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58
00657 사랑해요. =========================================================================
갑자기 생성된 빛무리에 지옥의 겁화가 엇나간 순간, 지옥 대공의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가로막혀 소멸된 게 아니라 빗나갔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파괴’ 하는 지옥 겁화의 특성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현 상황에서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런데 그게 현실로 이루어졌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그러다 문득 어디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은 물론, 지옥 대공마저 발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오는 안솔을 확인했을 때 사용자들 사이로 기쁨에 가까운 탄성이 터졌다. 사제가 절실히 필요한 현 시점에서, 사제 직업 중 끝판 대장이 등장한 것이다.
“솔아!”
“안솔!”
안현과 이유정이 동시에 외쳤다. 그 외침에 화답이라도 하듯 안솔이 지팡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번쩍 터진 빛무리가 지옥 대공을 제외한 전원의 몸에 사르르 내려앉는다.
“힘이…. 회복되고 있어?”
안현이 자신의 몸 전체를 물들인 빛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차소림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놀라고 있었다. 딱히 기적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고작 주문 하나만으로 몸의 상처가 사라지고 기력이 회복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100%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다시 싸우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그것은 김수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온몸에서 일어나는 출혈이 멎고 부러진 뼈가 맞춰지고 있었다. 거의 걸레짝이나 다름없던 김수현의 신체가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되돌아온다.
물론 그렇다고 이미 소진한 생명력이 되돌아오는 건 아니다. 어쨌든 염화 능력을 사용한 대가로 김수현의 죽음은 이미 확정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EX 랭크로 오른 ‘쓰러질 수 없는’ 으로 겨우겨우 버티던 김수현의 생명을 잠시나마 연장시키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방금 짓거리는 네 년이 한 것이냐?”
지옥 대공이 안솔을 노려보며 불편한 어조로 말했다. 하기야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누가 봐도 전투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왠 사제가 불쑥 끼어들더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것도 눈 깜짝할 새에.
“글쎄요.”
차분히 대답한 안솔이 김수현의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하늘을 향하던 지팡이가 이번에는 지옥 대공을 겨냥한다.
“믿을 수 없다면, 한 번 더 시험해보셔도 좋아요.”
지옥 대공의 입술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건방지다는 생각보다는 안솔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자신감이 거슬린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몸을 회복한 사용자들이 어느새 사방으로 이동해 지옥 대공을 노리고 있다. 또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반쯤 날라갔던 김수현이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상태였다.
“이제 일어난 거냐.”
김수현이 여전히 지옥 대공을 응시하는 채로 나직이 말했다.
“꿈이 조금 길었어요.”
안솔도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방금 공격은 정말 어떻게 막은 거지? 아니, 빗나가게 만든 건가?”
“기적(Miracle)과 있을 수 없는 일(Blue Dahlia)이 합쳐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세요?”
물음에는 물음으로 대답한다.
“…그건 사기 아닌가?”
조용히 중얼거린 김수현이 싱겁게 웃었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무검을 힘주어 잡으며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웅웅웅웅웅웅웅웅!
어디선가 울리는 웅혼한 마력음이 사용자들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잠깐 맑아졌던 세상이 도로 붉은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까 지옥 대공이 소환될 때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옥 대공이 무슨 수작을 벌인 건 아니다. 이미 소환은 끝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그 순간, 사용자들은 들려온 마력음이 전투 재개의 신호라도 된 듯이 모조리 지옥 대공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김수현은 물론이고 지금 여기 있는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니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자 ‘지옥 대공이 모종의 수작을 부렸다.’ 고 생각해 신속히 공격에 들어간 것이다.
지옥 대공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한 생각이었으나 어쨌든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김수현은 거의 끝나가는 상태였고, 다른 사용자들이야 회복되든 말든 떨거지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한 지옥 대공이 후방으로 훌쩍 물러나 마구잡이로 짓쳐 들어온 마법 공격을 피하고, 왼손에 든 불의 채찍을 다잡았을 때였다.
뻐억!
“……?!”
거칠게 타격하는 소리와 함께 지옥 대공의 고개가 한껏 하늘로 젖혀졌다. 지옥 대공의 머릿속으로 한순간 혼란이 찾아 들었다. 분명 모든 마법 공격을 피했을 터인데,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온 마력 공격에 턱을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심대한 타격도 아니고 그냥 고개 한 번만 떨치면 회복할만한 수준이었으나, 중요한 건 타격 자체를 허용했다는 것.
지옥 대공의 턱을 가격한 마력은 다름 아닌 제갈 해솔의 작품이었다. 현재 제갈 해솔의 마력 능력치는 102포인트. 100포인트와 101포인트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라면, 101포인트와 102포인트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아까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해 느슨하게 대응한 지옥 대공의 실수였다.
이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지옥 대공이 한 번 더 물러나는 틈을 타, 근접 계열 사용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든 것이다.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물리는 합격은 아닌 그냥 무작정 들이대는 공격이었지만, 목숨을 도외시하고 들어오는 만큼 마냥 얕볼만한 공격은 아니었다.
“이놈들이…!”
지옥 대공이 노호성을 지르며 있는 힘껏 불의 채찍을 휘둘렀다. 두 갈래 채찍이 무자비하게 후려치자 대다수의 사용자들이 여지없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안솔이 기다렸다는 치료 주문을 발동했고, 이내 전신이 빛무리에 휩싸인 사용자들이 벌떡 일어나 재차 달려오기 시작했다.
고작 사제 하나가 가세했을 뿐인데, 전투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도와리야!”
결국 아차 한 순간에 지척까지 다가오는걸 막지 못한 지옥 대공은, 멧돼지처럼 들어온 공찬호에게 다시 한 번 어깨 박치기를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이것 또한 지옥 대공에게 커다란 타격은 주지 못했다. 그러나 자세가 허물어진 지옥 대공이 또다시 뒤로 물러나게 만들 정도로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제갈 해솔에 마력 공격을 허용한 이후, 지옥 대공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창졸간에 이어진 일들이기도 했지만, 아까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한두 개의 공격들이 신경을 무지하게 긁는다.
그중에서도 후방에서 졸졸 따라오며 계속 치료 주문을 외우는 사제가 특히나 거슬렸다. 그 탓에 아까까지만 해도 한 방이면 무력하게 나가떨어지던 것들이, 지금은 오뚝이처럼 벌떡벌떡 일어나 죽자사자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마치 저 사제에게 여벌의 목숨을 맡기기라도 한 것처럼.
‘이 내가, 이까짓 놈들한테?’
처음 마법 공격에 한 번.
제갈 해솔의 마력 공격에 한 번.
공찬호의 돌격에 한 번.
정리해보면 지옥 대공으로서는 이미 3번이나 크게 물러난 상태였다.
그렇기에 인정할 수 없었다.
“적당히 좀 하란 말이다!”
결국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지옥 대공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렇게 까지 몰린 이상 적당히 상대하겠다는, 사정을 봐주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는다. 그저 아예 치료 주문이 들지 않도록 일격에 죽여버리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뿐.
그렇게 생각한 지옥 대공이 막 지옥 겁화의 힘을 터뜨리려 힘을 모았을 때였다.
사앙….
돌연히 정면 방향으로 바람 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러나 그냥 흘려 들을만한 바람이 아닌, 무언가 묘한 쇳소리가 섞인 이질적인 바람 소리였다. 그것은 사용자들 사이를 뚫고 지옥 대공이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베어오고 있었다.
“……!”
찰나의 순간, 지옥 대공에 두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이대로 힘을 터뜨린다.
또 한 번 물러난다.
그리고 무수한 전장을 헤치며 쌓여온 직감은, 여기서 지옥 대공에게 후자를 선택하라 말하고 있었다.
이윽고 지옥 대공이 황급히 걸음을 물렸을 때.
삭.
가느다란 바람결이 지옥 대공의 목젖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내 눈앞으로 실선처럼 이어지는 다홍색 불빛을 보며 지옥 대공은 섬찟한 기분을 느꼈다. 방금 일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몸소 깨달은 것이다.
누가 공격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지옥 대공에게 죽음을 느끼게 할 정도의 공격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지금 이 장소에 한 명밖에 없다.
그제야 비로소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열이 흩어지고 차가운 이성이 흘러들었다.
안솔이 출현한 이후 갑자기 사용자들의 기세가 찌를 듯이 높아졌다. 지금도 그렇다. 아까 김수현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사용자들은 물러나는 지옥 대공을 향해 악착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이대로는 불리하다.’
그렇게 판단한 지옥 대공은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이것으로 몇 번째 물러나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아예 후퇴를 목적으로 한 도약이라 지옥 대공의 몸이 공활(空豁) 한 허공을 크게 날았다. 우선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을 요량이었고, 한편으로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 대공은 알고 있을까?
눈앞의 사용자들에게 신경을 쓰느라 한 가지 실수를 더 해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실수가 이미 지옥 대공의 근처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아니, 지옥 대공이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까?
말인즉, 공중으로 도약한 몸이 최고점에 다다랐을 즈음.
지옥 대공은 느닷없이 시야가 더욱 붉어진걸 느꼈다.
“…아?”
이제야 심상찮은 이변을 느꼈는지 지옥 대공이 망연한 음성을 흘렸다. 문득 아까 들었던 웅혼한 마력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껏 놀란 눈이 빠르게, 그러나 어느 것도 놓치지 않고 사방을 하나하나 훑는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원반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붉은 결계였다. 그리고 아래서 미친 듯이 요동치며 흐르는 방대한 마력까지.
거기까지 확인한 순간 지옥 대공은 마침내 이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차원 이동 진이 발동됐구나!’
그 생각은 정확했다. 아까 이상한 마력음이 들리고 세상이 붉게 변했을 때부터 이미 차원 이동 진은 발동된 상태였다. 거기서 지옥 대공이 헬레나가 발동에 성공한 차원 이동 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물론 지옥 대공이 의도한 일은 아니었고, 사실상 천운이 따랐다고 봐야 옳은 일이었다.
사샤가 헬레나의 말을 듣고 전하러 달려갔을 때는, 이미 전투가 재개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전투가 헬레나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안솔의 참가와 갑자기 달라진 사용자들의 공격에 연신 물러나던 지옥 대공은, 김수현의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하고 잠시 추스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일단 거리를 벌리려 있는 힘껏 후방으로 뛰었는데, 너무 많은 거리를 도약한 것이다. 바로 차원 이동 진의 범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지금 차원 이동 진이 발동된 목적은 간단하다. 이 진을 이용해 지옥 대공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것.
그걸 알고 있는 지옥 대공이었으나, 다른 생각보다는 ‘도대체 어떻게?’ 라는 의문이 앞섰다. 백 번 양보해서 진의 구동에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제물이 없으면 차원 이동 진은 발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몸이 생각보다 빠르게 낙하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지옥 대공이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그리고 진의 중앙에 홀로 서 있는 금발의 여인과 눈을 마주쳤을 때, 지옥 대공의 두 눈에 황망한 감정이 물감처럼 번지며 찢어질 듯 커졌다.
금발의 여인은 확실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모습만 인간일 뿐, 내면의 영혼은 인간이 아니다.
“너, 너는…!”
“저 정도면 제물로 충분하겠지요?”
두 여인의 목소리가 겹쳤다. 이어서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지옥 대공의 몸이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이 추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진의 중앙 공간이 쩍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불그스름한 빛이 지옥 대공을 덮쳐 들었다.
끄그그긍, 끄그그긍!
이어서 들려오는 거슬리는 쇳소리.
“아, 아…!”
지옥 대공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하반신이 갈라진 공간에 삼켜졌을 때였다. 크게 놀란 지옥 대공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점차 공간 안으로 말려들어 가는 자신의 몸을 볼 수 있었다.
“아, 안 돼!”
지옥 대공이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든 나오려는 듯 용을 쓰며 기어 나오려 했지만, 그럴수록 전신을 감싼 불그스름한 빛이 한층 강렬하게 발하며 도로 밀어 넣는다.
“저, 저건?”
마침 지옥 대공을 쫓아온 김수현을 비롯한 사용자들은, 붉은 결계를 보고 절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붉은 결계에 흐르는 어마어마한 마력.
결계 중앙의 갈라진 공간.
그 공간에 먹혀 들어가는 지옥 대공.
그리고 서서히 몸이 희미해지는 헬레나.
과연 누가 이 상황을 보고 전후 사정을 알아낼 수 있을까?
“헬레나!”
김수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헬레나는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오면 저처럼 용해되어 차원 이동 진에 흡수될 테니까요.”
그 말에 무작정 들어가려던 성질 급한 사용자들이 멈칫 걸음을 정지했다.
“그게 무슨…?”
“어라? 사샤한테 듣지 못하셨는지요.”
“……?”
“제물은 저 하나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사용자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까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정보를 떠올린 김수현의 낯에는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쳤다. ‘제물’ 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무언가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헬레나가 자신을 희생해서 차원 이동 진을 발동시켰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걸 깨달았다고 해도 지금 김수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헬레나가 진을 발동했을 때부터 이미 늦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상은 여전히 붉었고, 크게 갈라졌던 공간은 차차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거기다 헬레나의 몸은 이제 거의 사라져 상체만 간신히 보이는 상태. 이것은 차원 이동 진의 발동이 거의 완료에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였다.
“이럴 때는…. 안녕이라고 해야 합니까?”
헬레나가 묘하게 웃음 짓는다. 그 미소를 보며 김수현은 왠지 모르게 급격한 피로를 느꼈다. 사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죽음을 각오한 채로, 지옥 대공을 상대하는 데만 온 정신을 집중했을 뿐이다.
“너….”
그런데 지옥 대공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지금, 동시에 헬레나와의 갑작스런 작별 또한 앞두고 있는 지금. 김수현은 도저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냥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에, 머릿속이 텅 비어지고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하게 들었다.
탱강, 왼손에 쥐었던 수라마창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참으로 놀고들 있구나.”
돌연 지옥 대공의 태연한 목소리가 사용자들의 귓전을 울렸다.
“제물이 너 하나로 충분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어지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김수현은 도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진의 중앙을 확인한 순간 절로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헬레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당황함이 나타난다.
지옥 대공의 얼굴에서 당황함이 사라지고 미소가 나타난다.
상황이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벌어진 공간은 점차 줄어들고 헬레나는 거의 사라져 가는데, 지옥 대공은 아직 하반신만 삼켜진 상태였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정확히 말해보면 차원 이동 진의 발동은 거의 끝나가는데, 지옥 대공이 역 소환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옥 대공을 감싼 불그스름한 광채도 차차 빛이 약해지는 중이었다.
“고작 죽은 용의 영혼으로 이 몸을 강제로 보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정말이지 우습기 짝이 없구나.”
지옥 대공이 진정 우습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말인즉, 지옥 대공 정도의 존재를 강제로 보내버리기에는 제물이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는지 헬레나의 낯에 망연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때였다.
“충분하지 않으면 채우면 그만이에요.”
별안간 앳된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그러자 흘끗 시선을 돌린 지옥 대공이 안솔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 또 네 년이냐?”
지옥 대공의 살기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안솔은 침착하게 받아넘겼다.
한동안 안솔을 노려보던 지옥 대공이 돌연 비웃는 얼굴로 코웃음 쳤다. 이대로 가면 차원 이동 진의 발동은 곧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러면 끝나기 전에 충분한 제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준비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 네가 과연 어쩔 셈인지 나도 궁금해지는구나. 어디 한 번 해보거라.”
“…….”
“어서 해보래도? …왜, 설마 네가 추가 제물이라도 될 생각이었느냐? 그럼 들어오던가? 아니면 목숨이 아깝다던가?”
“…….”
마치 어서 해보라는 듯한 조롱 섞인 언사에 안솔의 눈이 가늘어졌다. 김수현은 지그시 입을 깨물었지만, 혹시 몰라 안솔이 넘어갈 것을 대비해 잡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안솔은 지옥 대공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헬레나 언니.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이제는 형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헬레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을 뿐.
그 행동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걸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지옥 대공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나 안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에 쥔 지팡이를 천천히 앞으로 들어올리고는.
“기적…!”
또렷하면서 고요한 목소리로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를 내뱉었다.
그리고.
화아아악!
하늘에서 내려온 새하얀 빛이, 온통 붉은빛 일색이던 세상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 작품 후기 ============================
1. 죄송합니다. 오늘 많이 늦었죠? 생각보다 들어가는 내용이 많아서요. 하하. 하…. 고백하자면 오늘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미리 말씀 드리지만, 이번에는 연참 약속 안 걸었어요!) 어떻게든 끝내려고 했는데, 예상 밖으로 들어갈 내용이 많더라고요.
…잠시만요! 부디 돌은 내려놓아 주세요. 제 말을 들어주세요. 어제 끝내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오늘 안으로 이 파트는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은 너무 졸려 글이 안 나오는 탓에, 한숨 자고 난 후에 나머지 내용을 올리도록 할게요. 사실 오늘 보셔서 아시겠지만, 남은 내용이 그리 많지는 않아요.
2. 리리플은 다음회로 미루겠습니다. 지금 한다 해도 제가 너무 비몽사몽인 상태라, 제대로 답변을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3. 현재 답신을 드리지 못한 쪽지가 22개? 그 정도 남은 상태입니다. 오늘 자고 일어나서 연참을 한 후에, 순차적으로 답신을 드릴게요.
4. 네. 어느 분이 질문하셨는데, 기획상 시즌 3이 끝나면 잠깐 쉴 예정입니다. 그동안 너무 달려오느라 알게 모르게 많이 지친 상태이거든요. 그렇다고 너무 오래 쉴 생각은 없고요, 짧으면 하루, 길어봤자 사흘 정도로만 생각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