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9
00019 잠시, 헤어지다. =========================================================================
푹! 파각!
털썩.
마지막까지 남은 데드맨의 머리를 부순 후 나는 나무에 기대었다. 주변에는 하나같이 머리가 박살 난 데드맨의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최대한 아끼고 아끼면서 한 마리씩 상대했는데도 금방 끝나버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러나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기분을 풀기는커녕 찝찝한 기분만 잔뜩이었다.
“퉤.”
눈앞에 보이는 잔해 위로 침을 탁 뱉었지만 살육을 원하는 본능은 지금껏 억지로 억누른 것에 대한 반발심인지 고개를 더욱 치켜들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문득 애당초 내가 이 기분을 막을 생각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병. 애들 장난도 아니고. 입맛만 버렸네.”
입맛만 쩝쩝 다시던 나는 결국 치솟는 살기를 이기지 못하고 옆에 있던 나무를 후려쳐버렸다.
꽝! 우수수….
어떠한 마력 처리도 하지 않은, 순수 근력으로 쳤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했던 나무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조금 기분이 풀리긴 했지만, 이미 내부를 가득 채운 살기가 모조리 가시진 않았다.
일행들도 나갔겠다, 마음 같아선 이 숲에 확 불이나 싸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돌담을 넘었다고 해도 숲 밖에 또 어떤 괴물이 있을지는 모르는 노릇이었다. 애들 걱정도 되고 화살도 회수하려면 뭉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나는 그 동안 놔두었던 마력을 다스리며 신속하게 발을 놀렸다.
나무와 숲 그리고 주변 풍경이 빠르게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지금까지 보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아까 내가 있었던 돌무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데드맨들의 머리에 꼽힌 화살들을 하나씩 뽑아내면서 주변을 감지하자, 일행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예상대로 내가 숲 안으로 들어간 후 바로 나간 모양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이 정도면 충분 하겠지.”
그대로 화살을 주머니에 꼽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안솔이 봤다간 발작을 할지도 모르기에 나는 대충 이물질을 털어냈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
바로 밖에 안현 일행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돌담을 넘어가기 전 나는 고개를 돌려 조용한 숲을 바라봤다.
숲은 그대로였다. 예전에도 지금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숲을 벗어날 때는 쫓기느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그냥 달리다 보니 아차 하는 순간 숲을 벗어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한동안 숲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뭔가 커다란 짐을 내려놓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감상적인 기분을 즐긴 후 나는 몸을 날려 담을 넘었다. 시답잖은 분위기에 취하는 건 내 자신이 사양하고 싶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
훌쩍 돌담을 넘은 후 눈에 들어온 광경은 내 기대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상태였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길은 울퉁불퉁하긴 해도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있다. 언뜻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반듯하진 않아도 가칠한 옆면이 일괄적인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다.
길 아래로는 평야가 끝이 보이질 않는 광활한 지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주변은 한산했다. 가끔 살랑대는 바람만이 주변에서 미약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괴물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일행 또한 보이지 않는다. 어디를 둘러봐도, 심지어 마력으로 일부를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문득 그들이 나를 버리고 갔다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선 속성을 가진 인물들이 셋이나 있는 만큼 배신할 확률은 상대적으로 적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단순히 성향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나를 남겨두고 떠났을 경우를 보류한다면, 결국 내가 없는 동안 나를 기다리다가 변을 당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통과의례에 나타나는 괴물은 데드맨 말고도 꽤 많은 종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가닥을 잡기로 하고, 나는 먼저 일행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단서, 즉 추적을 위한 자국을 찾는 일은 지금의 나로서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차분히 주변을 살피며 돌담을 따라가던 나는 운동화 자국이 움푹 패여 있는 흙 지대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 방향으로 담을 넘은 것처럼 보였다.
흙이 쓸려있는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자 역시나 일행이 모여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여기서 나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사실을 확인하자 마음 한구석에 슬며시 자리 잡으려 했던 일말의 배신감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일행이 모여있던 장소에 쭈그리고 앉아 하나씩 천천히 살펴본다. 숙련된 레인저나 트랩퍼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 몇 명이 어떻게 왜 등 상황이 발생한 모든 현상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정도는 불가능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날카로운 눈썰미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총 동원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안력을 돋워 발자국을 하나하나 대조하고 비교한다. 일단 일행의 운동화 자국으로 보이는걸 눈에 익힌 후 그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자국을 살펴볼 요량 이었다. 단체로 셔플 댄스라도 췄나 싶을 정도로 발자국은 꽤나 격렬하게 찍혀 있어, 판별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문득 불안한 생각 한줄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계속 살펴나갔다.
차 한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분석을 마칠 수 있었다. 나는 다리를 쭉 피며 일어났다. 일행의 발자국으로 보이는걸 제외한다면 이상한 자국이 하나도 발견 되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발 디딤 부분이 움푹 패여 들어간 자국이 하나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위에 운동화 문양이 덧씌워져 있어 일행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땅이 질질 끌린 흔적이 없으니 데드맨은 절대 아니었다. 보스 몬스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시작한지 이제 막 반나절을 넘기고 있었고 보스 몬스터가 출현하는 조건은 따로 있었다.
보스 몬스터에 대한 생각도 한 구석으로 밀어 넣자 딱히 이거다 싶을 정도로 확 와 닿는 게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마력 회로를 일깨우기 시작했다.
한 순간 마력을 폭발적인 기세로 끌어내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 시켰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단순히 상대방의 사용자 정보를 확인하는 일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일 이었다.
이 정도 마력을 일으키는 게 이렇게 이른 시기에 올 줄은 나조차도 예상 못했지만 시간을 다투는 일 일만큼 지금 당장 딱히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괜히 어물쩍거리고 마력 감지로 찾는다고 하다가, 그 사이에 일이 벌어지면 나도 그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내가 제 3의 눈을 이용해 고찰하려는 현상은 현재가 아닌 ‘과거’였다. 물론 이 고유 능력은 조건만 맞춘다면 이상 차원도 고찰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 차원의 미래와 과거를 보는 것도 능력 여하에 달린 일 이었다.
다만 한가지 걱정이 머리를 스치려고 할 때, 내 눈동자로 하나의 장면이 비치듯 스며 들어와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었다.
파직!
“큭…!”
단 1초만 봤을 뿐인데 망막에 비치던 장면이 어그러지면서 커다란 충격이 내 눈을 강타했다. 눈동자가 화끈거리는 게 마치 불에 이글이글 타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양 눈을 비비면서도 나는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단 1초였다. 1초에 한해 과거의 한 장면만을 봤을 뿐인데, 제 3의 눈이 강제로 캔슬 되어 버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눈의 고통이 사그러지자 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하하. 96의 마력 포인트로도 고작 1초를 버티는 게 한계라니…. 미치겠군.”
설마 설마 했지만 내 마력 능력치가 고유 능력의 오버 드라이브를 견디지 못했다. 새삼 제 3의 눈이 얼마나 고위급 능력인줄 재확인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과거를 본다는 것은 미래를 보는 것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단순히 미래를 예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래도 S랭크에 도달한 제 3의 눈이라 잘하면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강제 발현으로 인한 2랭크 다운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결국 화정으로 1랭크 상승 보정을 받긴 했어도 지금 현재에 한해 전 현상 고찰이 가능할 뿐 과거와 미래를 다루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는 소리나 다름 없었다.
고통은 점점 줄고 있었지만 당장에 시야가 흐릿했다. 마법이 취소 당하고 마력 반동으로 인한 여파의 후유증인 것 같았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눈에 보이는 사물이 또렷해지는 게 영구적인 시력 손실은 아닌 것 같았다.
의도치 않게 위험한 수를 썼지만, 그래도 다행히 하나 건진 건 있었다.
단 1초에 불과했지만 나는 확실히 ‘과거’를 볼 수 있었으니까. 나는 방금 전에 망막에 비친 장면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기껏 옥석들만 모아 겨우 숲을 벗어나니 더욱 까다로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힘이 없어서 그런다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힘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정 안되면 통과의례고 뭐고 난리라도 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이었다.
어째 산 넘어 산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