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56
00355 바바라 =========================================================================
우에엥. 우에에엥.
세상에, 검이 운다.
한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교차했다. 그러나, 나는 일단 재빨리 떨어뜨린 검을 집어 들었다. 다른 사람의 검을 떨군 것이 실례에 해당되는 행동이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기도 했다.
이윽고 나는 왼손에 남다은의 검 ‘설아’를 들었고, 오른손으로 검신을 슬슬 보듬었다. 마치 예전에 안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던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쓸어 내린다.
우웅…. 웅….
그렇게 한 열 번 가량 쓰다듬었을까? 아까부터 구슬프게 울리던 검음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더욱 부드럽게 검신을 쓸어 내렸다.
“…….”
“…….”
우웅!
문득, ‘설아’가 방긋 미소 짓는듯한 착각이 든 것은 왜일까?
‘설마 내 손길을 느끼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설아’의 직접적인 표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까는 처량한 울음소리를 내었다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검신을 부르르 떠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잡다한 것을 제외하고, ‘설아’는 주인이 확실하게 있는 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나로서는 의도치 않은 상황이라 난감할 수 밖에 없다.
어찌됐든, 나는 계속해서 검을 쓸어 내리던 도중 멍하니 고개를 들어 남다은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내리꽂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니…. 진짜 나보고 뭐 어떻게 하라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우웅~.
‘설아’는 오직 청명한 검음을 흘릴 뿐이었다.
*
남다은의 말대로 저녁에는 ‘조’에 참가한 인원들의 회합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해프닝을 끌어안은 채, 그녀와 함께 회합에 참가했다.
그렇게 특별한 사용자들의 회합이 시작되었지만, 내용에 딱히 특별한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조’를 대표하는 인물로 선발된 남다은의 간략한 인사와, 참가한 인원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 전부였다.
비록 인원은 소수일지라도 하나하나 개성이 강한 사용자들의 모임이었다. 아니, 자부심이라고 해야 맞을까?
남다은은 그러한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는지, 회합 내내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전쟁 동안 잘 부탁한다.”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말투로 모두에게 말했을 뿐.
이 다음은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보였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회합은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로 흘러갔다.
물론 대화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 중 처음에는 바바라에 관한 말들이 가장 많았지만 이내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는지, 지금은 부랑자들에게로 화제가 옮겨간 상태였다.
“어휴. 언니. 저는요, 밖에 매달아 논 부랑자들이 진짜 마음에 안 들어요. 저게 지금 뭐 하는 짓거리인지도 모르겠고….”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눈살을 잔뜩 찌푸린 ‘간호사’ 강예빈이 보였다. 그녀는 고연주의 옆에 착 달라붙은 채 한창 불만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알아낼 정보 다 알아냈으면 그냥 깔끔하게 처리하면 좋잖아요. 뭐 좋은 게 있다고 저렇게 중앙에 덩그러니 매달아 놓았는지…. 볼 때마다 밥맛이 뚝뚝 떨어지는 게, 영 별로네요.”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음침한 목소리가 갑작스레 강예빈의 말에 끼어들었다. 목소리 톤이 굵직한 걸로 보아 고연주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대답의 주인공은, ‘저주술사’ 강태욱이었다.
강예빈은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상대를 확인했는지 아니꼬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 아~. 그래요. 네 취향에는 저런 게 딱~. 맞으시겠지요.”
“말이 조금 심하군.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분위기? 그건 또 무슨 헛소리세요?”
“…흥. 널 이해시킬 자신이 없어서. 관두자. 기껏 이야기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 같으니….”
“뭐라고요?”
강태욱의 눈에 일순 한심하다는 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버린다.
‘분위기라.’
하지만 나는, 강태욱의 말에 담긴 뜻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요컨대, 말 그대로 분위기의 차이였다. 도시에서부터 분명히 전운은 감돌았다. 그러나 이효을이 말했던 ‘광고’가 너무 과대한 효과를 내버린 탓인지, 사용자들이 승리에 대한 기대치는 필요 이상으로 높아진 상태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부랑자들의 잠입을 사전에 차단한 것은 동부 사용자들에게 이로운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약간이라고 해도 상대에 대한 경각심을 확실히 일깨워주었을 테니.
도를 넘어선 긴장은 좋지 않다. 그러나 목숨이 오고 가는 전쟁에서 적에 대한 철저한 경계심은 필수로 갖춰야 할 사항이었다.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가만히 앉아있는 강태욱을 흘끗 살펴보았다.
1회 차에서 나와 강태욱은 어느 정도의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물론 아주 친하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한때 ‘부랑자 사냥꾼’으로 같이 활동한 전력이 있었다. 당시 포획한 부랑자들을 상대로 인체 실험이나 이종 교배 등, 굉장히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기억이 제법 강하게 남아있다.
우우웅….
“그래 그래.”
너무 깊게 빠져있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손을 멈췄던 모양이다. 아래서 자그맣게 들려오는 검음에, 나는 다시금 손을 놀려 검신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다은이 미안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김수현. 김수현.”
“응?”
방정맞지만, 낭랑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비비앙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요즘 신상용 못 봤어?”
“신상용? 근래에는 못 봤는데. 왜?”
“아. 내일 아니면 모레에 바바라에 도착한다잖아. 그래도 스승 된 도리로써 한 번 찾아 가는 게 좋겠다 싶어서.”
“찾아가면 되잖아.”
“하지만 갈 때마다 보이지 않는걸. 일부러 피하는 건가 생각도 들고….”
비비앙은 약간은 풀이 죽은듯한 목소리로 끝말을 흐렸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에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자리를 피한다고?’
“그럼 내가 한 번 찾아가볼까?”
“어? 그래도 상관없긴 한데…. 못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리고 시간도 애매하잖아.”
내 제안에 비비앙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회합은 거의 끝난 상태였고, 사정상 자리를 비운 사용자들도 한두 명은 있었다.
“없으면…. 글쎄. 아무튼 밤이라고 딱히 못 만나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한 번 가볼게.”
“후유. 응. 그래 주면 고맙고. 하기야 신상용도 설마 너를 피하지는 않겠지.”
비비앙의 한숨에 나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곤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아차. 김수현 잠깐만! 한 가지만 더.”
“?”
“이건 개인적인 호기심인데, 아까부터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응? 내가 뭘.”
비비앙은 대답 대신 시선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눈길은 왼손에 쥐어진 ‘설아’와, 검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꽂혀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오늘 날씨 좋네. 하늘도 창창하고. 그렇지 않아?”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리고 지금은 밤이라고.”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곧바로 검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아까부터 보고 있는 것 같으니, 알아서 찾아가겠지.
“네 말을 들으니까 신상용씨가 조금 걱정이 되네. 지금 바로 가봐야겠다. 너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으, 응. 고마워. 그런데…. 김수현? 김수현!”
등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빠른 걸음으로 막사를 벗어났다.
‘젠장. 이게 무슨 창피야.’
나는 속으로 강하게 투덜거리며, 막사를 나오자마자 바로 제 3제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신상용은 레어 클래스 ‘키메라 연금술사’이기는 해도, 일단은 마법사 클래스로 편성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신상용을 만날 수 없었다. 보초에게 물어 막사를 찾을 수는 있었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심지어 같은 막사를 사용하는 사용자들까지도 신상용이 어디 갔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들은 말이라고 해봤자 요즘 들어 근심이 많아 보였다는 것과, 밤늦게 홀로 막사로 돌아온다는 것뿐이었다.
이곳 저곳 이 잡듯 뒤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일단은 보류해두기로 했다. 막사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내일 따로 만나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대로 돌아가는 건 아쉬운 마음이 없잖아 있어, 꿩 대신 닭이라는 마음으로(?) 김한별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물어 물어 김한별의 막사를 찾아간 결과, 나는 뜻밖의 인물과 조우하고 말았다.
“어머? 머셔너리 로드?”
“어. 당신은….”
“여기는 웬일이세요?”
김한별의 천막 앞에는, 타로 카드 마술사이자 제 3제대장인 선율이 서 있었다.
*
제 3 제대 장, 타로 카드 마술사의 개인용 막사. 나는 선율의 안내에 따라 중앙에 비치된 테이블 의자에 앉았고, 그녀와 마주보게 되었다.
막사는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그러나 주변에 놓인 라이트 스톤들이 미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희미한 불빛 사이로 선율의 모습이 어렴풋이 시야에 잡혔다.
이윽고, 선율의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그렇군요. 클랜원들이 걱정돼서 찾아오셨다 라…. 후후. 성실하시네요. 마침 저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설마 거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괜찮아요. 전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오히려 호감이 가는데요?”
나를 보는 선율의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이 그려진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선율의 복장은 누가 봐도 현대의 마술사를 연상케 할 정도로, 특유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나 여성이라서 그런지 상하의로 어느 정도 노출이 드러난 상태였다.
소담스러운 어깨와 아름다운 쇄골을 드러내는 검은색 란제리 의상. 안이 제법 비쳐서 그런지 가슴 사이의 골짜기도 은근히 드러내는듯한 느낌이 든다. 거기다 아래는 가터벨트 차림을 선보이기까지.
육감적인 매력이 무척이나 도드라진 게, 꼭 팜므파탈의 결정체를 보는 것 같았다.
“음…. 신상용씨라면….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그럼요. 그래도 일단은 제 제대 원인데요. 그리고 머셔너리 분들에게는 모두 관심이 있어서…. 아마 곧 바바라에 도착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많이 떨리는 모양이에요. 생각이 복잡한지 이곳 저곳을 걸어 다니는 것 같은데, 그냥 놔두고 있어요.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내일 직접 만나봐야 알겠지만, 선율의 말대로라면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참 모르겠군.’
처음에는 단순히 허세만 가득한 사용자인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을 관리하는 수완이나 맡고 있는 역할에 대한 책임감등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이 사람에 대한 평가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분이 돌아오시면 머셔너리 로드께서 찾아오셨다고 말씀해둘게요….”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동안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이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져, 나는 먼저 말문을 열기로 했다.
“마탑 로드. 저한테 궁금한 게 있다고 하셨죠.”
그랬다. 나는 김한별 막사 부근에서 제대 원들을 돌고 있던 선율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왕 오신 김에 잠깐 이야기라도 하고 가지 않겠냐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개인 천막에 들어온 상태였다.
“편하게 부르셔도 되요. 그리고 네. 아까도 말했듯이, 머셔너리 클랜원들에게는 깊은 관심이 있어서요.”
선율은 잠깐 생각할게 있는지 입술을 닫았다가 이내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궁금하게 있다고 쳐도….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것들은 아니에요.”
“어떤 것들이 궁금하신지요.”
“그냥 사람 자체가 궁금했을 뿐이에요. 이것저것 호기심이 일었다고 할까? 어떤 사람일까. 해밀 로드의 친동생이라고 하던데 진짜일까?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유적을 발굴할 수 있었을까? 0연차임에도 불구하고 백서연을 포로로 잡을 정도의 실력은 또 뭘까?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던 고연주를 어떻게 잡은 걸까? 정말 소문대로 절륜한 걸까? 등등 말이에요. 바꾸어 생각해보면, 머셔너리 로드는 저에 대해서 궁금한 것들이 없으신가요?”
‘뭐?’
잘 나가다가 갑자기 뭔가 삼천포에 빠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태클을 걸기에는 선율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음…. 중간에 뭔가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지만, 대강은 알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궁금한 게 있거든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입니다만.”
“어머. 그건 그것 나름대로 호기심이 생기는데. 후후. 저에 대해 어떤 것들이 궁금한지 먼저 들어도 될까요? 살짝 야해도 이해할게요.”
“그냥…. 사람이 조금 종잡을 수 없다고 느껴져서요.”
“왜요? 왜 그렇게 느끼셨어요?”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 선율은 빤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회의 때나, 클랜원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나, 아니면 저번에 부랑자들과 대화했을 때나.”
“머셔너리 클랜원들이요? 뭐라고 말했는데요? 모두 다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궁금해요.”
‘궁금한 것도 많은 여성이군…. 하기야, 마법사니까.’
아까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속으로 약간 쓴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먼저 단초를 제공한 것이 나이기에, 나는 최대한 아는 선에서 대답해주었다.
“많이 챙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저것 조언도 많이 해주고, 점도 쳐주고, 수다도 나누고…. 꼭 친언니 같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챙겨주신 것은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아. 하연씨랑 비비앙씨 말씀하시는 거구나. 딱히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둘이 마음에 들어서 친분을 쌓은 것뿐이니까…. 그래서 점도 봐준 거고…. 아.”
그제야 대강의 상황을 이해했는지 선율은 이해가 간다는 눈빛을 보여주었다. 그때였다.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던 그녀은, 갑작스레 뭔가를 떠올린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약 1분의 시간이 흐르고, 선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머셔너리 로드.”
“예.”
“이런 말씀 드리기 조금 그런데…. 그래도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비비앙씨는 거주민이잖아요? 혹시 그녀와 계약 관계에 있나요?”
왜 갑자기 이런 것을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있는 사실대로 대답해주기로 했다. 선율의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 아까부터 대화에 쓸데없는 무게 감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음. 일단은 다행이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계약서를 한 번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침묵. 시원하게 이어지던 아까의 질문에 비해 답답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속으로 참을 인을 되뇌었다.
다행히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주저하는듯한 태도를 보이는 선율이 이내 마음을 정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머셔너리 로드. 조금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말씀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비비앙씨를 조심하세요.”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저번에 비비앙씨의 점을 친 적이 있는데, 결과가 썩 좋지 못했거든요.”
“혹시 점의 내용을 들려줄 수 있습니까?”
조금 외람된 요청일지도 모르지만, 선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얘기를 꺼냈으니 끝까지 하는 게 맞겠죠. 대신 비비앙씨한테는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물론입니다.”
이윽고, 내 확답과 함께 선율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실은 카드 점이라는 게 재미로 보는 것도 있지만 상당히 애매해서요. 그런데, 이게 이따금 아주 기가 막힐 정도의 적중률을 보일 때가 있어요.”
“애매하다는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거군요.”
“맞아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해석 나름이죠. 애당초 재미로 보는 것도 있고요. 그런데 저번에 비비앙씨는….”
그때의 점괘를 떠올리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은 선율은, 그 상태 그대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뭔가 원하는 게 하나 있어요. 소원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요? 그리고, 그 소원은 다른 사람과 아주 강하게 연결되어있고요.”
“소원이라면….”
“그거야 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그리고 비비앙씨의 소원이 이루어졌을 시에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비비앙에게 말을 듣기 직전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멈춘 적이 있었다. 해서, 나는 더욱더 선율의 말에 주의를 집중했다.
“솔직히 여기서부터는 저도 잘 몰라요. 그러니 카드 해석에 따라 그대로 말씀 드릴게요.”
“예.”
“둘 다,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예?”
예 와 예? 두 말은 같지만 어감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져버린다. 선율도 그것을 느꼈는지 다시 눈을 뜨고는 입맛을 다셨다.
“아까 해석은 나름이라고 말씀 드렸죠? 대충 자신을 잃어버린다, 이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지요. 물론 해석은 자유지만, 그렇게 좋은 의미 같지는 않아요.”
‘자,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려?’
불현듯 어렴풋하지만 낯설지 않은 뭔가가 다가오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감이 잡힐 듯 말듯 하다는 소리였다.
“머셔너리 로드.”
그때, 앞에서 선율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품속에서 카드 한 뭉치를 꺼내 들고는, 그것을 살짝 들어올렸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머셔너리 로드의 점도 한 번 봐드릴까요?”
촤르르. 촤르르, 촤르르.
그리고 수준급이면서도, 솜씨 있는 카드 셔플링이 이어진다.
이윽고 간단한 셔플을 마친 선율은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곤 입을 열었다.
“혹시, 궁금하신 거라도?”
============================ 작품 후기 ============================
(오늘 리리플은 하루 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회에 합쳐서 할 생각이오니 독자분들의 양해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독자분들의 배려 덕분에 하루 푹 쉴 수 있었습니다. 일단 카페인 음료는 끊기로 했고, 담배도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원래는 다이어트 때문에 저녁도 거의 안 먹었는데, 앞으로 그냥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으려고요. 하하.
아무래도 1부의 끝을 장식할 전쟁이 다가오다 보니 그전에 이것저것 넣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들이 거의 끝난 상태입니다. 다음 회에는 바바라에 도착할 예정이오니, 조금 늦은 진행이더라도 양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실은 오늘도 하마터면 글을 올리지 못할뻔했습니다. 지금 집에 냉장고가 고장이 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글을 쓰던 도중, 갑자기 집에 정전되더라고요. 확인해보니까 누전 차단기가 내려가 있었습니다.
그대로 쓰던 게 날아가 정신이 붕괴할뻔했는데, 다행히 워드가 자동 저장인가? 복구를 해주었습니다. 정말 십 년 감수했습니다. 하하하.
아. 내일, 금요일은 제가 학교에서 가장 늦게 돌아오는 날입니다. 혹시라도 자정 업데이트에 늦을 수도 있겠지만, 연재는 꼭 이어나가겠습니다.
요즘 들어 자꾸만 독자분들의 양해를 구하는 일이 생기네요.
얼른 정신 차리고 페이스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