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23
00322 無 =========================================================================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비비앙을 응시했다. 그녀는 기필코 성공해 보이겠다는 자신감을 한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비비앙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고질적인 체력 문제를 일부 해소해준 것도 그녀 덕분이 아니던가.
나는 위그드라실의 과실을 만지작거리다가, 기꺼운 마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법인데, 비비앙. 이제 구미가 당기는 말도 할 줄 알고.”
“응? 뭘 당겨? 구미?”
“관심이 생겼다는 소리야. 그런데 말이야…. 백서연 한 명에게 굳이 16병이나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요정 여왕도 8병으로 충분했다고 했잖아.”
“아. 어떻게 보면 이 물약은 양날의 검이라고 볼 수 있거든. 정말 만에 하나의 경우지만. 백서연이 이 물약을 마시고도 저항한다면, 그때는 웬만한 방법으로는 타격이 어려워질 수도 있어. 아까 내성 얘기해줬지?”
“그렇군. 그럼 질문 하나 더. 혹시 물약을 제외하고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전에 네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 예를 들면 그때 마볼로처럼….”
곁눈으로 오르도를 슬쩍 흘겨보며 운을 띄우자, 비비앙은 밝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뭘 생각하는지 알겠다. 김수현. 미안하지만 정신을 직접 조작하는 건 지금 내 실력으로는 불가능해. 아니, 그건 대 마법사라 불린 마볼로도 실패한 과정이라고.”
“그래? 그건 좀 아쉽군.”
“그래도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이 지팡이에 잠들어있는 힘을 사용하면 여기에 나와있는 재미있는 것들을 몇 가지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거든. 아무튼 방법은 많아. 나는 어디까지나 제안하는 입장이니까, 선택은 네 몫이야. 김수현.”
그래. 결국 선택은 내 몫이었다. 문득 비비앙에게 얘기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서의 영향인지 원래 성격이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백서연의 정신을 철저히 망가뜨릴 생각인 것 같았다.
아무튼, 비비앙의 말은 아직 계획 단계에 불과했다. 실제로 행동에 들어가야 구체적인걸 정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마음을 정한 나는, 이만 면담을 끝내고 회의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좋아. 결정했다. 네 계획을 승인하도록 하겠어.”
“좋아 좋아. 아주 좋은 선택이야.”
“조만간 지하 연무장에 감옥을 하나 건설할 생각이다. 그곳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마. 그리고 인력이든 재료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아낌없이 지원해주겠어.”
“후. 이제야 김수현이 내 진가를 조금 알아보는 것 같군.”
비비앙은 두 팔을 겨드랑이 밑으로 마주 끼고는 잘난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솟구치는 가학성을 억누르며,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 이 일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해줄 테니, 잘 해보라고.”
“걱정 붙들어 매셔.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실망시킨 적 있었어?”
없다. 내 생각에도 부랑자들에 대한 일은 비비앙이 가장 적합한 적임자였다.
나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자신감에 취해있던 비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가려고?”
“응. 이제 회의에 들어 가야 할 것 같아서. 너는 들어오지 않아도 좋아. 당분간은 일절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일에만 몰두하라고.”
“아….”
“왜?”
그 순간, 방금 전까지 거만했던 비비앙의 얼굴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그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시무룩한 낯빛으로 마주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비비앙?”
“알았어…. 그럴게….”
비비앙은 주섬주섬 물건을 담으며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시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이윽고 회의실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미약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었다.
“바보. 건드려도 좋은데….”
‘…….’
과연 비비앙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
“그럼 회의는 이것으로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아까 적어놓은 기록을 정리하며 회의가 파했음을 알렸다. 회의라고 해봤자 별 내용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부랑자들의 문제를 처리했으니, 나머지는 크게 어렵지 않은 일들이었다.
“다들 아직 피로가 남아있겠지만, 주변 상황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머셔너리 또한 이러한 상황에 발맞춰 단단히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3층 회의실에는 비비앙과 신재룡을 제외한 전원이 앉아있었다. 클랜원들이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다가, 나는 안현과 정하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둘은 제가 개인적으로 맡긴 일들이 있을 겁니다. 각자 그것들에 대해 고민해보시고, 오늘 안으로 세부적으로 조정할 사항들을 말씀해주세요.”
“예 클랜 로드. 그런데 세부적으로 조정할 사항들이라면 어떤걸 말씀 드려야 해요?”
“안현 네가 장비 결산이었지? 그걸 혼자 할 수는 없잖아. 구즈 어프레이즐도 필요하겠고, 도와줄 인원도 필요하겠지. 그런걸 나에게 말하라는 뜻이야.”
“아하.”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안현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음흉한 눈빛으로 고연주를 쳐다봤지만, 이내 뭔가를 봤는지 흠칫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만 해산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나가보시고, 영감님은 잠시….”
“이곳에 남아주세요.”라고 말하려는 찰나,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테이블 맨 끝에서 앉아있는 백한결이 손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이 공개적으로 발언권을 요청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나는 얼른 일어나라고 손짓해주었다.
“사용자 백한결.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크, 클랜 로드님. 죄, 죄송합니다.”
백한결은 벌벌 떨면서 일어서고는 대뜸 사과부터 했다. 낯빛이 하얗게 질려있는 게 단순히 긴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회의 내내 좌불안석하는 태도를 보여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었다.
“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제가…. 어제 말씀 드렸어야 했는데…. 모르고 까먹고…. 형님을 만나니 너무 반가워서 그만….”
“백한결. 진정하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그, 그게….”
횡설수설. 백한결은 클랜원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더욱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말에 나는 애꿎은 테이블만 두드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열 번 정도 두드렸을 즈음, 비로소 다시금 녀석의 말문이 열렸다.
“실은 형님을 찾으러 클랜원분들이 도시를 떠날 때…. 이스탄텔 로우에서 약간의 도움을 줬어요.”
“음. 그래. 사용자 정하연이 요청을 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클랜 하우스를 보호하는 인원을 보내줬다고 했지.”
이미 정하연에게 들은바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이 건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해야 하기에, 조만간 이스탄텔 로우에 방문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예…. 그런데 돌아오시기 일주일전에, 하연이 누나한테 수정구로 연락을 받았거든요.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그래서.”
“그래서 기쁜 마음에 그때 보호하러 온 분에게 말씀을 드렸어요. 마침 클랜 로드님과 잘 아는 사이라고 하셔서…. 그런데 그분이 다음날 오시더니…. 그게….”
“백한결. 말 더듬지 말고.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뭐가 문제인지 본론만 말해.”
결국 나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이기지 못해 딱딱한 목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원래 이런 성격인건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척하면 바로 알아듣는 비비앙과 대화하다가, 백한결의 말을 듣자니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백한결 또한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움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스탄텔 로우에서 클랜 로드님께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어요. 돌아오시면 부랑자들을 데리고 바로 이스탄텔의 클랜 하우스로 오라고 했어요. 그걸 제가 어제 말씀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깜빡 잊고…. 정말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바로 궁금함이었다. 일주일전에 통신을 넣었다면 아직 귀환하던 도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탄텔 로우에서 우리가 부랑자들을 붙잡은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네게 말했다는 건데.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그건 아마 한결이가 얘기했을 거예요. 제가 클랜 로드와 만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상황도 같이 설명해주었거든요.”
“사용자 정하연이요?”
“네. 한결이가 자세히 알고 싶다고 해서….”
대답은 정하연에게서 나왔다.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백한결. 그럼 네가 그 사실을 알려주니 경호해주러 온 인원이 그렇게 말했어? 한치의 틀림도 없이?”
“예…. 너희 클랜로드에게 부랑자들 데리고 우리 클랜 하우스로 오라고 전해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 그리고 곧 소집령을 가질 계획이니 거기에도 참석하라고….”
“소집령? 도대체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군데?”
“처형의 공주라고….”
나는 그제야 상황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한소영은 실수할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게 말할 사용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혜림이라면, 그녀의 성격상 앞뒤 구분 못하고 툭 내뱉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정을 모르는 애들은 그저 멀뚱한 얼굴로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지만, 연차가 있는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그 사람 좋은 신상용마저도 불쾌한 빛을 드러내고 있을 정도였다.
일단 자세한 사정을 알아봐야겠지만, 그래도 머셔너리는 지금껏 이스탄텔 로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연혜림의 의도치 않은 말실수로 클랜원들이 이스탄텔 로우에 반감을 갖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해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유하게 넘길 수 있을까 고민이 들던 찰나였다.
똑똑.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살며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메이드 복과 가터벨트를 차고 있는 고용인이었다. 그녀는 회의실에 감도는 사늘한 분위기에 놀랐는지 몸을 움츠렸다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클랜 하우스에 사용자 한 분이 방문하셨습니다. 의뢰가 있다고, 클랜 로드를 뵙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
“흐흥. 흐흥흐흥.”
이스탄텔 로우의 클랜 하우스.
박다연은 휴게실 테이블에 진득하니 앉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뭔가를 열심히 적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따금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면서도 열심히 손을 놀리더니, 곧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깃펜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기록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려다보며 말했다.
“좋았어. 이 정도면 완벽해. 후후.”
“완벽하긴 뭐가 완벽해.”
팍!
“어, 어?”
그때였다. 박다연의 등 뒤로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녀가 들고 있던 기록을 누군가 순식간에 빼앗아 들었다. 박다연은 반사적으로 기록을 잡으려고 손을 휘저었지만, 상대 역시 하늘 높이 기록을 들고 있었다.
한없이 까치발을 들던 박다연은, 결국 손이 닿지 않은 것을 인정했는지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 어느새 눈앞에 서 있는 연혜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뭐에요. 언제 온 거예요?”
“방금. 그런데 뭐야, 별 내용도 없네. 하도 몸을 꼬길래 난 또 연애 편지인 줄 알았네. 친애하는 머셔너리 로드에게. 이거 보고 잔뜩 기대했는데.”
“연애 편지는 무슨. 곧 개최할 소집령에 대한 초청장이에요. 이리 줘요.”
“그런 거 같더라. 그런데 이거 보낼 필요 없어.”
연혜림은 기록을 휙 날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윽고 종이가 날아간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박다연은 중간에 살짝 얼굴을 돌리며 되물었다.
“왜요? 이거 소영이 언니가 직접 시킨 건데, 취소 지시 내려왔어요?”
“내가 말 안 했던가? 머셔너리한테는 내가 예전에 말해놨는데.”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박다연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아. 저번에 유니콘도 볼 겸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에 갔었잖아? 그때 그 신의 방패라는 꼬맹이가 머셔너리 로드의 소식을 말해주더라고. 그래서 그때 말했지. 김수현이 돌아오면, 부랑자들도 한 번 데려와 보고 소집령도 참가하라고. 그렇게 전해달라고 했어.”
“뭐…. 뭐라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구구절절 써놓은 기록은 보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호호. 나 잘했지?”
연혜림은 입 꼬리를 씩 끌어올림과 함께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박다연의 눈썹이 세게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입술이 크게 떼어졌다.
“야 이 멍청이야아아!”
============================ 작품 후기 ============================
곧 개강입니다. 하하. 괜히 마음이 설레네요. 이번 방학 때 마음먹은 다이어트는 결국 실패했네요. 흑흑. 앞으로 학교 + 연재 + 이북 + 다이어트를 어떻게 병행할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숨이 막혀옵니다. ;ㅇ;
『 리리플(320회) 』
1. 우사인볼트 : 1등 축하합니다. 하하. 원래 김유현과 김수현은 그런 관계였습니다. 수현이는 어렸을 때 참 순수한 아이였거든요. 🙂
2. 아톰 : 그 모습 좀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물음표와 느낌표. 킵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
3. 피빠는소녀 : 이번 전쟁 파트에 나올 예정입니다. 과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후후.
4. Astrain : 구예지, 조승우. 모두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혹시 구예지가 마음에 드셨나요? 😀
5. 작은꿈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_(__)_
『 리리플(321회) 』
1. 마황강림 : 1등 축하합니다. 그리고 첫 코멘트 이시군요! 미월야 님이 은퇴 선언을 하신 이후 참 여러분을 뵙는것 같네요. 하하.
2. 엿같다 : 의도한 내용입니다. 그 정도의 혼동이 일정도로 애매한 캐릭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
3. 랜슬럿 듀 락 : 아마 1병만 마셔도 반응이 제법 괜찮을 겁니다. 이미 구상돼있어요. 후후.
4. 파뱐 : 그렇군요. 좋은 것 하나 배웠습니다.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5. 카바이리 : 현재 모니카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6. 감자띱 : 많이 느리다고 느껴지시는 모양이네요. 알겠습니다. 중간중간에 생략해도 될 과정은 한 번 생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7. dydy0114 : dydy0114 님은 아기 유니콘의 이미지를 부수셨습니다. ㅜ.ㅠ 엉엉.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비평, 질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