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91
00590 누구나 한 번쯤은 빛나는 시절이 있다. =========================================================================
안현은 훌쩍 물러나는 주현호를 보며 온 신경을 집중했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지금 안현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거리 유지가 가장 큰 관건이라 할 수 있지. 즉, 주문을 외울 틈만 주지 않으면 된다.’
‘물론 그건 일반적인 경우에 불과하고. 조금 특수한 경우를 상정해볼까? 예를 들면 이동 마법을 연속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마법사라거나, 아니면 신체 능력이 무척 높은 마법사. 이럴 때는….’
머릿속으로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안현은 창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물러나는 주현호를 무섭게 추격했다.
‘물론 항마력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안현. 너는 회피가 더 맞을 거야. 왜냐고? 당연하잖아. 너는 기공창술사니까. 정확히는 기공창술사의 체술을 극대화하라는 말이야. 그 체술은 회피에 최적화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동시 공격까지 가능케 하는데….’
‘여기서, 하나를 추가로 섞을 수 있지. 바로 페이크다.’
그 순간, 계속해서 전진하던 안현의 다리가 돌연 신들린 듯 신묘한 놀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면으로 창을 찌르는가 싶더니, 벼락같이 왼쪽으로 파고들어 창을 그어 내렸다가, 또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틀며 후려갈기듯이 창을 휘두른다.
주현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걸 느꼈다. 원래 힘들기도 했지만, 어느새 호흡도 무척이나 거칠어져 있었다. 지금 상대하는 사용자가 한 명이 아닌, 세 명과 상대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괜찮다.
한 명이든 세 명이든 간에 일단 눈에 잡을 수만 있으면…!
그렇게 생각한 주현호는 억지로 눈을 부릅뜨며 안현의 움직임을 눈에 익히려 애썼다. 그리고 세 명의 안현이 거의 동시에 치고 들어온 순간, 모조리 머리를 박살내겠다는 듯 파괴 주문으로 감싼 손을 횡으로 힘차게 휘둘렀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기운을 품은 손은 하릴없이 허공을 내젓고 말았다.
일순 주현호의 얼굴에 멍한 기색이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망연히 시선을 들어올린다.
어느새.
도대체 어느새 허공으로 오른 걸까?
공중에는 안현이 있었다. 두 손으로 잡은 창을 하늘 높이 치켜든 채 몸이 초승달처럼 휜 안현의 모습은, 기형적인, 흡사 곡예를 보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부웅!
이내 탄력적으로 몸이 접힘과 동시에 안현이 흑 창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짓쳐 내려온 창대가 주현호의 머리를 세차게 강타한다.
빠아아악!
“끄어어억….”
붉은 액체가 점점이 뿌려졌다. 머리가 크게 꺾여졌다. 주현호의 얼굴이 멍멍해지는가 싶더니 서서히 벌어지는 입에서 숨 넘어갈 듯한 신음이 새어 나온다.
이윽고 가볍게 지면에 착지한 순간, 안현은 곧장 주현호를 노려보았다. 주현호가 온몸을 간헐적으로 떨면서 비틀비틀 물러나고 있다.
‘좋아. 그렇게 정타를 먹였다면, 절대로 멈추지 마라. 끝장을 볼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말라는 말이다.’
‘상대가 그로기 상태에 몰렸다면, 그건 지금껏 네가 잘 싸워온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야. 조금 더 강한 공격을, 조금 더 확실한 공격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보상. 그런데, 고작 공격 한 번 성공시켰다고 기뻐하느라 그 기회를 날릴 셈이냐?’
안현은 지체 않고 오른발을 들어올렸다. 상체가 올라가고 창도 올라간다.
발바닥, 다리, 허벅지, 복부, 가슴, 그리고 팔로 순차적으로 힘이 이어진다. 이어진 힘은 마력의 증폭을 받아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이내 발을 크게 벌리며 내려 밟음과 동시에, 안현은 그 모든 힘을 모아 창 끝으로 보냈다.
쿵!
오른발이 내려오고, 상체도 내려왔다. 그에 따라 창도 똑같이 내려온다.
정석적인 찌르기가 아니다. 크게 기울었던 창이 원래대로 수평을 이루는 순간, 아래로 내리쳐진 창 끝이 정확히 주현호의 가슴을 쿡 찔러버렸다.
꽈앙!
한 점에 집중된 폭발적인 힘이 주현호의 가슴을 터뜨렸다. 엄청난 충격파!
주현호의 입과 가슴에서 다량의 핏물이 터져 나왔다. 몸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도 모자라, 그대로 데굴데굴 나뒹굴 정도였다.
그리고.
“아.”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신재룡은 자그마한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어느덧 신재룡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력이 완전히 떨어진 이상 신재룡은 더는 전투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니 그전에, 이미 양 옆구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욱신욱신한 아픔이 밀려오고 시야가 서서히 흐려진다.
그러나 신재룡은 바짝 정신을 다잡았다. 안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주현호가 괴성을 부르짖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안현이 먼저 공격해 들어갔다. 이성을 잃었는지, 주현호의 손이 안현의 목을 잡아채려는 듯 뻗어나간다.
하지만 안현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초근접전을 펼치지 않았다. 창을 길게 쥐며 슬쩍 빠졌다가, 주현호의 공격이 빗나갈 즈음 창을 고쳐 쥐고는 길게 찔러 넣었다. 자신이 상처를 낸 곳을 향해서.
창은 여지없이 가슴을 관통했고 피가 솟구쳤다.
그 모든 과정을 신재룡은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애당초 전투를 재개했을 때부터 시선은 안현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신재룡이 탄성을 질렀다.
안현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용자 안현의 새로운 능력이 개방됩니다. 4번째 잠재 능력 슬롯이 소비됩니다.』
『축하합니다! 잠재 능력, 신창합일(身槍合一)이 개화됩니다!』
빛난다.
안현이 빛난다. 빛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그런 안현을 보는 신재룡은 갑작스레 설레기 시작함을 느꼈다. 환한 빛에 휩싸인 안현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은 이성에게 느끼는 설렘이 아닌, 정말로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 느끼는 일종의 감동이었다.
문득, 신재룡은 회상했다. 예전에 보았던 어느 광경을.
하늘에서 눈이 내려오는 광경이었다.
신재룡은 가만히 벤치에 앉아 눈이 내려오는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리고, 녹는다.
내리고, 녹는다.
내리고, 녹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이 덮이기 시작한다. 덮이기 시작한 눈은 더 이상 녹지 않았다.
쌓이기 시작했다.
내리고, 덮여서, 쌓인다.
그 당시, 문득 정신을 차린 신재룡은 무척 놀라고야 말았다. 그저 녹아 내리기만 하던 눈송이들이, 어느새 길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북이 쌓여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환한 빛을 발산하던 그날의 눈의 벌판을, 신재룡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신재룡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안현을 생각했다.
‘안현…. 너는….’
사실상, 지금껏 함께하면서 몇 번의 고비가 있기는 했다. 자의든 타의든, 안현이 고비에 부딪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랬다. 안현은 한 번도 도망친 적이 없다. 주어진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어떻게든 고비를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설령,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 첫 번째. 안현의 클랜원 직위를 해제합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안현을 더는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안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 형. 저 정말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악바리 근성으로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 제가 뭘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다시 올라오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안현이 한 행동 모두가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것 하나만은 부인할 수 없다.
안현은, 언제나 노력했다. 그리고 어디서나 최선을 다했다.
비록 그 노력이 바로 바로 보답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안현은 항상 신재룡에게 무언가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용자였다.
그게 바로 신재룡이 보는 안현이었고, 또 이번에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안현…. 너란 녀석은…. 정말….’
신재룡은 감았던 눈을 떠 안현을 응시했다. 여전히 주현호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안현은 주변으로 휘황찬란한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활기찬 눈동자.
기형적으로 비틀리는 몸.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창을 조종하는 팔.
그러나 쉴 새 없이 지면을 밟는 발.
모든 게 불규칙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안현의 창과 몸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신들린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재룡은 환호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환호였다.
그래, 바로 그거다. 저게 바로 진정한 기공창술사다.
아니, 기공창술사 안현이다!
지금껏 안현이라는 대지에 눈이 내리면 무조건 녹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었다.
내리고, 덮여서, 쌓인다.
계속해서 덮이고 쌓여서, 빛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안현에게도 빛나는 시절이 다가오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승부가 난 것일까?
결국, 버티지 못한 주현호가 쓰러졌다. 안현이 쓰러진 주현호의 배를 밟고 올라갔다가, 곧바로 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미 박살 나다 못해 걸레로 변한 가슴을 보며 있는 힘껏 창을 내려찍는다. 그 모든 움직임이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안현의 창이 아래로 내려가는 찰나, 주현호의 다리가 꿈틀 움직였다.
그 순간, 신재룡은 저도 모르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주현호가 자신을 밟고 있는 안현의 등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발을 차올린다.
서로의 동시 공격.
그 찰나의 순간, 보이는 시야가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아니, 정지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느릿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신재룡이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인 한 줌의 마력을 지팡이 끝에 담았다.
“───. ───. ───. 보호!”
휙!
카캉!
주현호와 안현의 공격은 모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주현호의 발차기는 신재룡이 걸어준 보호막에 막히고 말았다.
안현의 창은, 주현호가 머리를 한껏 젖힘과 동시에 두 손으로 창을 부여잡았다.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기는 했지만, 간신히 피할 수는 있었다.
잠깐의 정적.
그동안 주현호는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애송이라고 생각하던 상대가 갑자기 이상하게 돌변했다. 아무리 김수현과 헬레나에 의해 몸이 걸레짝 수준이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고 처참히 쑤셔지고, 두들겨 맞았다.
“크윽, 크으으윽!”
잠시 후, 주현호는 어떻게든 창을 치우려는지 끙 신음을 흘리며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안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미 전투는 끝난 것과 다름없다.
재빠르게 발을 움직여 박살 난 가슴을 휘젓자 주현호가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그 사이 다시금 창을 올렸다가, 그대로 내려찍었다.
푹!
이번에는 빗나가지 않고 정확히 목에 꽂혔다.
안현은 멈추지 않았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목이 완전히 관통될 때까지, 안현은 몇 번이고 창을 찍어 내렸다.
결국 열한 번째 찍고 나서야 주현호의 살에 구멍이 파이며, 창이 완전히 목을 뚫고 흙 바닥에 틀어박혔다. 그 상태 그대로, 안현은 주현호를 밀쳐내듯이 창을 깊숙이 돌렸다.
“크르르륵!”
벌어진 입에서 액체와 거품이 반반씩 섞인 핏물이 왈칵 토해졌다. 터져 나온 피가 사방으로 흘러내려 지면의 흙에 진득한 얼룩을 만들어냈다.
“…하아, 하아!”
그제야 안현은, 참았던 숨을 일거에 터뜨렸다. 동시에 뜻 모를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그냥 가르침 받은 대로만 했을 뿐이다. 그저 지금껏 자신이 추구해온 길을 버리고, 원래 가야 했던 길로 선회했을 뿐이다.
그런데, 모든 게 생각대로 된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경험. 계속해서 이어지는 환희에 온몸이 떨리는 듯한 착각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차분히 숨을 고른 안현이 간헐적인 떨림을 보이는 주현호를 응시했다. 전신이 엉망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주현호는 아직 살아있었다.
“이제, 말해봐.”
그런 주현호를 내려다보는 안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심. 폭발 장치. 이게 무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