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17
00216 전조 =========================================================================
“솔아.”
“네?”
“오빠가 솔이한테 궁금한 게 있어.”
“우웅? 어떤거요오? 어떤 게 궁금하세요?”
안솔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동동 떠오른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났다.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고, 나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동안 서로만 바라보다가, 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즈음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 워프 게이트 앞에서 오빠한테 했던 말들 기억나니?”
“네? 네에….”
“그러면 지금은 어때? 아직도 불안해?”
안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풀이 죽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오. 오라버니가 제 말을 믿어주셨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자꾸 그런 모습을 보이면요. 오라버니께 괜한 걱정을 끼쳐드리는 것 같아서….”
뜨문뜨문 말을 잇는 안솔을 보자 속으로 흐뭇함이 샘솟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 아빠들이 그렇게 딸을 귀여워하는 거구나. 흡족한 마음에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안솔은 배시시 웃었다.
“그래. 오빠는 항상 솔이 말을 믿는단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 복덩이 말을 믿어서 도움을 받은 적도 많고.”
“헤헤. 아이, 아니에요오. 항상 민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민폐는 무슨. 아무튼 그래서, 이번에도 솔이 도움을 받고 싶어.”
“네에? 도움이요?”
안솔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나는 고개를 한번 주억인 후 진중하게 보일만한 표정을 지었다. 얘는 앞뒤 다 자르고 말하면 알아 듣지를 못하니, 하나씩 차분하게 단계를 올려나갈 필요가 있었다.(이 대화법은 예전 안솔의 행운을 101로 올릴 때 익힐 수 있었다.)
“요즘 아카데미에서 하는 일이 생각만큼 풀리지가 않아서 말이야.”
“에….”
“솔이라면 이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그렇지마안. 저는 아카데미 일도 잘 모르고…. 그리고 제가 어떻게 감히….”
“하하. 설마 너보고 교관 업무를 도와달라고 하겠니. 내가 도움을 받고 싶은 건 다른 일이야. 그리고 그 일 자체는 아주 간단하단다.”
내 말을 곡해해서 받아 들였는지, 안솔은 손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불안함을 내비쳤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작은 웃음을 터뜨린 후,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안심시켰다. 더불어 너만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고 양념을 치자, 그제서야 조금이나마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나는 잠시간 그녀를 다독인 후 훌쩍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몸을 일으킨 그녀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작스럽게 보내는 전폭적인 신뢰가 부담스러운지 전반적으로 자신 없어하는 것 같았다. 분명 나를 후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왔으면서, 막상 멍석을 깔아주니 주저하고 있었다.
‘단순한 오해라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데. 어쩌면 일단 이곳에 오면 내가 자신을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안솔은 분위기를 타는 아이였다. 여기서 다그치기 보다는, 살살 구슬리며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백배 이득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그녀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해서, 나는 살짝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농담을 건넸다.
“걱정 마. 그냥 오빠가 하라는 대로만 해주면 돼.”
“아~. 하라는 대로요? 알겠어요오. 뭔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라버니만 믿으면 되는 거죠?”
“그럼. 오빠 믿지?”
한번 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손만 잡고 잘게 라는 농담을 던지려고 했지만, 안솔의 뜨거운 눈동자를 보고 관두기로 했다. 이윽고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이제는 안솔의 행운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만이 남았다. 과연 어떤 형태로 내 답답함을 풀어줄지 자못 많은 기대가 들었다. 능력을 발동한 후 내게 어떤 해답을 가져다 줄까?
나는 설레는 마음을 품고 이스터 에그(Easter Egg)를 나섰다.
*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안솔 마음대로 휘젓도록 놔두는 게 첫 번째 계획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불안을 털어버리라고 종용한 후, 본관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자.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보려무나.”
“네? 제가 가고 싶은 곳이요?”
“그래. 일단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아. 동물원에 놀러 왔다고 생각해봐. 이곳 저곳 가고 싶은 데가 많겠지?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장 끌리는 곳으로 가면 돼. 불안해하지 말고.”
“으응….”
안솔의 장점 중 하나는 내 말을 상당히 잘 따른다는 것이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뭔가 반짝 떠오른 듯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나는 벌써 촉이 온 건가 싶어 놀라운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처음 이스터 에그로 갈 때는 막 주변도 둘러보면서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이번에는 주위로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즉 정말로 마음이 이끌리는 곳이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두 근 반 세 근 반 설레는 감정을 다스리며 계속해서 안솔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면 갈수록 익숙한 풍경이 자꾸 보이는데, 그것을 볼수록 되려 내 마음이 불안해지는걸 느꼈다. 분명 이곳은 아침에 일어난 후 내가 항상 걷는….
“오라버니, 오라버니이. 나아, 나아. 저기 들어갈래요.”
이윽고 안솔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한 방향을 가리키며 칭얼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소, 솔아. 여기는 안돼.”
“우웅? 왜요?”
“아무튼 여기는 들어가면 안 된단다. 들어가면 무서운 아저씨가 이놈! 하고 혼내요. 그러니 어서 이리 오렴.”
“시, 싫어어. 들어갈래요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곳은 다름아닌 내 전용 교관 숙소였다. 재빨리 감지를 돌려 내부를 확인해보니 천만다행으로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다만 김한별도 그곳에서 생활하는 만큼, 그녀가 쓰던 용품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더구나 딱 붙어있는 침대까지. 맹하긴 해도 안솔도 천성 여자였고,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를 챌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안솔은 내 반응을 보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잽싼 몸놀림으로 앞으로 뛰었다. 그러나 나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민첩 능력치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만큼 뛰어봤자 벼룩이었다. 열심히 달리는 안솔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올리자, 그녀는 허공에 뜬 상태로 손과 발을 버둥거렸다.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갈거야아. 들어갈거야아.”
“자자. 착하지. 오빠 말 들어요.”
“우에엥. 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거에요~.”
안솔은 볼을 빵빵 히 부풀리며 불만 어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한 것은 맞는데, 이곳은 아니었다. 역시나 행운 능력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튄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나는 연신 투덜거리는 솔이를 달랬다.
결국, 우리 둘은 얼른 본관 앞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솔아.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해보자.”
“에, 다르게요?”
“그래. 혹시 예전에 도시 밖을 탐험했을 때 기억나니? 푸른 산맥에서 이 방향 저 방향으로 길을 가리켰잖아.”
“네.”
“좋아. 아까 오빠가 했던 말 기억하지? 이번에는 그 말들을 생각하면서 갔으면 좋겠어.”
“네. 그럼…. 응?”
그때였다. 안솔은 대답을 끝내지 못하고 의문 성을 터뜨렸다. 마치 무엇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을 때 터뜨리는 말투. 그녀는 곧 인상을 찡그렸고, 찡그림은 이내 다급함으로 물들었다. 얘가 도대체 왜 이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안솔은 빠른 속도로 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안솔은 이번에는 옆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으며 그녀가 가는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여러 건물들이 있었지만, 확실한 건 본관에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무에 그리 급한지 안솔은 한동안 입도 열지 않으며 걷는 데만 주력했다.
그렇게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던 도중, 신규 사용자들 몇몇이 모여 킥킥거리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사용자들도 있었고, 넓적한 바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사용자도 있었다. 오늘 하루 휴식을 부여 받기는 했지만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잠깐 통제를 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안솔도 바빠 보였고, 저기 멀리서 신규 사용자들에 둘러싸여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통제 교관이 보였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서 좋게 보면 고작 2주밖에 지나지 않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높이 쳐줄 수 있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너무도 느슨해진 분위기에 자꾸만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 사이를 지나치며 걷자 여러 건물들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 부지는 부속 건물들이 제법 모여있는 곳이라 여러 갈래로 나 있는 좁은 길들이 많은 곳 이었다.
그 동안 뒤만 따라가고 있어 잘 모르고 있었는데, 안솔의 옆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언제 바뀌었는지 몰라도 그녀의 얼굴 표정에는 아까의 맹 함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뭔가에 대단히 몰입해 있었다. 그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서서히 그녀가 그 몰입 감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극에 오른 것 같아 보이는 순간, 안솔은 다시금 걸음을 멈췄다.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솔아. 갑자기 왜 그래?”
“오라버니 죄송해요.”
“죄송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계속 급한 마음이 들어요. 빨리 갔어야 했는데…. 자꾸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안솔의 대답은 재빠르고 날카로웠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의 청초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주변을 잔뜩 흘기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아무 말도 내 옷자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고 싶었다. 웬만하면 옷자락을 잡지 않은 상태로 두고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몸을 비틀려는 순간 뭔가 모를 위화감이 나를 감싸 들었다. 그 정체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문득 고연주가 말해줬던 알 수 없는 기운이 나에게로 스며드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옷자락을 순순히 내주고 말았고, 안솔은 그제서야 만족한듯한 신음을 내었다.
잠시 동안 이곳 저곳 탐색하듯 건물을 바라본 그녀는 한쪽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
드디어 그녀가 목표로 잡은 건물이 서서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건물 내부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나도 서서히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사용자 아카데미는 대강 알고 있을 뿐이지 구석구석 안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1회 차 시절 인연이 없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워낙 부지가 넓고 건물도 제법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솔이가 이끄는 곳은 건물들이 밀집한 미로 같은 좁은 길 지역이었다. 그렇게 안솔은 나를 조금씩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중간에는 건물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만들어진 틈 사이로 컨테이너처럼 보이는 창고도 있었고, 뭔가 묵직해 보이는 상자들이 쌓여있는 곳도 있었다. 아마 이곳이 현대라면 수업을 땡땡이 치고 숨기 딱 좋은 그런 곳 이었다.
안솔은 다시 한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걸음을 멈춘 곳 앞에는 길이 총 4개가 나있었다. 반듯한 사거리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앞, 뒤, 왼쪽, 오른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그녀는 그때 내 옷자락을 놓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언뜻 보니 무척이나 고민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으응.”
한창 고민하던 솔이는 이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바짝 날이 서 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외모랑 표정 자체가 부드러워 전체적으로는 자애로운 분위기였지만, 어딘가 범접하지 못할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그래. 이 느낌은 꼭 나중에 각성한 유현아에게서 받을 수 있었던 느낌과 비슷했다.
한동안 옆쪽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양 손을 들어 왼쪽과 앞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오라버니가 고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나보고 고르라고?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하나씩 차근하게 묻기 시작했다.
“뭘 고르라는 소리야?”
내가 되묻자 안솔은 재빨리 양 손을 들어 왼쪽 방향과, 앞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하게 여기서는 제가 고를 수 없어요. 둘 다 가고 싶은 기분인데, 한 쪽만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오라버니가 어서 하나를 골라주세요.”
============================ 작품 후기 ============================
216회 후기 생략합니다.
216회 리리플은 217회에 포함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