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8
00018 반으로 갈라지다. =========================================================================
돌무덤 앞은 꽤 많은 수의 데드맨이 쓰러져 있었다. 각각 미간에 화살이 하나씩 박힌 게, 세어보니 일곱 구 정도로 보였다. 물론 아직도 처치한 데드맨의 배는 넘는 숫자가 남아 있었다. 무너진 동료의 시체를 꾸역꾸역 밟고 기어 올라오는걸 보니 어떻게든 나를 한입 물고 싶은 모양 이었다.
“애쓴다, 애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살을 쥐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찔렀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주머니 속의 애꿎은 허공만 휘젓다가 맨 아래까지 딱딱 긁고 나서야 깊숙이 박힌 화살 두발을 꺼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에는 이미 쏜 화살이라도 수거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모든 데드맨들이 모인 건 아니었다. 멀리 있던 데드맨들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지만 대충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설령 서너 마리가 남아 일행을 노린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안현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아래를 보니 데드맨들이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웃겨 나도 모르게 고개 비트를 타며 똑같이 고개를 흔들어 주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냐.’
그것들을 보며 비릿한 미소가 배어 나오는 순간 반사적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너무 들뜬 거 같다. 홀 플레인 1회 차 사용자 시절에 소드 마스터에 오른 이후 나는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었다. 특히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는 언제나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해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렇기에 역대 최고로 어려운 전투로 꼽히는 아틀란타 탈환 전투와 라그나로크 포위 섬멸전에서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느낌은 실로 오랜만 이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를 가진 연합군을 봐도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던 내가 살육이라는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감정을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처럼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기대하는 설레는 감정이 내 전신에 녹아 든 기분이었다.
돌무덤 위에서 괴물들을 보면 볼수록 감정이 자극하는 본성이 터질 것 같아 숲 안쪽 방향으로 풀쩍 뛰어 내렸다. 조금만 더 참자고 몸을 달래고 있자 돌무덤을 낑낑거리며 올라오던 데드맨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기껏 올라왔는데 도리어 내가 내려가니 열이 뻗치는 모양이다.
“얘들아. 여기서 일 치르기엔 보는 눈이 많거든. 그러니 우리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르렁!
내 말을 알아 듣는지 모르겠지만 데드맨 울음소리를 내며 따라와주었다.
나는 일부러 느린 발걸음으로 숲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원래 목적은 전력으로 뛰어 순식간에 거리를 벌릴 생각 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중간에 나를 놓치지 않게 어느 정도 따라오게끔 만들 것이다.
어지간히도 굶주린 듯, 나느 돌무덤에 올라오자마자 아래로 우당탕 떨어지는 데드맨을 향해 가볍게 석궁을 쏘았다. 그렇게 가장 열심히 올라온 데드맨은 배고픈 채로 머리통에 화살이 박히고 말았다. 고개를 축 늘어뜨리는 녀석을 확인한 후 나는 바로 몸을 돌려 숲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저 울음소리도 듣다 보니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잡힐 듯 말듯 완급을 조절하며 달리자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었다. 바로 뒤에서 이빨을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들리는 게 색다른 스릴이 있었다. 그때였다.
꽉!
“어.”
하지만 너무 흥을 냈다. 한동안 S자를 그리며 나무들 사이를 종횡 무진하던 나는 왼팔에 무언가 꽉 깨무는 느낌을 받았다.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니 데드맨 한 마리가 요상한 얼굴로 내 왼쪽 팔목을 문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끌고 온 놈은 아니고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운 좋게 진로에 걸려 이빨을 들이민 것 같았다.
솔직히 별로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놈에게 팔이 물린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곧 분노로 다가왔다. 아무리 운이라고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 이었다. 나는 언짢은 목소리로 내 팔목을 문 데드맨을 보며 말했다.
“뭘 봐.”
그르렁.
“놀랐잖아…. 씨발아.”
팔목을 물고 있는 데드맨의 눈은 이상했다. 물긴 물었는데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탓이다. 그럼 당연하지. 네가 내구 능력치가 92포인트에 해당하는 내 육체를 씹을라고? 욕설과 함께 분노의 오른손을 휘두르자 머리통이 빵 하며 터지는걸 볼 수 있었다.
잠시 괴물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헐레벌떡 나를 쫓아오던 데드맨들은 내 주위를 겹겹이 에워쌌다. 몇몇 놈은 히죽거리는 게 다 잡은 먹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잠깐 달려온 거리를 가늠해보고는 괜찮겠다 싶어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사방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지만 절대로 두렵지는 않았다. 예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상대한 지옥 사자들과 비교하면 이놈들은 귀여운 애교 수준 이었다. 다만 이것들이 내 욕구를 조금이라도 충족 시켜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잘 부탁해.”
상냥한 인사를 하자 데드맨을 이빨을 들이밀며 화답했다. 예의라는걸 모르는 놈들이로군. 나 또한 동시다발로 밀고 들어오는 데드맨의 머리를 겨냥해 손가락을 뻗었다. 일단 맨 앞에 한 놈.
콰직!
손가락이 머리를 파고 들어가는 느낌은 뭐랄까, 인간의 말랑한 살이 아닌 뭔가 썩은 통나무를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뒤통수까지 가격당한 데드맨을 보며 팔을 들어올리자 내 손가락에 매달린 채 대롱거리며 몸을 늘어뜨린다. 그리고 그 광경을 목격한 데드맨들은 일거에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공포. 항상 인간을 먹이로만 생각하던 놈들이 알기나 할까?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사냥 당할 수 있다는 걸. 그래도 나는 내심 놀라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라는걸 하는지 아니면 본능인지는 모른다. 먹잇감만 보면 사정없이 달려드는 녀석들이 지금 내가 내뿜는 존재감에 잠깐이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기특하긴 하지만 놔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가볍게 마력을 방출해 손에 든 괴물의 머리통을 산산이 바스러뜨리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어서 덤비라는 신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데드맨들은 되려 한걸음 물러났다.
장검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 이었다. 없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장에 널린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리거나 또는 풀 한 포기만 뜯어도 내가 들게 되면 충분한 살상 무기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살육에 목말라 있었고 그 갈증을 풀기 위해 손맛이라는걸 느끼고 싶었다. 손의 관절을 꺾으며 진한 미소를 배어 물었다. 그리고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부터 웃음을 멈출 수 없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내 본능에 굶주려 있었다. 10년 동안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살(殺)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본성 자체가 피에 흠뻑 젖은 모양이다. 차츰차츰 뒤로 물러나는 괴물들을 보며 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
“형이 잘 해준 것 같은데. 다들 일어나. 빨리 저 담을 넘어야 해.”
방금 전까지 괴물들이 배회하던 숲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한산한 숲을 보며 안현이 기껏 힘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일행의 분위기는 한껏 가라 앉아 있었다. 안현의 말대로 김수현은 주변에 있던 그것들을 모두 끌고 가는데 성공했다. 조금 전만해도 우글거리던 괴물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뜻 모를 절망감이 모두의 몸을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오빠는…. 괜찮을까? 있잖아. 우리 그냥 지금이라도….”
이유정이 답지 않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안현은 내심 속이 따끔해지는걸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수현이 형은 자신을 믿었고 자신이 일행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기대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건 안돼.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다시 그것들이 돌아오면 어떡할래?”
“넌 오빠 걱정도 안돼?”
“난 형을 믿어. 형도 그랬잖아. 다시 돌아오는 바보짓을 절대 하지 말라고.”
안현의 담담한 말에 이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듯한 얼굴을 보니 안현 자신도 온 몸에 무력감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바짝 차리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고는 힘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믿자. 형이 우리를 믿는 것처럼 나도 형을 믿을 거야.”
안현은 말을 마치고 일어서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 데드맨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안솔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따라 나오자 이유정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막 은신처를 나서려던 이유정은 멍하니 앉아있는 김한별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야. 일어나. 왜 갑자기 멍 때리고 있어?”
”…….”
김한별의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처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이유정을 한 번 보더니 천천히 자리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모두가 나온걸 확인한 후 안현은 전방의 돌담 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힘내. 눈 앞에 보이는 돌담만 넘으면 이 지긋지긋한 숲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일단 담 앞까지는 같이 행동하고 담을 넘는 건 먼저 내가 할게. 밖에 또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안현의 말에 안솔과 이유정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나 김한별은 여전이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김수현이 사라진 숲 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도 이내 안현이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바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알겠어요.”
뭘 알겠다는 걸까. 안현은 속으로 한숨이 나왔지만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형이 있을 때는 서로 도와가며 잘만 움직였는데, 형이 없어진 지금은 왠지 모르게 시작부터 삐걱대는 기분이었다.
“…너희들 심정 모르는 거 아니야. 나도 똑같아. 그런데 우리가 이대로 숲 안으로 간다면 형이 희생한 의미가 없어지잖아. 수현이 형이 목숨을 걸면서 만들어준 기회야. 그리고 형은 나한테 너희들의 안전을 부탁했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빨리 저 담을 넘고 형이 무사히 돌아오는걸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말은 그렇게 해도 침체된 분위기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한 번 떨어진 사기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안현 나름대로 열심히 애쓰는걸 알고 있었지만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안현도 말을 할수록 김수현의 공백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느꼈다. 속으로 까닭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안현은 결국 차오르는 부담감에 눈을 감고 말았다.
나머지 일행들 모두 석궁을 들고 언제나 침착한 얼굴을 가진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만난 지 막 반나절 만에 김수현은 그만큼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상태였다. 공터에서 빠르게 발을 뺄 수 있었던 것도, 괴물들에게 물릴뻔한 안솔을 구해준 것도, 박동걸에 의해 팀이 분열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괴물들과 싸우면서 위험할 때마다 화살을 날려 구해준 것도 김수현 이었다. 언제나 중요한 국면에서 그는 든든하게 일행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울타리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 울타리가 사라졌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의 빈 자리에 공허함이라는 감정을 실감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