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74
00573 철혈(鐵血) 여왕의 분노, 김수현의 환희. =========================================================================
통로는 여전히 어두웠다. 비비앙이 라이트 주문을 밝히기는 했지만, 정통 마법이 전공이 아니라 그런지 동굴에 들어찬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득 하연이 그리워졌다. 하연 정도로 정통 마법에 통달해있는 사용자라면 전투는 물론 이런 때에 커다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기야 안력을 높여 어둠 속의 사물을 인지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아예 시야를 환하게 밝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아무튼, 이제 약 50분 정도 흘렀을까?
중앙 입구로 들어온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선두에서 행군하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괴물들을 보지 못했다. 약간의 이상한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걸어온 느낌으로는 그저 텅 빈 통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계속 행군만 하는 건, 사실 상당히 지루한 일이다. 애들도 조금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10분 전부터 작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애당초 과묵한 성격이라 그런지, 아니면 소곤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선유운이 가끔 못마땅한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한 번 그냥 놔두라는 의미로 머리를 가로젓자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저기, 클랜 로드.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생겼습니다.”
그렇게 지루한 행군을 계속하던 와중, 헬레나가 스리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입은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 아마 정말 궁금한 게 생긴 모양이다. 선유운에게 잠시 선도를 해달라 부탁한 후, 나는 살짝 걸음을 늦췄다.
“뭐가 궁금한데.”
“다름이 아니고…. 지금 인간들은 이 강철 산맥이라는 지역을 넘으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왜 이 강철 산맥을 굳이 넘으려고 하는 겁니까?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말이지요. 이미 인간들은 하나의 대륙에 터전을 잡았고, 살아가는데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을 터인데.”
“그거야 강철 산맥을 넘으면 새로운 대륙이 나오니까.”
“그 새로운 대륙이란 걸 꼭 발견하고 가져야만 합니까? 지금 주어진 것들에 만족할 수는 없는 겁니까?”
흠. 사람이 아닌 용의 입장에서 보면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건가?
처음에 장난스러웠던 헬레나의 목소리는 이어질수록 낮아지고 있었다. 마치 현자에게 답을 구하는 말투처럼. 그러고 보니 어느덧 사샤도 은근슬쩍 다가와 귀를 들이밀고 있다. 나는 잠깐 목을 가다듬은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족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야. 우선 사용자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다소 들어본 바는 있어, 약간이나마 알고는 있습니다.”
“좋아. 일단 홀 플레인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야. 사용자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강해질 의무가 있지. 하지만 그 강해지는 방법이, 크게 보면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거야.”
“자기 수련이라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사용자 정보라는 설정이 들어온 이상 수련으로 강해지는 건 한계가 있어. 그건 스스로의 잠재성에 의해 결정되는 거라 시작부터 선이 그어져 있는 거나 다름없다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고. 밖을 돌아다니며 괴물들을 처리하고, 고대 유적을 발견하고, 탐험해서 좋은 무기나 클래스 금화 등을 얻는 것 등등.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 또한 한계가 있지. 한 대륙에 잠들어 있는 자원이나 성과는 절대로 무한하지 않아. 계속해서 캐고 발굴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라져. 그리고 지금 북 대륙이 바로 그런 포화 상태인데, 사용자들은 계속해서 들어오는 상황이지.”
“호. 그러면 새로 들어오는 사용자들을 위해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는 겁니까?”
“물론 새로운 사용자들을 키울 여건을 마련하는 측면은 있지만, 그게 궁극적인 목적은 되지 않아. 우스갯소리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대륙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도 하거든? 아직 개척되지 않은 만큼, 새로운 대륙에는 아직 손 닿지 않은 값진 자원과 짭짤한 성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대륙이 있는데 사용자들이 가만히 있겠어? 또한 목숨을 걸고 원정에 참가했으니 나름의 특권은 누려야지. 어느 정도 뱃속을 채우고 난 후에야 아마 다른 사용자들에게도 개방이 될 거야.”
“발전을 위해서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지만, 그래도 고생한 이들에게는 우선권을 보장해준다는 말씀이시군요.”
나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와는 관점이 달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이유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요. 왜, 그러니까 왜 꼭 이 강철 산맥을 넘어야 하는 겁니까? 새로운 대륙이라면 북쪽으로도 개척되지 않은 지역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런 데는 이런 대규모 원정대를 편성하지 않는 겁니까?”
헬레나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뜨끔해지는걸 느껴야만 했다. 돌연 주변이 고요한 게 모두가 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다. 별안간 말을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확실성이 없으니까.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안되니까.”
“확실성?”
“지금으로부터 8, 9년 전 바바라도 미개척 지역이던 때가 있었지. 지금 강철 산맥과 같이 중앙의 숲을 통과해서 바바라를 공략했고, 이후 다른 도시들도 발견해서 북 대륙이라는 하나의 터전을 마련했어. 그 공략하는 과정에서…. 정확히는 바바라에 있던 고대 도서관에서 아틀란타라는 새로운 대륙이 있다는 기록을 발견한 거야. 그에 반해 북쪽의 미개척 지역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었고.”
“과연. 확실성이란 그런 뜻이었군요.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그 아틀란타라는 대륙도 언젠가는 포화 상태에 이르겠지. 그러면 우리는 또 새로운 대륙을 찾아야 할 테고. 과연 또 다른 새로운 대륙의 기록이 아틀란타에 있고 없고를 떠나서, 문제는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 북 대륙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야.”
“하나가 아니다?”
“우리 북 대륙은 강철 산맥을 남진하면 아틀란타라는 새로운 대륙이 나오잖아? 다른 대륙도 똑같아. 동 대륙이 불모의 황야를 서진하면 플로렌스, 서 대륙이 서리 협곡을 동진하면 아이리스, 그리고 남 대륙이 오크 성을 북진하면 라그나로크라는 새로운 대륙이 나오지. 그러면 생각해봐. 이렇게 각 대륙이 현재 위치한 지점의 반대 방향으로 계속 밀고 간다면, 종래에는 어떻게 될까?”
“…서로 부딪치게 되는군요.”
정답이었다. 정확히는 테라라는 마지막 대륙을 두고 경쟁해야 하지만, 그것까지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다행스럽게도 헬레나는 충분히 호기심을 해결했는지 더는 묻지 않았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홀가분한 기분입니다.”
…홀가분한 기분이다?
이윽고 헬레나는 약간은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헬레나는 왜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한 걸까?
홀가분한 기분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마지막에 보인 쓸쓸한 기색의 의미는 무엇일까?
“클랜 로드!”
그러나 미처 깊숙이 생각할 틈도 없이 선유운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 생각을 접고 선두로 다가가자 걸음을 멈춘 채 우뚝 서 있는 선유운이 전방을 가리켰다. 나는 곧바로 정지 신호를 보낸 후 선유운을 가리키는 방향을 유심히 살폈다.
너무 이야기에 빠졌던 걸까. 잠시 지루한 기분은 잊을 수 있었지만, 어느덧 전방에는 탁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어느 정도 거리가 남아있었지만, 이제 거의 통로의 끝에 다다랐는지 새로운 입구가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안으로, 무언가 꼿꼿이 선 채로 우리를 마주보고 있다.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어떻게 보면 사용자 같기도 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허수아비 같기도 했다. 안력을 한껏 높여도 이 거리에서는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쿵!
그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울리는 소리에 이어, 꼿꼿이 서 있던 것들 중 하나가 맥없이 무너졌다. 그 순간 눈동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내 클랜원들이 재빠르게 모이는 기척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무검을 뽑았다.
…적어도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하나가 무너지는 순간, 어디선가 검은 그림자가 재빠르게 입구 너머 공간을 스쳤다는 것을.
“수현. 그림자를 보내볼까요?”
“안개화로 선 진입 할 수도 있다.”
고연주와 사샤가 동시에 말했다. 그러나 나는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방금 마력 감지를 최대한으로 높여 돌렸는데도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마?
“바로 진입하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후, 나는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겨 통로를 통과했다. 그렇게 약 5분 가량을 빠른 걸음으로 걷자, 곧 입구 너머의 너른 공동에 다다를 수 있었다.
새어 나오는 탁한 불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벽에 걸려있는 횃불이었다. 넓이는 아까 공동보다 3분의 2정도 되는 크기였고, 우리가 들어온 쪽으로 총 9개의 굴이 뚫려있었다. 말인즉, 한 공간으로 모든 통로가 이어져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빠르게 주변 탐색을 마치고 중앙을 바라본 순간, 옆에 있던 선유운이 “헉.”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 무슨 일이에요?”
고연주가 물었다. 그러나 곧 중앙을 확인했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주변으로 고개를 돌리며 건너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중앙에는 꼿꼿이 서 있는 건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허수아비의 모양을 한 8구의 시체였다.
흙 바닥에 박힌 8개의 나무 막대기 끝에는 사용자들이 각각 가슴께부터 꽂힌 상태였다. 복부 아래는 무참히 뜯긴 상태였고, 내장이나 장기는 싹싹 긁어먹었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나마 온전한 거라고는 머리와 덜렁덜렁 늘어진 두 팔뿐.
나는 가장 정면에 있는 사내의 시체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내는 죽을 때 꽤나 고통스러웠는지 온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에 반해 입은 귀밑까지 찢기고 고정된 상태였다.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는 게, 웃는지 우는지 모를 기괴한 형상을 보이고 있다.
“아까 오른쪽에서 두 번째로 들어갔던 조에요.”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은 남다은이 무너진 시체를 뒤집으며 말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조라면…. 처음 구덩이에 들어왔을 때 뼈에 걸려 넘어졌던 여인이 포함된 조였다. 유지태의 농담에 환영하는 방식이 저질이라고 욕하던 여인.
말인즉, 한 조가 몰살당했다. 방금 설마 하고 추측한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잠깐. 그러고 보니 여인의 시체는 보이지 않고, 사내의 시체만 보이는데?
“클랜 로드. 잠시만요. 여기 좀 보세요.”
남다은은 머리가 꽂힌 막대기를 치우고서는 바닥을 가리켰다. 아까 시체가 무너졌던 자리였다. 약간 허리를 굽혀 살펴보자 지면에 삐뚤 빼뚤 그려진 벌건 핏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구덩이로 내려왔을 때 본 것과 똑같은 필체였다.
『건방지게. 멋대로 들어온 주제에 어디서 불평 불만이야?』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신경 좀 썼지. 어때. 이 정도면 저질이 아닌가? 히히, 히히히!
PS. 아. 다른 3명은 고맙게 사용하도록 할게.』
“이 개새끼들!”
안현의 분노한 목소리가 공동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안현을 흘긋 흘겼다가 어깨를 건드리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탐색을 마치고 왔는지 고연주가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수현. 이상해요.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아요.”
터벅…. 터벅….
“분명 나가거나 들어온 기척이 있어야 하는데…. 수현?”
“고연주. 쉿.”
“…아.”
“…….”
고연주도 이제 들은 걸까. 나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금방 들어온 굴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힘없이 걸어오는 소리. 그 소리는 지금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리가 들어온 굴 바로 오른쪽에서 들려오고 있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정상적인 걸음 소리는 아니다. 느릿느릿 힘없이 걷는 것 같으면서, 이따금 발을 질질 끄는 기척까지 들려온다. 그리고….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코를 쓱 닦은 사샤가 코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작품 후기 ============================
아. 오늘 종합 소득세를 해결하는데 정말 정신이 없더라고요. 아는 분 말씀으로는 그냥 영수증 출력하고 은행으로 가서 내는 게 깔끔하다고 해서, 점심 조금 넘어서 PC방에 갔습니다. 집 프린트기가 고장 났거든요.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보안 키보드 충돌로 문제가 일어났는지 비밀번호가 계속 이상하게 쳐지더라고요. ㅜ.ㅠ 한 1시간 동안 씨름하다가 결국 집에 돌아왔어요. 그리고 전자 납부로 30분만에 해결했습니다. 지방세 납부가 복잡하다고 겁을 주셨는데, 하라는 대로 하니까 금방 해결했습니다. -_-a
오늘 초 중반 내용은 개인적으로 모 독자 분의 궁금증이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지도를 그려드리고는 싶은데, 제가 그림 재주는 없어서요. 한 번 그려는 보았는데 그냥 동그라미와 네모의 집합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창피해서 그림은 못 보여드리고, 그 외의 부분을 포함해 그냥 글로 최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