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98
00697 시작이 늦었다고 앞서나가지 못하는 건 아니다. =========================================================================
하늘의 한복판에 붉은 금색으로 이글거리는 해가 떠올랐다. 사방으로 뿌리는 눈부신 빛살은 공기를 타고 흐르듯이 내려가, 세상을 비추며 자신의 색으로 물들였다.
쨍쨍히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서 그런지, 도시 내 자옥하게 올라오는 모래 먼지도 반짝거리며 빛난다. 이어서 자옥한 흙 연기를 뚫고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어수선한 외침까지. 어제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도시가 오늘 아침부터 복작거리기 시작한 이유는 하나였다.
드디어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됐다.
즉 본격적인 도시 복구의 신호탄을 쏜 셈인데, 그 첫 시작을 이스탄텔 로우에서 끊었다. 무수한 사용자의 기대를 받고 있는 만큼, 이스탄텔 로우에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되자마자 거주민 이동과 자재 조달을 시작했다. 지금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모두 복구 작업의 일환이었다.
“흠….”
턱을 괸 채 멍하니 창문 너머를 바라보던 한소영은 가벼운 숨을 흘리며 시선을 내렸다. 긴 속눈썹 아래, 고즈넉한 빛을 품은 흑 수정 같은 눈동자가 책상에 놓인 기록을 응시한다.
이윽고 차분히 한 장 넘겼을 즈음.
달칵!
“야! 한우야!”
문이 사정없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특유의 새침한 목소리가 방을 넘어 복도까지 울렸다. 한소영의 눈이 대번에 날카롭게 빛난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한우. 원래는 한국 고유의 소 품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종의 애칭으로, 처음에는 한소영의 이름 중 앞 두 글자를 따와 ‘한소’ 라고 불렀으나 어느 순간부터 ‘한우’ 로 변했다. 한소영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가슴과,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연혜림의 가슴을 비교해보면 왜 한우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을 터.
연혜림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책상에 세게 손을 얹었다.
“이거 한 번 봐봐. 오늘 머셔너리 클랜에서 나온 거거든?”
“성과 발굴했다는 소문은 이미 들었어.”
“그거 아니야. 도시 복구에 관련한 내용 같은데, 광장에 게시해놓은 거 가져왔어. 지금 사람 엄청나게 많아.”
“…사람이 많다고?”
한소영이 눈을 살짝 치뜨며 묻자 연혜림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을 치웠다. 약간 구겨진 기록에는 총 세 가지 사항이 대충 휘갈긴 필체로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그 공지사항이라는 걸 베껴온 듯싶다. 한소영은 기록을 들고 자세하게 정독하기 시작했다.
1번과 2번은 그냥 넘겼다. 이미 저번에 논의된 사안으로 모든 도시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이니까.
그러나 3번으로 넘어갔을 때, 한소영의 눈동자에 돌연 요사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 3. 도시 복구를 지원해주실 사용자 분들을 모집합니다.
간단하게 적혀 있는 한 줄. 그러나 그 한 줄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도시 복구? 지원?”
“응. 그거 때문에 다들 떠들썩하더라.”
“이게 다야? 상세한 내용은?”
“안 그래도 광장에서 문의를 받고 있는 중이야. 신궁이라는 놈이랑 그 누구지? 아. 임한나라는 애가 나와서 설명하던데.”
설명을 들은 한소영은 눈을 찡그렸다. 누가 나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내용을 말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혜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도 몰라. 사람들 엄청 많았다니까? 이것도 겨우 베껴왔는데….”
“분위기는 어땠는데.”
“딱히 나쁘지는 않았어. 간간이 탄성도 들리고…. 아! 그러고 보니 광장에 장비 몇 개를 가지고 왔더라고.”
“장비?”
“응. 무기나 갑옷 등등. 장신구도 있는 것 같고. 아무튼 이번에 얻었다는 성과 중 일부인 것 같던데?”
“…….”
연혜림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소영이 갑자기 눈을 감더니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괜찮네. 아니 괜찮은 생각이야.”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상념에서 깨어난 한소영이 선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연혜림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기야 머리 쓰는 걸 싫어하니(죽어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편적인 것밖에 보지 못해도, 한소영은 무언가 알아차렸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관심도 끌고, 생색도 내고, 탄력도 받겠고. 일거삼득이네. 얼마나 빠르게 작업에 들어가는지가 관건이겠지만.”
“응? 하지만 다들 그러던데. 머셔너리가 상황이 급하니까 기껏 발견한 성과 출혈을 감수하고 있는 거라고.”
“그럴 리가 없지. 머셔너리 장비는 북 대륙 최고 수준이야. 아마 쓸만한 것들은 따로 빼놓고, 떨어지는 것들만 내놓을걸? 그것만 해도 달려드는 사용자는 부지기수일 테니.”
“헤…. 그럼 우리도 그러면 안 돼?”
“응? 우리가 지원하자고?”
“아니 아니. 사용자 모집. 어떤 면에서는 거주민보다 나을 거 아냐. 보니까 호응도 괜찮던데.”
직접 보고 와서 그런 걸까. 연혜림이 묘하게 부럽다는 투로 말했다.
확실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건물을 헐거나 잔해를 치우는 등, 정말 어떤 면에서는 거주민보다 사용자가 낫다. 가만히 자리에 서서 주문 한 번만 외워도 몇십 명이 달려들어야 할 일을 단번에 끝낼 수 있으니까.
“안 돼.”
그러나 한소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 전투 사용자라면 몰라도, 전투 사용자는 고급 인력이다. 모험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지 허드렛일을 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니 전투 사용자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려면 그만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결국에는 돈 문제랄까.
그러나 연혜림에게 들어보니 사용자들의 호응이 좋다고 한다. 그 말은 머셔너리에서 상당량의 금화를 약속했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새로운 도시에서 발견했다는 장비까지 내걸었다. 굳이 낙동강 오리 알 신세에 처한 사용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혹할 법한 조건이지 않은가.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쌓아놨길래….’
한소영은 언뜻 웃음을 내비쳤다.
앞서 말했듯이 이스탄텔 로우는 회담 전부터 차곡차곡 준비해온 입장이다. 무조건 도시 하나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북 대륙과 미리 수시로 연락해 거주민을 모으고 자재를 준비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워프 게이트가 활성화됐을 때 시작부터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머셔너리는 모든 게 늦었다. 거주민도 자재도 이제 구해야 하는 입장이다. 사실 상황만 보면 아직도 늦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추격을 시작했다. 설령 성과 발견이라는 예기치 못한 행운이 따랐다고는 해도, 모든 건 결과가 말해주는 법.
어쨌든 하나 분명한 건, 머셔너리가 아틀란타에 사활을 걸었다는 것. 그런 만큼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든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격을 시작할 것이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네.’
한소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닷없이 지기 싫다는 기분이 엄습했다. 이스탄텔 로우는 모든 걸 완벽히 준비한 상황인데, 이제 막 시작한 머셔너리에 추격을 허용하면 자존심이 크게 상할 것 같다.
허나 한편으로는 아주 조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차후 김수현이 그냥 클랜의 로드가 아닌, 한 지역의 수장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소영은 알고 있을까. 현재 김수현의 옆에는, 1회 차서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여인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
“시장을 만들어야 해요.”
후룩, 제갈 해솔이 양손으로 찻잔을 들이키더니 대단히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흘끗 보니 조금 전까지 찻물로 가득하던 찻잔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소문을 내서 관심을 끌겠다? 좋아요. 그저 그런 장비로 생색내서 이미지 개선을 하겠다? 좋아요. 금화를 퍼붓고 발견한 성과로 사용자들을 끌어들이겠다? 좋아요. 그런데요. 이 상황의 최종 종착지는 도시 내 시장 형성이라는 결과물을 도출해야 해요.”
조금 길게 말을 덧붙인 제갈 해솔은 탐욕 어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앞에 놓인, 아직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찻잔을 밀어주자 잡아채듯 냉큼 가져갔다.
“시장 형성이라….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어머. 시장 무시하세요? 도시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데. 시장을 선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데요.”
“필수 요소라는 것에는 동의해. 하지만 선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북 대륙이 있는데.”
“거기는 북 대륙이죠. 아틀란타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지금이 아니라, 3개월 후를 보자는 말이에요.”
핀잔 조로 말한 제갈 해솔은 힘껏 찻잔을 들이켰다. 그득하던 찻물이 벌써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우선 광장의 호응은 높다고 해요. 좋은 현상이죠. 그러나 현재 시선이 집중됐다고는 해도, 금방 사그라질 관심이에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관심을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해야 해요. 그래서 시장이 필요한 거고요.”
꼴깍 목울대를 움직인 제갈 해솔이 말을 잇는다.
“시장은 누가 만들자! 앞으로 여기가 시장이다! 라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에요. 서로 물물교환을 하는 것부터 자연스레 자생 및 진화 가능성이 생기기 시작해요. 홀 플레인이 완전한 게임은 아니잖아요?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시장이 건설 중입니다. 이런 메시지가 뜨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상황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시장의 생성을 유도해야죠.”
“그러니까 네 말은, 도시 광장을 시장과 비슷한 상황으로 만들어 사용자들을 끌어들이겠다?”
“그래요. 생각해봐요. 현재 아틀란타에 거주하는 사용자는 약 1만 5천 명. 그 중 대표 클랜과 산하 클랜 인원을 제외하면 약 8, 9천 명 정도가 남아요. 우리는 이들을 노려야 한다는 말이죠.”
“흠.”
말을 듣는 와중 나는 잠깐 문을 응시했다. 계단으로부터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잠시 후 제갈 해솔은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아마 보장 기간이 끝날 때까지 네 개의 외 도시를 빙글빙글 돌 거예요. 그리고 생각하겠죠. 아~. 이 도시는 조금 휑하네. 어? 이 도시는 왜 이렇게 사람이 바글바글해? 바로 거기서부터 인식의 변화를 꾀하는 거랍니다.”
“그래서. 광장은 네 말대로 한다고 치고.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가 흥미를 표하니 기분이 좋은 걸까. 아니면 고작 0년 차에 불과한 자신의 말을 들어주니 그냥 좋은 걸까. 제갈 해솔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부터는 간단해요. 관심이 높아질수록 기대치는 커지고, 그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면 자연스레 평가도 좋아지겠죠. 즉 이 도시가 얼마나 빠르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면 돼요. 어차피 아틀란타에 몰빵 치기로 마음 먹으셨잖아요?”
그렇게 말한 제갈 해솔은 돌연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서 쪽, 찻잔을 빨아들였다. 와. 벌써 다 마신 거야?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조금 아쉽기는 하네요. 들어보니 옆 동네는 진짜 준비 철저하게 했다던데. 우리도 미리 준비만 해놨다면, 아마 지금쯤….”
“옆 동네?”
“아. 이스탄텔 로우요. 오늘 아침에 못 보셨어요? 워프 게이트 활성화되자마자 거주민이랑 자재가 들어오는데….”
“아아. 그거라면 걱정하지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우리도 곧 들어올 거거든. 그것도 공짜로.”
“…네?”
“곧 알게 될 거야.”
제갈 해솔이 의아한 기색을 비췄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실제로 머셔너리가 거주민을 모으거나 자재를 조달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이게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페널티였다.
하지만 믿는 구석은 있다.
‘그건 바로….’
똑똑.
“수현. 들어갈게요.”
때마침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달칵 열렸다. 그리고 고연주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예. 곧 가겠습니다.”
“아래 개새끼들이 찾아…. 네?”
“모두 개새끼라고 매도하기는 그렇지 않나요? 설마 동부만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코란 연합 쪽에서도 찾아왔을 것 같은데.”
“…….”
고연주는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짓더니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코란 연합에서 두 명. 그리고 동부에서는 리버스, 한, 마탑, 달밤 클랜이…. 그런데 알고 있었어요?”
“뻔하죠. 이쯤이면 슬슬 기어들어오리라 예상했으니까. 그나저나 달밤에서 온 건 의외인데.”
제갈 해솔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곧 두 눈을 화들짝 뜨더니 입꼬리가 묘한 호선을 그린다. 이제야 아까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모양이다. 나는 선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얼마나 잘 짖는지, 어디 한 번 들어볼까?’
============================ 작품 후기 ============================
자정 연재 내용에
네 이름을 쓴다 로유진이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정체성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로유진이여
아직 동 트지 않은 조아라의 어딘가
타자 치는 소리 로유미 소리 레이드 모집하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작가의 한숨 소리
신음 소리 후회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로유미 위에
네 이름의 흔들리는 성 정체성 위에
살아오는 로리 전쟁
살아오는 후기를 지운 기억
되살아오는 항복했던 작가의 침통한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 떨리는 부끄러움으로 하얀 화면에
키보드로 서툰 솜씨로
적는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로유진이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