딘가에 있을 테니.”
“네?”
더글라스는 그 말을 남기고 승강기 쪽으로 건너가서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겠다고 했다.
프레드는 불타는 나뭇가지들을 피해서 더글라스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테사 플리테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일전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프레드와 함께 보내던 그 날 밤, 우연히 프레드는 날개를 편 테사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와 같았다. 나체가 아니라는 건 프레드의 입장에서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는 여기저기 토막 난 고깃덩어리들이 가득했다.
사람이고 벌레고 하나도 남김없이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 있었다.
그리고 테사는 그 중심에 양손으로 자신을 껴안듯 안은 채로, 주저앉아 있었고 날개는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테사.”
“보지마…….”
테사는 주저앉아 말했다.
“왜?”
“이게 내 본성이니까. 나는 내 안에 살육의 본능을 억누를 수가 없어.”
“저건 인간도 아니고 괴물인데?”
“넌 날 이해하지 못해.”
테사가 고개를 들어서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서 어떤 감정을 읽기는 힘들었다.
“태어나면서 내면에 무언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태어났지. 어릴 때는 짐승을 잡아 죽이다가, 문득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느꼈어. 근데, 날 통제하기가 점점 어려워져.”
테사가 손을 들었다. 무언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자 한쪽 가지에 달린 포도알이 수십 조각으로 분해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든 죽이고 싶어진다고. 특히,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그들을 보면서 혐오감과 살해 욕구를 억누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
“난 하루에도 몇 번씩 널 죽이고 싶어. 너와 사랑을 나눌 때도 늘 네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음. 그런 취향이구나. 좀 하드 한데, 어울려주기는 할 게.”
“장난 아니야!”
“나도 장난 아니야.”
프레드는 진지한 눈동자로 테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그러던데. 인간은 원래 악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그리고 교육은 그걸 억누르는 과정이라지. 너도 할 수 있어.”
“못 하면?”
“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옆에서.”
“넌 내 옆에 있으면 안 돼. 내가 널 죽이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 거야.”
“그러면……. 음. 안 죽을 정도로 단련해야겠네.”
“진담이야?”
“뭐, 아버지한테 부탁하면 어떻게든 해주겠지. 엄청 쌘 영성자였다며.”
“아무리 그래도.”
“아, 아. 고민은 나중에 하고 일단 갑시다. 위쪽을 보라고.”
벌써 가지에 번진 불길이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바짝 마르지도 않은 나무가 등유에 불을 붙인 것처럼 미친 듯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래, 가자.”
테사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날개를 접었다.
더글라스는 승강기 앞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더글라스는 이런 걸 알고서 프레드에게 가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얼른 가자! 곧 이 공간의 상태가 안 좋아질 거다.”
“네.”
탈출을 끝마쳤다. 도망치면서 위쪽에서 대기 중인 경비병력을 만나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위쪽은 이미 제압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프레드는 테사의 손을 잡았다.
승강기 앞에는 두 사람이 뭔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탐정처럼 보이는 차림새의 남자 하나, 그리고 한 명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무사하군요. 다행입니다.”
“당신들은 누구죠?”
프레드가 묻자 탐정이 대답했다.
“당신 삼촌이 고용한 탐정입니다. 뭐, 보다시피 용병들을 고용해서 당신을 호위하려고 왔죠.”
탐정이 뒤로 고개를 돌리자 뒤쪽에는 진짜 용병으로 보이는 인력들이 몇 있었다. 근데 그 사람들도 둘로 나눠진 것 같은데?
“당신은 누구죠?”
탐정에 옆에 선 중년 여성은 긴 금발 머리카락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있다. 딱 봐도 엄청나게 일을 많이 할 것 같은 워커 홀릭의 분위기다.
“반가워요. 리카 웹스에요. 봉인 재단의 상무이사죠.”
“무슨 재단?”
처음 들어보는 재단의 이름을 대면서 명함을 내미는 여성을 보고 프레드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더글라스나 테사나 놀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프레드만 모르고 있었지 엄청 유명한 회사인 것 같다.
근데, 재단 이사인지 뭔지는 몰라도 리카 웹스라는 이름은 들어봤다.
“당신이 제게 만년필을 보낸 사람이군요?”
“맞아요. 당신 아버지가 갖고 있던 건데 근래에는 제가 보관하고 있었죠.”
프레드는 좀 과격파이긴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만년필을 받고 나서 활용법에 익숙해지자마자 곧바로 편지지를 스캔해서 만년필을 보낸 사람을 알아냈으니까.
“근데 이 명함은 왜 제게……?”
“필요할 때가 올 테니까요. 그럼 잘 있어요.”
손을 흔들고 사라진 여성을 보면서 프레드는 머리를 긁었다. 이건 나중에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 건물을 나가는 순간까지 프레드는 테사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아서 옆에 있는 더글라스가 건수를 잡았는지 실실 웃으면서 프레드를 놀리기로 했다.
“흐흐. 그렇게 손을 잡고 있다니, 아주 연인이 다 되었구나?”
“아, 연인 아니에요.”
“에이, 맞으면서.”
“결혼할 거거든요.”
“……?”
“집에 가서 결혼 승낙받을래요.”
더글라스가 당황해서 테사를 돌아보니 테사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
외전11 – 인간은 총을 맞으면 죽는다.
그러나 여기, 머리에 총알 세 발을 맞고도 살아남은, 억세게 운이 좋은 한 남자가 있다.
“끄으으으윽.”
관통한 부위는 두개골이었다. 미간에 한 발, 양쪽 눈썹 위에 두 발.
보통이라면 죽었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였지만, 그는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았다.
총알이 앞에 있는 참호를 뚫고 들어와서 관통력이 매우 낮았으며, 아주 멀리서 날아왔고, 두꺼운 철모를 관통했던 것.
추가적인 공격은 없었고 남자는 부상자가 되어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실려 나갔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두개골에 걸린 것도 아니고 이마의 피부 가죽만 상하게 한 모양이므로 다시 전장으로 복귀해도 좋다는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곧바로 복귀하지는 말고 휴식을 하라고 권고했다.
침상에 누워있던 남자, 프레드 헥센은 자신의 이마를 감싼 붕대를 만져보았다.
“이게 말이 돼?”
“크크. 말이 되지 말입니다.”
상사 마크를 단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총알을 머리에 세 대나 맞았는데 집으로 못 가는 사람은 처음 봤지 말입니다. 보통 천국에 가잖습니까?”
“하지. 개소리 하지 마.”
에스터하지 페렐은 그와 함께 입대한 동기였다.
“중위님이 남아있어서 기쁘다는 인간들이 참 많지 말입니다.”
“그거 악담 맞지?”
“진담이라던데 말입니다. 솔직히 커튼 같은 사람이 중대장인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개소리 말고 물이나 줘.”
“역시 다른 사람 뒷담은 안 까는 중위님 답지 말입니다.”
컵에 따라온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프레드는 손짓으로 부하를 내보내고 나서 과거를 돌아보았다.
“내가 미쳤지…….”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두고 전쟁터에 나간다니.
그의 아버지 샤를 헥센은, 절대로 전쟁터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잔혹한 전쟁이 될 거라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들을 걸 그랬다. 이곳에서 인간들이 도축되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적이고 아군이고 기관총 앞에서 갈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인생이라는 게 별 것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 전쟁도 벌써 2년째. 해군으로 입대할 걸 그랬나 싶지만, 육군으로 온 나머지 이 머나먼 남태평양의 섬에서 총질이나 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선배가 말하는 탱크 어쩌고 하는 꼬임에 넘어와서.’
그 선배는 정작 자기는 기갑부대로 갔는데 프레드는 땡보병으로 갔다.
침상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남국의 해변이 보인다.
휴가차 왔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전쟁을 하러 왔다.
여긴 끔찍한 정글과 지독하게 더운 날씨, 땀과 냄새나는 시체, 죽음뿐이다.
사흘 동안 푹 쉰 프레드는 한창 자고 있다가 살짝 눈을 떴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바깥이 소란스럽다.
하지가 급한 것처럼 달려와서 프레드에게 말했다.
“주, 중대장님.”
“왜? 무슨 일인데.”
“이리 와서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머리의 부상도 꽤 괜찮아졌겠다, 슬슬 움직이기 편해진 프레드는 하지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
거기에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그 중앙에 놓인 시체를 보고 있었다.
이 미친 땅덩이에서 걸리는 게 사체지만, 지금 이건 뭔가 이상했다.
시체는 수십 개의 열상이 나 있었다.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나무 이에 매달아 놨는데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씨발…….”
그간 이런 식으로 죽은 시체는 없었다. 하지가 다가와서 말했다.
“프레데터입니다.”
“뭐?”
“왜, 있잖습니까. 옆 부대에서 난리 났던 사건. 여기도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봐.”
프레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어젯밤 근무를 서던 보급병 하나가 갑자기 보이지 않더란다.
탈영인지 의심하고 샅샅이 뒤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늘 아침에 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고 했다.
“프레데터. 그놈이 틀림없습니다.”
“…….”
그 프레데터라는 존재에 대해서 프레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누구도 그 프레데터라는 놈을 본 적이 없는 데,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고 했다. 은밀하게, 하나씩, 하나씩.
옆 부대에서 프레데터에게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점점 이렇게 죽어간 인간들이 많아져서인지 미치광이가 되어서 서로 죽이기까지 했다는 괴담이 돌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이 프레데터는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도 이런 방식으로 죽여버린다고 했다.
“적군 진지를 습격했는데, 저렇게 매달려서 죽어 있는 시체가 한 둘이 아니었답니다.”
“…….”
“그리고 지금 병사들 사이에서 우리 부대가 프레데터의 표적이 되었다고 난리랍니다.”
“유언비어 퍼뜨리지 말고 헛소리하는 놈들 입단속 잘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신경 꺼라.”
“알겠습니다.”
하지는 그나마 좀 낫다는 표정을 지었다. 프레드가 단언하는 말은 실제로 이뤄진다.
여태까지의 행동이 그를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하게 했다.
하지가 나가자마자 프레드는 탁자 앞에 앉아서 턱을 괴고 생각했다.
이건 대대에 보고해야 할 건이다. 프레드는 곧바로 보고했다. 그러자 상부에서는 진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뭐,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어차피 보고해봐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미 상부는 프레데터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고 해결책을 고심하고 있지만, 효과는 없다.
비밀 세계와 물리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지만, 이런 남태평양의 고립된 섬에 있는 영성자라면 그런 것을 무시하고 있을 수도 있지.
원래부터 상부 측에서는 정부에서 개발한 신병기를 투입한다는 말 때문에 진격 중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레데터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의 부대를 정지시키고 프레데터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그놈을 잡을 수 있는 건 프레드뿐이다.
프레드는 저녁쯤이 되자 하지를 불렀다.
“준비해라.”
“예? 알아서 해결하시는 거 아니었슴까?”
“너도 도와야지 그럼 손가락 빨고 있을 거야? 나머지 병사들도 준비하게 해. 프레데터 놈을 잡는다.”
그간 있는지 없는지 모를 공포의 존재를 찾는다는 말에 하지가 울상이 되면서 무장을 하고 나왔다.
돌격소총에 권총, 수류탄 등의 완전 무장에 등에 군장까지 짊어지고 나온 하지와는 다르게 프레드의 장비는 딱 하나였다.
“예? 그거 장식 아니었습니까?”
“괴물을 잡으려면 옛 방식도 써야지.”
프레드가 늘 보관하고 있던 도검인, 화천지옥검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화천지옥검의 소유권을 아예 프레드에게 넘겨주었다.
파기나레코르는……. 깨어나고 난 뒤에는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더니 저택에 눌러앉게 되었다.
비어있는 페이지에 아버지가 주문을 써준다나 뭐라나 하던데.
어쨌든, 이 화천지옥검은 아주 날카롭게 벼려진 도검이었다. 동료들에게는 그냥 장식이라고 말하고 들고 다녔다.
1차 세계 대전까지만 해도 도검을 들고 다니는 인간들이 있긴 했지만, 그때도 구식 취급받았다.
이젠 무기의 발달로 인해서 검을 쓰는 건 구시대적인 인간 취급받곤 했다.
하지는 칼 한 자루와 권총을 허리춤에 찬 프레드를 보고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프레드를 따라서 말없이 나섰다.
프레드가 허튼짓을 할 리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어젯밤에 프레데터에게 죽고 난 병사를 보고 난 뒤에 놈을 좀 조사해봤다.”
“네.”
“일단 놈을 잡기 위해 사용한 방법들.”
프레데터의 잔인함과 밧줄에 매달아 놓는 방식을 볼 때, 놈이 이 섬에 사는 야만인이라고 판단한 상부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했다.
지뢰를 사용해서 놈이 들어오는 길목에 대비했으나 프레데터는 지뢰를 전혀 밟지도 않고 군영에 들어와서 죽였다.
밤새도록 병사들을 경계시켰으나 다음 날 새벽에 귀신같이 한 명이 죽어 있었다.
죽은 병사의 옆에 있던 동료는 그가 사라졌는지 몰랐다고 했다.
누구도 프레데터를 제대로 본 자는 없었다. 다만 다들 흐릿한 인영으로 보았을 뿐인데, 각자 다른 얘기를 하면서 횡설수설했다.
“그럼 우리가 뭔가 하더라도 의미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병사들도 다 무서워하더랍니다.”
하지가 으스스하다는 듯이 떨면서 말하자 프레드가 고개를 저었다.
“놈은 확실히 존재해. 그러니 잡아서 족쳐야지.”
놈은 비가시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프레드는 디노의 포도나무 사건 이후로 아버지 샤를에게서 영성을 다루는 방법을 배운 바가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집중적으로 배운 것은 눈에 영성을 집중해서 보는 방법이었다.
어둠 속에서 꿰뚫어 보는 방법, 또는 열기가 있는 생물체를 추적하는 방법, 유령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도 배웠다.
하지는 프레드가 고민하는 동안 병사들을 불러서 준비하게 했다. 병사들은 무서워하는 눈치였으나, 이를 악물고 각자 총을 꺼내 들었다.
슬슬 밤이 오고 주변이 어둑해지자 병사들이 불을 붙여서 사방을 밝혔다.
“……온다.”
갑자기 주변이 으스스해졌다. 프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았다.
하지는 놀라서 이리저리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보이는 건 그냥 평범한 정글 나무들뿐이었다.
이미 병사들을 시켜서 주변의 나무를 베어냈기 때문에, 상당 부분은 평지인 상태였다.
“아, 안 보입니다.”
“내가 맞춘 놈을 쏴라.”
프레드는 허리춤에서 조명탄을 쏘기 위해 권총을 들었다.
탕!
발사된 신호탄이 무언가에게 적중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무슨 구슬처럼 보였다.
“뭐, 뭐지?”
“배리어다. 구형.”
불꽃이 탁탁 튀자, 병사들은 다 같이 소총을 난사했다. 불꽃에 가려져서 베리어 내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소총 세례를 당하던 프레데터는, 곧 몸을 돌려서 정글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프레드가 빠르게 외쳤다.
“하지! 쫓아오지 말고 대비해라!”
“네!”
프레드가 검을 뽑아 들고 엄청난 속도로 정글로 뛰어가자 하지는 주변을 경계하게 시켰다. 그리고 조리병에게 말했다.
“너, 밀가루 포대 얼마나 남았었지?”
“꽤 있습니다.”
“또 한 놈 더 있을지 모르니 밀가루 포대를 준비해둬.”
일단 준비는 해놓겠지만, 그 프레데터라는 놈이 없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그 거대한 불꽃으로 뒤덮인 구슬이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는 걸 보고 병사들이 하나같이 동요했던 것.
하지가 부대를 방어하는 동안, 프레드는 정글 안으로 달렸다.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진 이후에는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정글 나무들 사이로 가지를 밟고 뛰거나 넝쿨을 타고 움직이는 식으로 입체적으로 기동했다.
그때, 프레드는 곧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조명탄을 툭, 바닥에 버린 뒤에 프레데터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리어를 해제한 프레데터는 아예 보이지 않는 비가시 상태도 해제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하얀색 눈동자, 하얀색 머리카락을 올려서 땋은 여성이었다.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은, 갑옷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머리 위에 환한 빛을 내는 링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는 것이었다.
“……넌 누구지?”
“…….”
그 여성은 문답무용으로 공격해들어왔다.
외전12 – “프레드. 영성자가 뭐라고 생각하냐?”
“어……. 글쎄요? 그냥 마법사 같은 거?”
“이념의 극단에 서 있는 놈들이지. 몇몇은 이계에 있다는 신들을 숭배하면서 그 존재의 생각을 따른다.”
샤를 헥센은 자리에 앉혀두고 프레드에게 강의했다.
“내가 전에 말했을 때 기억나니? 뭐가 제일 나쁜 지도자인가?”
프레드는 기억을 떠올렸다.
멍청한 지도자가 아니라 신념을 가진 지도자라고.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가 지도자가 되면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 설득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지. 영성자들도 마찬가지야. 대부분 극단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잘못된 생각……. 예컨대 프레드가 일전에 만났던 디노의 경우가 그랬다.
겨우 포도주를 만들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일들을 저질렀다.
샤를은 그가 죽여왔던 ‘설득이 통하지 않는 자’들을 몇몇을 예시로 들어서 설명했다.
들어본 예시는 하나같이 끔찍했다. 사람을 강화하는 알약을 만들기 위해 벌어진 인체실험, 고대의 존재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잔혹한 인신 공양을 저지른다던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광인들이 그렇게나 많다니?
“그러니 너도 그들에게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은 익혀야 한다.”
아직 이 세상에서 완전히 영성이 사라지지 않고 그 근간이 남아있으므로 그동안은 필요했다.
그리고 샤를은 프레드에게 한 사람을 소개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무용수였다. 이름도 듣지 못했고 제대로 말하는 걸 본 적도 없는 그 남자에게서, 프레드는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다.
화려한 움직임과 곡예 기술은 단련된 살인 기예로 변했고 부단히 연마했다.
사관학교에 가서도 시간이 남을 때마다 수련하다 보니 어느새 미친 듯이 강해져 있었다.
그렇게 프레드는 영성자가 되고, 수호자 전문화로 나갔다.
*
뭔지 모르겠지만, 공격해온다. 프레드는 상대방의 무기를 살폈다. 프레데터가 만든 희생자들에게 남은 깊은 열상을 보면 날붙이라고 생각되는데…….
화천지옥검을 들어서 공격을 막아냈다.
손가락마다 마치 발톱 같은 것이 붙어 있었는데 강철과는 다른, 보라색 금속을 사용하고 있었다.
화천지옥검이 커다란 클로와 맞닿았다. 엄청난 불꽃이 터져 나오면서 프레드와 상대를 밀어냈다.
‘단순한 금속이 아니야.’
저것도 일종의 유물일 것이다. 화천지옥검과 부딪혔는데도 멀쩡한 유물은 이번이 처음이다.
“넌 누구냐!?”
역시 말이 없다. 프레드는 양손의 클로를 사용해서 미친 듯이 일격을 가하는 프레데터를 따라가기도 벅찼다. 미친 듯이 강하다.
화천지옥검에 불길을 끌어올려서 불꽃으로 이뤄진 검으로 변형했다.
이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꽃은 조(爪)가 닿기도 전에 고열을 뿜어서 프레데터가 입고 있던 검은색 옷을 불태우고 있었다.
양쪽으로 공격을 하면서 틈을 보던 프레데터는 엄청난 화력을 뿜어내는 화천지옥검을 보고 그대로 뒤로 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데도 표정 변화가 없네.’
프레드는 미친 듯이 달려서 프레데터를 쫓아갔다.
거의 3km를 정글로 달린 프레드는 곧이어 그것이 도망친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일종의 사원으로 보이는 장소가 있었는데 정글과 융화되어 있었다. 프레드는 프레데터가 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인식 왜곡 같은 것이 걸려 있나 보군.’
이런 종류의 최면 기술에 대해서는 아버지에게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본인이 자주 사용하던 능력이라면서 실제로 당해보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석재로 제작된 사원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보는 문자가 적혀 있었다. 비밀 지식에 정통한 자라면 신대 문자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겠지만 프레드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사원으로 들어서자 엄청나게 넓은 내부 공간이 보였다.
끝도 없이 펼쳐진 공간 안은 대체 어디서 조명이 들어오는지 전혀 어둡지 않았다. 거기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뭐야…….”
그때, 저 멀리서 달려가고 있던 프레데터가 한쪽 기둥에 손을 짚었다. 그것에 반응한 것처럼 바닥이 열리면서 안으로 쏙하고 들어갔다.
“기다려!”
프레드는 유인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곳에 와보겠나. 프레데터가 아니었으면 프레드는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프레드는 기둥으로 달려가서 똑같은 곳에 손을 댔다. 그러자 안으로 들어가는 공간이 나왔다.
“……좀 다른 곳 같은데.”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분위기의 공간이 보인다. 프레드는 안으로 들어선 다음, 화천지옥검을 조명 대용으로 사용했다.
이 안의 공간은 특이하게도 여러 신의 신상이 보였다.
만신전이라고 해야 하나. 프레드가 전혀 보지 못한 신들을 비롯해서 알음알음 들어본 적 있는 신들의 신상이 놓여 있었다.
“탄원자……밖에 모르겠다.”
아마 그의 아버지라면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만신전이라는 것을 확인한 프레드는 대체 왜 이런 오지의 섬에 이런 것이 있는지 궁금해 했다.
“대체 여긴 뭘까?”
심지어 여기 남태평양에 있는 군도 중에서도 그다지 크진 않은 섬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그가 알고 있는 신을 모신 신상이라니.
-호오, 그게 궁금한가?
“우왓!?”
-워, 워 진정해! 그 검 좀 치우게.
누군가의 말에 놀란 프레드가 화천지옥검을 겨누자 그 영령이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댁은 누구십니까?”
-나야말로 자네가 누군지 궁금한데?
“제 이름은 프레드 헥센입니다. 일단 프레데터라는 자를 쫓아서 왔긴 한데, 아무튼 댁은 누굽니까?”
-나는 이 만신전을 지키는 수호 영령 바투라네. 뭐, 수호라고 해도 그냥 지키고 있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자네를 만나서 참으로 기쁘군 이 몇 년만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났단 말인가?……
이렇게 내버려 두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아서 프레드가 그를 제지했다.
“그만, 그만. 아무튼, 여긴 뭐 하는 곳입니까?”
-말했잖나? 만신전이라고, 정확히는 만신전의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신앙 에너지를 응축하는 기관이지.
“기관?”
-그래.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들어왔단 말인가? 프레데터는 뭐고……. 음. 아니지. 그런 이상한 이름으로 불릴 사람은 딱 하나뿐이군. 뭐. 그래. 옵스큐라 뿐이지.
“그게 이름인가요?”
-그 여자의 이름을 말하는 거라면 맞다네. 그 일족이 날 끌고 온 지도 어언 3천 년이나 되었군.
프레드는 이 말 많은 영령에게서 꽤나 많은 정보를 뜯어낼 수 있을 걸고 생각해서 그가 계속 말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왜 끌고 온 겁니까?”
-당연히 이 ‘우주선’의 수리를 맡기기 위해서라네.
“네에? 우주선이라고요?”
주변을 둘러봐도 여긴 평범한 유적지처럼 보이는데.
-오해할 수도 있겠군. 이 우주선은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그들의 종족 ‘니힐리스’들이 만들어낸 것이니까. 니힐리스가 뭐냐고? 머리 위에 링 달린 년들이 모인 것이 바로 그 종족이라네. 수천 년을 살고 자가번식을 하지. 처녀생식 뭐 그런 거라네. 니힐리스들은 수천 년 동안 지구에 불시작해서 지구를 빠져나갈 때까지 연료를 모으기로 했지. 바로 신앙 에너지를 사용한 연료라네.
“자, 잠깐 처, 천천히 좀.”
-만신전을 설치해두고 전 세계의 모든 신앙이 여기에 있는 만신전의 신상(神像)을 거쳐 가는 동안, 수수료 삼아서 야금야금 조금씩 뽑아낸 신앙 에너지를 우주선 내부에 응축시키고 있었다네 거의 수천 년 동안 말이지.
“말이 너무 빠르다고요.”
-?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는 영령 바투를 한 대치고 싶지만, 프레드는 일단 들은 것을 정리했다.
“아무튼, 여기가 그 니힐리스라는 외계 종족의 근원지인지 뭔가 인지하는 그런 곳이란 말이죠? 외계인이 왜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는지는 차치하고 그럼 왜 대체 밖으로 나가서 인간을 공격하는 거죠? 그 옵스큐라라는 이름의 여성은요.”
-뻔하지. 혹시 모를 위협에 이 우주선을 지키려는 것이라네. 뭐 그런 게 한 번도 아니라네, 원주민들이 접근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했으니까. 그들은 들어오지 않지.
프레드는 그럴 수도 있다고 느꼈다. 수천 년 동안 조용히 살아왔는데 갑자기 군대가 몰아치면서 저들끼리 자기네 땅이라고 싸우면…….
그들이 오히려 불청객인 셈이었다.
-외계인이라도 다 다르게 생겼을 거라는 건 편견이라네. 겉모습만 인간처럼 생겼을 뿐 내부는 완전히 다르기도 하고.
“아, 아무튼, 그건 됐고요. 그럼 옵스큐라를 설득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애초에 우린 우주선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데.”
프레드가 병사들을 데리고 진지를 치고 있던 이곳은 애초에 여긴 주 전장도 아니다. 거쳐 가는 거점이지.
그런데 프레데터가 등장하자 난리가 났다.
-옵스큐라는 매우 완고한 성격이야. 극단적일 정도로 남의 말을 듣지 않지. 자신에게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야. 옵스큐라를 설득하려면 루미너스라도 데려와야 한다네.
“루미너스?”
-수백 년 전쯤에 여길 나가서 인간들이 사는 세상으로 나갔다네. 어디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정보를 듣게 된 경위는 꽤 복잡했지만, 프레드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쳐 지나가듯 하던 이야기였고 당시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분명히 재단에서…….”
은퇴한 MI7의 요원이라면서 재단에서 루미너스라는 자를 고용했다고 했다.
특징은 머리 위에 달린 링. 일반인은 볼 수 없다나.
옵스큐라의 머리 위에도 천사의 링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헤일로가 달려 있었다면 루미너스가 맞을 걸세. 이름도 똑같이 활동하고 있었군.
“아니, 근데 그 사람은 지금 지구 반대편에 있는 데요?”
-그럼 나도 몰?루?
“야이 씹!”
바투가 어깨를 들썩이자 프레드가 칼을 들이댔다.
-아니, 나 보고 어쩌라는 겐가? 설득하려면 그 방법이라고 했었지.
“지금 옵스큐라는 어딨죠?”
-여기보다 몇 단계 밑에 있는 전투정보실로 들어갔다네. 무장을 강화하고 나올 걸세. 보라툼 건틀렛에 안트늄 강화 슈트를 착용하려고 있군. 자네가 꽤 강적이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프레드는 머리를 감싸다가 일단 명함을 꺼내 들었다.
이건 리카 웹스에게 받은 명함이었다. 단순히 종이 쪼가리인 줄 알았으나, 영성에 입문하면서 이게 원거리에서도 통신할 수 있게 되는 마도구라는 걸 깨달았다.
-저기요?
프레드는 명함에 대고 말을 거는 게 좀 바보 같다고 생각했으나 일단 맞겠지?
-프레드 헥센?
대답이 없으면 부끄러울 뻔했으나 곧바로 반대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리카 웹스의 목소리였다.
-다행이다. 연결되네요. 혹시 저번에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문제죠?
-댁네 회원인 루미너스라는 사람이랑 엮인 얘기인데요.
프레드가 사정을 설명하자마자 리카 웹스가 답했다.
-30분 정도 뒤에 루미너스가 그곳에 도착할 겁니다.
-네? 30분? 그렇게 짧게?
-다 방법이 있죠. 아무튼, 그때 얘기해보시죠.
리카 웹스가 싱긋 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이 다 끝나면 재단에 한 번 들려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죠.
외전13 – “30분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그보단 더 일찍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옵스큐라의 무장이 끝났네. 그리고 나를 통해서 자네의 위치가 발각되었고.
“내 위치를 말해줬다고?”
-나 개인으로서는 별로 가르쳐주고 싶지 않지만 나는 그냥 이 우주선에 엮여있는 영령일 뿐이라네. 일종의 자연적인 컴퓨터일 뿐이지.
“……날 돕는 이유가 있는 것 같군?”
바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말이 많은 설명충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해방되고 싶다네. 이미 할 만큼 했다고. 저 니힐리스 일족에게 붙잡혀서 몇천 년 동안 봉사를 했으면 날 좀 풀어줄 만도 한데, ‘성능’ 어쩌고 하면서 날 풀어줄 생각이 없으니 원.
“…….”
바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붙잡혀서 몇천 년 동안 이 우주선의 관리를 했다는 건 부당한 일이었다. 물론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하에서 생각한 것이지만.
-곧 올 거라네. 옵스큐라가 아래층까지 왔어.
한쪽 끝의 바닥이 열리더니 완전무장한 여성이 나타났다. 여전히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모습이 다르다.
양손에는 기존의 클로보다 더 강력해 보이는 건틀렛을 끼고 있었고 그 위에 보라색 건틀릿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전신의 복장은 검은색 타이즈로 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전의 천 옷에 비하면 확실히 육감적이고 활동적으로 보이는 옷차림이긴 한데.
-조심하게……! 안트늄 강화 슈트는 신체 기능을 월등하게 증폭시키지.
짧게 충고한 바투의 말대로, 엄청난 속도로 짓쳐 들어왔다. 화천지옥검에 불길을 일으키면서 건틀릿에 달린 클로를 막아냈다.
초고열의 불길에도 저 슈트는 멀쩡했다.
물리법칙을 벗어난 것 같은 기괴한 움직임이 눈에 보인다.
마치 중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회오리치듯 한 바퀴 회전해서 클로를 두 번 이상 옆으로 밀어친다.
프레드는 화천지옥검으로 첫 번째 일격을 막아내고, 검에서 뽑아낸 불꽃 채찍으로 두 번째 일격을 막았으나, 세 번째 공격은 예상하지 못했다.
부우웅.
바람을 가르고 격렬한 폭격처럼 들이친 미들킥이 옆구리에 적중하자 프레드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면서 뒤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바닥을 박차는 옵스큐라가 재차 다가와서 공격하려는 찰나, 프레드는 옆구리에서 권총을 뽑아서 머리를 향해 쐈다.
유일하게 가려지지 않은 신체 부위인 얼굴을 막기 위해 옵스큐라가 양팔로 얼굴을 가리자 건틀릿이 총알을 튕겨냈다.
그 사이 피해에서 회복한 프레드가 권총집에 검을 집어넣고 화천지옥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검 끝에 엄청난 에너지가 몰리기 시작했다. 영성을 검 끝에 집중하자 동그란 구체가 형성되었다.
그걸 그대로 휘두르자 구체가 광선이 되어 쏘아졌다.
엄청난 속도로 발사된 고열의 광선. 옵스큐라는 막아낼 생각을 하는 대시 옆으로 굴렀다. 초고열의 광선이 바닥의 석재를 그대로 녹여버렸다.
-아아악! 우주선 내부가!?
바투의 절규를 뒤로 한 채 프레드는 이를 악물고 두 번째 광선을 쏴버렸다.
옵스큐라는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서 피해내더니 그대로 이단 옆차기를 하듯 날아왔다.
프레드는 옆으로 몸을 비틀고 한 손을 검에서 떼고는 발목을 붙잡아서 옆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옵스큐라가 벌떡 일어나더니 재차 달려들었다. 자신의 클로를 들어서 상체를 공격해온다.
프레드가 화천지옥검으로 클로를 막아냈으나 이번 일격은 기존과는 달랐다.
“뭣!?”
클로를 그대로 구부려서 화천지옥검을 떼어지지 않게 꽉 잡아채더니, 자신의 건틀릿과 함께 옆으로 던져버렸다.
글러브처럼 전신을 감싸는 건틀릿을 저렇게 빨리 던지는 것은 이상했으나 처음부터 탈착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둘 다 무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근접 격투였다.
프레드는 즉시 무에타이의 능썽 스탠스를 취했다. 옵스큐라는 처음 보는 특이한 자세를 취했다. 양손을 살짝 뒤로 하고 상체를 낮춘, 마치 달리기를 할 것 같은 기묘한 자세.
그 상태에서 하늘을 날 듯 점프한 옵스큐라가 달려들자 프레드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하이킥을 날렸다.
날아오는 옵스큐라는 팔을 쌍으로 교체하면서 일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입안에 숨겨뒀던 것을 꺼냈다. 혀에서 독침이 내밀어지는 순간 프레드는 그 바늘의 궤도를 읽고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피해냈다.
반 바퀴 돌면서 회전하는 것과 동시에 떨어지는 옵스큐라의 옆구리에 돌려차기를 먹였다.
빡!
엄청난 소리와 함께 옵스큐라가 옆으로 밀려나다가 그대로 옆으로 굴렀다.
“신성한 격투에 그런 비겁한 짓거리를 하다니!”
생각해보니 프레드도 신성한 칼싸움에 총을 꺼내 들긴 했지만, 본인도 이미 잊어버린 뒤였다.
프레드는 격전을 벌이면서 재밌다고 느꼈다.
그가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얻은 정신병 한 가지는……. 바로 스릴을 겪으면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기관총을 난사하는 토치카에 들어가 돌격소총을 난사하거나, 참호를 밟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전차의 밑바닥에 대전차지뢰를 가져다 붙이는 것처럼 짜릿한 일은 없었다.
지금처럼 죽음을 각오한 격투전을 벌이면서 프레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쾌감에 사로잡혔다.
옵스큐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한 인형과 같다면, 프레드는 싸우면서 웃고 있는 광인과 같았다.
격투전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옵스큐라의 뺨은 이미 붉게 부어올랐고 입술은 여기저기 찢어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프레드도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얻어맞은 상태였다. 갈비뼈가 하나 부러지고 한쪽 귓불이 발끝에 스쳐서 피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때, 바투가 말했다.
-어, 어라? 침입자가, 아니지 이 사람은…….
바투의 말을 듣고 프레드가 뒤로 훌쩍 물러나자 빠르게 접근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옵스큐라랑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이 있었다.
“멈춰.”
“……!”
옵스큐라는 물론이고 프레드도 살짝 놀랐다. 진짜 완전 판박이처럼 생겼다. 복제품인 것처럼. 아마 이 여자가 루미너스일 것이다.
굉장히 젊고 전혀 늙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싸움은 이제 끝이야.”
“루미너스?”
아름답고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프레드는 처음 들어보는 옵스큐라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었나?
“루미너스!”
그리고 달려가서 루미너스에게 안기는 옵스큐라. 어린애처럼 울고 있었다.
-감동적인 재회로구먼.
바투가 눈물을 흘리는 듯이 눈을 비볐다. 진짜 눈물은 나오지 않지만.
“걱정하지 마. 이제 진짜로 돌아왔으니까.”
루미너스는 옵스큐라를 달래듯 등을 토닥거렸다.
어쩐지 김이 빠지는 모양새라 프레드는 전투 자세를 그만뒀다.
잠시 소회를 풀던 루미너스는 고개를 돌려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불청객. 여기서 나가줬으면 하는 데.”
“나도 나가고 싶은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말해. 들어주지.”
“첫 번째, 옵스큐라가 밖에 나가서 인간들을 학살하고 있어. 여기서 조금만 더 움직이면 전차가 굴러다니는 전쟁터라는 거 알지? 옵스큐라가 살인 행각을 멈춰야 해.”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살인을 멈추고 인식 왜곡 기능을 더 강화하지.”
“두 번째, 바투가 날 좀 도와줘서 그것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몇천 년 동안 고용한 건 너무하지 않았나 싶어서.”
-그래!
바투가 옆에서 거들자 루미너스의 눈이 바투에게로 향했다.
-어!? 그동안 일했으면 날 풀어줄 때도 됐잖아!?
“원하는 게 많군. 하지만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바투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인조 영혼이다.”
“……?”
“오직 우주선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영령이라는 거지.”
프레드가 바투를 바라보았다. 영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인데. 본인이 잡혀 와서 여기서 일하고 있다는 부분은 거짓말인가 보군.
“그래도 몇천 년 보상도 없이 강제노동시키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루미너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팔짱을 꼈다.
“뭐, 좋아. 우주선을 관리하는 모든 지식을 소거하고 영령을 풀어주면 되나?”
“그럼 그렇게…….”
-잠깐, 잠깐. 지식을 소거한다고?! 여길 관리하는 지식을?
루미너스가 바투의 말에 대답했다.
“당연하지. 외부로 기밀을 누출할 수 없으니까. 너 대신 새로운 영령을 창조해서 그 안에 넣을 거다.”
-이 내 노하우를 공짜로 줄 순 없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우주선을 관리했는데.
“그럼 계속 일해. 저 남자 말대로 보수는 음, 따로 준비해서 줄 테니까.”
-어……. 그럴까?
프레드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투를 바라보았다. 손바닥 뒤집듯 목적을 바꾸다니. 결국, 부당 대우를 뒤집으려고 파업한 거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건 받은 것이니까, 보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옵스큐라가 살인 행각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것에 보증이 필요한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루미너스는 품에서 특이하게 생긴 보석을 꺼냈다. 모든 방향으로 모든 색의 빛이 흘러나오는 작은 보석이었는데 보기만 해도 엄청난 영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이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유물은 처음 본다. 그의 화천지옥검보단 몇 배나 강해 보였다.
“내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행성을 탈출하기 위한 에너지를 얻는 것뿐이었다. 이제야 겨우 이걸 손에 넣었거든.”
“그게 뭔데.”
“동력원. 이제 만신전 따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그 영감이 이 우주 밖으로 빠져나간 뒤에 입을 씻을 줄 알았는데, 결국 약속을 지켰더군.”
“……영감?”
“거래를 좀 했거든. 문글로즈라고 아나? 샤를 헥센과도 엮인 일인데.”
“……아니. 아버지는 예전 일이나 비밀 세계의 일을 잘 말해주지 않거든.”
“뭐, 모르면 상관없지. 문글로즈에게서 물건을 못 받을까 봐 대체품을 얻기 위해서 재단에 들어가서 일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물건이 들어와서 재단 일도 그만두고 오게 되었지.”
우연히 리카 웹스가 연락해왔다고 말을 덧붙였다.
근데 들어봐도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프레드가 관여할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이 행성을 떠날 거다.”
“그거 다행이군.”
“밖으로 내보내주지.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좋아.”
루미너스가 손짓하자마자 프레드는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솔직히 자신의 부하를 죽인 옵스큐라를 살려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루미너스는 옵스큐라만큼이나 강한 자였다. 협상을 거부하면 싸워야 하는데 목이 달랑거릴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아예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어?”
하늘에서 화천지옥검이 떨어지자 프레드는 살짝 옆으로 피하면서 손잡이를 잡아챘다. 꽤 친절하시구만 그래.
어느새 정글에 있는 걸 확인한 프레드는 지진이 울리는 것처럼 바닥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조금 더 가야겠는데.’
잠시 뒤, 프레드는 허공으로 치솟아오르는 거대한 정팔면체형 물체를 보았다. 안은 끝도 없이 넓었는데 밖에서 보니,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으면서 엄청난 속도로 대기권을 탈출했다.
“……와.”
옆을 보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제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거지?”
부대에 가서 프레데터를 제거했다고 설명하면 될 것 같긴 한데, 우주선 어쩌고 말을 꺼냈다간 정신병자 취급을 받겠지.
외전14 – 1943년 8월 15일. 연합군의 승리로 2차 세계 대전이라고 불릴 대전쟁은 막을 내렸다.
마지막 남은 추축국, 일본은 고려를 마음대로 침공해서 병합하고 식민지를 늘려나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심지어 진주만을 습격하기까지 했다.
결국, 일본 본토 전체에 고루고루 떨어진 핵 33발은 그걸 사용하고 승인한 영국인들도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의 위력을 보여줬고 수많은 군인, 민간인 피해를 입혀 전 세계에 핵에 대한 경각심을 보였다.
승리자가 된 소비에트 연방과 대영제국은 전 세계의 패권을 자신의 마음대로 재조립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냉전에 들어서게 될 테지만, 아직은 동맹으로서의 뜨뜻미지근한 감정이 몇 년 남은 상황이었다.
대영제국인 장교 프레드 헥센은 30살에 대령으로 제대했다.
전쟁 중에 일어난 여러 긴박한 상황과 전과를 세운 것들이 몇 번 반복된 결과, 비정상적인 승진이 여러 번 반복 되었다.
그런 그것도 이젠 끝. 임시 직위는 반납하게 되고 정식 계급은 대위로 다시 낮아질 예정……이었다만.
프레드는 전역을 선택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제일 큰 이유는, 이만하면 국가에 대한 헌신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이 계속해서 제2의 선택지를 고르라고 설득한 것도 있었다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이제 못 참겠어…….”
잘 버텨왔던 테사가 요즘 들어서 더 심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충동……. 프레드는 도저히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테사는 현모양처이기도 하고 훌륭한 학자기도 했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실험을 해오면서 살인 충동을 약화하는 약을 개발해서 먹고 있긴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 그런 충동이 더 심해졌다.
“이제, 더 못 버틸 것 같아. 더 사랑할수록 더 죽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프레드는 괴로워하는 테사의 옆에서 그녀를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인 샤를 헥센에게 가서 물어보았으나 그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계몽주의자라는 종족의 한계에 비롯된 거다. 인간의 한계처럼 말이지.”
“뭔가 방법이 있을 거 아니에요? 도저히 못 보겠어요. 다행히 우리 아들은 그런 충동을 느끼지 않지만 테사는…….”
샤를은 방법이 있긴 하라면서 말했다.
“재단에서 받은 명함이 있지?”
“네.”
“연락해봐라. 재단은 답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게, 지금 프레드가 카페에서 리카 웹스를 기다리는 이유였다.
짤랑짤랑.
가게 문이 열리고 벨이 울리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거기에 꽤 아름다운 중년 여성이 선글라스를 끼고 바바리코트를 입고 문 앞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프레드가 있는 곳을 발견한 리카 웹스가 손을 흔들면서 자리에 앉았다.
“오래 기다리게 했나요?”
“그다지 오래 걸리진 않았습니다.”
“후훗.”
리카 웹스는 자리에 앉아서 턱을 괴고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점점 샤를 헥센을 닮아가네요. 이젠 판박이라고 해도 믿겠어.”
“……그 오늘 보자고 한 이유는.”
“아. 잠시 내 얘기 좀 들어봐요. 요즘 넋두리를 하고 싶은데 대화상대가 없었다니까.”
커피가 오자 설탕을 몽땅 집어넣은 리카 웹스는 곧이어 설탕물인지 커피인지 모를 음료를 빨대로 마셨다.
“샤를 헥센은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교수였어요. 알고 있어요?”
“아뇨 그건 처음 듣는군요.”
원래는 용건부터 말하려고 했으나 옛날얘기라는 말에 프레드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는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았고 또 듣고 싶었으나 그 과거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궁금한 얘기를 하니 조용히 듣기로 했다.
“그는 교수 시절부터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어요.”
“하긴, 그렇겠죠.”
지금도 미중년이라 여기저기서 추파를 부리는 여자를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때는 오죽했겠나.
“나도 샤를 헥센에게 반한 사람 중 한 명이었죠. 그 산장에서 그가 날 구해줄 때부터…….”
추억에 잠긴 눈동자는 꽤 깊은 기억의 바다를 침잠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에게 반했죠. 가문에서 영성자로 훈련받고 난 이후에는 좀 더 과감해져서 이런저런 유혹을 하기도 했는데, 무엇에 쫓기는 듯한 사람인지 계속 철벽을 치더라고요. 하아.”
그대로 육탄 공세로 밀어붙여서 기정사실로 만들었어야 하는 건데, 실수했다며 리카 웹스가 푸념을 했다.
“아무튼, 그래서 당신의 어머니가 승리한 거라고요.”
“어…….”
그러면 어머니인 플로나와는 리카 웹스가 연적이 되는 셈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눈을 굴리는 프레드를 보고는 리카 웹스가 피식 웃었다.
“뭐. 진 건 진 거니 어쩔 수 없죠. 좀 더 과감해야 했는데 실수한 건 실수한 것이고. 그래서 나는 일이랑 결혼하기로 했어요.”
“그렇군요.”
“눈이 너무 높아져서요.”
차이고 난 이후에 눈이 너무 높아진 리카는 끝내 눈을 낮출 수 없었고 웹스 가문의 사업인 재단에 미친 듯이 몰두하기로 했단다.
끝없는 워커홀릭이 되어 일한 결과, 지금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재단의 일을 맡은 거예요. 오늘 내게 부탁할 게 있어서 왔죠?”
“네. 그, 제 아내는 계몽주의자입니다.”
“신기하네요, 계몽주의자와 샤를이 얽힌 얘기를 생각해보면,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싶은데.”
프레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테사와 결혼할 때는 집안에서 잡음이 많았다. 플로나는 역정을 내는 수준이었고, 샤를은 침음성을 내뱉고는 좀 곰곰이 고민하는 듯했었다.
그 뒤로 프레드가 애원하다시피 조르자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혼을 승인하기는 했지만, 분가(分家)는 불가능하다고 샤를이 못을 박았다.
위험해지면 샤를이 제어하겠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프레드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몇 번이나 그런 ‘위험’해지는 사건들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의 사건은 어찌 보면 그런 것들의 스노우볼이 굴러서 여기까지 온 것일 테지.
“본능을 억제하고 싶단 거죠?”
“그렇습니다. 되도록 그걸 완치하고 싶은데 불가능하면 억제하는 약물이라도 찾고 싶군요.”
리카는 좀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쉽게도 그게 가능한 ‘봉인물’은 없어요.”
“……그럴 수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일이 있긴 합니다만, 매우 위험하죠.”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바라던 바입니다.”
프레드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위험한 일이라면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허공에서 눈먼 폭탄이 근접 유폭하거나 전차에 깔려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는데, 프레드는 끔찍하게 운이 좋게도 살아남았다.
“본인이 원하니, 설명해주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 얘기는 카페에서 할만한 얘기는 아닙니다. 따라오시죠.”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가자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자 가장 가까운 역인 킹스크로스역에 도착했다.
역에 도착한 뒤, 근처에 있는 승강기를 향해 걸어갔다.
“이건 올라가는 승강기 아닌가요?”
1층과 2층밖에 적혀 있지 않은 승강기를 보고 프레드가 묻자 리카가 답했다.
“사실 내려가는 승강기랍니다.”
리카가 특수한 골무를 낀 손가락을 들어서 아무것도 없는 가상의 0층을 향해 손가락을 찍었다.
그러자 엄청난 속도가 느껴졌다. 눈을 돌려서 승강기 위치를 바라보자 순식간에 –55층까지 내려 와있다.
그 승강기는 –99층을 찍고 나서야 멈췄다.
“맙소사…….”
솔직히 말하면, 괴담에서나 나올법한 지옥으로 가는 승강기인 줄 알았으나, 리카가 당당히 내리는 것을 보고 이곳이 ‘재단’과 관련된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래층은 정거장처럼 생겼다. 수많은, 움직이지 않는 열차들이 보이고, 벽면마다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입구가 있었다.
“어서 와요. 여긴 대영제국 봉인 재단 지휘본부입니다.”
“맙소사, 그럼 메트로폴 아래층이 전부 이런 곳인가요?”
“여긴 메트로라는 유적지입니다. 본래는 개척이 되지 않은 공간이지만, 재단 측에서 수십 년간 전력을 다해서 뚫은 덕에 99층 바닥까지 메트로를 뚫을 수 있었죠.”
“…….”
“그 뒤로 아예 메트로를 봉인 재단의 지휘본부로 사용하고 있죠.”
수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박사들부터 누가 봐도 군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병사들, 특이하게도 주황색 옷을 입고 있는 인부들도 있었다.
“주황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명찰에 D라고 적혀 있네요?”
“아,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리 오시죠. 제 사무실로 갑시다.”
봉인 재단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어쩐지 리카 웹스의 말투가 굉장히 사무적으로 변했다고 느꼈다. 이제야 확실히 워커 홀릭 여성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리카가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안에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아, 회의실 비어있지?”
“예 상무 이사님.”
“내가 쓴다.”
함께 온 프레드에 대해서 궁금해할 법도 한데 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기들이 할 법한 업무를 계속 진행했다.
사무실 옆에 딸린 회의실로 들어서자 그제야 리카는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기밀 유출에 대한 우려가 있어서, 외부에서는 할 수 없는 얘기가 있었죠. 자 이제 얘기해볼까요?”
“네.”
리카가 손가락을 튕기자 비서들이 들어와서 웬 화이트보드를 끌어다가 놓고 사라졌다.
거기에는 세계지도가 있었다. 그리고 세계지도에는 여러 국가의 모습과 그 위치에 있는 점들이 보였다.
“이건 봉인 재단의 전 세계 지부의 위치죠. 내가 가능성이 있다고 한 얘기는 바로 이곳 때문이에요.”
리카 웹스는 소비에트 연방을 가리켰다. 우랄산맥 동쪽 시베리아, 이름도 처음 들어본 곳이었다.
“니즈네바르톱스크 북쪽에는 봉인 재단의 지부가 하나 있죠.”
“니즈……뭐요?”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고 보면 됩니다. 아무튼, 여긴 키에프 제국 시절, 황태자 니콜라이와 우리 봉인 재단과 계약한 곳입니다.”
“그리고요?”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크리쳐 실험을 하고 있었죠.”
“……크리쳐?”
“예. 인간이 아닌 생물종을 지칭하는 내용입니다. 계몽주의자, 메시에 인(人) 등등의 이족(異族)들을 연구하는 장소였죠. 생물형 ‘봉인물’들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고. 근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요?”
그리고서 그녀는 얼굴을 찡그린 채 이어서 설명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이 연구실을 찾아낸 것이죠. 아주 우연하게도 말입니다.”
“네?”
“중동에서 석유 열풍이 불자 시베리아에 있는 자원을 찾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신 끝에, 니즈네바르톱스크 근방에서 유전을 발견한 거죠. 그리고 그 유전과 동시에 봉인 재단의 지부도 발견된 거고.”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뭐, 아시다시피.”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 공산주의자들은 봉인 재단의 지부를 습격해서 온갖 정보를 캐냈겠지.
“문제는 그들이 재단의 협력을 거부했다는 겁니다. 재단 사람들을 구속한 뒤에 자기들 맘대로 지부를 파헤친 결과,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그건 재앙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15 – 소비에트는 봉인 재단을 자본주의의 첨병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협력을 거부하고 절차를 무시한 채 마구 재단 내부를 파헤친 결과, 풀어서는 안 될 것들을 풀어버렸다.
내부 상황은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모든 연락망이 끊겨 버렸으니까.
“지금 소비에트 연방 지부에서는 대참사가 일어났을 겁니다. 그 내부는 재단 측에서도 제대로 확인해보지 못하고 있죠.”
“소련은 어떻게 하는 중인데요?”
“아마 그들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할 겁니다. 대신 그 안에 들어 있는 생물 병기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을 겁니다.”
“…….”
“지부 안에 있던 우리 연구진이 최선을 다했는지, 다행히도 강제 격리 격벽 문이 닫혔지만, 지금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안은 완전히 지옥이 되어 있을 거다, 이 말이군요?”
“네. 원래 이 제안은 당신에게 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4년 전에 사라진, 루미너스에게 하려고 했던 건데.”
그 친구들은 지금 우주로 떠나서 자기들이 원하는 곳으로 여행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제게 온 거군요.”
“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계몽주의자에 관한 연구를 공유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 연구 사이에 당신이 원하는 결과물도 있겠죠.”
당대의 수많은 석학이 모여서 이뤄진 게 니즈네바르톱스크 지부라고 했다.
그 안에 계몽주의자의 폭력성 약화에 대한 억류 약물 연구도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 그게 바로 프레드가 원하던 것이었다.
“좋아요, 받아들이죠.”
“다행이군요. 임무에 앞서서 설명할 것들이 많습니다.”
“뭐죠?”
“먼저 소련도 이 시설을 눈독 들이고 있을 거라는 점입니다. 특히 스페츠나츠들이 이 시설을 점거할 위협이 있습니다.”
“그들이 적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프레드씨도 영성자이니 알 겁니다. 영성이 조금씩 약해져 가고 있다는 걸요.”
“그렇긴 하죠.”
영성이 전체적으로 옅어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주문의 위력도 전체적으로 약해지고 있다고 프레드는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성자는 약해지는 데 유물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프레드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랬나? 화천지옥검을 늘 들고 다녔긴 하지만 그런 낌새는 못 느꼈다.
“재단에서는 강력한 유물을 ‘봉인물’이라고 취급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만, 이 봉인물들의 능력이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건 우리 연구진들이 분석해서 통계까지 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프레드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새로운 인물을 소개받았다.
“이쪽은 피요르트 피오도로프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중후한 콧수염을 기른 남자였는데 군인이라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그는 왜인지 프레드를 위아래로 내려다보면서 깔보고 있는 것 같았다.
군대에서 여러 번 느꼈다. 프레드의 생김새만 보고 샌님처럼 느끼는 거였다.
프레드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런 친구들의 아구창에는 주먹을 꽂아주면 나중에 싱글벙글하면서 친구가 되곤 했다.
이 피요르인지 피존투인지 하는 친구의 아구창에도 ‘우정의 징표’를 꽂아주면 될 텐데.
“여긴 프레드 헥센 씨입니다.”
“헥센…….”
그러자 왠지 모르게 피요르트는 살짝 놀라는 듯하면서 깔보는 눈빛을 지웠다.
프레드는 늘 비밀 세계와 엮이면 느끼는 건데, 헥센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다들 안색이 변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대체 아버진 무슨 짓을 저질러온 것이지? 다들 헥센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안색이 변한다.
아무튼, 아버지의 후광 덕에 피요르트는 활짝 웃으면서 프레드에게 악수를 하였다.
“피요르트 피오도로프 소령입니다. 피요라고 불러주십쇼. 아, 소령이라고 해도 대영제국 소속은 아닙니다. 전 키예프 제국 소속이었죠.”
“아, 프레드 헥센입니다. 근데 제국 소속이셨다고요?”
친절하게 본인의 애칭까지 알려주면서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적응이 안 된다.
근데 제국은 망한 지가 꽤 오래인데 30대 중반에 제국 소속이라고?
“신대륙으로 망명한 백군에서 자랐습니다.”
“피요르트 소령은 특수전의 스폐셜리스트입니다. 저희가 초빙해서 고용했죠. 지금은 재단 집행부대 라쿤 부대 소속입니다.”
“라쿤……?”
“일전에는 팀 수준이었으나 부대 단위까지 숫자가 증가했죠. 그리고 라쿤은 별거 없습니다. 라쿤 가면을 쓰거든요.”
이해할 수 없어진 프레드의 머리가 타오르는 것을 느끼자 프레드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뭐, 아무튼 피요씨와 함께 일하는 겁니까?”
“네. 프레드씨는 외인부대……로 소속이 변경될 겁니다. 사실 남는 부대 편제가 없군요. 재단 행정처리가 좀 복잡해서요.”
외국인도 아닌데 그 부대 소속에 들어가야 한다니. 프레드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대신 명령은 받지 않을 겁니다. 상무이사 직속 편제거든요. 그리고 휘하 부대원도 없을 겁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죠.”
어차피 프레드의 목적은 계몽주의자의 연구 자료다.
“피요르트 씨의 라쿤 부대와 함께 행동하면서 같이 움직이시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인사도 끝났으니 재단 측의 지원부터 보여드리죠.”
리카 웹스를 따라서 움직이자 새하얀 방이 나타났다. 아마도 사격 장인 듯, 여러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프레드씨가 화천지옥검이라는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알지만, 항상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건 아닐 테죠.”
“당연하죠.”
사실 무기의 효용성에 있어서 총을 능가하는 무기는 없다. 특히 현대기술로 발전하는 총기류의 발전 소도는 진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세계 대전 도중에는 늘 신무기가 나오고 제식 무기가 변경되는 경우까진 없었으나 삼촌의 군수 회사에서 개발되는 총들을 가끔 듣는 그의 처지에선 경이적이기까지 했다.
근데, 여기는 더 경이로웠다.
“이게, 뭐죠?”
“재단 내부에서 사용하는 소총입니다. UK-19. 사용해보시죠.”
프레드가 소총을 들고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 사용해보자 깜짝 놀랐다. 너무 부드럽고 기계적으로 퍼펙트하다.
거기다 피카니티 레일이라는 걸 만들어서 그 위에 여러 파츠를 부착할 수 있게 만들어놨다.
“텍티컬하군요.”
“그렇죠? 사실 세계 대전 때 사용하던 무기보다 월등히 좋답니다. 몇십 년 뒤의 기술들이 적용되어 있으니까요.”
“놀랍군요.”
아무래도 재단 내부의 기술은 현대기술보다 확실히 뛰어난 것 같다.
신형 소총과 방탄복의 성능을 체감한 프레드는 만족했다.
“저건 뭡니까?”
“야간투시경입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사용해보게 시켰다.
프레드는 자신이 사용하는 ‘안력 증대’ 기술보다 별로라고 생각했으나, 이 야투경을 사용할 때, 영성을 전혀 소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만족도를 얻었다.
그 영성을 화천지옥검을 사용하는 데로 돌릴 수 있으니까.
“괜찮은 장비군요.”
“그리고 이쪽으로.”
리카 웹스는 정보실이라고 적혀 있는 다른 사무실로 프레드를 데려갔다. 안에 들어서자 주변에 엄청난 서류와 책들이 보였다.
쿵.
그리고 서류가 잔뜩 들어 있는 거대한 종이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건?”
“후후. 지부 안에 있으리라 추측한 우리 박사들이 총편집한 생물 도감……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생물형 ‘봉인물’에 대한 정보도 있으니 전부 외우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죠.”
졸지에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에 도달했지만 별수 있나, 모든 정보를 숙지하지 않으면 출발도 못 하게 생겼는데.
프레드는 공부하면서 동시에 재단에 사용될 이런저런 서류들을 작성해서 리카에게 넘겼다.
재단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공부했는데, 그들에게 등급이 나눠진 것도 봤다.
D등급은 잡부들이다. 중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고용해서 비윤리적인 실험에 참여하게 시킨다.
이 작태에 프레드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중죄를 저지른 자들의 면면을 보니 당해도 싸다고 느꼈다.
아동 성범죄자, 연쇄 살인마, 갱 단원, 강간범 등등.
C등급은 일반 직원들이나 방금 나간 비서들,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알 수 없는 행정처리를 하는 행정 직원들이다.
B등급은 재단의 중역들. 무슨 무슨 박사라던가 무슨 무슨 군인들 등등을 총칭한다. 프레드도 이번 임무에 한하여 B등급을 받았다.
A등급은 재단의 가장 높은 직위다. 웹스 가문의 사람들이 다수 들어서 있지만 정확한 것은 등급이 모자라서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대충 이것저것 열람하면서 정보를 전부 다 습득한 프레드는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우리는 메트로를 이용해서 지부로 갈 거예요.”
“알겠습니다.”
프레드는 재단에서 받은 무장을 살폈다. 방탄복에 있는 각종 파우치에 들어가는 탄창의 수를 체크했다.
“아참, 잊은 게 있네요. 이 열쇠를 받으세요.”
리카는 새모양의 머리가 달린 특이해 보이는 금색 열쇠를 건넸다.
“이건 뭐죠?”
“지부 내부에 있는 소모품들을 사용할 수 있는 열쇠죠. 거기서 소모된 탄환이나 우리가 준비한 특별한 ‘장비’들을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프레드는 작전 목표를 살폈다. 지부의 내부 지도는 이미 다 익혀뒀다.
그의 목표는 지하에 있는 계몽주의자를 연구하는 연구실이었다.
라쿤 부대의 목표는 시설 내부의 정상화다. 그리고 내부 상태를 확인한 후 시설을 폐기할지, 존립할지를 선택할 것이다.
“다들 무운을 빌죠.”
메트로 옆에서 리카가 손을 흔들었다.
라쿤 부대원들과 프레드가 탄 메트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도착한 곳은, 소련 지부 북쪽에 있는 늪지대 쪽이었다.
‘엄청난 속도군.’
본토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겪을 험난한 과정을 모두 무시하고 날아오다니.
남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섬에 루미너스가 왜 그리 일찍 도착했나 했더니 메트로를 사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드는 이게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된다면 엄청나게 끔찍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트로의 노선도는 지구 전역이다.
‘만약 메트로가 국가의 소유가 된다면 어쩌면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단일 국가가 나타났을지도 모르겠어.’
언제 어디서든 군대를 투입할 수 있다니……. 봉인 재단의 목표가 전 세계에 있는 봉인물의 회수 및 보관이 아니라 지구 정복이라면 실제로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늪지대에서 나온 부대원들은 지부로 향했다. 곧 도착한 지부는 평범한 공장처럼 생겼으나, 본부가 으레 그랬듯, 이곳도 지하 깊숙한 곳에 시설이 있을 터였다.
피요가 손목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재어 체크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시간을 정확히 체크하고 있어야 했다.
그가 부대원들에게 외쳤다.
“착용.”
다들 품에서 방독면을 꺼내쓰듯이 라쿤 가면을 꺼내서 장착했다.
꽤 귀여워 보이는 외모지만, 프레드는 저 가면이 결코 그런 귀여운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입구로 돌입한다.”
곧이어 라쿤 부대가 내부로 진입하고 프레드는 그들의 뒤를 따라서 맨 뒤에서 진입했다.
외전16 – 프레드의 무장은 다른 라쿤 부대원들과 비슷했다.
복장도 비슷하다. 군화, 군복, 야투경이 달린 군용 헬멧. 대신 가면은 쓰지 않았고 마스크로 입을 가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UK -19 다목적 돌격소총이 주무장이다. 총구 아래에 유탄발사기를 장착했다. SF에 나올 법한 디자인이다. 부무장은 E-33라고 하던 권총 1정. 등 뒤에는 백팩과 화천지옥검을 세로로 짊어지고 있었다.
프레드는 부대 후미에서 따르고 있었지만, 완전히 별개의 외인 취급이었다. 오히려 몇몇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런 만큼 프레드에게도 장점이 있다. 명령이 없다. 프레드는 이 안에서 완전히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협력은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협력일 뿐, 그들의 목적은 다르다.
라쿤 부대는 지부 내부의 정보 습득 및 정상화가 우선이다. 아마 여의치 않다면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출할 테고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지부를 폐쇄하게 된다.
이점은 이미 사전에 고지를 받았다.
그들과 달리 프레드의 목적은 계몽주의자를 연구하던 003 섹터다. 아마 지하 끝까지 내려가야 할 것 같지만.
“도착했다. 입구 절단 중.”
선두에 있던 피요 소령의 말이 헬멧에 부착된 마이크에서 들렸다.
저번에 훈련하면서도 이미 사용해본 적이 있어서 그다지 신기하지는 않았지만 새삼, 전쟁터에서 쓰던 무기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지이이이이잉.
고성능 절단기로 폐쇄된 문을 잘라내고 있다. 금이 가기 시작한 문이 잘려나가고 퀴퀴한 냄새가 드러났다.
“조심해라. 이제부터 이 기지 안은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모르는 상태다.”
몇 차례의 이 과정을 반복했는데, 조금 뒤에는 절단할 수 없는 전자식 격벽이 나와서 미리 준비해둔 암호를 입력했다.
“전자 격벽을 올린 다음에는 곧바로 내려서 다시 폐쇄한다.”
암호를 다시 입력한 피요 소령이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를 걸어 잠갔다.
첫 번째 전자식 격벽을 올리고 나서 피요 소령이 말했다.
“프레드씨.”
“예.”
“이전에 계획에서 설명했던 대로 갑시다.”
“그러죠. 무운을 빕니다.”
“선생님도.”
처음부터 피요 소령은 A 사이트로 접근해서 통제실부터 장악하고, 프레드는 직통으로 지하로 내려가는 C 사이트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C 사이트로 가는 첫 번째 복도에 입장한다. 깜빡거리는 조명이 보였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선명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체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선다.
봉인 재단 지부는 모든 건물이 블록형으로 이뤄져 있다. 정말 중요한 공간이 아니고는 대부분 블록과 블록을 복도로 엮어둔 형태였다.
핏자국이 그득한 복도를 지나서 다음 블록으로 들어서자 격벽 문이 닫혀 있는 것이 보인다.
전자식 격벽이다.
-출입에 카드 키가 필요합니다.
프레드는 리카 웹스가 미리 전달했던 팔목에 부착된 팔찌를 가져다 댔다.
-입력 완료.
문이 열리자마자 조명이 붉은색인 것이 보였다. 여태까지의 다른 조명의 색은 모두 흰색이었다. 그러나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뿌드득. 뿌드득. 콰직. 콰직.
바닥에서 피가 높이 치솟아서 천장에 닿고 있었다.
“…….”
그곳에, 광인처럼 보이는 한 인간이 자신의 도축용 칼을 들어서 아래를 내리치고 있었다.
피가 튀어서 조명이 붉게 물든 것이었다…….
“그으으.”
기괴한 소리를 내며 아래를 내리치던 존재가 고개를 돌렸다.
겉보기에는 사람……같았으나 바닥에 시체를 계속 내리치던 인간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그게게겍게게겍!”
흥분으로 인해 눈이 시뻘게진 광인이 알 수 없는 고함을 외치면서 도축용 칼을 들고 달려왔다.
프레드는 소총을 들어서 방아쇠를 당겼다. 두개골을 정확히 관통한 탄환이 이 참상의 끝을 마무리 지었다.
“뭐야 이놈? 괴물인가.”
시체를 좀 살펴보니, 그 검붉은 옷이 대충 일전에는 하얀색 가운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명찰은 떨어져 나간 지 오래였으며
“의사? 박사?”
아무튼, 이 시설의 관계자인 것 같은데, 시체를 뒤져도 나오는 게 없다.
프레드는 슬슬 역한 냄새에 적응되는 것을 느끼면서 주변을 살폈다.
지도상에선 이 블록은 경비실이라고 적혀 있는데 경비원들은 죄다 바닥에 깔린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주변을 뒤지면서 하나 알아낸 게 있었다. 바로 이 박사가 쓰던 노트 같다.
[머리에 그게 들어왔다. 나도 이제 그들이 된다. 차라리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는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니까.]지독할 정도의 정자(正字)인데 내용은 끝없는 절망을 담고 있었다.
“머리에 들어왔다고?”
일종의 기생충 같은 건가? 그게 감염을 일으켜서 그를 미치게 했던 것일까?
프레드는 몇 년 전 죽었던 유사한 사건이 떠올라서 얼굴을 찌푸렸다.
격벽 문을 열고 다음 복도로 진입했다. 이 복도에서는 세 갈림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목표한 대로 두 번째 갈림길에 있는 블록으로 들어섰다. 이쪽은 아예 문이 잠겨 있지도 않았다. 지독할 정도의 정적만 들릴 뿐.
그 안에 있는 물건은 성한 게 없었다. 무언가 때려 부순 흔적뿐이었다.
이 통로를 지나자 드디어 첫 번째 목적지에 도달했다.
엄청나게 큰 블록이 있었다. 기존의 블록의 몇 배나 된다. 여기가 지하로 내려가는 승강기가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지부의 사람들의 여가 및 복지를 담당하는 구역이기도 했다.
널찍한 통로 여기저기에는 벤치가 놓여 있었고 관상용으로 식물들을 잔뜩 심어둔 모양인데 차나무 같은 것도 심겨 있었다.
뚜벅뚜벅.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밟자 군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중앙 승강기는 낮은 숫자의 섹터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때, 프레드는 멀리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즉시 옆에 있는 나무 옆에 숨었다.
‘뭐지?’
귀를 기울이니, 키예프 어를 쓰고 있었다. 살짝 들어서 그들을 살폈다. 다 헤진 붉은색 완장을 팔뚝에 찬 남자 둘이서 조심스럽게 승강기 옆 스토어로 향하고 있었다.
‘생존자인가?’
주변을 살피면서 스토어에서 물건을 잔뜩 들고나온 두 남자는, 이전보다 조금 더 표정이 밝아 보였지만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는 못했다.
그때였다.
“Камрад!!”
갑자기 등장한, 기괴한 생물이 남자 하나를 낚아챘다. 잡히지 않은 남자가 고함치지만, 소용없었다.
상체는 사람이지만, 하체는 거미처럼 생긴 기괴한 생물이 낚아챈 인간을 천장으로 끌어들여서 스토어의 지붕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프레드도 깜짝 놀랐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프레드조차 감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어라 괴성을 내지르면서 놓으라고 다툼을 벌이고 있지만, 낫처럼 생긴 앞발로 남자의 반항을 무참히 찢어버리려는 때, 프레드가 그 괴물을 정확히 조준해서 사격했다.
탕!
굉음과 함께 거미 괴물의 상체에 총알구멍이 났다. 원래는 머리를 노리려고 했으나 놈이 움직이는 바라에 옆구리를 꿰뚫었다.
하지만 원래 목적은 성공했다. 잡혀서 지붕으로 딸려 올라가던 사람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것이었다.
밑에서 대기하던, 안경 쓴 소련인이 허겁지겁 동료를 부축했다.
“케에에에에엑!”
귀를 찢는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자신의 흉포함을 내세우려는 거미 괴물을 향해서 프레드가 삼점사로 사격했다.
몇 발 얻어맞아서 피를 질질 흘리던 거미 괴물은 스토어 천장을 통해서 스스슥 이동하며 보이지 않는 사각으로 움직였다.
안경 낀 소련인이 프레드를 향해 무어라고 외쳤다.
“뭐라는 겁니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알아채자마자 안경 낀 소련인이 곧바로 영어로 말을 바꿔서 말했다.
“거기 있으면 안 됩니다! 곧 놈들이 몰려올 테니 우리를 따라오세요!”
“……놈들?”
프레드는 일단 그들을 따라서 움직이기로 했다. 일단 그들에게서 정보를 좀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들을 따라 빠르게 움직여서, 벽면 끝에 있는 한쪽 블록으로 움직였다.
그들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은, 다른 곳보다 조명이 탁월하게 밝은 곳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판자로 입구를 막아버린 남자들은 그제야 숨을 내쉬면서 들고 있던 몇 안 되는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잡혀갔다가 떨어진 소련인은 얼굴에 턱수염이 그득하고 터프해보이는 남자였다.
잡히는 와중에 뾰족한 낫처럼 생긴 앞발에 찍혔으므로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안경 낀 남자와는 다르게 영어를 못 하는지 키예프 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표정과 어조로 보아, 화를 내는 것 같다. 하지만 안경 남자는 차분히 그를 설득하는 듯했다. 프레드는 일단 그들의 환심을 살 겸, 가지고 왔던 물병을 꺼내서 그들에게 건넸다.
물병을 보자마자 다들 초췌한 안색에도 반색하면서 좋아하는 게 아닌가. 그 털보 남자가 제일 먼저 물병을 받아마시고 안경 남자가 두 번째로 마셨다.
“그걸 마시고 좀 얘기 좀 들려주시죠. 당신들은 누구고 여기 왜 있던 겁니까?”
“……이분은 상무회 정치위원 예브게니 볼코프시고, 저는 위원 보조 지노비 비스스몌르트늬입니다.”
프레드는 통성명하고 물었다.
“……정치인? 정치인이 왜 여길?”
“그게, 사정이 있습니다.”
이름도 복잡한 지노비 비스스몌르트늬는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눈을 돌렸다.
“그보다, 부탁이 있습니다. 당신은 밖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제발 우리를 밖으로 데려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일단, 지금 상황에 대해서 먼저 가르쳐주시죠. 당신들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는 게 먼접니다.”
지노비는 먼저 프레드의 요구를 들어줘야겠다고 느꼈는지 입을 열었다.
“그게 우리는, 그날 석유 공업부 장관과 함께 이 한적한 시골 도시로 왔었습니다. 그리고 버려진 공장 건물에서 어떤 시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죠……. 그리고 그날, 일이 벌어졌습니다.”
프레드는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단지 휩쓸린 정치인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봉인재단 소련 지부에 와서 간섭하던 자겠지. 이 일의 원흉일 수도 있다는 의심은 그럴 듯했다.
하지만 정보는 필요했기 때문에 계속 들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하에서 그 끔찍한 것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람들은 미쳐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는 혼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때, 예브게니가 숨을 거칠게 쉬기 시작하자 프레드는 백팩에서 붕대를 꺼내고 그의 상처를 돌봐주었다.
응급처치하긴 했지만 제대로 병원에 가서 치료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을 구하러 밖으로 나가는 건 계획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것저것 숨기는 것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 같은데 믿을 수도 없고.
“그 거미 괴물은 뭡니까?”
“이 층에서 사는 사신(死神)입니다. 누군가에게 듣기로, 아라크네라는 괴물이라고 하더군요. 저 괴물이 수많은 동무를 저승으로 데려갔습니다.”
지노비는 부르르 떨면서 사람 잡아먹는 괴물에 관해 설명했다. 이 블록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지만, 조명이 밝은 곳에는 접근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들이 조명을 여기저기서 떼어내서 이 블록에 보관하던 고요.”
프레드는 좀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이대로 그들을 내버려 두고 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호위해서 밖으로 데려다줄 것인가.
그리고 곧 결론을 내렸다.
외전17 – “미안하지만 내게도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당신들을 데리고 나가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군요.”
“부탁입니다. 우리는 무기도 없고 나갈 기력도 없어요.”
“얘기를 듣자 하니, 댁네 나라에서 특수부대원들을 이곳에 투입한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조금 기다리면 구조대가 올 겁니다. 그들을 기다리시죠.”
단호하게 말하고 프레드는 일어섰다. 지노비는 낙담하는 듯했지만 감히 프레드에게 싸움을 걸어서 무기를 빼앗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안경 쓴 남자는 엘리트로 보이긴 하지만 싸움꾼으로는 영 별로인 것처럼 보인다. 옆에 있던 예브게니가 오히려 더 강해 보였다.
그때, 쓰러져 있던 예브게니가 프레드의 손목을 잡았다.
무어라 말하는 것을 옆에 있던 지노비가 통역했다.
“같이 가자고 합니다.”
“안 된다고 했을 텐데요.”
“아뇨, 아래로 같이 내려가자고 하더랍니다. 승강기로 가는 것 맞죠?”
“……아래로?”
지노비는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면서 예브게니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그는 완강해 보였다.
“……밑에 층에, 이분의 딸이 있더랍니다. 난리 통에 헤어져서 올라왔는데, 내려가야 한다고.”
“그런데 왜 당신은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죠? 예브게니는 오히려 딸을 찾고 싶어 했을 텐데요.”
말이 없는 것을 보니, 그건 지노비의 독단인 듯했다. 아마도 예브게니와 사전에 얘기된 것이 아닌 모양.
‘생각보다 둘의 관계는 끈끈하지는 않은 건가.’
지노비의 번역은 알아서 걸려들어야 할 것 같다.
“예브게니 당신은 짐이 됩니다. 만약 당신 딸을 찾게 된다면, 구해주긴 하겠지만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죠.”
그렇게 확언하고 프레드가 일어서려는데, 예브게니는 따라서 일어섰다. 눈빛을 보니 그만두지는 않을 셈인 것 같다.
프레드는 기왕 구한 것, 계속 그를 도와주고 싶었으나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다.
라고 매몰차게 돌아서려고 했으나 프레드는 결국 예브게니와 같이 가기로 했다.
세계 대전의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배운 게 있다면 사람의 인연만큼 끊어지기 쉬운 게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연이 끊어지기 쉬우므로, 소중하게 여겨야만 한다.
“지노비, 당신은?”
“……나도 갑니다.”
그래도 의리는 있었던 걸까? 아니면 혼자 이 블록에 남겨진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근데 지금 나가는 건 어려울 겁니다. 발전기가 작동하지 않는 시간일 거예요.”
유리가 금이 간 시계를 들어서 살핀 지노비가 이어서 말했다.
“1시간 간격으로 조명이 들어왔다 꺼졌다가 합니다.”
“발전기? 승강기는요?”
“승강기 전원은 완전히 다른 전원으로 돌아가긴 합니다만. 지금 어떻게 밖으로 나갑니까? 그 괴물은 조명이 없을 때 더 활발하게 움직인단 말입니다.”
“그래도 갈 겁니다. 채비하세요. 가져온 음식이라도 지금 먹고요.”
프레드가 단호하게 말하자 지노비가 한숨을 내쉬며 옆에다가 키예프 어로 번역했다. 예브게니는 오히려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스토어에서 가져온 음식을 좀 먹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와보니 아까보다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지노비의 말대로 블록의 모든 조명들이 한도 남김없이 꺼져 있었다.
프레드는 야투경을 내리고 전원을 켰다. 탁 트이는 시야. 눈으로 보이는 화질이 좀 낮아지긴 하지만 움직이는 생물을 못 잡을 정도는 아니다.
“나만 따라오십시오.”
어둡더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은 식별할 수 있을 정도여서 둘은 프레드의 뒤를 따라왔다.
그런데, 이전보다 더 조용하다. 대화를 나눌 수는 없으니 프레드는 추측을 해보았다.
‘스토어에서 습격하던 때처럼 가만히 앉아서 먹잇감이 들어오도록 대기하고 있는 것일 수 있지.’
어둠 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나,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소리에도 민감하니까.
그러면 어디서 기다리고 있을까? 이전에 음식을 먹으면서 하던 지노비의 말대로라면, 아라크네는 지능이 있다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 소총을 들고 무장한 군인을 봤을 때, 외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는 곰곰이 생각해보겠지. 왜 외부인이 들어왔을까? 목적이 뭘까 하면서.’
그리고 아라크네는 두 가지 결론을 내렸을 거다.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중앙 승강기 근처로 온 프레드가 멈추자 다들 멈췄다.
중앙 승강기는 따로 전력을 사용하는지, 오직 그곳에서만 희미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숫자와 버튼, 그리고 은은하게 닫힌 승강기의 틈에서 빛이 빠져나온다.
프레드는 시력을 집중해서 중앙 승강기의 위쪽에 있는 검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소총의 조절기를 연사로 변경한다. 승강기 입구 위에 교묘하게 붙어 있는 아라크네를 사격했다.
드르르르르르륵.
“키에에에게그그그극극”
한 탄창을 다 쓸 때까지 얻어맞아 벌집이 된 아라크네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꿈틀댄다. 허리춤에서 손에 익은 쿠크리를 꺼내서 아라크네의 멱을 땄다.
인도에 파병되었을 때, 구르카라는 용병들에게서 심심풀이로 쿠크리 다루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는군.
목이 날아간 아라크네는 꿈틀대는 것을 멈췄다.
“뛰어요!”
프레드는 뒤쪽에서 달려오기 시작한 아라크네를 또 보고 외쳤다.
예브게니가 먼저 달리고, 뒤이어 지노비가 반응한 듯, 승강기 쪽으로 달렸다.
프레드는 엄청난 속도로 탄창을 교체한 다음에, 뒤로 돌아서 삼점사로 조준 사격했다.
아라크네가 한 마리가 아니었던 모양인지, 최소 세 마리가 넘게 달려들고 있었다.
승강기 문이 열리고 빛이 보이자 예브게니가 키예프 어로 소리쳤다.
프레드는 빠른 뒷걸음질을 하면서 아라크네를 견제하면서 승강기에 탑승했다.
재빨리 문을 닫은 그는 그대로 지하 3층 버튼을 연타했다. 예브게니가 한 말을 지노비가 번역했다.
“저놈은 너무 덩치가 커서 이 승강기에 들어오지 못한답니다. 그러니 이제 안심해도 좋다고 합니다. 아, 그리고. 이대로 지하 3층까지 가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헤어졌다고 합니다.”
“따님 이름은요?”
“사샤.”
프레드는 승강기가 멈추자마자 다시 총을 들어서 전진했다. 원래 목적대로라면 이 승강기를 타고 지하 10층까지는 내려가야 했으나, 어쩔 수 없다.
“여긴, 놀이동산인가요?”
“무슨 직원들의 복지를 위한 테마파크였나 그랬을 겁니다. 지상 1층이랑 지하 3층 두 군데에 있었어요.”
곧이어 발전기가 작동했는지 불이 들어왔다. 여긴 멀쩡한 듯, 부서진 것도 하나도 없었고 인적도 없었다.
“혹시 모르니 근처에 괴물들이 있는지 확인해보겠습니다.”
주변을 좀 돌아다녀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승강기 밖으로 나왔다.
예브게니는 살짝 절뚝거리면서 백화점 건물 같은 곳으로 향했다.
“사샤! 사샤!”
안에 아이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토끼 인형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사샤와 헤어졌다고 합니다.”
예브게니는 낙담하면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프레드는 뭔가 쓸만한 것이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남았다.
그때, 예민한 프레드의 귀에 승강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백화점과 승강기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기도 했고.
“뭐지?”
중앙 승강기 문이 열리면서 몇몇 특수부대가 나타났다. 프레드와 비슷한 복장이지만 저쪽은 진짜 군인이다.
‘스페츠나츠?’
이 혹들을 떼어낼 수 있게 되자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노비는 프레드와 있다가 스페츠나츠라는 말에 반색하면서 예브게니 옆으로 갔다.
스페츠나츠가 총을 들어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들을 겨누었다. 지노비가 손을 들어서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는 말했다.
“이쪽은 상무회 위원이신 예브게니 볼코프 십니다!”
“당신은?”
“저는 위원 보조 지노비…”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제거하라고 명령이 내려왔다. 둘 다 죽여.”
탕! 탕!
프레드는 백화점 건물 내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놀라서 창밖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딱 두 발, 정확하게 미간을 노려서 쐈다.
‘상무회 위원을 죽인다고?’
보통 고위급 정치인이 아니다. 소련 상무회는 최고권력 기관이다. 그런데 그 위원을 저렇게 죽인다면.
‘더 윗선에서 명령이 내려온 거야. 어쩌면 주석, 아니면 서기장이.’
소련 측 최고 권력자가 여길 눈여겨보고 있는 거다. 스페츠나츠가 떼거리로 몰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드는 문답 무용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유탄 발사기에 유탄을 장전해서 그들에게 겨눴다.
‘복수는 해주겠습니다.’
퉁!
“유……ㅌ.”
그 얘기를 듣자마자 일련의 부대원들이 폭발에 휩쓸렸다.
프레드는 그대로 남은 자들을 단발 사격으로 처리했다. 혹시 몰라 머리에 확인사살까지 끝마쳤다.
승강기 문을 열고 그대로 지하 10층까지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프레드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만약 서기장이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왜일까?
‘첫 번째 가정. 소련 최고 권력자는 이 지부 내부가 완전히 오염되었다고 판단하고 그 소탕을 위해서.’
‘두 번째 가정. 소련 최고 권력자는 봉인 재단에서 라쿤 부대를 이 지부에 파견한 것을 알아챘다.’
어느 쪽이건, 이제부터 스페츠나츠는 적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벌써 탄창 네 개를 썼다. 파우치에 남은 탄창은 8개.
띵동.
문이 열리자마자 프레드는 얼어붙었다.
‘시멘트 조각상?’
처음부터 재단 측에서 유의하라고 했던 생물을 만났다.
봉인물 069. 이스카라의 시멘트 조각상.
세로로 갈라서 반은 사람의 모습, 나머지 반은 이형의 촉수가 넘실거리는 괴물의 모습이다.
이건 조형물처럼 보이지만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이었다. 언제 움직이냐고? 바로 누구도 바라보지 않을 때다.
그 생물이 승강기를 향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금지야.’
시야에서 벗어나면 움직이고, 눈을 깜빡이는 순간 다가온다.
프레드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저 생물을 시야에 두었다.
사람의 시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로 사람은 좌우 시야각이 180~210도, 상하 시야각이 120도 내외다.
어쨌든, 시야의 각도 끝자락에 붙어 있기만 하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걸 이용해서 프레드는 주변을 살폈다.
이제부터는 계단으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이 뒤쪽을 보니, 죄다 찢겨 시체가 보였다.
‘이놈의 소행이군.’
프레드는 대체 여길 어떻게 관리한 건지 혀를 찼다.
아마, 이 안에 살아있는 생물은 오직 프레드뿐일 것이다. 다른 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프레드가 조심스럽게 몸을 틀어서 조형물 옆을 지나쳤다.
모서리를 돌자마자,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쫓아온다!’
잠깐 눈을 깜박였는데 모서리를 돈 조각상이 움직여서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때, 복도 위쪽에 붙어 있던 스피커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그쪽으로 가면 안 돼요. 거기로 조금만 더 가면 무인 터렛이 있어요.”
“……!?”
누구지!?
외전18 – 곧 방송은 끊겼지만, 프레드는 경각심을 놓지 않았다. 조언해준 사람의 목소리는 변성기가 오지 않은 어린아이 같았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말을 거는 것도 이상했다.
‘진짜건 가짜건, 시험해보면 알겠지.’
어딘가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은데, 눈을 떼지 못하는 상황은 답답함과 동시에 궁금증,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두려움은 없으나 제한된 시야 속에서 속박된 느낌이 몸을 붙잡고 늘어졌다.
문제는 저 괴물이 따라온다는 점이었다. 잠깐 눈을 깜빡이면 그 짧은 순간 앞으로 다가와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 시야에서 벗어나면 들리는 드르륵거리는 소리.
마치 돌을 바닥에 질질 끄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려보면 저 괴물이 있다.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집어서 뒤쪽으로 집어 던졌다.
타탕!
‘진짜 있다!’
농담이 아니다. 봉인 재단의 기술력이 들어간 로봇인 것이 틀림없다.
2발 연사. 어떻게 인식하는지 몰라도 움직이는 것을 추적해 발사하는 것 같다. 지금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마 뒤에는 총알에 꿰뚫린 시체들이 가득할지도 모른다.
비로소 소녀의 조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프레드는 나갈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았다.
이미 지도를 외워왔다. 이쪽 길로 나가는 것이 아니면, 반대편으로…….
그때, 갑작스럽게 조명이 꺼졌다. 순식간에 암전이 되자 암순응하지 못한 눈이 이스카라의 시멘트 조각상을 놓친다.
재빨리 총에 장착된 조명을 작동시키자 순식간에 눈앞에 와있는 조각상을 발견했다.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나?’
아마도 발전기 가동이 멈추는 순간이었을 터였다.
소름 끼치는 자세를 취한 채, 눈앞까지 다가와 있는 조각상.
부숴버리고 싶지만, 이 조각상은 일반적인 물리 공격에 피해를 입지 않는다.
물론 ‘마법적인’ 공격에는 피해를 입게 되어, 화천지옥검을 사용한다면 이 조각상을 반 토막 내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냥 보고만 있으면 대응할 수 있는 적에게 한정된 자원인 영성을 사용할 수는 없어.’
밑에서 어떤 괴물이 나타날지 모르니 영성을 사용하는 건 최대한 지양하고 싶다.
조심조심 다른 쪽 출구를 찾아 움직인 뒤에, 그쪽 문을 열고 전자식 입구를 잠갔다.
“후.”
잠깐 위험했었으나 이제는 괜찮다. 저 생물은 문을 여는 방법을 모른다.
조각상을 따돌린 프레드는 진땀을 뺐다며 숨을 좀 돌렸다.
지하 20층까지는 이제 승강기가 없다. 그리고 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마경이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복도를 좀 걷자, 또다시 스피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 아저씨 살아남았네? 조금 더 가면 박사 아저씨가 있는 구역에 갈 수 있을 거예요. 파이팅.”
스피커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딘가에 카메라가 있어서 프레드의 모습을 감시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박사라니.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나?
다음 블록에 도착하고 문을 밀어젖혔다. 이 안은 확실히 연구실처럼 보인다. 다른 곳보다는 깨끗하고.
그곳에 머리가 푸석푸석한 상태의 웬 중년인 남자가 있었다. 하얀 가운은 헤지고 좀 지쳐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프레드가 나온 방향을 보면서 몹시 놀라워했다.
“자, 자네는 누구지? 거, 거긴 조각상이 있는 섹터였을 텐데. 구, 구조대인가? 그렇지?”
“유감스럽지만, 아닙니다. 내 이름은 프레드 헥센입니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마이크 호킹 박사라네. 분야는 생물공학이고, 이 끔찍한 블록에 갇혀 있는 신세지.”
“봉인 재단 측에서 라쿤 부대를 투입했습니다. 아마 곧 있으면 상황이 정상화되지 않을까요?”
“뭐?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누가 와도 상황을 정상화할 수는 없을 걸세.”
“왜죠?”
프레드는 드디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소련 정치인들과는 달리, 마이크 호킹 박사는 이 지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시작은 소련의 개입부터였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지부의 사람들을 감금하고 부대를 투입했다죠? 그리고 안에 있는 시설을 강제 탈취했다면서요.”
“그들은 이 시설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냥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었지. 섹터 001이에서 시작되었네.”
소비에트는 섹터 001를 관리해야 할 비취인가를 가진 사람을 구속했다.
“섹터 001에는 무자헤딘이라고 불리는 S급 봉인물이 있다네.”
“성전사……라는 뜻인가요?”
“그래. 무자헤딘의 봉인이 풀어지자 무자헤딘이 연쇄적으로 나머지 것들의 봉인을 풀기 시작했지. 섹터 002-백야화. 섹터 003-계몽주의자……. 이 아래는 지옥이야.”
“아래쪽의 모든 통제가 풀렸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몇몇은 아직도 봉인이 유지되고 있겠지만 그것들을 관리할 사람들이 모두 죽었어. 이 시설은 폐기해야만 해.”
프레드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더더욱 서둘러야 한다.
“섹터 003까지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아십니까? 저 아래에 볼일이 있어서요.”
“자네 지금 내 얘기 제대로 들은 거 맞나?”
“물론이죠. 위험하다면서요. 뭐, 전쟁터도 위험했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대답에 마이크 호킹은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프레드에게 그가 알고 있는 위험한 장소 몇몇을 얘기했다.
“밑으로 다섯 층 더 내려가면 통합관리실이 있을 텐데 거긴 아이들이 있을 걸세.”
“아이들?”
“섹터 005에서는 영성이 없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삼아서 초능력 연구를 하고 있었지. 유감스럽게도 어른들은 실패했으나 아이들은 초능력 개발에 성공했다네.”
“……그리고 풀려난 아이들이 통합관리실을 제어하고 있다는 겁니까?”
“맞아.”
프레드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들에게 실험하다니. 눈살을 찌푸린 프레드는 얼추 정보를 습득한 뒤 말했다.
“아까 말했던 대로, 곧 있으면 구조대가 올 겁니다. 근데 소련인이며 당장 숨는 게 좋을 겁니다. 스페츠나츠가 이 지부 내부의 모든 생물체를 전멸시키기로 작정했거든요.”
“……썩을. 아무튼, 좋은 정보를 건네줬으니 나도 선물을 주지.”
그러면서 마이크 호킹은 기묘한 형태의 공작품을 가져왔다. 옆에 비슷한 박스가 여러 개 있는 걸 보니 양산 제품인 것 같다.
“이게 뭐죠?”
“드론이라네. 새로 발명한 물건이지. 이 작은 날개로 허공으로 날아서 돌아다닐 수 있다네. 내가 개발한 이 드론의 장점은 소음이 거의 없다는 점이지.”
실제로 무선으로 조작해서 동작하는 것을 보여준 마이크는 프레드의 헬멧을 달라고 했다.
뚝딱뚝딱 조립하더니 마이크가 말했다.
“이 드론을 헬멧에 연결했다네. 드론의 시야에서 송출하는 걸 볼 수 있지. 조종은 이 조종기로 하는 거고.”
“잘 쓰죠.”
이런저런 실험과 조작법을 익힌 직후에, 프레드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로 들어섰다.
그의 배낭에는 묵직한 드론과 조종기가 들어 있었다.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서 내려갔다.
구조상 계단은 이대로 지하 20층까지 연결되어 있지만, 프레드는 4층을 내려왔을 때, 더 내려가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우욱, 이게 뭐야?”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나무가 계단을 꽉 막고 있었다.
나무는 실시간으로 꿈틀거리며 분홍빛으로 번뜩였는데 그 질감이 마치 살점 같아 보였다. 그 피부마다 하얀색 꽃이 피어있었는데, 프레드는 이게 마이크가 말하던 섹터 002의 백야화라는 봉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얀색 꽃은 그것을 바라보는 프레드에게 기이한 악취와 동시에 연기를 내뿜었다.
‘백야화는 관측자가 존재할 때 움직이기 시작한다네. 관측자를 시각적, 후각적인 방법으로 끌어당기고 잡아먹어서 자신의 본체와 융합시키지.’
프레드는 마이크의 조언을 떠올리고 얼른 자리를 떴다. 그가 얼른 피해버리자 꽃은 곧 꿈틀대는 것을 멈췄다.
프레드는 재빨리 다음 블록으로 이동한 뒤에,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왼쪽 복도로 가는 문이 열려 있었고 그 복도 끝에는 기괴하게 생긴 두꺼비가 있었다.
등에는 사람의 신체 부위 같은 것들이 박혀 있었고 뱀처럼 날름거리는 두꺼비의 혀는 다섯 개도 넘었다.
이쪽을 찾아내지는 못한지, 반대쪽 블록에서 혀를 날름거리면서 적의에 깃든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욕을 삼키면서 잠시 기다렸다. 곧이어 허공을 날아다니는 사람이 나타났다.
아니, 사람의 형체를 한 무언가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자는 힌두교의 성전인 바가바드 기타를 읊으면서 거꾸로 된 십자가에 매달린 채,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자의 머리……부분에서는 적색 휘광이 마치 조명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휘광에서 꿈틀거리는 기생충들이 태어나서 바닥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 괴물들은, 서로를 발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미친 듯이 싸우기 시작했다.
프레드는 잠시 홀린 것처럼 두 괴물의 격전을 바라보다가 즉시 고개를 돌려서 다른 계단을 이용해 내려가려다가 멈췄다.
‘여기는…….’
지도에는 적혀 있지 않았으나, 아래로 내려가는 구멍이 있었다. 내려다보니 아래층 연구실과 연결되어 있다.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야광봉을 꺼내서 꺾은 다음, 아래로 던졌다.
─풍덩. 치이이이익.
‘풍덩?’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아서 여길 벗어났다.
조금 이 층을 헤매고 있자 옆에 있던 스피커가 켜졌다.
이번에도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지 이명을 냈다. 손가락이 닿는 이명이 여러 번 들린다.
조금 듣다가, 프레드는 거기서 규칙성을 찾아냈다. 이건 모스 부호가 분명했다.
‘오른쪽으로 두 칸 전진한 후에, 들어간 방에서 바닥의 격자무늬 세 번째.’
도착하자마자 프레드는 격자무늬 타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잘 만져보니 빠질 것 같아서 옆에 손가락을 넣고 힘주어서 빼냈다. 제법 무겁다.
그 아래에는 놀랍게도, 지도에도 없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고, 밑에 층에서 누군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놀라워서 무언가 말하려던 프레드를 향해서 검지를 들어 입술을 막는 시늉을 했다.
프레드가 그 뜻을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가자 한 소녀가 보였다.
옷은 병원의 가운 같은 것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남자아이처럼 짧아 보였다.
나이는 십대 초중반쯤 되었을까.
손가락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자 프레드가 뒤를 따랐다.
블록 몇 개를 거치자 좀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말해도 돼요.”
“너구나? 스피커에서 날 도와준 게.”
“어. 그건 아니고요.”
“응?”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여긴 가끔 위험한 거든요.”
그 말대로 따라 들어가니, 안에 아이들이 있었다. 세 명.
이런 미친 공간에서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하게 보였다.
“어. 아저씨 결국 살아서 왔네?”
머리가 긴 편인 여자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옆에는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단발머리의 아이가 수줍은 듯 서 있다.
“그럼 네가 도와준 거야?”
“응.”
외전19 – “어, 일단 고맙다. 여기 선물.”
프레드는 문득 주머니에 있던 초콜릿이 떠올라서 꺼내서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이게 뭐야?”
“초콜릿 몰라? 먹는 거야.”
프레드는 이 아이들보단 좀 어리지만 10살짜리 딸이 하나 있다.
긴 머리카락의 여자아이가 좀 의심하는 눈초리로 네모난 초콜릿을 바라보는 사이, 프레드를 데려왔던 아이는 그대로 초콜릿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맛있어.”
다들 왠지 모르게 의심하면서 먹는 것이, 초콜릿을 모르는 아이들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맛있어!”
“헤헤.”
싱글벙글 웃고 있다. 이런 순수한 아이들을 실험에 썼다니. 봉인 재단 놈들 미친 거 아닌가?
“너희들 이름은 뭐니? 내 이름은 프레드야.”
“에이미, 밀라, 사샤.”
머리 긴 여자애가 에이미. 그를 데리고 왔던 숏컷 여자애가 밀라. 그리고 수줍어하는 단발머리 여자애는 사샤.
잠깐, 사샤?
“……이름이 사샤라고?”
그 말을 듣자 다들 조금 표정이 이상해졌다. 사샤는 좀 무서워하는 듯하면서 뒷걸음질까지 친다. 그러고 보니 프레드는 자신이 무신경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위층에서 예브게니라는 남자가 자기 딸을 찾는다고 했거든.”
“아저씨도 나쁜 사람이야?”
에이미가 좀 경계하는 표정으로 프레드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난 그 사람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사람이었어. 잠깐 부탁을 받았을 뿐이지.”
“그럼 잘됐네. 사샤는 아빠가 없어. 그 사람이 거짓말한 거야.”
“……?”
분명 예브게니는 토끼 인형을 들고 좋아하던 것 같은데.
프레드는 사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예브게니를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인다.
‘잠깐, 자기 딸이 이런 실험실에서 초능력을 개발하는 피실험체가 되게 했다고?’
어쩌면 소련 지도층과 봉인재단 소련 지부는 예전부터 어떤 커넥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고 봐야 한다.
상무회 의원은 자기 딸을 피실험체가 되는 데 동의했을 정도니까.
“그보다 아저씨. 초콜릿 더 있어?”
“……어.”
프레드는 배낭을 열어서 초콜릿 몇 개를 건네주려다가 온갖 달달한 것들, 비상용 에너지바까지 싹 다 털렸다.
“맛있어!!”
“초콜릿을 주니까 나쁜 아저씨는 아닌 것 같아.”
“하아. 니들 뭐 달달한 거 준다고 사람 믿고 그러면 안 돼.”
프레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미가 싱글벙글 웃었다.
“우리도 바보 아니야. 아저씨는 착한 사람인 것 같아서 잘해주는 거지. 사샤의 나쁜 마음 감지 센서가 작동을 안 하잖아.”
“……그건 뭐니?”
“누군가 사샤한테 해를 끼치려고 했으면 단박에 들킬걸? 사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일정 부분 읽을 수 있어.”
프레드가 묘한 표정으로 사샤를 바라보자 좀 수줍어하기는 해도, 에이미의 뒤에 숨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아이들과는 좀 길게 얘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왜 여기 있냐고? 그야 당연하잖아.”
“당연하다고?”
에이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여기 말고 어디로 가?”
“갈 곳이 없어서 여기 있다고? 이렇게 위험한 곳에?”
“뭐, 좀 위험하긴 하지만 적당히 규칙을 지키면서 살면 돼. 음식은 저쪽 옆에 있는 곳에서 계속 나오고 물도 계속 재활용되거든. 접때 박사가 말했는데 들어온 자원은 이 기지 내부에서 계속해서 순환하게 되어 있다고 했어. 부족하면 로봇들이 보충해주고.”
프레드는 할 말을 잃었다.
“여긴 너무 위험해. 너희들도 보잖아?”
프레드는 에이미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에서 여러 개의 카메라가 있었는 데 카메라에는 하나같이 끔찍한 괴물들이 찍혀 있었다.
“저……괴물들을.”
“가끔 보다 보면 은근히 귀여워.”
“미친.”
프레드가 고개를 돌려서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밀라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될 대로 되라는 느낌이지만 사샤는 또 달랐다. 저런 것들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만약 너희들 여기 밖에 나가서 안전한 곳에서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으면 어떻게 할래?”
“어……. 음. 글쎄.”
다들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지만 사샤는 이전보단 좀 더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에이미가 사샤를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사샤가 싫어한다면 뭐, 어쩔 수 없고.”
“나는 에이미가 한다면 할 게.”
“그럼 동의는 구했다? 잠시 기다려봐. 내려갔다가 와서 같이 올라가자.”
“이 밑으로 내려가겠다고?”
다들 좀 놀라는 눈치였다. 에이미가 밀라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 아저씨 강해?”
“초능력은 없는 것 같은데.”
“무슨 깡이야?”
“해야 하니까 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정보 좀 알려줄 수 있을까? 위험한 것들 말이야.”
“음. 두꺼비랑 적그리스도는 봤지?”
“……어.”
그렇게 간단한 문장 하나로 표현할 수 있던 것이었나? 프레드는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괴수들의 대전은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끔찍했다.
프레드가 대답하자 에이미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서 리스트를 지워나갔다.
“밑에 또 누구 있더라? 하얀 꽃, 그리고 날개 여덟 장 달린 천사님이랑 그 신도들?”
“사일런스도 있지.”
“아, 사일런스 영역도 그쪽이지. 요즘 이쪽 층에만 출몰해서 몰랐네.”
“사일런스?”
“응.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위험한 녀석이 있어.”
아, 뭔지 알겠다. 섹터 004에 있는 생물, 침묵 토템이다.
모습은 원통형. 눈이 두 개. 비늘 덮인 몸통. 입에서 튀어나온 송곳니가 인상적인데, 소리를 감지하면 미친 듯이 달려들어 원통 내부에 숨겨뒀던 사마귀 같은 칼날을 들어서 상대를 찢어발긴다.
‘하얀 꽃은 백야화……겠고. 천사님은 무자헤딘이겠군.’
“천사님은 정말 조심해야 해. 아예 마주 보는 것조차 금지야. 바라보면 미치게 되거든. 우리 애 중에도 광인이 되어버린 애도 있어.”
“대처법은 알고 있어.”
프레드는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이제 이 밑층으로는 CCTV도 없으니 홀로 어둠 속을 헤쳐가야 하는 것이었다.
운이 좋게도, 내려가는 동안 사일런스를 발견하지 않았다. 내려가는 동안, 온갖 계단은 죄다 막혀 있어서, 아이들이 가르쳐준 비밀 통로를 통해서 이동했다.
겨우겨우 지하 18층에 도착했다. 여기가 프레드의 목적지였다.
떨어지자마자 한 연구실이었다.
‘여기가 계몽주의자를 연구하던 곳이군.’
여태 봐왔던 여느 연구실과 다를 것은 없었다. 프레드는 볼록 하나를 지나면서 혹시 모를 적을 경계했다.
‘흠.’
한쪽 블록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계몽주의자의 신체가 보였다. 마치 무슨 도축용 고기를 올려둔 것 같다.
‘이렇게 많았었나?’
무명 교단이 계몽주의자들을 사냥하고,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나 했더니 이렇게 봉인재단에 넘긴 것 같다.
‘상당히 위험한 조직이야.’
프레드의 아버지 샤를 헥센은 스스로가 무명 교단을 창단했다고 했으나 이제 그가 손을 뗀 이후로 무명 교단은 알아서 굴러가게 된다고 했다. 이 폭력성은 거기서 기인하는 것일까?
잡생각을 떨쳐내고 여기저기 움직였다. 탄환이랑 탄창을 여기서 재보급했다. 마침 사용하지 않은 장비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다행이군.’
계몽주의자들의 시체들을 헤치고 다녔다. 이 층에는 이상하게도 연구원들의 시체가 없었다.
하나같이 종적을 감춘 모양새인데 아마도 납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야화의 꽃 냄새에 유인당해서 한 끼 식사가 되지 않았을까?
‘여깄군.’
연구 자료들을 뒤지다가 프레드는 자료를 찾아냈다. 『계몽주의자의 폭력성 억제 연구』.
잘못된 자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부를 쓱 읽어봤다. 연관된 자료들까지 취합, 분석을 끝마친 뒤, 그는 서둘러 자료들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 기이한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자 흠칫 멈췄다.
‘뭐야? 노랫소리?’
프레드는 조심스럽게 등에서 드론을 꺼냈다. 직접 페이스 체크를 하고 싶지만, 이 통로들은 하나같이 사각이 없는 모양새라 염탐하기 어렵다.
드론을 꺼내서 야투경과 시야를 공유했다. 무소음 드론이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한다.
‘…….’
거기에 기이한 조합이 있었다. 하얀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그럴 수 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과학자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뾰족한 원통형 두건을 썼다.
‘인종차별주의자들처럼…….’
KKK단이라는 악랄한 백인 우월단체들처럼 두건을 썼다.
프레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악명 높은 KKK단의 두건의 근원은 어떤 성례(聖禮)에서 따온 것이다.
그들은 행진하는 십자군처럼 머리 위로 십자가를 높이 들어 올리고 성가를 외치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보다 과학을 숭배하는 인간들이 신앙에 빠져 있다, 기이할 법도 하건만 이 안에서는 오히려 그게 정상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외눈박이 섬에서 두 눈이 있는 사람이 비정상적인 것처럼.
프레드는 그들의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마침 길을 막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노래를 끝마친 그들은 자신들의 전의를 가다듬기라도 하는 것인지 외쳐댔다.
“우리는 무자헤딘이다!”
“성전! 성전!”
“신께서 원하신다!”
“천사께서 성전을 원하신다!”
완전히 미친놈들이다. 이 안에서는 온갖 종교가 난무하고 있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읊는 적그리스도나 데우스 불트(deus vault, 신께서 원하신다.)를 외치는 이슬람교도나.
“이런 더러운 이교도 놈들! 크리스트교나 이슬람교를 믿다니! 내 안의 성령이 울부짖는다. 진실한 종교인 무명교를 믿어야 할 것……어라?”
프레드는 무교였으므로 그런 생각 같은 것은 전혀 들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문득 충동이 들었다.
‘여긴 너무 위험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정신이 오염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안의 공기가 다른 곳과는 다르다.
자신의 따귀를 한 대 때려서 정신을 차리고는 그는 얼른 드론을 회수했다.
“저놈들, 저쪽은 막힌 계단일 텐데.”
프레드는 과학자들로 만들어진 20세기 성전기사단이 가는 방향이 백야화가 꽉 틀어쥐고 있는 계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왠지 모르게 드론을 보내서 그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광인들은 모조리 백야화에게 잡아먹히지 않았을까? 싶었으나 놀랍게도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백야화의 줄기들이 옆으로 달라붙으면서 20세기 성전기사단원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백야화에게 지능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무자헤딘이 백야화를 완전히 제압한 것 같군.’
경각심을 느낀 그는 재빨리 아이들이 만든 비밀 통로를 통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보다 먼저 올라가서 관리실에 있는 아이들을 구출해서 올라가야 한다.
프레드는 그렇게 움직이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 존재감만큼은 확연하게 느껴졌다.
무자헤딘이라는 괴물이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외전20 – “어라, 아저씨 빨리 올라왔네? 원하는 건 찾았어?”
등에 짊어진 백팩을 위로 던지고 그대로 통로를 기어 올라오자 에이미가 옆에서 웃었다.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야.”
올라와서 보니, 바닥은 초콜릿 포장지로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왜?”
“밑에 층에서 올라오고 있어.”
“뭐가?”
에이미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옆에 있던 사샤가 말했다.
“저 아저씨 말이 맞아. 천사님의 숭배자들이 몰려오고 있어.”
“에엥? 그럼…….”
“천사님도 아마 올라올 것 같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에이미는 놀라워하면서도, 그 즉시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당장 짐 싸!”
옆에서 뒹굴뒹굴하던 밀라는 벌떡 일어나더니 손가락을 들어서 염동력을 발휘했다.
본인들이 사용하던 일반적인 물건들, 침낭, 옷, 음식 등을 순식간에 짐을 쌌다.
‘결단력이 있는데?’
사샤는 위험을 감지하고 에이미는 그걸 듣고 판단한다. 리더의 말에 군말 없이 움직이는 밀라라던가, 셋 다 하나같이 체계가 잡혀 있었다.
“사샤, 사일런스는 어디 있어?”
“밑에 층에…….”
“아저씨, 우리 밖으로 데려다준다고 했죠?”
“어, 응. 너희들이 원한다면.”
“그 말 무르기 없기?”
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에이미도 이 장소가 안전하지 않게 된다면 곧바로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사일런스가 오고 있어. 뭔가에 두려워하는 것처럼 도망치고 있어.”
“천사님이 무서운 거야. 모든 존재를 지배할 생각이거든.”
“짐 다 쌌어.”
“출발!”
프레드 아이들을 데리고 제일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통해서 올라갔다.
밑에서 따라 올라올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려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둥둥 떠오르더니 착 하고 가볍게 안착하는 게 아닌가.
‘엄청 편리해 보이는데.’
프레드는 총구를 들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움직였다. 아이들이 말하던 ‘두꺼비’와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살 난 구역의 잔해들만 남아 있을 뿐.
“뭐해? 빨리 가야지.”
“알고 있어.”
“두꺼비랑 적그리스도는 서로 싸우다가 힘을 빼서, 각자 휴식을 하고 있을 거예요.”
사샤가 옆에서 거들었다. 에이미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프레드는 재빨리 계단을 향해 달렸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셋 다 빠르게 날아다니고 있다.
‘역시 이런 괴물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있었군.’
각자 잘하는 분야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염동력에는 능숙한 것 같다.
“박사도 구해야겠어.”
“엥? 박사 아저씨도 구한다고?”
“라쿤 부대건 스페츠나츠건 아마도 이 밑에까지 내려오지는 못했을 테니.”
에이미는 좀 고민하는 듯했다. 프레드가 물었다.
“그 박사가 너희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 거야?”
“아니, 우리에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나쁜 사람들의 동료긴 하지.”
“그래도 언제든 죽일 수 있었어요. 우리가 그 박사 아저씨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내버려 둬도 알아서 죽을 거라로 생각했거든요.”
조용하던 밀라가 말했다. 그러나 소녀가 말한 것치고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근데 알아서 잘 살아남더라고요. 내버려 뒀죠.”
“아무튼, 박사 구하기 난 상관없어. 어차피 올라가는 길에 있잖아?”
“에이미가 그렇다면 나도 상관없어.”
“저, 저도요.”
밀라는 이 과학자들에게 증오심을 가진 것 같다. 에이미가 통제하지 않았으면 지금보다 위험한 아이가 되었을지도.
‘역시 이 아이들에겐 더 좋은 환경이 필요해. 책임지고 원만한 환경에서 길러야 해.’
사실 아이들의 통제는 봉인 재단이 맡아서 하고 있을 테고 어른들의 더러운 여러 계약으로 얽혀 있겠지만 프레드는 이 아이들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생각을 했다.
빠르게 계단 5개의 층을 올라갔다. 프레드는 전력을 다해서 달렸다. 일반인의 속도라고 상상할 수 없는 속도여서 옆에서 둥둥 떠서 날아다니던 에이미가 사샤에게 물었다.
“저 아저씨 정말로 초능력 없는 거 맞아?”
“어, 그렇긴 한데. 초능력 말고 다른 게 있는 것 같기도.”
“그럼 그게 초능력이지 바보야.”
“히잉.”
“밑에 층에서 하얀 꽃이 올라오기 시작했어.”
밀라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백야화가 꿈틀거리면서 올라오고 있는데 거기 광신도들이 탑승하고 있다.
“근데 왜 나쁜 아저씨들이 있지?”
프레드는 아래를 내려보고 놀랐다. 꿈틀거리는 백야화가 광신도들을 위로 올리는 모습이 마치 침수되고 있는 배를 연상케 했다.
층계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밀라의 눈동자가 번뜩거리더니 고열 광선이 쏘아졌다.
아래층 계단을 완전히 파괴하자 잔해가 떨어진다. 그러나 이걸로는 오래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프레드는 뒤쪽을 아이들에게 맡긴 뒤에, 곧바로 마이크 호킹 박사를 불렀다.
“호킹 박사!”
“에? 헥센 자네가 아닌가? 벌써 원하던 자료를 찾았나?”
“빨리 올라가야 합니다.”
“응? 어, 어어?! 아이들이 아닌가!?”
에이미는 호킹 박사가 머뭇거리자 아예 염동력으로 그를 들어 올리면서 끌고 갔다.
“어? 어? 어어?”
“뭘 머뭇거리고 있어! 일단 움직여. 밀라의 광선도 오래 사용할 수 없다구.”
밀라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염동력을 사용하는 것도 그만두고 뒤쪽에서 계속 광선을 쏴댔다.
고열의 광선에 직격한 20세기 성전기사단은 온몸이 불타오르는 데도 마치 언데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도주에 백야화가 꿈틀거리면서 광선을 막아내기도 했고, 광선에 맞은 과학자들은 기이할 정도로 빠른 재생 능력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신의 군대다!”
“산도 바다도 넘고 건너서! 앞으로─! 앞으로─!”
“영생의 길 찾아!”
그들을 보며 밀라가 징그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들이 더 이상한 방향으로 미쳐버렸어.”
“사샤! 밀라를 데리고 와!”
사샤는 그 말을 듣고 밀라에게 염동력을 사용해서 그녀를 끌어왔다.
“엘레베이터!”
“가기 전에 조각상 조심!”
“터렛도 조심!”
이미 이 바닥은 쫙 꿰고 있는 아이들답게 하나같이 위험한 것을 피해갔다.
무인 터렛은 그대로 격추했으며 이스카라의 시멘트 조각상은 그냥 보기만 하면 무력화할 수 있으므로 번갈아서 바라보기로 했다.
들어올 땐 조심스럽게 들어왔지만, 프레드는 총마저 뒤로 들쳐메고 자기 집 앞마당처럼 달렸다.
곧이어 메인 승강기에 도착한다.
“후, 후, 후, 후.”
프레드는 숨을 고르면서 승강기 옆에서 뒤쪽을 바라보았다.
추종자들의 진군은 이전보다 한참 느려 보인다.
승강기의 하강 버튼을 눌러서 이쪽으로 끌고 왔다.
띵동.
그러자 프레드는 스페츠나츠 여럿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로의 눈이 부릅떠진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탑승하고 아래층을 누른 순간, 프레드도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던 것 같다.
서로 인식하는 속도는 같았지만, 속도는 프레드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재빨리 점프해서 정면에 있는 놈을 니킥으로 박살 낸 다음, 쿠크리로 오른쪽 놈의 경동맥을 칼로 그어 넣고, 왼손으로 권총을 뽑아서 왼쪽 놈의 미간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이 과정이 진행되는 데는 딱 2초가 걸렸다.
‘메인 승강기를 라쿤 부대가 점령하지 못한 건가?’
칼에 베여서 미처 죽지 못한 스페츠나츠는 피를 분수처럼 뽑으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이 사람들 누구?”
“나쁜 사람들.”
에이미가 옆에서 묻자 프레드가 대답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에는 좋은 광경이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급하다.
“탑승!”
마지막으로 탑승한 밀라가 비틀거리면서 승강기에 올라탔다. 옆에서 사샤가 그녀를 부축했다.
버튼을 눌러서 1층으로 설정한다. 그러나 프레드는 좀 불안했다. 이렇게 쉽게 탈출 할 수 있던 거였나?
밀라가 말했다.
“조각상이랑 과학자 놈들이랑 싸움 붙여놨어. 아마 시간 벌이는 될 것 같아.”
“잘했어. 역시 우리 밀라야.”
에이미가 밀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칭찬했다.
“정말 잘했어.”
프레드도 옆에서 칭찬 한마디 거들어주자 밀라는 사샤처럼 부끄럼을 타는 지 얼굴이 좀 붉어졌다.
이런 걸 보면 영락없는 어린 애인데.
마이크 호킹 박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조금 떨면서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보세요?”
“어떻게 이 아이들과 이렇게 친해진 건가?”
“그냥요.”
초콜릿을 주니까 호감도가 올랐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말이 안 되긴 하지.
그렇게 탈출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승강기는 지하 7층에서 덜컥 멈춰버렸다.
“어라, 왜 이래?”
마이크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밑에서 승강기를 붙잡은 것 같다네.”
“벌써 백야화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가.”
프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승강기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진짜로 밑에서 무언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프레드는 양손으로 승강기 문을 붙잡고, 그대로 옆으로 밀어젖혔다.
“와, 아저씨 힘 쌔다.”
“말만 하지 말고 좀 거들어 봐.”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프레드는 인상을 쓰면서 결국 문을 강제로 열었다.
7층에서 강제로 탈출한 일행은 잠시 뒤에 승강기가 무언가에 잡아당겨 지듯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하아…….”
역시 이렇게 쉽게 탈출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왠지 모르게 느낌이 불안하더라니, 프레드는 곧 그게 실현된 느낌이 들었다.
“승강기가 박살 났으니 쉽게는 못 올라올 거야.”
백야화의 성장 속도는 빠르긴 했지만, 곧바로 올라오지는 못할 거다.
“하는 수 없이 계단으로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프레드는 지도를 꺼내 들었다. 기존에 왔던 방식으로 못 돌아가니 여기서 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총소리가 나요. 그리고 나쁜 사람들 느낌도 나.”
“그럼……아마도 두 세력이 싸우는 거겠지.”
프레드는 지도를 숙지하고 올라가는 길을 파악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다가 지하 5층부터 1층까지 올라가는 화물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계획이었다.
“스페츠나츠는 협력 불가야. 그들은 이 밑의 모든 생물체를 제거할 생각이야.”
“다른 세력도 있어?”
에이미가 묻자 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봉인 재단의 라쿤 부대가 있지.”
“그 사람들도 나쁜 사람들이잖아.”
“하지만 협상은 할 수 있지. 문답무용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아저씨가 그런 권한이 있어?”
프레드는 지금 공식적으로 봉인 재단의 소유인 초능력자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프레드가 그들과 교섭할 수 있을까?
“난 몰라도 우리 아버지는 할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래. 그때 가서 힘을 좀 빌리지. 뭐.”
프레드는 자라면서 여태 아버지의 배경을 쓴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프레드는 그의 아버지 샤를이 봉인 재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유산 같은 거라고 했다. 그걸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했지.
그 말에 옆에 있던 마이크 호킹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
“아마도.”
대충 이야기가 끝나자 그들은 움직여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외전21 – 깨진 유리 벽, 흩어진 핏자국, 주검이 된 자와 아직 살아서 손가락을 당기는 사람들이 연구실에 남아서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프레드는 그가 도착한 곳이 공교롭게도 스페츠나츠 부대의 뒤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후방을 잡게 된 것. 조정간을 단발로 잡았다.
엄폐한 채 탄환을 장전하고 있던 병사 하나가 문득 프레드를 바라보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무어라 외칠 틈도 없이 왼쪽 옆구리에서 권총을 뽑으려던 자는, 프레드의 사격에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그걸 기점으로 프레드가 사격을 이어나갔다.
“뒤에서 사격한다!”
깜짝 놀란 스페츠나츠 부대원이 소리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연발로 변경한 프레드가 총을 긁었다.
인당 6발가량을 투자해서 쏴대자 곧이어 스페츠나츠를 완전히 섬멸할 수 있었다.
‘6명 정도가 다인가.’
그럼 이건 스페츠나츠 소대의 일부일 것이다.
잠시 조용해진 뒤 프레드가 암구호를 외치자 상대 쪽에서도 화답이 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라쿤 부대원들이 맞았다. 그중에 마침 피요 소령이 껴 있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살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찌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보다 내려가면서 구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생존자가…있었다는 겁니까?”
프레드가 뒤쪽을 가리켰다. 곧이어 여자아이 셋과 박사 하나가 나타났다.
“대, 대단하군요. 일단 생존자들은 우리가 데리고 있…….”
“생존자는 제가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피요르트 소령은 말을 끊는 프레드를 보면서 불쾌해졌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밑에서 ‘무자헤딘’이 올라옵니다. 그가 지금 첨병을 보내고 있습니다.”
“……!”
챙!
프레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청난 속도로 옆에서 거대한 나무 같은 것이 유리를 깨고 튀어나왔다.
“흐아아아아아아악!”
그것은 죽어 있는 병사는 물론이고 살아있는 라쿤 부대원까지 노렸다.
“후퇴! C12 지점까지 후퇴!”
후퇴 중인 부대원들을 따라서 도망치는 동안, 전자로 봉쇄되어 있던 측면 블록의 문이 열리더니 하얀 두건을 뒤집어쓴 과학자들이 나타났다.
“불신자들을 죽이고 천국에 가자!”
“뭐야 이 새끼들은!?”
라쿤 부대원은 발끈해서 힘으로 털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무슨 힘이……!”
광신도들은 끔찍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라쿤 가면으로 강화된 부대원의 신체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강하다.
그래서 그는 들고 있던 돌격소총으로 그 광신도의 몸통에 미친 듯이 갈겼으나, 소용이 없었다.
프레드가 라쿤 부대원을 꽉 잡고 있던 광신도의 이마에 구멍을 내주었다.
시체가 축 늘어지자 프레드가 말했다.
“미간에 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라쿤 부대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언가 말하려다가 대신 광신도의 시체를 들어서 집어던졌다.
허공에서 뻗어 나오던 나무줄기가 라쿤 부대원 대신 죽은 광신도를 붙잡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이크 호킹 박사가 달려나가더니 책임자인 듯한 피요 소령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당장 이 시설을 폐쇄해야 합니다. 본부에 D-3 절차를 시행하라고 전달하십쇼!”
“……! D-3 절차는…….”
D-3 절차는 외부 압력을 이용한 시설의 완전 폐쇄다.
“지금 이 시설에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책임자는 나 혼자입니다. 나머지는 다 저것들처럼 되어버렸고.”
마이크 호킹 박사가 가리킨 곳에는 광신도로 변해서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의 신체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자들을 가리켰다.
미간에 쏘는 것이 훌륭한 대응책으로 받아 들여졌는지 라쿤 부대원들에게 곧바로 전파되어서 다들 광신도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있었다.
“당신 이름은 뭡니까?”
“마이크 호킹 생물공학자입니다. 인가는 B등급이지만 책임자가 한 명도 없으니 이 시설의 책임자는 나죠.”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아마 이 뒤로 마이크 호킹 박사는 책임 소재를 면하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는 각오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만큼 이 시설을 폐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일 터.
피요 소령이 통제실에 대기 중인 라쿤 부대원에게 명령하자 각 층을 강제 폐쇄하는 절차가 시행되었다.
여기저기 격벽이 닫히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지하 5층까지 올라가서 통제실에 도착했다.
“헉. 헉.”
다들 긴박하게 달리느라 숨을 고르느라 난리였다.
살짝 붕 떠서 움직이던 아이들만이 그런 분위기에서 자유로웠다.
통제실에 도착한 마이크 호킹 박사는 숨을 고르면서도 통제실 옆에 있는 캐비닛에 자신의 카드를 들어서 해제했다.
그곳에는 특이하게 생긴 헬멧이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리게 되는 모습이었는데 어찌 보면 바이크의 헬멧과 비슷하기도 했다.
“프레드. 이걸 빨리 아이들에게 씌우게.”
“예?”
캐비닛 전체를 카드로 열고 있던 마이크 호킹 박사가 말했다.
“이건 무자헤딘을 관리할 때 사용하던 물건이라네. 무자헤딘이 상대방을 세뇌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네.”
미쳐버린 과학자들을 보면 답이 나온다. 그리고 에이미에게서 초능력자 아이 중에서도 몇은 세뇌를 당했다고 들었다.
“세뇌를 막아내는 특수 재질로 이뤄진 물건이지.”
섹터 001을 관리하던 관리자도 있었으니, 충분히 있을 법한 물건이다.
“자네도 이걸 머리에 착용하게. 그 쓸데없이 큰 헬멧은 벗고.”
무려 야투경과 드론 통제 기능까지 붙어 있는 신형 헬멧이지만, 이젠 쓸모가 없어졌다.
헬멧을 새로 교체하고 아이들의 머리에도 헬멧을 씌워줬다.
“아, 이거 쓰기 싫은데.”
“어쩔 수 없어. 안전을 위해서라잖아.”
불만 가득한 아이들을 달래면서 헬멧을 씌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라쿤 부대원들은 군말 없이 각자 헬멧을 교체하고 있었다.
통제실에 앉아서 본부와 교신하던 병사 하나가 피요 소령에게 말했다.
“소령님. D-3 절차 시행 허가가 났습니다. 18시 30분까지 부대원들을 데리고 시설을 탈출하랍니다.”
“그럼 3시간 30분 남았군.”
손목을 들어서 시간을 확인한 피요 소령은 퇴거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통신병에게 말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옆에 있는 모니터를 감시하던 병사가 외쳤다.
“소령님! 큰일 났습니다! 격벽이…….”
피요 소령이 모니터를 바라보자 격벽 한쪽이 찌그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드득. 드드드득. 드드드드드득.
무언가가 그 두꺼운 것을 찢어내면서 나타나고 있었다.
“무슨……말도 안 되는.”
찌그러진 틈으로 어떤 존재가 나타났다. 그 존재는,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지 모니터에서는 마치 그 공간만 모자이크가 된 것처럼 되어 있었다.
“무자헤딘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이크 호킹 박사의 말에 다들 소름이 돋는 듯했다.
모니터에서는 격벽 옆에 있던 스페츠나츠 부대원들이 무자헤딘을 보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바닥에 처박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의 등장과 동시에 세뇌당하다니. 무서울 정도의 모습이었다.
“아이들과 박사를 먼저 내보내게.”
“소령님?”
“명령이다. 프레드 씨, 당신도 가시죠.”
피요 소령은 통제실 옆에 붙어 있던 화물용 승강기를 가리켰다.
프레드가 굳은 표정으로 피요 소령을 보았다. 그는 이 속도라면 도저히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것 같았다.
“죽을 겁니다.”
“뭐, 병사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안다. 프레드는 2차 세계 대전의 그 틈바구니에서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죽어 나갔는지, 그 병사 중에서도 죽기 위해 사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았다.
피요 소령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여기 남겠다고 한 것이었다.
“가십시오.”
“고맙습니다.”
프레드는 꾸벅 숙이면서 화물용 승강기로 올라갔다.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몇몇 라쿤 부대원이 같이 탑승했다.
프레드가 슬쩍 보니, 목소리를 들어보면 어린 것 같다.
‘여기나 거기나 똑같군.’
전쟁터 틈바구니에서도 나이 어린 병사들을 웬만하면 살려 보내려고 노력하곤 했다.
드르륵거리면서 승강기가 올라갔다.
*
서기장은 곰보 같은 피부에서 자라는 자신의 콧수염을 쓸었다.
스페츠나츠의 연락이 완전히 끊겨버렸다. 그렇다는 것은 통제 불가능의 상태라는 것이다.
“흐음. 어떻게 할까.”
서기장은 이미 그 시설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A등급의 인가를 받은 봉인재단의 주요 요인을 포섭해서 정보를 다 캐낸 뒤였으니까.
“브리즈네프. 가서 빨간 버튼 좀 가져오게.”
“예? 서기장님?”
비서 브리즈네프가 깜짝 놀랐다. 보통 그가 서기장의 명령에 반대로 질문한 적은 없었으나, 지금은 도저히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영제국과는 싸울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쪽에 쏠 게 아니라네. 여기다 쏠 거야. 음. 대외적으로는 핵실험이라고 표기하는 게 좋겠지.”
서기장은 니즈네바르톱스크의 지도에 손가락을 가리켰다.
시골 마을 근교. 대체 여기에 뭐가 있다고 쏜다고 하는 것일까?
어버버 어버버 하는 동안, 브리즈네프는 누군가 서기장 실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이오시프.”
브리즈네프가 깜짝 놀라면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의 미남자가 거기 있었다. 수염을 길렀지만 그다지 늙어 보이지 않는다.
“겨, 경비……!”
“아냐, 아냐. 브리즈네프. 그만하고 나가보게. 내가 아는 친구거든.”
브리즈네프는 비서인 자신도 모르는 스케줄이 있었나 싶었지만, 없었다. 분명히 불청객일 터이지만, 서기장은 너무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비서가 나가자 그 남자가 서기장의 앞에 앉았다. 서기장은 시가를 꺼내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자네도 한 개비 필텐가?”
“아니 됐어.”
“끌끌. 담배 맛을 모르는 지고. 그래서, 왜 내 빨갛고 커다란 버튼을 누르지 말라는 거지? 헥센?”
남자, 샤를 헥센은 팔짱을 끼면서 소파에 등을 푹 기댔다. 마치 자기집 안방인 것 같은 모양새였다.
“거기 내 아들이 있으니까.”
“장남?”
“그래.”
“끌끌. 왜 사서 고생을 하지? 거기만큼 위험한 곳이 어딨다고 말이야.”
“며느리가 좀 아픈데, 그 치료법이 거기 있다고 하더군.”
“자네도 꽤 귀찮게 됐군. 하지만 내 빨간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데?”
스페츠나츠의 마지막 보고에 의하면 빛의 날개를 지닌 천사가 나타나고 그분을 섬겨야만 한다고 했다. 횡설수설하는 광인의 마지막 보고는 곧 끊겼다.
들어보니 무자헤딘이 깨어난 것 같기도 한데.
“내가 가서 해결하지.”
“자네가? 그럴 거면 처음부터 자네가 가지 그랬나.”
“그 지하 맨 밑에 있던 게 깨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리고 음. 해결해야할 개인적인 문제도 생겼거든.”
“문제?”
“지하 맨 밑에 있던 놈이 이 창을 만든 자라는 것을 알아냈거든.”
샤를이 손을 들었다. 그런데 손 위에는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았는데 ‘창’이라고 한다.
“무슨 창인데?”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창이지. 이렇게, 찔러도 죽지 않고.”
“그게 무슨 창이고.”
서기장은 자신을 향해 찌르는 시늉을 하는 샤를 헥센을 보면서 이자가 미친 건지 심히 의심했다. 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 없지.
“뭐, 자네가 간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네. 어이, 브리즈네프. 가져온 빨간 버튼 다시 가져가.”
낑낑대며 크고 아름다운 버튼을 가지고 들어오던 비서가 다시 그 버튼을 들고 돌아갔다.
외전22 – 외22
덜컹거리는 화물 승강기가 1층에 도착했다. 프레드는 전자 격벽문에 카드를 가져다 댔으나,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예 발전기가 나가버린 모양인데.”
1시간 간격으로 켜지던 발전기도 완전히 맛이 간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라쿤 부대원 둘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한 레이저 커터를 들고 가장 얇은 부분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길. 그러나 프레드는 지글거리는 강철의 불길 속에서 한 줄의 불길함을 느꼈다.
어쩌면 밑에 남은 라쿤 부대원이 시간을 끌지 못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을 바닥에 내다 버리고 등에서 여태 매달려 있던 화천지옥검을 꺼내 들었다.
“아저씨?”
“뒤로 물러나 있어. 초능력 같은 거 쓸 생각하지 말고.”
지금 저 아래에서 오는 존재는 인간이 대적할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날까지도 발버둥 쳐야 한다.
이윽고 저편에서 아스라이 몰려오는 아침의 일출이 보인다. 철문을 뚫어서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서쪽에서 그 천사가 등장함과 동시에 주변이 빛으로 밝게 물들었다.
헬멧으로 가려져 있지 않았더라면 프레드는 지금 당장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기이한 안광을 내뿜으며 불길함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이형의 생물. 그것이 그들이 천사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너무 밝아서 그 실루엣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본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불꽃의 검을 쥐고 앞으로 걸어 나간다. 기관총이 쏟아지는 적 토치카에 뛰어 들어가거나 참호 위로 지나가는 탱크 밑바닥에 지뢰를 붙여본 적도 있었지만, 천사에게 검 한 자루 들고 싸워본 적은 처음이다.
적의 날개가 펼쳐지며 작열의 불길이 쏟아진다. 프레드는 검을 들어서 그 불길을 모조리 흡수해냈다.
검을 다루는 기술은 점점 더 능숙해져서 이제는 온갖 기예를 펼칠 수도 있었다.
흡수한 영성을 그대로 바깥으로 발사해서 광선 형태로 반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자헤딘의 근처에 가기도 전에 그을려서 사라졌다.
‘이런 게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생물이던가!?’
무자헤딘은, 더 접근하지 않고, 프레드를 보며 흥미를 느끼는 듯 눈알이 수십 개 달린 손바닥을 천천히 내밀었다.
프레드는 그 눈알을 그대로 검으로 베어버렸지만, 감각이 없다.
화천지옥검이 무자헤딘의 손에 달린 눈알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흐르는 백색의 피가 여기저기 번져나간다. 끔찍한 오염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초월적으로 민감해지는 감각에, 뒤에서 초능력을 사용하려던 에이미가 느껴졌다.
“그만둬!”
에이미가 깜짝 놀라서 손을 거둔다.
“네가 초능력을 사용한 순간, 저 녀석은 네 마음속에 있는 깊은 곳까지 도달할 거다. 그럼 그대로 세뇌당할 거야.”
“……!”
느껴진다. 이 존재가 상대방의 정신에 침투하려는 형태가.
인간이라는 하찮은 생물은, 그저 보기만 해도 인간의 존재를 모두 ‘인식’할 수 있다. 100% 파악 당한 인간은 그대로 압도적인 존재의 전능 감에 몸서리치며 세뇌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뚫었습니다!”
그렇게 대치를 이어나가는 도중에, 드디어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일행이 나가는 동안 프레드는 최대한 뒤쪽으로 검을 휘둘러대면서 빠져나갔다.
무자헤딘은 흥미가 생겼는지, 프레드를 죽일 생각은 없고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오는 것이었다.
프레드는 자신이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화천지옥검의 위력을 빌리더라도, 한계가 있다.
프레드는, 여기서 이 녀석을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옳은 일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못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지옥 같은 덩케르크에서도 돌아왔는데 여기서 죽게 될 줄이야.
마지막 불꽃이라도 휘날리면서 버텨볼까 생각한 프레드가 자신의 연구자료를 챙겨서 박사에게 넘겨주려는 순간, 바깥에서 헬기의 소리가 들렸다.
‘바보 같은, 아무리 군대를 많이 보내도 소용없는데.’
그때, 문득 눈앞의 이 존재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프레드를 상대할 때와는 달리 한껏 진지해진 무자헤딘은 눈에서 광선을 내뿜어서 격벽을 그대로 소멸시켜버렸다.
사라진 격벽 뒤, 동쪽에서 이번에야말로 찬란한 아침햇살이 떠오르고 있는데, 그곳 헬기에서 누군가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에? 아버지?”
멀리서 실루엣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기까지 했다.
“프레드. 네 일행을 데리고 도망쳐라. 저 헬기를 타면 메트로까지 갈 수 있을 거다.”
“아버지, 저놈은 보통 괴물이 아니라고요.”
“나도 그래.”
샤를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프레드에게 손짓했다. 프레드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너도 나만큼이나 고집쟁이구나.”
샤를은 인과율의 창을 꺼내 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사용하고 나서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물건.
이 창의 제작자가 누군지 궁금했었다. 맨 처음에는 광명자의 옆구리에 박혀 있었으니까.
꽤 오랜 시간 조사하던 도중, 우연히 무자헤딘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고 기록을 뒤져보니 이 창의 제작자가, 바로 이 앞의 천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봐라.”
무자헤딘은 이전과 달리 엄청난 파공음을 뿜으면서 강력한 열파를 쏟아냈다.
프레드가 주춤거리면서 화천지옥검으로 열기를 흡수하는 사이, 샤를은 프레드를 방패 삼아 숨었다가, 불꽃이 채 사라지기 전에 출발했다.
“아!?”
프레드가 감탄했다. 샤를이 너무 빠르게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무자헤딘은 샤를이 가진 인과율의 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신을 죽인 자. 벌하리라.
“그으래?”
샤를은 세뇌당하지도 않았고 온전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과율의 창을 들어서 무자헤딘의 등 뒤에 있는 날개를 찔렀다.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천사가 남으니 이제 네가 신 같았지?”
그리고 힘주어 내리니 날게 한쪽이 잘려나갔다.
-크아아아아아!
천사의 비명 속에, 샤를이 재차 인과율의 창을 내질렀다.
“아무튼, 창은 잘 썼다. 여러모로 죽이고 싶은 녀석들을 다 쳐 죽였거든. 근데 이 창, 아직도 안 사라지고 남아있네?”
-어리석은 필멸자가!
“그럼 만든 놈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고, 그놈을 죽이면 알아서 사라지다는 뜻이지.”
프레드는 샤를이 움직일 때마다 무자헤딘의 날개가 잘려나가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존재가 저렇게 쉽게 당하는 존재였나? 이미 괴수 대전이다.
“내가 남아있는 게 오히려 방해겠군.”
프레드는 두 괴수의 대전을 뒤로하고 일단 헬기에 탑승했다.
이미 마이크 호킹 박사와 라쿤 부대원들은 탑승해 있었고 아이들만 남아서 프레드와 함께 신화적 격전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해?”
“……현실이 이상한 것 같은데.”
“초능력도 쓰는 게, 이상한 소리 하고 있네. 가자.”
“사실 아저씨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아버지라면 알아서 끝내고 오시겠지.”
프레드는 격전을 보여주면서 설득을 하는 샤를에게 넘어가 버렸다. 이미 인간의 전투가 아닌데 인간이 끼어들어봤자 이상하다.
헬기가 이륙하고 엄청난 파공음에 저 멀리서 빛이 번뜩거리는 것이 보인다.
헬기는 곧, 근처의 메트로 역에 도착했고 그들은 메트로를 타고 메트로폴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샤를은 프레드와 일행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재차 주문을 시전했다.
무존자가 멀리서 그 격전을 지켜보다가 한 팔 거들겠다고 그에게 시성의 힘을 내려주겠다는 것을, 샤를은 한사코 거부했다.
이미 반신의 직위도 내려놓은 샤를이었지만, 지금 강해진 것 정도로도 충분히 무자헤딘을 제압할 수 있었다.
“대체 왜 거기서 튀어나왔냐? 그대로 지하에 처박혀 있지.”
-……!
날개를 모조리 자른 샤를은 놈의 능력을 반 정도는 깎아낸 것을 확인했다.
-그아아아아! 내 창을!
무시무시한 힘을 폭발시키는 무자헤딘의 몸통에 인과율의 창을 꽂아 넣었다.
스스로가 만들었으나 만든 이마저 상처 입는 무기.
“자, 말해 봐. 이런 무기는 왜 만들었지?”
-……그건, 선각……아니, 나의 욕망 때문에 만들어졌다.
샤를은 한 번의 기이한 수정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무자헤딘은 아마도 선각자의 의뢰로 이 물건을 만들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수정되면서 이제 선각자고, 관리자고 완전히 기억하는 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파기나레코르도, 평범하게 말하는 마도서가 되었던 만큼, 이제 이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긴 격전 끝에 인과율의 창을 내질러서 미간에 창을 꽂아 넣은 샤를은 기어코 무자헤딘을 소멸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인과율의 창도, 기나긴 여정을 끝마치고 제작자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샤를은 봉인 재단의 지부를 바라보았다. 입구부터 완전히 망가져 있다.
격전이 끝난 것을 확인하자, 근처에서 대기하던 헬기들이 샤를의 근처에 내렸다.
죄다 재단의 집행부대다. 안에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나, 혼란을 제거하려고 들어가는 거겠지.
사실, 무자헤딘을 제외하면 안쪽의 혼란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샤를은 곧 걸음을 옮겼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앞으로 저런 존재들은 하나씩 사라져갈 테고, 그들도 더는 엮이지 않는 날이 오겠지.
“뭐, 내가 죽은 다음의 일이겠지만.”
*
프레드는 귀환하자마자 테사의 중증 정신병을 치료했다. 봉인 재단의 연구 성과는 훌륭해서, 충분히 테사의 폭력성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구해온 아이들은, 봉인 재단과 협상해서 헥센 가문에서 설립한 민간 보육 재단에서 기르기로 했다.
아이들이 평범하게 살도록.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마이크 호킹 박사는 좌천되었다고 들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헥센 가의 연구소에 발탁되어서 이제 그쪽에서 일한다.
드론 기술을 발달시켜서 군사 시설에 응용하거나 배송, 운송 따위로 만든다던가?
아버지는 시대를 뛰어넘는 기술이라며 극찬했지만, 프레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바닷가에서 그는 가족들과 여행을 왔다. 대가족 여행이다.
헥센 가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해변에서 휴가를 보냈다.
“와아아아!”
아이들이 바다 앞에서 뛰노는 동안 프레드는 따뜻한 햇볕을 즐기면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끝, 수평선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있기만 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휴가였을 텐데.
-그동안 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