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1
00021 잠시, 헤어지다. =========================================================================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에는 먹구름이 한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 자욱할 정도는 아니지만, 안개도 희미하게 대기를 맴돌고 있었고, 이슬비도 간간히 내렸다. 창을 툭툭 때리는 빗방울들을 보며 김한별은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는걸 느꼈다.
아늑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적인 기분이라고 해도, 숲 안에 있을 때와 숲에서 나온 후 이상한 것들에게 쫓기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나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는 비 오는걸 참 좋아했는데.’
김한별은 어렸을 때부터 비 오는 날이 좋았다. 우산 하나 들고 비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음악을 듣는 건 지루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문득 커피 한잔의 생각이 간절했다. 속을 덥힐 수 있는 뜨겁고 맛 좋은 커피 한잔만 있다면 잠시라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걸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김한별은 처연한 얼굴로 창 밖을 통해 비치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잿빛 그림자가 몸을 드리우는걸 보니 어느덧 저녁이라는 시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을 겪다 보니 몸은 물론 정신적인 피로감이 가득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약 20평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방이 보였다.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식량, 물, 침구, 화장실 심지어 샤워 시설도.
정신 없이 도망치다가 도시가 보여 안으로 들어왔는데 진입할 때 김한별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시는 너무도 조용했고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 그녀는 도시를 보며 죽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발견한 중간 정도 크기의 건물 하나. 옥상 부분이 검은색으로 칠해진 이 건물은 유독 일행의 눈에 띄었다. 운이 좋았는지는 몰라도 무언가에 이끌리듯 들어와보니 웬만한 것들은 전부 갖춰져 있었다.
육체와 정신은 김한별에게 수면을 요구했지만 아직 잠들긴 미묘한 상황 이었다. 안솔은 아직 혼미한 상태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안현은 옆에서 그녀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유정은….
이유정의 자취를 좇던 김한별은 어렵지 않게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김한별이 현관문 옆에 곱게 세워둔 칼을 집어 들고 있었다. 그녀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대충은 짐작이 갔기에 한별은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언니.”
“응.”
“칼 내려 놓으세요.”
“싫어.”
이유정은 들은 척도 않은 채 현관문의 자물쇠를 풀었다. 현관문에서 철컥 이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안현도 놀랐는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그는 이유정이 든 칼을 보며 바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헛수고에요. 칼 내려 놓으시고 얌전히 기다리세요.”
김한별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유정은 분한 얼굴로 김한별을 쏘아보고 있었다.
“왜?”
“…….”
“수현이 오빠 데리고 올 테니까 너희들은 기다리고 있어.”
‘오빠. 수현이 오빠.’
속으로 그의 이름을 조그맣게 되뇐다. 김한별의 머리에 그의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김한별은 김수현과 자신을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터에서 봤을 때부터 무언가 남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항상 침착한 얼굴과 자신감 있는 목소리. 그리고 차분한 눈동자.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언덕에서 그와 이야기를 하고 그의 판단에 이끌렸다. 김한별은 잠시 이유정을 물끄러미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언니만 그 오빠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또 가도 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그냥 얌전히 기다리는 게 도와주는 거에요.”
“아직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다시 말하지만 안 갈 거면 빠져. 너희들이 안 가면 나라도 가서 데려오겠어.”
“이유정. 한별이 말이 맞아. 일단 칼 내려놔.”
안현의 엄한 목소리가 들리자 이유정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안현과 김한별 둘을 보며 코웃음 치던 그녀는 이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참 너무들 하네. 지금쯤 오빠는 우리들을 찾아 이곳 저곳 헤맬지도 모르는데. 응?”
너무들 하네. 이 한마디는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모두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리는걸 느꼈다. 그러나. 안현은 입을 꾹 다물었지만 김한별은 아니었다. 그녀는 옆방에 흘끗 보이는, 아직 쓰러져있는 안솔에 잠시 시선을 건넨 후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것들이 달려드는데 우리들도 위험한 상황이었고요. 아마 저 아이가 아니었다면 지금 여기 있는 모두가 죽었을지도 몰라요.”
“누가 몰라? 그래서 일단 피하고 솔이 여기로 데려온 거잖아. 왔으면 끝? 우리 일단 안전하니까 이제 끝? 오빠는 알아서 찾아 오겠지?”
의문문으로 자신을 비꼬는 이유정을 보며 김한별은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도, 반말을 하는 것도 영 거슬렸다.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 비웃는 표정을 지은 채 김한별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럼 나가세요. 나가서 실컷 찾아보세요. 언니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스스로 말하고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었다. 얘기를 들은 안현은 놀란 얼굴로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이유정은 잠시 충격 먹은 얼굴이 되더니 이내 ”하.”하고 허탈한 웃음 소리를 내뱉었다.
“너…. 진짜로, 정말로 싸가지 없는 애구나. 이런 애를 살리려고 오빠가 희생한 거야? 참 실망이다. 아까 가지 말라고 걱정하던 모습은 다 연기였나 보네.”
“전 분명 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도 하겠다고 한 건 그 오빠잖아요. 그걸 왜 제 탓으로 돌려요?”
“너…. 후유, 아니다. 너 같은 쓰레기랑은 더 말할 가치도 없겠어. 그냥 입 다물어.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년.”
또 고함을 지르며 득달같이 달려들줄 알았던 김한별은 이유정의 의외의 대응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쓰레기라 부르며 무시하는 태도에 자존심에 심한 상처가 나는걸 느꼈다. 그녀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어느덧 김한별의 숨소리도 처음보다 더욱 거칠어진 상태였다. 이어 말하는 목소리에는 미약한 울분이 섞여 있었다.
“말씀이 심하시네요. 제 말이 어디 틀린 데라도 있나요?”
“몰라. 그런 거 관심 없어. 그런데 난 최소한 너처럼 가식적으로 살고 싶지는 않아.”
“말 다 했어요?”
“나이도 어린 게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네. 어쩔 건데? 서로 머리카락이라도 쥐어 뜯을까? 아서라. 그 하얗고 뽀얀 얼굴에 스크래치 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예쁜 주둥아리 다물라고.”
“다들 그만해!”
점점 수위를 높여가는 둘의 말다툼을 보다 못한 안현이 화난 목소리로 둘을 강하게 일갈했다. 그 기세에 이유정과 김한별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말았다. 안현은 우묵한 눈동자로 잠시 둘을 노려보고는 이유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놔.”
“…싫어.”
칼을 꼬옥 껴안는 이유정을 보며 안현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조금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형 찾으러 갈게.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정말? 그럼 같이 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안현을 보며 이유정은 떨떠름하지만 나름 반기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말에 안현은 고개를 힘없이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 혼자 가는 게 더 편해. 아까 그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너랑 한별이는 솔이 좀 돌봐줘.”
“쟤랑? 싫어. 쟤는 이제 믿을 수 없어.”
계속해서 자신을 매도하는 이유정을 보며 김한별도 속에서 울컥 무언가 치솟는걸 느꼈다. 아까부터 참고 참던 게 결국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름 냉정한 머리의 소유자였다. 화가 나면 이유정처럼 목소리가 높아지고 열불을 내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목소리는 차갑고 냉소적으로 바뀐다. 그녀는 전에 없던 사늘한 목소리로 안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지 마세요. 가면 오빠도 틀림없이 당해요.”
“너 입 안 다물어?”
“그쪽이나 입 다물어요.”
“뭐? 그쪽? 다시 한번 말해봐.”
이유정이 눈을 부라리며 한대 칠 듯이 나서자 안현은 얼른 이유정이 품은 칼을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 그러나 김한별도 이미 작정을 했는지 한번 뚫린 말문은 둑 터진 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지나 말라고요. 아까 쟤가 없었으면 우린 다들 어떻게 될 거 같았어요? 칼도, 주먹도 안 통하는 거 못 보셨어요? 가면 죽을게 뻔한데 도대체 왜 그렇게 가겠다는 거에요?”
“이 쌍년이 진짜…”
“할 말이 없으니 욕을 하시는 거겠죠. 지금 오빠가 어디 있는 줄 알고 데리고 오겠다는 거에요?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보세요.”
“핑계 한번 좋네? 이제 본성 드러낸다 이거지? 오빠 덕분에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생각도 안나? 위선은 있는 대로 떨면서 남 등쳐먹을 생각만 하는 구나. 딱 보니까 답 나오네. 그 새끼보다 더 추악한 년 이잖아?”
트러블 메이커와 자신을 비교, 아니 더욱 깎아 내리는 말에 김한별은 처음으로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지 김한별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톤을 높여 말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잖아요! 산 사람이 살겠다는 게 뭐가 나빠요?!”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이유정은 안현을 거세게 밀치며 달려들었다. 김한별 또한 이를 바득 깨물고 힘껏 뺨이라도 올려 붙일 요량으로 손을 올리려는 순간 이었다.
벌컥.
“뭐야.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자물쇠가 풀린 현관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침착한 얼굴과 자신감 있는 목소리, 그리고 차분한 눈동자. 마지막으로 왼 팔에 매여있는 석궁. 그를 보는 방 안에 있던 모두는 동시에 숨을 멈추고 말았다. 갈등이 최고조로 올라갔던 방 안의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는 왼 팔에 든 석궁을 푼 후 모두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는 바로 김수현 이었다.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