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26
00625 Night Of Battle. =========================================================================
초원은 조용했다.
사용자들과 거인이 만나기로 한 초원은 지금껏 지나온 강철 산맥과는 약간 다른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강철 산맥이 기본적으로 수림이 무성한 지역이라면, 지금 사용자들이 서 있는 초원은 탁 트인 느낌을 주는 너른 공터 같았다고나 할까? 중간중간 파헤쳐진 땅이나 쓰러진 나무를 보면 황량한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그만큼 시야가 확보된다는 장점도 있다.
“젠장. 이놈들은 도대체 오는 거야, 안 오는 거야?”
문득 선두에 서서 거인들을 기다리던 공찬호가 지면에 놓인 돌멩이를 걷어차며 불만을 터뜨렸다. 다른 사용자들이 진득하게 기다리는 모습과 비교해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수도 있지만, 그동안의 진군을 생각해보면 공찬호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애당초 공찬호는 오직 전투 하나만 보고 이 원정에 참여한 입장이다. 그런데 김유현의 수작(?)으로 전투는커녕 하릴없이 진군만 하는 세월을 보냈으니 그동안 불만이 쌓일 법도 한 일이었다. 그나마 오늘 실컷 전투를 하게 해준다는 말에 희희낙락하며 달려왔는데, 도착한지 몇 시간이 지나도 거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결국에는 폭발하고만 것이다.
그러나, 김유현은 그런 공찬호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생각도 없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초원의 저편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처음 초원에 도착했을 때는 그래도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저물어가기 직전이었다. 여기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지금 초원을 물들인 황혼이 금세 어둠으로 변할 것이다.
“우라질 놈들! 몸집은 산만 한 놈들이 꽁꽁 숨어 있고나 말이야!”
“…….”
“어이, 뇌제! 그냥 진군하자! 응? 진군해서 화계를 쓰자고!”
“…….”
“조금만 더 가면 놈들의 터전이 있다며? 아 그러니까, 한 번 해보면 될 거 아냐?! 지들 터전에 불을 싸질러 놓는데, 제깟 놈들이 안 나오고 배기겠어?”
“…….”
공찬호가 꽥꽥 고함지르는 것을 들으며 김유현은 속으로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사실 아주 나쁜 생각은 아니었지만, 애당초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생각이다. 거기다 바로 어제 비가 억수같이 내린 점을 고려해보면 지금 공찬호의 말이 얼마나 억지인지 굳이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뇌제!”
‘제발 조용히 좀 해라….’
자꾸만 자신을 부르는 공찬호의 고성에 김유현의 살며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서서히 지끈거려오는 미간을 지그시 눌렀을 때였다.
쿵!
문득 전해져 오는 초원의 미약한 떨림.
그러자 공찬호가 고성을 뚝 그치는 동시에, 초원 건너편에서 무언가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들이 울려왔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서너 개의 인영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영의 정체를 사용자들은 굳이 안력을 높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원에 물든 황혼을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 수십 개, 아니 수백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거, 거인이다! 거인이 나타났다!”
땅이 울리는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어느 사용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거인들 또한 인간들을 발견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거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걸어오는 데만 집중했다.
처음에는 점으로만 보이던 거인들이 삽시간에 위용을 드러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사용자들 사이로 미미한 어수선함이 흘렀다.
쿠샨은 일족의 숫자가 총 800명이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800명의 거인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인간으로 이루어진 파도를 보는 기분이랄까? 바로 어제 기백 명의 거인들과 마주했을 때도 뜻 모를 묘한 압박이 느껴졌는데, 8배나 되는 거인들과 마주하니 온몸이 짓눌리는 기분이 느껴졌다.
‘드디어 왔군.’
그러나 김유현은 차분히 속을 추스른 후, 완전히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거인들을 침착히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 문득 거인들이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오직 한 거인만 빼고.
가장 선두에서 걸어오던 거인은 그대로 계속해서 걸어오더니 거리를 어느 정도 남겨두고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김유현의 뇌리에 한 생각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쿠샨이…. 성공한 건가?’
“공찬호.”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이 곧바로 공찬호를 불렀다.
“어, 어?”
침을 꿀꺽꿀꺽 삼키던 공찬호가 떨떠름히 머리를 돌렸다.
“작전은 잊지 않았겠지?”
“작전?”
공찬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김유현의 표정을 보고는 빠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어, 어. 그러니까 네가 신호하면….”
“Ok. 거기까지.”
공찬호가 어물어물 말을 이으려는 찰나 김유현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혹시라도 거인이 들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번역 수정구는 키지 않았지만 괜한 의심을 줄 필요는 없었다.
잠시 후, 거인을 향하던 시선 일부가 김유현에게로 쏟아졌다. 김유현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
그리고 도로 길게 내쉰 후, 쿠챠르가 서 있는 지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 홀로 걸어 나온 거인의 키는 못해도 김유현의 5배를 넘는다. 무려 10미터를 넘는다는 소리다. 그런 만큼,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쿠챠르의 몸집은 시야에 전부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그에 따라 김유현이 느끼는 압박감도 한층 심해져만 갔다. 크기는 둘째치고서 라도,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선은 차치하고서라도, 오른손에 쥔 거대한 망치를 보니 절로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게 묠니르인가?’
그랬다. 시퍼런 색의 기이한 기운을 흘리는 거대 망치는, 바로 거인의 제왕을 상징하는 ‘묠니르(Mjolnir)’였다.
잠깐 시선을 뺏긴 사이, 어느덧 쿠챠르와의 거리가 5미터 안으로 가까워졌다. 김유현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하늘이 가려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쿠챠르가 스리슬쩍 허리를 굽혀 김유현을 굽어보고 있었다. 마치 자세히 살펴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김유현은 지체 않고 번역 수정구를 활성화했다.
때마침 쿠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쿠샨이 말한 인간들의 우두머리인가.)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쿠샨의 이름이 거론됐다. 아마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놨을 거라고 생각한 김유현이 천천히 머리를 주억였다.
(그렇습니다. 우두머리는 아니나, 대표로 보시면 됩니다.)
(그런가. 대표라…. 뭐, 아무래도 좋다.)
쿠챠르는 상관없다는 양 말하고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잔뜩 드리워진 그림자가 약간이나마 걷혀졌다.
(그러는 당신은….)
이윽고 김유현이 말이 이어지려는 찰나.
(그럼.)
풀썩!
문득, 김유현은 갑작스레 몸이 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자, 하늘 끝까지 젖혀졌던 머리가 40도 가까이 도로 숙여졌다.
어느새 쿠챠르는 오른손에는 묠니르를 쥔 채, 그리고 왼손은 무릎에 얹은 채 지면에 걸터앉아 있었다.
김유현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주 앉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말해보라.)
김유현이 앉자마자 쿠챠르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 무 감정한 얼굴로 말했다.
(예?)
(쿠샨에게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그러니까 말해보라. 들어는 보겠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김유현은 순식간에 머릿속이 차가워지는걸 느꼈다. 들어는 보겠다. 이 말에 함축된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말 그대로 이 거인은 들으러 나왔다. 즉 듣기만 할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이런 태도를 보인 이상 거인의 마음이 움직일 가능성이 1%라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해보면 99%가 넘는 확률로 실패한다는 소리였다. 1%의 성공을 잡으려면 어지간한 달변가도 힘들 텐데, 김유현은 달변가 스타일도 아니었거니와 상대는 쿠샨처럼 어수룩하지도 않다. 자신보다 훨씬 오랫동안 살아온, 무려 거인들의 제왕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는 돌려 말하거나 숨겨 말하는걸 싫어한다. 그리고 길게 말하는 것 또한 싫어한다.)
‘협상은 이미 결렬됐구나.’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김유현은 서서히 마력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부터는 신호를 보낼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김유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돌려 말하지도, 숨겨 말하지도, 그리고 길게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거인들과 서로 화친을 맺고 싶습니다.)
(화친? 너희가?)
우습다는 투의 말이 들려왔으나 김유현은 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현재 우리의 목표는 이 산맥을 건너 나오는 대륙까지의 길을 트는데 있습니다. 말인즉, 거인들이 다스리는 영역을 통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화친을 통해 관계를 맺고, 차후 길을 오고 가는데 있어서 충돌을 피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아무리 목적을 구구절절 말해도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김유현이 입을 다물자 거인이 가열찬 콧숨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건 인간들의 방식이 아니지 않나? 길을 원하면 억지로라도 개척하고, 걸리는 게 있으면 깡그리 쓸어버리는 게 너희 방식이 아니었나?)
(그건 오해입니다. 분명 그런 면도 있기는 하나 상대를 가려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인들은 우리와 비슷한 지성을 갖춘….)
(오. 그러시겠지. 너희 인간들에 한해서 말이야.)
(…….)
시종일관 툭툭 거리기는 했지만, 김유현은 별안간 거인의 어조가 한층 곱지 않아졌음을 직감했다. 말을 들어보니 인간에게 굉장한 불신감이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증오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뿌리 깊은 불신감이.
‘상관없나.’
어차피 초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화친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쿠샨을 볼 낯이 없군요. 애초에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쿠샨은 이야기를 들어달라 요청했고, 나는 허락했다.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그대의 혀를 탓해야겠지.)
(거인들의 강함은 인정합니다. 허나 우리가 싸우면 서로 무익한 피해를 낼 뿐입니다. 안 그래도 적이 많다고 들었는데, 굳이 우리와 싸울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싸울 이유라.)
짧게 답한 쿠챠르가 문득 머리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거신 전쟁에 관하여 들어봤는가.)
(다소나마 들어는 봤습니다.)
(의외군. 아무튼, 그때 우리 조상의 상대였던 아리안로드가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우리와 굳이 싸울 이유가 있던가…. 라고.)
(으음.)
이윽고 다시 김유현을 내려다본 거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 우리의 조상인 쿠샨 로드가 했던 대답을 똑같이 들려주지.)
(경청하겠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래. 우리가 굳이 싸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싸운다.
목적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우리는 싸움을 위하여 살아가는 종족이다.
그래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다.)
(그건 이유가….)
(또한, 무엇보다.)
(…….)
김유현이 도중에 항변하려 했으나 쿠챠르는 가차없이 말을 끊어버렸다. 아직 거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진 선언은 김유현에게 어느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어느 생각이란, 며칠 전 괴조와의 첫 대면 때 들었던 말이었다.
‘결국에는 똑같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쿠챠르가 그런 김유현을 힐끔 흘겼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군.)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알겠구나.)
(글쎄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이거 하나만은 알겠습니다.)
김유현은 슬슬 이 무의미한 대화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자 돌연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김유현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하게 입을 열었다.
(교류가 무서워서 싸우는걸 선택하다니…. 적어도 거인들이 겁쟁이라는 건 아주 잘 알겠습니다. 하하하.)
그리고서 의도성이 다분한 웃음 소리를 내자, 쿠챠르가 무덤덤한 낯으로 김유현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죽고 싶나?)
잠깐이기는 했지만 김유현은 쿠챠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는 거인의 몸체와, 귓가로 들려오는 딱딱한 목소리뿐.
(꺼져라. 이야기는 끝났다.)
이윽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쿠챠르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순간 김유현은 눈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꺼지라고? 이야기는 끝났다고?’
(쿠샨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놈들. 하지만 며칠이나마 쿠샨을 돌봐주고, 무사히 돌려보낸 점을 고려해 이번 한 번만은 살려주도록 하마. 당장 꺼지고, 다시는 우리 눈에 띄지 마라.)
이어지는 쿠챠르의 설명에 김유현은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해만했을 뿐이지, 전혀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무사히 보내준다는 말은 김유현도 미처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였으니까.
‘이러면 나가린데….’
(역시, 도망치는 거군요. 쿠샨의 핑계를 대서 말이지요.)
황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김유현은 겉으로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곧바로 받아 쳤다.
막 몸을 돌리려는 폼을 잡던 쿠챠르가 그제야 덜컥 행동을 정지했다.
(도망?)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반문하고는 우묵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미친 것 같지는 않고, 일부러 나를 도발해 마음을 움직이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 그렇다면, 아주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어.)
사실 이미 충분하기는 했지만, 김유현은 한 번 더 도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대화 도중 솔직한 마음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거 아니….)
그러나 김유현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킨 쿠챠르가 김유현의 멱살을, 아니 아예 목을 감아 올린 것이다.
이내 서서히 멀어지는 지면을 보다가 김유현은 조용히 눈을 감아버렸다.
사실 쿠챠르의 말로 미루어보아, 분위기상 이야기를 좋게 끝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현이 쿠챠르를 도발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왜냐하면 거인이 그러하듯이 인간들도 진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전쟁.
허나 전쟁을 하려면 거인들의 힘을 제한시켜야만 한다. 힘을 제한시키려면 쿠샨이 신물을 건드려야 하는데, 신물을 건드리게 만드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인간들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연출될 것. 만일 거인이 이대로 인간들을 곱게 보내주려 했다면 쿠샨은 그걸로 만족하고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김유현으로서는 절대로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갑작스럽게 쿠챠르를 도발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안 그래도 좋지 못한 태도를 보이던 쿠챠르는 대번에 도발에 넘어가주었으니까. 어쩌면 도발에 넘어가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적어도 김유현이 원하는 행동은 해주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운에 맡겨야 한다.
(눈을 떠라. 건방진 인간.)
명령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도로 눈을 떴을 때는, 김유현의 시야에 쿠챠르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가까워지고 있다. 쿠챠르가 김유현을 향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대답해라, 인간. 죽고 싶나? 대답하지 않으면 이대로 목을 꺾겠다.)
(…어차피 살려 보내줄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까?)
(호오.) 쿠챠르가 중얼거렸다. 씩 입꼬리를 끌어올려 이를 드러내고는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정말 싸우자는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살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 건 네놈이 아니었나?)
그렇게 말한 쿠챠르가 섬뜩하게 웃기 시작했다.
웃음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리면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는 김유현이 재차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뭐, 소원대로라면.)
그 순간, 쿠챠르의 두 눈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였다. 삽시간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피가 몰려 핏발이 선 눈동자가 김유현을 노려본다. 돌연 붉은빛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는 게 흡사 핏물이라도 흘리는 모양새였다. 이야기 중 보이던 담담해 보이던 눈동자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피에 미쳐 날뛰기 직전의 야수 한 마리뿐이었다.
쿠챠르의 눈을 마주한 순간, 김유현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섬찟한 소름이 온몸에 일어나고 직감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잘못 건드렸다는, 이제 곧 죽는다는 공포에 전신이 사로잡히는 기분.
문득 공략을 떠나기 전 동생에게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형. 꼭 살아야 해?’
그러자 그냥 지금 신호를 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겨우 참아낼 수 있었다.
‘제발.’
김유현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평소 신을 믿지는 않으나 이때만큼은 절박하게 기도했다.
지금 이 상황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니 목소리만 빼고 쿠샨에게 중계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멀찍한 후방에 있을 자신의 클랜원이 통신용 수정구로 현 상황을 찍고 있을 것이며, 일찍이 쿠샨을 보낼 때 그림자에 숨겼던 사용자들과 연동하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김유현으로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한 셈이다. 행동만 본다면 누가 봐도 쿠챠르를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전조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전조는커녕 오히려 더욱 광폭하게 변한 쿠챠르가 김유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손아귀에 더욱 힘을 가할 뿐이다. 시시각각 목을 옥죄어 오는 굵직한 감촉에 김유현은 뜻 모를 거북함과 죽음의 공포를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이윽고 쿠챠르의 오른팔이 천천히 하늘 높이 올라간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정수리에 느껴지는 짜릿한 느낌만으로도 눈앞의 거인이 하려는 것을, 곧 벌어질 일을 알 수 있었다.
‘제발.’
다시 한 번, 김유현은 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대가 자초한 일이니 원망은 하지 않겠지.)
그러나 신은, 쿠챠르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임을 매정하리만치 일깨워주었다.
잠시 후.
후웅!
무언가가 바람을 강렬하게 찢으며 짓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흡사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람결에 김유현은 자신의 머릿결이 휘날리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꽈앙!
마치 포성이 울린 듯한 폭음이 김유현의 귓전을 멍멍하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몸의 균형 감각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다 못해 노이즈 현상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도 김유현은 용케 번역 수정구를 쥐고 있었다.
(헉, 허억….)
이윽고 간신히 흔들림이 멈췄을 때, 김유현은 자신의 호흡이 무척 거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마와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세상이 비스듬하게 보인다는 것도, 목을 부러뜨릴 듯이 옥죄던 손길이 갑자기 미약해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내 흘끗 시선을 내린 순간, 김유현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아니 순간적으로 힘의 조절에 실패해 궤도가 빗나간 묠니르가 땅에 틀어박혀 있음을. 그리고 무기를 놓친 쿠챠르가 오른손으로 땅을 짚은 채 무릎을 꿇고 있음을.
(네, 네놈…?)
또한, 그 무엇보다.
(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힘겹게 머리를 올리는 거인이 한껏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일련의 상황을 모두 확인한 순간, 김유현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됐다…!’
드디어, 됐다는 생각이.
더 이상 아까와 같은 무시무시한 기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렵기 짝이 없던 거인들의 제왕이, 이제는 한낱 몸집만 큰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툭, 툭!
김유현은 곧바로 손을 펴 쥐고 있던 수정구를 떨어트리고는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자 꾹 말아 쥔 손등에서 뇌신의 문양이 떠오르고, 동시에 황금빛 기운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드디어 찾아온 기회였다.
비로소 찾아온 기회였다.
마침내 찾아온 기회였다.
몇 날 며칠 동안 되도 않은 연극을 해오면서, 죽음 직전의 공포까지 감당하면서 겨우 붙잡은 단 한 번의 기회. 제 3지역 공략을 성공시킬 수 있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
그런 만큼,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짜릿짜릿한, 뇌제 특유의 마력 방전 현상이 사방을 떨쳐 울리기 시작한다. 곧 눈동자는 물론, 온몸이 황금빛으로 물들여지고, 전신에서 뻗어 나온 황금빛 전류가 사방으로 물감처럼 번져간다.
“크으으윽…!”
쿠챠르 또한 미칠 지경이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건 알 것 같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쿠챠르도 모른다. 그저 묠니르로 저 건방진 인간의 머리를 후려치기 직전, 갑작스럽게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힘이 떨어져 버리니 약화된 몸이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수깡 같던 묠니르가 지금은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마치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랄까?
“이, 이게 어떻게…!”
최대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음에도 어떠한 이상한 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저 아까부터 사방이 환하게 밝아지고, 대지에 황금빛이 물들었다는 것만이….
쿠릉, 쿠르릉!
그 순간 귓전을 떨어 울릴 정도의 요란한 천둥 소리가 사방을 가득히 메웠다. 쿠챠르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혼 빛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먹구름은 지면에서 솟구치는 노란 전류에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꽈릉, 꽈르릉!
구름과 구름이 부딪치고.
파직, 파지직!
구름 사이를 노니는 황금빛 전류를 확인한 순간, 쿠챠르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리고 그 순간.
“손 떼.”
김유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짜자자자자자자자자자자작!
눈부신 황금빛을 분사하는 벼락의 폭우가 하늘에서 빛살처럼 내리 꽂혔다.
============================ 작품 후기 ============================
바로 다음 회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