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12
00611 아스타로트, 직접 움직이다. =========================================================================
어두운 밤.
“응….”
미약한 침음을 흘린 한소영은 콧잔등을 살짝 어루만지고는, 책상에 놓인 라이트 스톤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톡톡,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리자 천막을 환하게 밝히던 빛이 약간은 줄어들었다. 그만큼 어둠이 몰려들기는 했지만 천막 안에는 조금은 아늑한 기운이 깔렸다.
깊은 밤, 그러나 완연한 새벽이라 말하기는 아직 이른 시간.
사락….
그렇게 빛을 줄인 한소영은 다시금 원래 읽던 기록을 넘겼다. 잠시 누그러졌던 눈매가 도로 글자에 집중한다.
사실 총 사령관인 한소영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을 필요는 없다. 애초 남부는 공략이 끝난 상태였거니와, 요새 건설이나 경계 등 하는 일도 모두 원활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럼 모두가 자야 할 시간에 한소영이 깨어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겠지마는, 아마 밖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부산스러운 기척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예를 들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사르륵!
그때였다.
누군가 한소영 홀로 있는 천막의 입구를 젖히고 살그머니 들어온다. 한소영도 기척을 느꼈는지 기록을 읽는 걸 멈추고는 차분히 고개를 올렸다. 정면 입구 방향으로 한 사내가 걸어 들어온다.
“이제 오셨군요. 머셔너리 로드.”
그랬다. 야심한 밤, 총 사령관의 천막을 찾은 이는 바로 김수현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확신한 건 아니에요.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높겠다고 생각했죠.”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 법한 대화. 한소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또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곧 김수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소영이 앉은 탁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허락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일을 앞서 진행시켰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 드리지요. 허나 클랜원들의 허락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흠.”
가벼운 콧숨을 흘린 한소영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이 느닷없이 찾아온 사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사내는 확실히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오만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다. 보기 좋은 자신감이 전해진다. 그 누가 이럴 수 있을까? 이렇게나 애먹게 만드는 강철 산맥을 앞에 두고서.
그렇게 생각한 한소영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럼 제가 허락하지 않는다면요?”
물론 한소영은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냥 일종의 농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작금의 상황에서 농(弄)은 확실히 적절치 못한 선택이었다. 농담도 어울리는 사람이 해야 상대도 웃으며 받아넘기지, 한소영 같은 사람이 하면 상대는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이내 초감각이 ‘당황’이라는 정보를 전해주자 한소영은 속으로 쓰게 웃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농담이에요.”
그리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김수현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농담과는 별개로, 가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은 있네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유랄 것이 있나요? 강철 산맥은 위험하잖아요.”
“그렇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한소영의 말인즉, ‘저는 머셔너리 로드가 다치는걸 원하지 않아요.’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수현은 머리를 갸웃했다. 마치 그래서 어쩌라는 듯이.
아마 그저 그런 여인이라면 참 눈치도 없다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한소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이해심 많고 배려심 깊은 여인이라 여기고 있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두 개만 약속해주신다면, 허락해드리겠어요.”
“약속이요?”
“네. 하나는 부디 몸조심하실 것.”
“예.”
“그리고 꼭 살아서 돌아오실 것.”
“알겠습니다.”
정말 어려운 약속이, 무척이나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이라고 중얼거린 한소영이 두 손이 팔짱을 끼듯 자신의 팔꿈치를 감싸 안는다. 그 상태서 양팔에 살짝 힘을 주자, 가냘픈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이 더욱 돋보인다.
“…미안해요.”
그러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김수현의 낯에 의아함이 서렸다.
“저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
“저도 무언가 해드리고 싶다고 했는데….”
“…….”
“또, 홀로 애만 태우며 지켜볼 수밖에 없겠네요.”
“…….”
한소영은 예전에도 이 말을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모닥불 앞에서, 김수현과 단 둘이 있을 때.
그제야 김수현이 눈이 약간 커졌다.
약속을 해달라는, 그리고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여인을 빤히 응시한다.
아무튼 마음이 어떻든 한소영은 움직일 수 없다. 김수현처럼 누구나 공감할 여지가 있는 혈육과 관련된 명분도 없거니와, 설령 나선다고 해도 그만한 웃기는 일도 없으리라.
그걸 알고 있음에도, 한소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요요히 빛나는 흑 수정 같은 눈은, 가지런한 속눈썹이 수줍은 듯 내려옴으로써 서서히 아래를 쳐다본다.
늦은 밤.
사람의 감성이 가장 충만해지는 시간.
약간의 정적이 흐른다. 한소영은 여전히 말을 않는다. 그러나 아래로 내리깔린 눈동자와 점차 발그스름한 빛을 띠는 흰 볼을 보고 있으면, 한소영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구라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늦은 밤의 공기는 차갑기 그지없는데, 유독 김수현과 한소영 사이서 공기가 뜨끈하게 달아오르며 열기를 내뿜는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문득, 김수현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거의 동시에 라이트 스톤의 불빛이 꺼지고, 어둠이 내려앉는다.
아니. 사실 불빛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김수현이 낯을 들이민 순간, 한소영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 불이 꺼졌다는 착각을 했을 뿐.
“저….”
한소영의 반듯한 이마가, 김수현의 손에 앞머리가 걷혀 드러난다.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이제는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어스레한 불빛을 머금은 어여쁜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한소영은 눈을 꼭 감은 채로, 천천히 뒤꿈치를 들어 키를 높였다.
그 순간이었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정말로 걱정된다는 투로, 조심스럽게 꺼낸 김수현의 말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셔서….”
이해심 많고 배려심 깊은 여인을, 한순간 사라지게 만들었다.
한소영은, 반사적으로 오른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때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한소영이었다.
*
한편, 같은 시각.
한소영이 김수현의 복부를 후려갈길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오늘 원정 첫날을 끝낸 김유현도 깊은 시름에 잠겨있었다.
동부 원정대는 공략이 끝날 때까지 어떤 괴물과도 조우하지 않았다. 남부 원정대는 진군 후 사나흘이 지나고 나서야 괴물과 조우했다.
그리고 북부 원정대는, 진군 후 반나절이 지나자마자 괴물과 조우하고 말았다. 그것도 처음 보는 괴물과.
키는 약 3미터는 넘을까? 거뭇거뭇한 온몸과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굵은 꼬리. 거기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 끝에 돋은 뿔을 보면, 흡사 공룡을 보는 듯했다.
우선 결과만 놓고 보면 원정 첫날은 나름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습격의 정도가 크지 않기는 했지만, 북부 원정대는 강철 산맥에서의 첫 전투를 단 한 명의 전상자도 없이 매우 훌륭하게 치러냈다.
괴물들이 약했다기 보다는 김유현의 대처가 굉장히 적절했다. 흔들리는 사용자들을 재빠르게 추스른 후, 괴물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노리는 공격을 지시한 것이다. 물론 그 지시는, 김수현이 알려준 정보가 바탕이 됐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결과 원정대의 사기는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기실 아무리 괴물의 수가 적었다고는 하나, 이 악명 높은 지역에서 첫 시작을 잘 끊었다는 사실은 어쨌든 자축할만한 일이었다.
사용자들은 뇌제를 칭송하고, 서북 동맹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고 끄덕거리며 떠들썩하게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단 한 명만 빼고.
“흐음….”
김유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 김유현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다른 사용자들은 모두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 지었는데, 왜 김유현만 시름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해답은 바로 오늘 출현한 괴물에 있었다.
‘거리로만 계산해보면, 6일에서 8일 정도면 공략 지점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음. 그놈들의 영역에 처음 들어가기까지는…. 이르면 하루? 늦어도 이틀?’
‘아, 형. 이건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1지역 놈들이 불안해. …응? 아니 아니. 동부 놈들 말고.’
‘1지역에서 나오는 괴물들 있잖아.’
‘응. 사실 2지역에서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더라고. 말인즉, 제 3지역에서 이놈들이 출현할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해. 그러니까….’
김수현은 김유현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여러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측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적중했다. 1지역에서 도망친 남은 괴물들은, 2지역을 통과해 3지역까지 들어가 있던 것이다.
그래서 김유현은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제 3지역을 다스리는 놈들은 물론, 그밖에 출현이 예상되는 괴물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설상가상으로 1지역 괴물들까지 몰려왔으니까.
이쯤 되면 김유현도 동부에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없다. 아무리 한때 같이한 이들이라고는 하나, 서부로 근거지를 옮긴 이상 이제는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쯧. 어쩔 수 없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유현이 딱히 주눅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쉬울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극복해야 할 시련이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잠시 후, 머리를 탈탈 털은 김유현은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이번 공략은…. 오래 끌면 끌수록 힘들어진다.’
무엇보다, 쓸만한 사용자가 없다.
전투적인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사용자를 이끄는 자질을 말하는 것이다.
기실 김유현은 남부 원정대처럼 북부 원정대를 구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선봉은 상황을 읽는 능력과 순간적인 판단이 정점에 이른 사용자가 맡아야 한다.
후미는 앞서 가는 부대를 잘 따라가며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용자가 맡아야 한다.
그러할진대, 눈 씻고 찾아봐도 그런 사용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동부처럼 중앙이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형태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괴물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할수록 부담감이 가중된다.
그러므로….
‘정보는 충분하다. 그러니 조금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공략 포인트까지 도착해야 해. 그리고 속전속결로….’
이윽고 김유현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탁자에 놓인 지도를 차곡차곡 접기 시작했다.
그때.
쿵….
갑작스럽게, 어디선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진동이 김유현의 귓전을 미약하게 울렸다. 정말 약하게 들려온 터라 그냥저냥 넘어가도 될 정도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곳은 강철 산맥.
김유현의 머리는 본능적으로 입구 밖을 향했다. 어느새 두 눈은 매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쿵…!
진동이 다시 한 번 들려온다.
푸드득, 푸드득!
– 쪼롱쪼롱!
돌연 날갯짓하는 소리가 나며, 황금빛을 띤 아름다운 새가 김유현의 어깨에 살짝 내려앉았다.
김유현은 얼른 몸을 일으키고는 빠른 걸음으로 천막을 나섰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어떻게 알아!”
“총 사령관님께 알려라!”
“경계조들한테 가봐! 빨리!”
웅성웅성.
비단 김유현만 들은 게 아닌지, 이미 야영지는 소리를 듣고 나온 사용자들로 어수선해지는 중이었다.
잠시 후, 경계조에 통신을 넣은 사용자들이 하나하나 보고를 시작했다.
“동부 경계조의 보고입니다! 소리는커녕, 아무런 기척도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부 경계조의 보고입니다! 소리가 확실하게 들리고, 지면에 아주 미약한 진동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기척은 잡히지 않습니다!”
급박한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김유현 또한 이미 마력 감지는 최대한으로 활성화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서부 경계를 맡고 있던 사용자들도 비슷한 상황임을 보고했다.
결국, 답은 하나.
괴물은 기척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야영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동이 들린다는 것은, 괴물이 그만한 힘을 가졌다는 소리였다.
‘설마 벌써?’
김유현은 입을 짓씹었다. 바로 지시를 내릴 생각에 음성 증폭 마법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쿵…!
조금 더 확실해진 진동이 들려옴과 동시에.
– 끼루루루루루루룩!
괴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찢어지는 비명이 강철 산맥을 떠르르 울렸다.
김유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작품 후기 ============================
이런, 어제 내용이 많은 독자 분들의 손과 발을 오그라들게 만든 모양입니다.
제가 오그라들게 만든 범인인 만큼, 직접 풀어드려야 마땅한 도리겠지요. 그럼 차후 어떤 내용으로 독자 분들의 손과 발을 부드러이 풀어드릴지, 고민 좀 해봐야겠네요. 하하하.
PS. 황금빛 새는 예전 김수현이 김유현과 함께 공략을 했을 때 얻은 성과로써, 형에게 선물한 새입니다. 겉모양이 굉장히 아름다우며, 지닌 능력도 뇌제와는 굉장히 상성이 잘 맞는 새이지요. 이름은 쪼롱이입니다. 쪼롱쪼롱하고 울거든요.
그 외의 특징이라면 분명 주인은 김유현이나, 김수현을 더 잘 따르고 좋아한다는 사실이 있겠네요. ‘자연’과 관련된 새이니만큼, 김수현의 내부의 ‘화정’에 끌리는 상태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