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64
64. 새로운 팔찌와 계약 파기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은하는 간호사 손에 이끌려 각종 검진을 받고 정오가 되어서야 병실로 돌아왔다.
달칵.
문을 닫은 은하는 병실 내에 비치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 헌터님. 혹시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검진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는 길, 한 간호사가 대뜸 은하에게 종이와 펜을 건네 왔다.
‘앗, 저도 부탁드려도 돼요?’
‘그, 그럼 저도…….’
주변에 있던 동료 간호사들, 뿐만 아니라 은하의 검진을 맡았던 의사, 하물며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환자마저 하나둘씩 은하에게 다가왔다. 사진을 요구하거나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우호적인 시선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개중에는 은하를 보고 쑥덕이는 자들도 있었다.
‘……갑자기 왜?’
은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자고 일어났더니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되어 버린 듯한, 말도 안 되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연유에 대해서는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누나, 제천대성이랑 결투한 거 진짜예요? 와! 짱 쎄다!’
병원 복도를 지나치던 중, 지나가던 꼬마 하나가 은하를 보며 눈을 빛냈다. 아이의 보호자처럼 보이던 여인은 그런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힐끔힐끔 은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제천대성이랑? 누가?’
‘에이, 설마.’
웅성웅성.
은하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노트북 전원을 켠 은하는 부팅을 기다리며 짐짓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괬다. 제천대성과 결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목격자가 있었던 걸까?’
당시 그곳에 있었던 건 제휘와 그의 여동생 제림, 그리고 불멸의 길드원들뿐일 텐데. 그 외엔 기껏해야─.
‘설마.’
은하의 눈빛이 바뀌었다.
설마 주변에 있던 경찰들? 그들이 소문을 퍼뜨렸단 말인가?
“…….”
타닥타닥.
자판을 두들기고 얼마 있지 않아, 은하는 포털 사이트 메인에 등재된 인터넷 기사를 발견했다.
[한국 헌터 협회, 부산 자갈치시장 언노운 게이트? 사실무근] [부산 자갈치시장, 진짜 ‘토벌자’는 누구?] [불멸 제천대성 기자 회견 거부. 불거지는 의혹.] [‘검은 드레스의 헌터를 보았다’ 잇따르는 목격 증언. 그녀의 정체는?] [불멸 측 ‘근거 없는 루머’에 대한 강경 대응 예고해.]마우스 휠을 내려가던 은하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똑똑.
노크 소리. 이어서 “헌터님, 접니다.” 하고 제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터님, 벌써 일어나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네. 아침 검진을 받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은하는 스르륵 노트북을 덮으며 답했다.
“결과는…… 어떻게, 괜찮은 건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보다 매니저님 여동생은 어때요?”
“아, 덕분에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당분간은 저와 함께 서울에서 생활하기로 결정도 했고요. 저번 주부터 서울에서 새로운 아르바이트도 구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담백하게 답하는 은하.
반면 제휘는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더듬더듬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결심한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헌터님. 실은…….”
이거요. 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은하는 까만 시선을 스르륵 아래로 내리깔았다.
하얀 손바닥 위 엉성하게 마무리된 그것은 은하의 소원 팔찌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은하의 소원 팔찌와 꼭 닮은 형태의 새것이었다.
“똑같은 팔찌를 선물해 드리려고 했는데, 서울 전체를 뒤져 보아도 같은 디자인의 팔찌를 도통 구할 수가 없어서요.”
“…….”
“그, 그래서 대표님께 조언을 구했더니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하셔서 말입니다. 다행히 대표님께서 헌터님의 팔찌 색깔이나 무늬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은하는 한참 동안이나 소원 팔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무수한 감정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여, 역시 기존의 것에 비해서는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지요?”
도로 소원 팔찌를 거두려는 제휘에게서, 은하가 휙 그것을 낚아챘다.
“아뇨.”
제 손에 들어온 엉성한 소원 팔찌.
그것을 살며시 감싸 쥐는 은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고마워요.”
“아.”
제휘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웃었다.
그것은 마치 연기처럼 금방 사라졌지만 제휘는 확신했다. 그는 방금 보았다. 그녀의 ‘진짜’ 웃는 얼굴을.
“매니저님.”
“네, 네?”
“신시우를 불러 주실 수 있을까요.”
“대, 대표님이요?”
“네.”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결심한 듯한 눈빛. 소원 팔찌를 살짝 감싸 쥔 은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 있어서요.”
* * *
서울 S병원 특별 병동 최상층.
침대에 부착된 간이 테이블 위로, 난초를 다듬고 있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어쩐 일인가. 병든 이를 만나는 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텐데.”
늑대의 주인이자 한때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라고 불렸던 귀훈은, 이미 죽은 자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눈으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냥 한번 들렀어. 이곳에 볼일이 좀 있었거든.”
문 표면에 기대어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달빛에 의해 서서히 밝아졌다.
백이준. 한국인 최초의 S급 헌터이자, 현재는 미국에서 활동 중인 마에스트로였다.
[한국이 배출해 낸 두 번째 S급 헌터 ‘백야’ 그는 누구인가?] [경기도 화성시 A급 게이트, 백야의 지휘 아래 단 5시간 만에 토벌. 동아시아 최고 기록 달성해.] [S급 헌터 백야 늑대 길드 창립. 늑대는 한국 최고의 검이자 방패가 될 것.]바다 건너 미국으로 떠난 이준이 처음 귀훈을, 그러니까 백야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에 대해서 떠드는 기사 덕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뒤 2009년 가을, 대만에 출현한 S급 게이트에서였다.
‘네가 마에스트로인가. 난 백야, 신귀훈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칭송받는 백야께서 매국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는 게 알려지면 좋은 소린 못 들을 텐데.’
‘상관없는 얘기군. 너와 난 격변의 태동기에서 살아남은 한국 최초의 S급 헌터니까. 줄곧 만나 보고 싶었다.’
‘격변의 태동기에서 살아남은 S급 헌터?’
‘왜 웃지?’
‘마치 우리가 S급이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들려서. 조금 다르지 않아?’
‘…….’
‘살아남았기 때문에 S급이 될 수 있었을 뿐이야, 우린.’
이후에도 세계 헌터 기념일을 맞이하여 열린 페스티벌이나 한미 국가 행사 등등, 비록 많은 횟수는 아니었지만 이준과 귀훈은 몇 번씩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벗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사상도 신념도 무엇 하나 같지 않았으니까.
동료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같은 세대를 살았던 동기.
그뿐인 관계였지만 둘에게는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었다.
1세대가 빚어낸 한국의 S급 헌터. 태동의 영웅. 두 사람 모두가 그리 불린다는 것.
“몸은 좀 어때?”
이준이 저벅저벅 걸어와 침대 곁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귀훈을 향했다.
십여 년 만에 만난 사이라고 해도 건조한 안부 인사. 귀훈이 실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괜찮으면 어떻고 괜찮지 않으면 또 어떠한가. 지금의 내가 할 일은 두 가지뿐이지.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귀훈은 멈추었던 손을 스르륵 움직여 다시 난초를 다듬기 시작했다.
“늑대를 끝까지 지키는 것.”
문득 벽에 걸린 액자가 달빛에 의해 초연하게 빛났다. 벼랑 끝에서 울부짖는 늑대가 그려진 유화였다.
“여전하군.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끝까지 그렇게 길드 타령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늑대를 지키는 것이 곧 한국을 지키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지.”
한국 헌터법을 개정하고 또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협회라면, 한국 헌터의 위상을 높인 것은 늑대의 공헌이 컸다.
실제로 늑대는 자신들이 가진 힘과 재산을 이용하여 헌터 육성 및 교육 관련 사업에 크게 투자하였고 이곳 S병원처럼 헌터 전문 병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늑대가 이끌어 이룬 위업들이었다.
줄곧 미국에서 지내고 있던 이준조차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랑은 생각이 조금 다른 것 같던데?”
이준의 입에서 ‘백랑’이란 이명이 나오는 순간, 귀훈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간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백랑에 대해 이준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든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에스트로, 그라면 말이다.
“……그 아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 오직 그것만 생각해야지. 그것이 나와 그 아이가, 늑대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니까.”
“당신 아들 혼자서 짊어지기에는 그 책임, 조금 버거울 것 같은데.”
어깨를 으쓱하는 이준을 향해 귀훈이 피식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유유히 난초를 다듬던 귀훈이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 아이의 재능은 나 이상이다. 어쩌면 자네조차 뛰어넘을지도 모르지.”
그러자 이준의 입가에 줄곧 머무르던 미소가 한순간 사라졌다.
귀훈의 얼굴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아들을 자랑하는 아빠의 얼굴이 아니었다.
“아직 개화하지 못했을 뿐이야. 그 아이는 늑대를 넘어 한국 전체를 제패할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하니 궁금해지는걸.”
이준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은 그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옅게 미소 지었다.
“한번 확인해 볼까? 개화하지 않았다는 백랑의 그릇이 도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말이야. 내가 마침 꽤 쓸 만한 헌터들을 알고 있거든.”
귀훈의 시선이 소리 없이 이준에게로 향한다.
“조건이 있겠지.”
“대화가 빠르네.”
비스듬히 턱을 괸 이준은 초승달 형태로 눈매를 접었다. 그리고 한 톤 낮춘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최근 백랑과 계약한 F급 컨셉 헌터. 내가 데려가겠어.”
귀훈의 눈빛이 순간 달라졌다.
이준이 언급한 F급 컨셉 헌터. 이명이나 본명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귀훈은 그가 누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자네, 많은 걸 알고 있군.”
“관심이 많아서.”
정면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둘의 관계가 그랬다.
귀훈의 푸른 시선이 뜯어보듯 이준에게 머물렀다.
블라인드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 옅은 베이지색 머리칼을 흔들며 이준이 가지런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 물론 당신 아들 말고, 그쪽 계약직 헌터한테.”
* * *
달칵.
810호실 문을 닫고 나온 시우는 바로 옆 811호실, 은하의 병실로 향했다. 그런데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든 순간,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아.”
무안하게 허공에 머문 손을 거둔 시우가 눈을 깜빡였다.
“선배,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응. 들어와.”
은하가 병실 방향으로 눈짓했다.
병실에 들어선 시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소원 팔찌를 발견했다. 제휘 녀석, 어제 밤을 새서 만들더니 결국엔 완성한 모양이다.
시우가 소원 팔찌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은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박 매니저에게 받았어.”
“그렇습니까.”
“네가 도안을 그려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
시우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할 필욘 없었는데. 제휘 녀석, 그런 면에서 참 센스가 없었다.
작게 헛기침을 한 시우는 딴청을 피우듯 병실 내부를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인터넷 봤어. 목격자가 꽤 있는 것 같더라.”
시우의 시선이 우뚝 멈추었다. 도르륵 눈길을 돌린 시우가 은하를 응시했다.
“……인터넷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 그렇잖습니까.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협회도 그렇게 생각하려나.”
은하는 다시금 덧붙였다.
“협회에서 제시한 페널티를 무시하고 게이트에 무단으로 입장했단 것이 밝혀지면 면허 취소가 될지도 몰라. 너도 알잖아?”
“괜찮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아니.”
시우의 말꼬리를 싹둑 잘라 버린 은하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잖아. 현대 사회에 무지한 나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 그중 대부분이 잘못된 정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피어난 불씨는 한 사람이 꺼뜨리기에는 힘든 규모일 터.
만일 의문을 가진 협회가 은하의 행보를 조사하기 시작한다면? 제천대성을 캐묻기 시작한다면?
지금은 무슨 연유에선지 입을 다물고 있다곤 하지만 유환이 언제 마음을 바꿔 입을 열지 모르는 상황.
그렇다면 과연 시우에게도, 시우와의 계약에도 아무런 영향이 가지 않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
“…….”
불편한 정적. 그 끝에서 시우는 조금 억눌린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서요?”
시우의 푸른 눈이 은하를 향했다.
“선배가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이번에는 은하의 까만 눈이 시우를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우리 계약, 이쯤에서 그만 파기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부산행 기차표를 끊을 때부터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은하에게도 분명 있었다. 녹화를 펑크 내면서까지 부산으로 향한 건 다름 아닌 은하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니까.
그에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오피스텔도 그렇고 박 매니저도 그렇고…….
은하는 소원 팔찌를 감싸 쥐며 나지막이 말을 이어 갔다.
“이 이상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나도 양심이란 게 있으니까.”
위약금은 걱정 마. 어떻게든 보상해 볼게.
거기까지 말한 은하는 힐끗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
시우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은하의 눈빛에 옅은 의문이 떠올랐다.
“왜 그런 얼굴을 해?”
돌처럼 굳어 버린 듯한 그를 바라보며 은하가 옅게 고개를 갸웃했다.
얼굴만 보자면 마치…….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쯧쯧. 녀석, 누가 보면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겠다며 혀를 찹니다.]시우는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떨구며 입술을 달싹였다.
“일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듯 몇 번이고 입을 뻐끔거리던 시우가 겨우 할 말을 찾은 듯 다시 시선을 들었다.
“일단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