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91
00690 3차 회담. =========================================================================
아틀란타의 내(內) 도시를 잇는 네 개의 외(外) 도시를 분배하는 안건을 다루는 3차 회담. 도시라는 거대한 보상이 걸려있는 만큼 여러 클랜의 이해 관계가 얽혀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예상외로 빨리 끝날 수도 있고 생각보다 늦게 끝날 수도 있다. 어차피 앞선 2차 회담을 통해 문제는 하나로 좁혀졌으니까.
딱 하나 분명한 건 오늘 이 3차 회담으로 아틀란타를 둘러싼 상황이 일단락될 거라는 것. 머셔너리가 포기하느냐, 동부가 포기하느냐. 결국에는 이 문제였다.
“형. 도착했어요.”
회담 장소까지 도착하는데 약 30분 정도가 걸렸다.
인근에 모인 사용자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회담에 직접적으로 참가하는 사용자와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용자. 당연한 말이지만 회의 진행에 도움을 주는 이를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은 클랜 로드 급으로 제한돼있다.
“클랜 로드. 건투를 빕니다.”
“나중에 봅시다.”
신재룡의 응원을 받은 후 나는 광장 쪽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누가 봤는지 어디선가 “머셔너리 로드가 도착했습니다!”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한층 심해진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나는 천천히 계단을 밟았다.
내 도시 광장은 약간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둥그런 무대가 설치된 중앙과 층이 난 계단이 주변을 둘러싸는 형식을 보이는데, 멀리서 보면 흡사 커다란 노천 극장을 연상케 하는 형태였다.
원래는 이곳 또한 낡고 더러워야 정상이지만, 그래도 앞선 회담을 거치면서 청소에 공을 들였는지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은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이윽고 계단이 끝나는 부분에서 걸음을 멈추자 비로소 회담의 중심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무대에는 각 원정대를 이끈 총 사령관과 소속 클랜 로드들이 모여 있었다. 조성호가 사망한 동부 원정대에서는 성현민과 선율, 그리고 김덕필이 참가한 상태였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랄까.
무대에는 약 100명 가량의 인원이 모여 있었으나 장내는 상당히 조용했다. 개중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도 있었고, 눈을 감은 채 씨근거리는 이도 적지 않았다. 환영과 낭패가 섞인 시선을 받으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오셨네요.”
무대의 상석, 한소영의 옆에 서 있는 박다연이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오늘 회담의 진행 요원으로 뽑힌 모양이다. 쟤도 참 출세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소문은 어제 들었어요. 그럼 본 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머셔너리 로드의 생환을 진심으로 축하 드려요.”
박다연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하면서도 발을 움직여 누군가를 툭툭 건드렸다. 한소영의 옆에 앉은 잘생긴 청년이 깜짝 놀라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박다연이 곧바로 험악한 기색을 보이자 떠름해 하면서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는 이쪽에 앉도록 하지요.”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나는 괜찮다는 투로 말하며 거절했다. 마침 무대 왼쪽에 앉은 형이 자리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쯤은 반응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고.
“아…. 그러실래요?”
이번에는 박다연이 떨떠름히 웃었다. 어느 사용자는 그냥 그렇구나 하는 표정이었으나 또 어느 사용자는 의외라는 낯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옆자리를 거부한 것에 꽤나 놀란 모양이다.
사실 애초 자리를 비워놨다면 모를까. 소문을 들었음에도 다른 사용자를 앉혀놨다는 것은…. 글쎄. 정해진 자리야 없다손 치더라도 내가 항상 앉던 자리를 생각해보면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수현아. 어서 와. 조금 늦었네?”
조금 초췌한 모습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형은 그제보다는 훨씬 깔끔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러는 형은 예상보다 일찍 왔고.”
“그렇지? 하하하!”
적당히 대꾸하며 옆에 앉은 순간, 형은 갑자기 누가 들으라는 듯이 크게 웃고는 목을 빳빳이 세우며 상석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소영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애초 내가 등장했을 때도 눈만 한 번 맞췄을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한소영이 주변을 둘러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3차 회담의 개최를 선언하겠습니다~!”
한순간 한소영이 저렇게 말한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앙증맞은 음성의 주인공은 다행히(?) 박다연이었다. 조금 전 한소영이 고개를 끄덕인 건 아마 모종의 신호인 듯싶다.
조금 긴장되는 듯 살짝 숨을 들이킨 박다연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아. 머셔너리 로드. 혹시 앞선 2차 회담에 관한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필요하시다면 간략하게 설명해드릴 수도 있는데.”
깜빡 잊은 듯 말하는 건 좋았지만 그렇게 목소리가 떨려서야. 왠지 그 속내를 알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진행에 필요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듣고 왔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박다연의 안색이 밝아졌다. 아마 거북할지도 모르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이리라.
박다연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좋아요. 저는 돌려 말할 줄 모르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머셔너리 클랜은 이번 공략에 세운 공에 대한 보답으로 도시를 관리하는 권한을 원하시나요?”
“그거야 두 말하면 잔소리지요.”
나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방금 회답을 기점으로 회담 장소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 속에서 박다연은 미묘하게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동부 인사들이 앉아 있는 방향이었다. 나는 신중하게 생각에 잠겼다.
현재 남은 도시는 네 개. 거기서 남부는 이미 도시 하나를 가졌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 그럼 남은 세 개의 도시를 두고 동부, 서부, 북부 그리고 머셔너리가 경쟁해야 한다.
여기서 동부는 머셔너리를 견제 상대로 정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서로 동맹 관계인 두 지역을 상대하는 것 보다는 클랜 하나를 상대하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머셔너리가 남부 소속으로 참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러모로 할 말도 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리저리 턱을 움직였다. 오늘은 제대로 입 좀 털어야 할 것 같았기에.
잠시 후.
“먼저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사내가 발언권을 요청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번 볼 것도 없이 역시나 동부 소속이었다.
“우선은 개인적으로 머셔너리 로드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머셔너리 클랜은 이번 강철 산맥 공략에 최고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단순 공적으로만 따지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웬일로 인정하는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단순 공적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나는 팔짱을 끼며 건너편을 응시했다.
“허나 아무리 공이 높다고 해도, 도시라는 중대한 사안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무조건 공적 순으로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 도시의 대표 클랜이 된다는 것은 그만한 역량이 있어야 된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감히 머셔너리 로드에게 묻겠습니다.”
이윽고 사내는 주변으로 돌리던 시선을 멈추고 나를 정면에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만일 도시 하나를 맡게 된다는 가정하에. 머셔너리 로드가, 머셔너리 클랜에서 어떻게 도시를 발전시켜 나가실지. 그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을 듣고 싶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장기적인 비전이라. 하하하.
“그런 거 없습니다. 아직은요.”
나는 싱겁게 웃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예?”
사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돌아온 지 고작 사흘밖에 안됐어요. 그동안 한 거라고는 고작 돌아가는 상황만 들었을 뿐이고요. 그런데 무슨 벌써부터 장기적인 비전입니까.”
“아, 아니….”
설마 이런 말을 들을지는 예상치 못한 듯 사내는 연신 말을 더듬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처럼 보였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씀을 하나 잘못하신 게, 비전의 사전적인 의미는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는 맞지 않는 말이에요. 당장 급한 게 이 폐허나 다름없는 도시를 사용자가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인데. 갑자기 무슨 장기적인 비전입니까. 그런 건 당면한 일부터 해결하면서 차차 세워나가는 겁니다.”
“하, 하지만 그건 꼭 필요한…!”
“아. 물론 필요하기는 해요. 장기적인 비전. 그러니까 정 듣고 싶으시면, 차후 상황이 정리되고 저를 한 번 찾아오세요. 같이 차라도 한 잔 하시면서 차분히 들려드리겠습니다.”
“…….”
장내에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내는 무어라 우물우물 말하더니 입을 짓씹었다. 그래. 할 말이 없겠지. 그러니까 얼른 앉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였다. 사내가 살그머니 자리에 앉는 동시 바로 왼쪽의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여인은 뒤늦게 상석을 바라봐 발언권을 요청한 후, 도로 고개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우선 가장 급한 문제는 이 도시를 개축하는 것이다. 확실히 맞는 말씀이기는 해요. 말씀대로 그러면서 장기적인 비전도 세울 수 있겠고요. 하지만 원점으로 돌아와서. 애초부터 어느 클랜이 도시를 맡을만한 역량이 있는가. 거기에 관해서는 의문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그 말씀은 우리 머셔너리가 자격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자격이 없다? 저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한 적 없는데요? 아! 물론 머셔너리가 전투적인 측면에서는 대단히 뛰어난 클랜이라는 건 인정할게요. 그러나 도시는 전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에요. 사용자들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죠. 그에 따라 행정적인 업무가 굉장히 중요시되는데, 그러한 부분에서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이 말입니다.”
“부족한 부분이라. 그거 재미있네요. 그 부분에 관해서 자세히 듣고 싶은데.”
그러자 싱긋 웃은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글쎄요. 우선은 경험이 적다는, 아니 아예 없다는 부분을 들 수 있겠네요. 제가 알기로는 머셔너리를 용병 업무를 위주로 운영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또 애초 북 대륙 소속이 아닌 자유 신분이라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무엇보다, 인원수가 적다는 게 가장 큰 우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수천 명이 거주할지도 모르는 도시에 겨우 50명 남짓한 클랜이 한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이 된다는 건 좀….”
여인의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서. 대표 클랜이 되려면 인원수가 많아야 한다. 이 말씀인가요?”
“통상적인 시선에서 보면 그렇다는 소리죠.”
“동의하기 어렵네요. 인원수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클랜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고 했잖아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어디 하나 인원수가 적은 대표 클랜이 있었나요? 말인즉 도시를 관리하는 클랜은, 비록 한 방면에서 아주 뛰어난 부분은 없을지라도, 어느 것 하나 부족한 점이 없는 완전무결한 최고의 클랜이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아주 대놓고 머셔너리를 저격하고 있군.
“확실히. 최고의 클랜이 대표 클랜이 되야 한다는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저도 한 가지 묻겠습니다.”
나는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인원수 많은 클랜 중에서, 우리 머셔너리 클랜보다 등급이 높은 클랜이 있습니까?”
그 순간 여인의 눈에 동요의 빛이 스쳤다.
“그, 그건….”
“참고로 말씀 드리면, 사용자 정보에 출력되는 등급은 소속 클랜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존재하는지 나타내주는 가장 객관적인 지표입니다. 100% 실적으로만 상승하는 시스템이니까요. 아무튼 이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으실 테고. …그래서, 있습니까?”
여인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그, 그러니까 제 말은…! 이, 인원수는…. 도, 도시 관리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행정적인 업무를 맡을 수 있는데…. 그…. 중요한 영향을 차지한다는 말로….”
그래도 여기서 물러나기는 싫은지, 여인은 횡설수설 말을 더듬으면서도 끝끝내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앵무새처럼 계속 똑같은 말을 들먹여 나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자꾸 인원수 인원수 그러시는데…. 그 부분은 우리도 곧 인원을 확충할 계획이 있다는 것으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는 사용자를 둘러보았다.
“오늘 이곳에 모이신 분들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설마 내가 질문을 할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사용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 회담이 끝나고 우리 머셔너리에서 새로운 가족을 모집한다면, 혹시 가입하실 분들이 계십니까? 가입 의향이 있는 분께서는 가볍게 손을 들어주세요.”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곧 한 명 두 명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종래에는 사방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손을 들었다. 대충 둘러봐도 수천은 가볍게 넘을 정도였다.
그렇게 사방을 둘러본 후, 나는 다시 여인이 서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흠. 많네요.”
“…….”
여인도 손을 든 사용자를 봤는지 얼굴을 흙빛으로 물들인 채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우리 머셔너리는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한 클랜이 되겠네요. 이제 좀 안심이 되시는지요?”
여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애꿎은 땅만 노려보다가 돌연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스르르 자리에 앉았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받친 후, 한껏 가라앉은 동부를 향해 턱을 까닥 움직였다.
앞선 두 명은 젖혔고, 이제 다음 타자 나오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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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머리가 아파서 일찍 자야 할 것 같아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