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271
00270 Tears Of Elf Queen =========================================================================
(이번 회는 ‘굉장히’ 불쾌한 내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해당 내용을 원하지 않는 독자 분들께서는 생략하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홀 플레인 이라는 세상은 ‘죽음’이라는 말을 끼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다. 그만큼 죽음이 빈번하다는 것은 병아리들도 아는 사실이다. 또한 이곳에서 살아가다 보면 누구든지 좋든 싫든 지인 또는 타인의 죽음을 마주한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보고서를 쓰고 있는 필자도 몇 년 전에 있었던 원정에서 통과의례 때부터 함께해왔던 동료를 잃은 적이 있다. 그 녀석이 죽기 직전에 남겼던 말은 딱 한마디. 바로 “허무하다.”였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눈물을 몇 방울을 흘리더니, 결국 눈을 감고야 말았다. 나는 녀석이 했던 말과 흘린 눈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주마등’이라는 말이 있다. 주마등의 기본적인 뜻은 돌리는 대로 그림의 장면이 다르게 보이도록 만든 등을 뜻한다. 그것은 워낙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사물이 빠르게 변해 돌아가거나 세월의 빠름을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즉 무엇인가 언뜻언뜻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소리다.
사람들은 평소 또는 죽기 전에 흔히들 말하고는 한다. “인생은 주마등 같다.”, “인생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마 내 친구녀석이 허망하다고 말한 것은 독에 당해 숨을 거두기 직전 순식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지금 이 기록을 보고 있는 사용자들은 필자를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분명 기록 초반에 홀 플레인 은 죽음과 친숙해져야 한다고 적어두었으니까. 내가 이번 기록에서 진정 다루고 싶은 주제는 ‘눈물’로 정의할 수 있다.
예전에 큰 화제가 됐던 ‘천사의 눈물’이라는 물약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사용자 상점의 비밀이 밝혀진 직후 어느 운 좋은 사용자가 거금의 Gold Point를 사용해서 선점했고 무려 6 능력치 포인트의 상승 효과를 얻었다. 애초에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사례도 드문데 한꺼번에 6포인트를, 그것도 자유롭게 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부러움을 샀다고.
그때 이후로 능력치 상승에 눈이 뒤집힌 사용자들 사이에는 ‘눈물’을 얻기 위해 엄청난 열풍이 불었고 그것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확실히 인간의 눈물이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겠지만, 다른 존재의 눈물에는 비슷한 효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얼마 전 우리들은 남 대륙을 중심으로 뭉친 타 대륙 연합군들을 격퇴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사용자들을 포로로 잡았고 개중에는 남 대륙과 동맹을 맺은 요정들도 다수 끼어있었다. 전후 처리과정에서 대부분의 요정들은 노예로 전락했는데, 사용자들은 ‘천사의 눈물’로 시작한 열풍을 요정들에게로 돌렸다.
비슷한 전례(前例)가 있는 만큼, 요정에 대한 가능성은 필자도 꽤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뭐 결과적으로는 아직까지 요정의 눈물이 효능을 발휘한 것에 대해 보고된 사례는 없다. 나는 그 문제점을 사용자들이 요정의 눈물을 얻는 방식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물론 요정들의 특성을 따져보면 눈물을 잘 보이는 종족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감정은 평상시 지극히 고저가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요정들도 엄연히 하나의 인격을 갖고 있는 객체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광장에 걸어놓아 차례대로 돌리면서 윤간시키거나, 또는 도를 넘어서는 폭행을 함으로써 눈물을 얻으려는 행태를 보면 그저 기가 찰 뿐이다.(물론 요정에게 동료를 잃어 순수하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감정이란 것은 상당히 오묘해 나 또한 함부로 잣대를 내리기는 어려운 주제이다. 그래도, 적어도 그때 내 친우가 죽으면서 흘린 눈물과 요정들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일들을 당하면서 흘리는 눈물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딱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눈물에 담긴 ‘진심’ 혹은 ‘감정’의 차이라고나 할까. 강제적인 (성)폭행으로 인한 억지가 가미된 눈물에는 ‘천사의 눈물’과 같은 효능을 바라기 요원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요정의 눈물에는 오직 스스로에서 일어난, 그들 본연의 오롯한 감정을 담을 수 있다면 효능을 한번 기대해봄 직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이 기록을 읽고 요정을 가진 사용자들이 노예를 죽이는 것은 그들의 자유지만, 설령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필자에게 칼을 들이미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PS. 요정들도 각기 계급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로서도 한가지 궁금한 점은, 그렇다면 요정의 눈물도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과연 고귀한 요정들의 정점에 서있는 요정 여왕의 진실된 감정을 담을 수 있다면, 그 눈물에 어떤 효능이 담겨있을지 필자는 정말로 궁금한 바이다.
북 대륙의 고명한 탐험가 양기덕(7년차 사용자)의 저서 ‘현재 홀 플레인 에 부는 열풍, 눈물에 관한 고찰’에서 발췌.
*
요정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요정 여왕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우는 요정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불 사이로 드러난 뽀얗고 풍만한 가슴과, 백옥 같은 나신을 보자 절로 호흡을 멈추고 말았다.
마르가리타는 정말이지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흘러 넘치는 기품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1회차 시절 내가 기억하는 일반 요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결했고, 섬세했으며, 아름다웠다.
이윽고 찰랑이던 은발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연한 푸른빛을 띠는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이었다.
“주인님!”
“…….”
“헤에, 주인님 또 모습을 바꾸셨구나. 주인님~. 왜 자꾸 마르를 시험에 들게 하세요~. 마르는요. 이제 절~대 그런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답니다.”
마르가리타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우아한 태도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더니 이내 가슴과 배를 바닥으로 향하고, 양손과 양발을 하나씩 놀리며 내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오기’ 시작했다.
그 충격적인 모습을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1. 이름(Name) : 마르가리타 달란트 비트라이스
2. 클래스(Class) : 요정의 여왕(Tribe, Queen Of Elf,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요정의 숲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날개가 잘려버린 요정의 여왕 · 위그드라실(Yggdrasil)
6. 성별(Sex) : 여성(788)
7. 신장 · 체중 : 171.8cm · 48.7kg
8. 성향 : 음란 · 복종(Obscene · Obey)
(근 300년에 이르는 동안 육체적, 정신적으로 수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고결하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여왕이었다고는 하지만, 사악한 마법사의 지속적인 세뇌 및 조교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본연의 정신은 붕괴되어, 과거 요정들의 여왕과 영웅으로써의 풍모는 모조리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사악한 마법사에게 당해버린 마르가리타의 현재 상태는 한마디로 내외로 ‘부서져버렸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본래의 이지를 상실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은 마법사의 입맛에 맞춰 다시 ‘만들어진’ 상태입니다.)
(마르가리타는 현재 자신에게 허락된 세월을 초과한 상황입니다. 고대 마법의 대규모 결계와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마법사의 모종의 노력으로 억지로 수명을 늘리고는 있지만,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마르가리타의 육체는 살아있지만 이미 사망한 것과 다름 없는 모순적인 상태입니다.)
(마르가리타의 목숨을 연장해주던 고대 마법이 끊겼음을 확인했습니다. 그 동안 억지로 그녀의 수명을 이어온 행동이 독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3시간 후 그녀의 육체 능력치가 0이 되는 순간, 요정 여왕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미 육체가 죽어버린 상태라 엘릭서 한 병을 사용해도 현재 육체 상태의 ‘모순’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끊어진 마력이 다시 이어진다면 약간의 수명 연장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 동안 도대체 어떤 일들을 당했길래 이런 엄청난 정보들이 뜨는 걸까. 순식간에 허공을 빽빽이 메우는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언제 다가왔는지 마르가리타의 늘씬한 등이 보였다. 원래는 열두 쌍의 날개가 있어야 할 텐데, 모조리 뜯겨버린 듯 단 한 쌍의 날개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곧 죽는다는 소린가.’
“왕왕! 주인님 어서 오세요. 왕왕!”
“뭐…?”
충격적인 언행이 이어지는 동안 마르가리타는 바로 내 앞에서 기어오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치 주인이 오자 반갑다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호호….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 이 개 좆 같은 자식이…!”
“흐으…. 흐으으…!”
문득 양 옆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지간하면 내 앞에서 욕설을 자제하던 고연주도, 구토를 하는 와중에도 으르렁대는 이유정도. 둘은 한 여성을 망가뜨려버린 마볼로의 행태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요정 여왕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 앞의 마르가리타는 비참했고, 처참했다.
방 내부를 순식간에 채워가는 살기를 느낀 듯 마르가리타는 “히익.” 하고 울었다. 그리고 양 팔로 내 다리를 덥석 안으며,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울먹였다.
“주, 주인님.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마르는요 주인님께서 시키신 것들을 충실하게 했단 말이에요. 보세요! 유니콘 고기도 절반이나 먹었고요, 물도 싹싹 핥아 먹었어요. 그리고 주인님께서 주신 사탕도 전부 먹었단 말이에요. 그러니 벌을 내리지 마세요. 흑…. 잘못했어요….”
마볼로는 확실히 미치광이에 변태였다. 요정에게 유니콘의 고기를 먹였다. 물은 인간들의 피를 말하는 것 같고 사탕은…. 아마 그녀의 수명을 억지로 늘리던 마볼로의 모종의 연구물이 아니었을까? 다만 그 재료는 아마 이곳에 널브러져있는 수많은 것들이 주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내 다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비비는 마르가리타를 살며시 떼어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 후, 그녀의 귓가에 똑똑히 들리도록 마력을 담아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당신이 과거 홀 플레인 을 구원한 영웅들 중 한 명이며, 요정의 여왕으로 알려진 마르가리타가 맞습니까?”
“웅…? 아, 네! 마르는요오. 예전에 주제도 모르고 그렇게 불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오만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주인님.”
“…요정 여왕. 예전에 당신을 구속했던 마볼로 드 아일라이트는 현재 사망한 상태입니다. 이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
한마디씩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해주자 약간이나마 마르가리타의 표정이 바뀌었다. 해맑던 표정이 사라지고, 눈매가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나 여전히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나와 그녀의 시선이 중간에서 얽히고 곧이어 고운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아….”
“정신이….”
“아이참~. 속지 않는다니까요 주인님!”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마르가리타는 배시시 웃고는 이내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요염한 표정과 함께 바닥에 발랑 드러눕고는, 새침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주인님은 정말 아직도 저를 시험하고 싶으신 것 같아요.”
“…….”
“걱정 마세요. 그렇다면 마르가 직접 주인님에 대한 복종을 증명해드릴게요. 마르는요~. 실은 오늘도 주인님을 떠올리며 힘차게 자기를 위로를 했답니다. 그 증거를 보여드릴게요.”
말을 끝마치자마자 마르가리타의 손이 그녀의 소중한 곳을 더듬는다. 이윽고 꽃의 내부를 파고들어간 그녀의 집게 손가락은, 안에서 얇고 기다란 원뿔형 기둥 하나를 쑥 뽑아내었다. 기둥의 겉면에는 끈적끈적한 액으로 점철되어있었지만 은은한 빛이 어린 상태였다. 그것은 유니콘의 뿔이었다.
“…쯧.”
“수현. 제가 보기엔…. 이미 끝난 것 같아요.”
가만히 혀를 차고 있자, 옆에서 침중한 기색이 담긴 고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말이 맞다. 처음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만해도 남아있었던, 여왕으로서의 기품과 고아함은 눈 녹듯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 내 눈앞에는 마치 퇴폐적인 창녀처럼 욕망을 갈구하는 구제 불가능한 요정만이 남아있을 뿐. 다시 살릴 수도 없고, 이 상태로는 동료로 만들 수도 없다.
‘그렇다면….’
잠시 동안 마르가리타의 처분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한 발짝 앞으로 걸었다.
“흐응. 주인님. 있잖아요 이상하게 아까부터 마르의 몸이 식어가는 것 같아요. 막 숨도 차고, 자꾸만 졸려요. 어서 주인님이 뜨겁게 만들어주세요.”
“당신은 요정들의 여왕입니다.”
“네! 마르는요. 주인님을 위해 언제나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는 애완용 암X입니다!”
마치 교육을 받은 듯 마르가리타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결국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마음을 정한 이상, 이제는 재빠르게 행동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다.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일 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거기에 걸어보고 싶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니까. 게다가 그녀는 곧 죽을 운명이었다.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이대로 내버려두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여기서 깔끔하게 끝내주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어디까지 저를 부끄럽게 만드실 거예요. 히히. 그래도 와주셨으니 기뻐요. 그럼 부디 이 마르의 음란한 구….”
“그만.”
헐떡이며 스스로 허벅지를 좌우로 벌리던 마르가리타는, 내 말에 곧바로 행동을 멈췄다. 나는 침착하게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 후, 요정의 심장이 있는 쪽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위 마디에 말캉한 가슴이 느껴졌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 상태로, 나는 심장에 잠들어있는 화정을 서서히 일깨웠다.
“헤헤, 주인님. 오늘따라 너무 상냥하세요.”
“…그래요.”
“이런 주인님도 좋지만 조금 더. 아니, 많이 격렬하게 해주셔도 좋아요.”
“…….”
할 수만 있다면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차분히 힘을 이끌어 마르가리타의 내부에 투사했다. 그러자 화끈한 기운이 그녀의 내부를 조금씩 잠식하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파괴를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은 똑같지만, 나는 화정에 전에 없이 강하게 기원했다. 그녀의 내면을 잠식한 모든 악의적인 것들을 불태워달라고. 그리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기억들도 모두 불태웠으면 좋겠다고.
“아 따뜻해…. 주인님 이건 뭐에요…?”
“…….”
“너무 따스하고…. 포근하고…. 이건 마치….”
“…마치?”
“꼭 숲……………………. 어…?”
비로소 화정이 온 몸을 잠식하고 뜨겁게 불타오르는 순간. 마르가리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뒷목을 받치며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마르가리타 달란트 비트라이스. 요정의 숲의 수장이며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가장 고귀한 요정.”
“어…. 어…. 어…?”
“과거 당신은 홀 플레인 을 구원한 영웅 중 한 명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그것을 보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 기록이 남아 회자되고 있는 당신의 업적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어…. 응….”
마르가리타는 이미 수명을 다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을 마볼로가 억지로 이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강제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짓거리는 99%가 그릇된 방법일터. 요정의 순결한 몸을 사도의 방법으로 일구려고 했으니 ‘모순’이라는 정보가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 상태를 유지하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방 내부는 고요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간혹 마르가리타의 앓는 소리가 간간이 허공을 울릴 뿐.
화륵, 화르륵.
드디어 몸 내부를 깨끗하게 정화했는지, 어느새 몸의 외부까지 돌출되는 맑은 불꽃이 보인다. 300년간 쌓여진 악의였다고 해도 화정의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마르가리타의 수명을 이어주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자, 곧이어 서서히 반응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르르…. 사르르….
온몸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온다. 발끝부터 금빛 가루가 휘날리고 있다. 그렇게, 그녀는 서서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듯 소멸의 절차를 밟고 있었다. 애당초 마볼로는 ‘파괴’로 조절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였지만 마르가리타는 ‘정화’로 조절해 최대한 편안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 으.… 아….”
‘아직 반응은 없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르가리타의 전신은 금빛 가루를 휘날리며, 아주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몸은 억지로 정화시켜도, 오랜 세월 동안 망가져버린 정신을 단번에 회복시키는 건 어려운 모양이다. 그녀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앓는 소리만 내는 중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그녀의 귓가에 한번 더 소곤거렸다.
“당신의 약혼자였던 용사 로이드는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
“부디 살아생전 못다 이룬 꿈을 하늘에서나마 다시 이루시기를….”
“…….”
‘떠올려라 제발.’
어쩌면 지금 정말로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읽었던 기록을 성공한 사용자는 없었던 걸로 알고 있지만, 그 기록이 100% 바르다고 확신할 수도 없으니까.
그 와중에도 마르가리타의 몸이 사라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발, 다리, 팔 몸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금빛 가루들이 휩싸인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그녀의 가슴 윗부분뿐. 하지만 그것도 어느새 목을 지나고 있는 상태였다.
끝난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다시 화정을 일으켜 몸이 뻐근하긴 했지만, 그래도….
“로…이…드…?”
그때였다. 아쉬운 마음은 남았지만 사실상 포기하고 나가려는 찰나, 미약한 음성이 귓가로 조용히 흘러 들었다. 깜짝 놀라 반쯤 돌렸던 몸을 다시 되돌리자, 마르가리타의 코까지 덮여있는 불빛이 보였다. 하지만 회광반조(回光返照)의 현상인지, 시종일관 흐리멍덩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한 순간 빛을 되찾은 듯 또렷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똑….
마르가리타의 오른쪽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탁탁…. 데구르르….
흘러내린 눈물 한줄기는 곧 하나의 동그란 형태로 모였고,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며 톡톡 굴렀다.
그것은 요정 여왕의 눈물이었다.
확! 사르르…. 사르르….
곧이어 화정이 한번 크게 불타오른다 싶더니, 금빛 가루가 춤추듯 주변으로 크게 흩날린다. 더 이상 마르가리타는 보이지 않는다.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통 받았던 요정 여왕은 성의 지하에서 본래의 소멸을 맞이했다.
‘그 양반 말이 맞았군.’
한동안 그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는 담담히 땅에 떨어진 것들을 주웠다. 오른손에는 유니콘의 뿔을. 왼손에는 요정 여왕의 눈물을.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그것은, 딱딱한 고체의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화정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을 쥔 왼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몸을 돌리자 숙연한 얼굴로 서있는 두 명의 여성이 보인다. 그런 그들을 지나치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올라갑시다…. 아.”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문득 생각이 미쳐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하얀색 신수 한 마리가 예의 처참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저것도 가져가야겠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로유진입니다.
먼저, 이번 회로 불쾌감을 느끼셨을 독자 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넙죽. _(__)_ 나름 심하다 싶어 어제 경고 문구를 썼었는데, 달아주신 코멘트들을 보고 제가 조금 울컥했나 봅니다.(?) 실은 다 써놓고 보니 너무 심하다 싶은 감이 있어서 중간 부분을 아예 쳐냈습니다.(정확히는 수현이 “그만.” 이라고 말하지 않았지요.) 원래는 여왕과의 대면이 2회 정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냥 1회로 압축해서 올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유. 이제 감옥을 나갈 차례네요. 얻을 것은 얻고, 풀 것은 풀어야겠죠. 감사합니다. _(__)_
『 리리플 』
1. 미월야 : 1등 축하 드립니다. 하하. 이제 슬슬 메모라이즈도 1등을 도맡으며 하실 수 있는 분이 나오셨네요. 개인적으로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번 회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2. 하루지온s : 암 쏘 쏘리 죄송합니다. _(__)_ 많은 고민을 했지만 초반 계획했던 대로 나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LumpOfSuger : 그래서 오늘은 절단을 없앴습니다. 하하하.
4. 엘JH : 다음 회 여기 바치겠습니다! 이얍!
5. 파뱐 : 그러고 보니 멕시코는 갱? 이라고 해야 하나요? 멕시코 카르텔? 하여튼 그런 범죄가 정말 엄청나게 많이 일어난다고 본 것 같아요. ㄷㄷㄷㄷ.
6. 현오 : 두, 두루치기! 저도 두루치기 정말 좋아합니다. 고기에 두부에 김치 얹고 먹으면 정말로 꿀맛이죠. 🙂
7. 사룸 : 1회 차에서는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즉 결국 그녀의 생명을 이어주던 ‘독’들이 터져버린 셈이죠.
8. NinthSky : 음, 참다 참다가 결국 유니콘의 시체에서 터졌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9. 유리켄느 : 하하, 수현앓이를 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다니. 의외라고 생각되면서도 많이 기쁘네요. 메모라이즈에서야 주인공 보정(?) 때문이지만, 실제로 좋게 생각해주시는 분들이 많을줄은 몰랐어요. 🙂
10. GradeRown : 많은 분들이 윌사쿠, 윌사쿠 하시길래 뭔가 했더니 그것이었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예전에 노블에서 재밌게 읽던 소설이 있었는데요. 막 이프리트 술탄도 나오고 흡혈귀 베르치카? 갑자기 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요. ㅋㅋ. 거기서 작품 설정에 나오는 윌사쿠 말씀하시는 줄 알았어요.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