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76
00575 철혈(鐵血) 여왕의 분노, 김수현의 환희. =========================================================================
“이스탄텔 로우 로드. 앞쪽에서 적의 기척들이 잡힙니다.”
김수현이 조용히 말했다. 한소영이 흘긋 시선을 흘기고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거리는 약 200미터. 자세한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통로의 좌우를 꽉 채울 정도의 엄청난 비틀림이 느껴집니다.”
200미터. 길다면 긴 거리였으나 지금 이 신속에 가까운 행군이라면 금방이다.
한소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런 한소영을 김수현은 마치 관찰하듯이 천천히 살펴본다. 이내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소영의 눈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사용자 유지태.”
고요하지만 마력이 충만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호출에, 유지태는 곧바로 다가왔다.
“앞쪽에 적이 무리 지어 있다고 하네요. 거리는 200미터 정도.”
“예.”
“선두로 나가주세요. 남부에서 명성이 자자한 유령마의 명성을 확인해보고 싶군요.”
“후후. 이 정도 버프를 받았는데 실망하게 해 드릴 수는 없지요. 똑똑히 보여드리겠습니다.”
선두로 나가라는 말인즉, 방패 역할을 하라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태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추호의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가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령마의 소환 의식을 펼치는 걸까?
“마법의 사용은 보조로 제한합니다. 유지태는 화살 지원이 들어가면 곧바로 치고 들어가 선진(先陣)을 무너뜨리세요.”
그것은 비단 유지태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같이 달리는 모든 사용자들이 한소영의 말을 들었고, 각자 나름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120미터를 추가로 진군했을 즈음. 선두 사용자들의 육안에도 서서히 괴물들의 실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확실히 김수현의 말대로였다. 현재 구덩이 공략 조의 인원은 91명. 그러나 보이는 괴물들의 수는 그보다 2배는 넘어 보였다. 더 이상의 진군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통로에 빽빽이 들어차 사용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괴물들의 정보는 모른다. 아니, 알고 있다고 해도 굉장히 단편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변수가 있다면 지금 들어가는 사용자들이 남부 원정대의 최정예라는 것. 그리고 아까처럼 9개로 분산된 게 아닌, 모두가 하나로 응집돼있다는 것. 한소영은 그 힘을 믿고 있었다.
– 히히히힝!
그 순간, 어디선가 말이 우렁차게 울어 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소환 의식을 마쳤는지 유지태가 유령마를 소환한 것이다.
이윽고 죽음의 기사 평생의 반려라고 불리는 유령마가 그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었다. 기본적인 모습은 용맹한 군마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두 눈에서는 강렬한 안광을 내뿜고, 전신은 반투명하면서도 시퍼런 불길에 휩싸였다.
“하!”
유지태가 힘껏 땅을 박차 멋들어지게 유령마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궁수들이 활을 장전하는 소리가 일제히 이어졌다.
어느덧 남은 거리는 40미터로 좁혀졌다. 인간의 모습을 한 소수의 괴물들과,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잔뜩 웅크린 괴물 다수가 사용자들을 인지한다.
– 키에에에에에에에!
“발사!”
이내 기괴한 괴성이 들려온 찰나, 한소영의 매서운 외침이 사용자들의 귓전을 울렸다. 마법사들이 보조 주문을 외우고 사제들은 방어 주문을 외웠다. 거의 동시에 궁수들 또한 각자의 표적을 향해 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유지태가 내지른 한 차례 기합과 함께 유령마가 펄쩍 뛰어올랐다.
피피핑, 피피피핑!
괴물과 사용자. 서로의 진영에서 무수한 화살들이 교차한다. 괴물들도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날아가는 화살의 개수나 보조 마법 등의 영창은 사용자 진영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괴물들은 모자란 수를 유일한 원거리 공격인 촉수 공격으로 메웠다.
터텅, 텅텅텅텅!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유지태를 노리고 들어간 소수의 화살이나 대량의 촉수는, 겹겹이 둘러친 보호막에 모조리 막히거나 떨어졌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나 유령마를 노리는 공격들도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저 들어간 그대로 몸통을 뚫고 지나가 하릴없이 허공만 스칠 뿐.
그에 반해, 궁수들이 날린 화살은 괴물들의 머리 위로 고스란히 쏟아졌다. 그리고 화살들의 뒤를 바로 이어, 유지태를 태운 유령마가 미끄러지듯이 짓쳐 들어간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이 선진의 괴물들에 부딪친다.
콰앙!
저릿한 폭음이 통로에 퍼졌다. 유령마는 선진을 단숨에 흐트러트리며 이미 무너진 괴물들을 향해 말발굽을 크게 들어올렸다.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깡그리 부숴버리겠다는 듯 무차별적으로 짓밟는다. 온몸에 피어오르는 시퍼런 불길이 한순간 명멸(明滅)하더니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폭발했다. 미친 듯이 용틀임 치는 유령마가 다시 한 번 거대하게 울부짖었다.
– 키히히히히히히힝!
그 폭발은, 그 울림은 이제껏 조용하게, 숨죽이며 달려오던 사용자들의 억눌린 마음을 일깨워주었다. 번뜩 고개를 치켜든 사용자들이 하나같이 거친 숨결을 내뿜었다.
때가 되었다고 여긴 걸까. 한소영의 오른팔이 반으로 접히는가 싶더니 이미 붕괴한 선진을 정확히 겨냥한다. 명백한 공격 명령.
그러자 지금껏 마음속으로 칼을 갈던 근접 계열 사용자들이, 거대한 함성을 내지르며 한꺼번에 뛰어나와 어지러워지는 괴물들과 맞부딪쳤다.
가장 먼저 허준영, 김수현, 연혜림이 각각 3갈래로 갈라져 좌, 중앙, 우 방향으로 번개처럼 짓쳐 들어갔다. 막아서는 괴물들의 몸을 기세 좋게 꿰뚫고 베어 넘기며 더욱 커다란 공간을 창출한다. 그리고 유지태와 세 명이 만들어준 그 틈으로, 사용자들이 마치 해일과도 같은 기세로 들이닥쳤다.
“빠샤!”
무에 그리 신이 나는 걸까? 한껏 상기된 얼굴과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사내. 고오환이 가로막는 괴물을 향해 있는 힘껏 이마를 부닥치고는 춤추듯 대검을 휘둘렀다. 고오환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칼이 휘둘러지고 창이 쇄도하듯이 날아다닌다. 그럴 때마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괴물들이 고꾸라졌고, 비산한 핏물들이 바닥의 흙을 붉게 물들였다.
전장 지휘자의 권능, 『파괴 • 돌격』의 위력 때문일까?
보이는 그대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보이는 돌진력이었다. 괴물들의 진형은 덮쳐오는 해일에 속절없이 휩쓸려 깡그리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마치 텅 빈 통로를 그냥 있는 그대로 통과하는 것처럼, 사용자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괴물들을 뚫고 지나갔다.
대승. 말 그대로 대승이었다. 사용자들은 단 한 번의 격돌로,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200에 가까운 괴물을 전멸시켰다.
그러나 한소영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더는 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시체도 살피지 않는다.
‘무조건, 최대한 빠르게 구덩이를 공략하겠습니다.’
그저 이 말을 지키려는 듯, 무너지면 무너진 그대로 또다시 앞으로 달려나간다.
잠시 멈춰 섰던 사용자들은 반사적으로 앞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바람처럼 내달리는 한소영을 확인한 순간, 모두가 홀린 듯한 기분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전장에 나선 병사들이 여왕을 따르는 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사용자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한소영을 따르고 있었다.
김수현 역시 그랬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한소영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김수현은, 그제야 아까 느꼈던 미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실 지금껏 한소영의 지휘력은 그다지 좋은 편은 못되었다. 어디까지나 김수현의 시선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 김수현이 기억하는 1회 차에 절정의 한소영과, 이제 갓 대규모 병력의 지휘권을 잡은 한소영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김수현이 더욱 한소영을 보호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한소영도 알고 있었다.
‘이번에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만일 머셔너리 로드가 남부 원정대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제가 어떻게든 해결했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야 했는데, 총 사령관이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고 구경만 했죠.’
‘…그런데, 머셔너리 로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주셨어요.’
‘요즘 제 능력이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그때 김수현에게 했던 말은 한소영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랬던 한소영이, 갑작스럽게 터졌다.
단순히 도발 문구 때문에 터진 게 아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무력감이, 총 사령관의 입장에서 꾹꾹 억눌러왔던 감정의 둑이, 일거에 터져 나온 것이다.
거기서 한소영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회귀(回歸)였다. 대규모 병력 운용에 관한 모든 전술을 버렸다. 새로 등장한 적이나 전략에 관한 생각도 멈췄다. 그저 자기 자신만의, 아니 스스로가 가장 자신 있는 방법으로 병력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소영은 호칭만이 아닌 진정한 철혈 여왕으로의 각성을 이루어내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여전히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김수현은 그런 한소영을 차분히 응시했다. 아까 느꼈던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분이 이제 뭔지 알 것 같다.
김수현이 기억하는 철혈(鐵血)의 여왕이 돌아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작스럽게 뜻 모를 기쁨을 느꼈다. 절로 들썩거리려는 어깨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김수현은 입을 질끈 깨물었다. 머릿속부터 일어난 상쾌한 기분이 하나의 환희로 변하여 전신을 물들인다.
잠시 후, 구덩이 내로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김수현이 골짜기에서 첫 번째 돌풍을 일으켰다면, 지금 이 바람은 한소영이 일으킨 두 번째 돌풍이었다.
그렇게 한소영을 선두로 한 사용자들은 돌풍처럼 통로를 통과했다.
*
한소영을 필두로 한 구덩이 공략 조는 엄청난 속도로 보이는 모든 통로를 통과했다. 걸리는 모든 것들은 배제한다. 5개의 길이 나 있던 함정의 방은 이미 진작에 지나쳤다.
이후 계속 달리면서 두 개의 공동을 추가로 발견했지만, 한소영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사용자들을 독려하며 더욱 행군 속도를 높였다.
이러한 쾌속의 행군을 가능케 한 것은 한소영의 권능도 있지만, 사용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시 되새겼다는 점도 한 몫 했다.
할까요, 말까요 묻지 말고, 우선 하고 보고하라.
결론을 낼 수 없는 보고는 필요 없다.
그 말인즉, 알아서 하라는 소리였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다. 모두가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아니 해야 할 일을 알아서 하고 있다. 지금껏 살짝살짝 어긋나던 톱니바퀴들이, 세 번째 통로를 통과한 이후 갑자기 딱딱 맞춰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거기서, 안현은 생각했다.
지금 여기 있는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안현은 달리는 와중에도 주변을 쉴 새 없이 둘러보았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세계였다. 한 팀에서만 활약하다가 느닷없이 올 스타 전에 서 있는 듯한 기분. 그러한 상황에서 안현은 홀로 미묘한 어색함과 소외감을 느꼈다.
“현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별안간 어깨를 짚는 감촉과 동시에 자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린 안현은 인자하게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신재룡을 볼 수 있었다.
“재, 재룡 형님.”
“괜찮아.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
“내가 들어오기 전에 했던 말을 기억나지?”
안현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곧 가만히 머리를 끄덕이고는 한결 차분해진 기색으로 얼굴을 들었다. 그런 안현을 보는 신재룡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과연 신재룡은 안현에게 무슨 말을 한 걸까?
어느덧, 앞쪽에서 탁한 불빛이 비치며 새로운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각.
“으으…. 으으으…!”
주현호는 토굴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이상한 신음을 내고 있었다. 이따금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머리를 미친 듯이 긁기도 했다. 흡사 미친놈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그런 게, 주현호의 입장에서 갑작스럽게 모든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괴물들의 상황은 굉장히 좋지 못했다. 골짜기와 언덕에서의 전투는 절대 의미 없는 전투가 아니었다. 괴물들은 그 전투에서 가용 가능한 태반의 병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용자들이 구덩이로 들어온 이후.
처음에는 좋았다. 두 번째 통로인 9개의 길에서만 해도 생각대로 되는 것만 같았다. 5번째 통로를 지나쳐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사용자들의 수를 줄이고 파더의 힘을 빌어 제대로 한 판을 벌인다는 작전.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급격히 반전되었다. 사용자들의 병력을 갉아먹기는커녕 반대로 자신들이 병력이 뭉텅이로 깎여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마련해놓은 모든 장치를 해체하고 무시하며 오직 직선으로만 달려오고 있다.
“젠장!”
주현호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남은 괴물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4백, 아니 3백은 될까? 그나마 믿을 거라고는 굴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둔 높은 진화를 이루어낸 놈들이지만, 그들의 수는 절대적으로 적다. 뒷받침해줄 수 있는 병력이 없는 이상, 주현호와 진화된 괴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하, 하다못해 형식이라도 태어난다면…!”
그때였다.
“응?”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던 주현호가 문득 머리를 들었다. 토굴의 입구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돌연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주현호의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두두두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귓전을 미약하게 울렸다.
이윽고 허둥거리면서도 황급히 벽면에 손을 댄 순간, 주현호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마, 말도 안 돼! 벌써 5번째 통로를 통과했다고?!”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이 늦었죠?
오후에 투표하고 오는 길에 가족들과 외식을 했는데,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집에 오자마자 졸고 말았습니다. ‘-‘a 독자 분들 모두 투표는 하셨나요? 하하.
그나저나 슬슬 새로운 일러스트를 염두에 두어야겠군요. 예전에도 그랬듯이 새로운 일러스트 또한 투표로 선출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아니에요. 원래는 캐릭터 투표가 3천 표가 넘으면 하려고 했는데, 2천 표로 줄은 상태이거든요. 지금 1931명의 독자 분이 투표해주셨으니 이제 곧 2천 표를 돌파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투표에서 한소영은 제외할 생각입니다. 지금 홀로 45%의 득표율을 보이며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재투표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한소영은 무조건 일러스트를 제작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캐릭터들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을 보인 4명을 따로 뽑아 여러분들께 의견을 구할 예정입니다. 즉, 이번에는 2장의 일러스트가 새로 나오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