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18
00617 Night Of Theater. =========================================================================
거신 전쟁과 최후의 전쟁.
사람들은 이 두 개의 신화를 놓고 ‘사실이다.’ 혹은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 신화의 참과 거짓을 가리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수도 있지만, 이에 관한 필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면 ‘거신 전쟁’은 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후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한 반면, 거신 전쟁에 관한 기록은 전후 사정을 담은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 있으니까.(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말이다.)
우선 아래의 기록을 한 번 보도록 하자. 해당 내용은 거신 전쟁 이후 수천 년이 지난 이후의 기록으로, 산맥에 터전을 잡은 거인과 지금은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고대 무녀의 대화록이다.
『대화록.』
쿠샨 토르가 묻기를.
“천상과의 전쟁 이후 수천 년이 흘렀다. 지금 살아가는 우리는 그 시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정녕 이 이상의 방법은 없는가.”
그러자 고대 무녀가 이르기를.
“전쟁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흐르기는 했다. 그대들의 잘못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으로써 나와 그대가 이렇게 인연을 맺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 만남은 신이 허락한 것이다.”
“아마 내 힘으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회복하였을 터.”
“헌데, 그럼에도 만족을 못하는 건가.”
쿠샨 로드가 묻기를.
“그런 뜻은 아니다. 확실히 고대 무녀의 힘, 그리고 그대의 노력과 수고에는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억울하다. 우리는 한때 지상을 지배하는 종족이었으나, 전쟁 이후 고통과 굴욕으로 점철된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자 고대 무녀가 이르기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의 입장에서 시간의 흐름은 커다란 의미를 주지 못한다.”
“들어보니 우습구나. 신의 분노가 고작 시간에 좌우되리라 생각했는가.”
쿠샨 로드가 묻기를.
“그럼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이 저주를, 신의 분노를 계속 감내해야 한다는 말인가.”
“특권을 누리고 싶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원래 누려야 했던, 원래 가져야 했던걸 되찾고 싶다는 것이다. 어찌 이 갈망을 우습게 느낄 수 있는가.”
“모든 노력을 했다고 자신한다. 고통과 굴욕도 당해보았고, 진정으로 반성하고 용서도 구해보았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정녕, 정녕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러자 한참을 생각한 고대 무녀가 조용히 이르기를.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거신 전쟁 때 신들은 이끌었던 아리안로드는, 무수한 동족을 잃었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이후 7신은 각각의 저주를 아리안로드에게 건넸고, 아리안로드는 그대들에게 하나의 봉인 조건으로 저주를 내렸다.”
“봉인 조건이라 함은, 거인들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
“말인즉, 그대들도 아리안로드가 느꼈던 슬픔을 고스란히 느껴보라는 것이다.”
쿠샨 로드가 묻기를.
“슬픔을 느껴야 한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허나, 모순이다.”
“우리는 그 감정을 느껴본 지 오래됐다. 사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리안로드가 우리에게서 슬픔을 빼앗아가지 않았는가.”
“빼앗아 갔으면서 느껴보라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그러자 고대 무녀가 이르기를.
“그러니까 한 번 느껴보라는 것이다.”
“슬픔은 말 그대로 봉인 조건이다. 그것은 아리안로드가 지정한 절대불변의 법칙.”
“거인들이여, 슬퍼하라. 어디 한 번 슬퍼해보라.”
“어떤 상황이든 좋으니, 신이 빼앗아간 감정을 다시 되살릴 정도의, 절절하고 슬픈 감정을 느껴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르기를.
“그리하여 조건이 해제된다면 슬픔을 되찾음은 물론, 저주로 속박된 힘까지 풀려날 것이며.”
“과거의 영광 또한 자연스레 되찾을 것이다.”
– 기록 명 ‘고대 무녀와 거인.’, 저자 불명,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에서 발췌.
*
기묘한 동행이라는 말을 아는가?
어쩌면, 현재 북부 원정대가 그 말에 딱 걸맞은 상황인지도 모른다.
원정대를 구성할 때 가장 중요시 여기는 건 바로 진을 어떻게 형성하느냐는 것이다. 정면 습격이든 측면 후면 기습이든 간에, 총 사령관은 어느 때나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진을 구성해야 한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김유현은, 나름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상의 진을 구성했다.
그러할진대, 오늘 아침 부로 진의 구성에 변화가 생겼다. 아니, 추가라고 해야 옳을까?
김유현은 아침이 되자마자 특별한 지시를 하나 내렸다. 바로 거인의 다리를 풀어주고, 진의 선두에 세우고 진군하라는 지시였다.
아직 샘플을 조사하는 중이라면 아주 이해 못할 지시는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용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중앙이라면 모를까. 두려움은 차치하고서라도, 선두에 세우면 도주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우려가 있었다.
허나 그 우려를 모를 김유현이 아니었고, 추가로 2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첫 번째는, 강철 산맥 내 일어나는 영역 다툼과 이 거인이 가장 강한 종족이라는 것을 근거 삼아, 다른 괴물들이 경각심을 높여보자는 것. 말인즉, 허수아비 효과를 노려보자는 소리였다.
두 번째로, 김유현은 해밀 클랜의 배치를 중앙에서 선두로 변경했다. 이것의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만일 거인이 모두의 우려처럼 도주에 성공했을 시, 모든 책임을 김유현이 지겠다는 소리였다.
기실 이 지시가 심각한 불화로 불거지지 않은 배경에는, 북부 원정대가 김유현을 신뢰하는데 있었다.
총 사령관의 자리는 모두를 아우르는 자리이지만, 그만큼 모두의 기대를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기대라 함은, 사용자로서의 강함만이 아닌,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이다.
그리고 김유현은, 바로 얼마 전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했다. 일전에 큰 피해가 예상됐던 괴조 군단과의 충돌 때 단 몇 마디 말로 돌려보내지 않았는가. 사용자들은 그 광경을 한 명도 빠짐없이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래도 뇌제니까.’
‘무언가 노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북부 원정대는 결국 김유현이 내세운 2개의 명분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였다는 게 납득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군소리 않고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약간의 우려 속에서 시작된 북부 원정대의 진군은, 결과적으로 김유현이 내세운 명분이 맞아떨어졌음을 증명했다.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괴조가 몇 번 하늘을 배회한 것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습격을 받지 않은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고작 하루에 불과하다. 김유현이 말한 ‘허수아비 효과’는 며칠은 더 지켜봐야 확실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사용자들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괴물과 싸우는 것보다는, 거인을 경계하고 식사를 따로 준비해주는 게 몇 배나 더 쉬운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기분으로 야영지를 설치하고, 거인의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상황은 거인의 입장에서도 가히 나쁘지는 않은 일이었다.
거인도 일말의 지성을 갖춘 존재인지라 자신이 현재 포로라는 것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즉 당장 죽어 신체 곳곳을 해부 당해도 모자랄 판인데, 적대적인 모습은커녕 진군 내내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시도하고, 때가 되면 밥도 꼬박꼬박 챙겨준다.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평소 인간에게 커다란 호기심을 갖고 있던 만큼 현재의 상황은 거인에게도 나름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를 구속하는 건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거인이 그렇게 느끼게 만들기까지는, 김유현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아무튼.
이렇게 북부 원정대의 진군이 끝나고, 오늘 하루 공략을 마무리 짓는 저녁 식사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김유현은 저녁 식사를 거인과 함께하는 중이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한 결과, 둘의 관계는 서로 식사를 같이 하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준까지는 발전한 상태였다.
(저는 정말 억울하다니까요? 그때 저는, 그 날개만 큰 놈들하고 싸우려 했던 게 아니라고요.)
기둥에 몸이 꽉 묶인 거인이 오른팔을 방방 휘두르며 열변을 토한다. 아까 진군하고 있을 때는 양팔이 꽁꽁 묶여 있었다면, 지금은 약간 다른 모습이다.
이것 또한 김유현의 지시였다. 최소한 식사 때는 거인의 한쪽 팔을 풀어줄 것을 지시한 것이다. 그래야 밥을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말할 것도 없이, 식사가 끝나면 거인의 양팔은 어김없이 도로 묶이며, 김유현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최대한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 어린 놈 하나 보셨죠? 저는 그 녀석을 구하려 했다는 말이에요.)
(그래 그래.)
(요즘 다른 지역에 있던 괴물들이 우리 지역으로 넘어오는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어린 놈이 멋모르고 혼자서 나왔다가, 그 넘어온 괴물한테 딱 걸렸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우연히 그걸 보고, 도와주려고 했다는 말이죠.)
(맞아.)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무척이나 갑갑한지, 거인은 앞에 놓인 큼지막한 냄비를 통째로 들어올렸다. 입에 대고 들이키자 냄비에 가득 차 있던 뜨거운 스튜가 벌컥벌컥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하얀 김을 펄펄 날리는 게 꽤나 뜨거워 보이는데, 거인은 조금도 아랑곳 않고 스튜를 깡그리, 한 입에 먹어 치웠다. 그것도 모자라 한 통을 추가로 비우기까지. 가히 어마어마한 식탐이었다.
거인은 삽시간에 두 통을 해치우고는 인중을 삭 닦으며 입을 열었다.
(아 정말이라니까요. 생각해보세요. 저는 실제로 그 어린 놈을 구해줬는데, 갑자기 나타난 그 날개만 큰놈이 저를 공격해왔어요. 그럼 제가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당연히 화가 나겠지. …그런데.)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유현이 가벼운 한숨을 흘리며 수저를 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가득 찬, 수정구를 살살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방금 이야기, 벌써 세 번째 듣는 거야.)
(그러니까…. 에? 세, 세 번째요?)
(응. 그 다음에 네가 우리를 보고 기절하고, 그 날개만 큰놈들이 찾아오고, 내가 돌려보냈다는 것까지. 나도 이야기해줬잖아?)
(아. 그, 그랬나요? 에헤헤.)
거인은 머쓱하게, 그러나 해맑게도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한쪽에 무더기로 쌓인 빵을 한 움큼 집고는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음식이 꽤 마음에 드는 눈치다.
김유현도 진정으로 힐난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적당히 맞장구도 쳐주고 간간이 미소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눈동자만큼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쉴 새 없이 번뜩이며 거인을 관찰한다.
‘너무 여유가 넘친다.’
생각 그대로였다.
거인은 붙잡힌 이후, 단 한 번도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이 있다면 왜 자신을 앞으로 내세웠는지, 그리고 왜 인간이 산맥으로 들어왔는지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최소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감이 강하다.’
혹은 자부심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수천 년 동안 이 산맥의 일부를 다스려온 지배자로서, 거인들은 단 한 번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 인간들의 공략도, 그저 예전에 있었던 외부 침입 중 하나로 치부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물끄러미 거인을 응시했다. 그 사이 빵마저 모두 먹어 치웠는지, 어느새 거인의 주변에는 텅 빈 냄비 두 통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으음. 인간들의 음식, 입맛에 꽤 맞는데요? 상당히 맛있어요.)
(더 먹을래?)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거인을 보며 김유현은 자신이 먹던 그릇을 내밀었다. 진짜 주려는 건 아니었고, 그냥 의례적인 말이었다. 크기로 보나 그릇에 담긴 양으로 보나 설마 벼룩의 간을 빼먹겠냐고 생각했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나 거인은 사양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어 잽싸게 채가더니 그릇 채로 입안에 날름 집어넣은 것이다.
아주 잠시간에 불과했지만, 김유현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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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 회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