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07
00706 천사의 의뢰. =========================================================================
소환의 방을 나온 후, 나는 바로 아틀란타로 돌아와 회의를 소집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어쨌든 의뢰를 받아들였으니 최대한 빠르게 임무 수행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조금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클랜원들은 군말 않고 호출에 응해주었다.
회의장은 고요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적막하다. 권좌에 앉아 천천히 둘러보니 클랜원들은 입을 꽉 다문 채 흘끗흘끗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세라프를 만난 후의 더러운 기분이 은연중에 표출된 모양이다.
“의뢰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표정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나는 조용히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의뢰인은 신전…. 정확히는 천사입니다.”
살짝, 회의장이 어수선해졌다. 거의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 번갈아 본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사용자라면 모를까, 천사가 의뢰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천사라면…. 도우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재룡이 손을 들며 물었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의뢰인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도우미가 맞습니다.”
“허….”
“시간이 많지 않으니 간단하게 말하도록 하죠. 의뢰 내용은 사용자 구출이고, 구출 대상은 서 대륙 사용자입니다.”
“……?”
웅성웅성.
비로소 의뢰 내용을 꺼내자 소란스러움이 한층 심해졌다. 어차피 예상하고는 있던 터라, 두어 번 탁자를 두드려 조용히 시키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여러 사용자가 한꺼번에 손을 들었다.
“클랜 로드. 서 대륙 사용자요? 그리고 구출이요?”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진 건 정하연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턱을 주억였다.
“말 그대로입니다. 듣기로는 우리와의 전쟁 이후 서 대륙의 치안 상태가 굉장히 좋지 못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견디지 못한 사용자 중 일부가 북 대륙으로 이주를 시도했는데, 그들을 쫓고 있는 무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천사는 그 무리를 무법자라고 칭하더군요.”
“아, 아니…. 그러니까 왜….”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의뢰 내용만 간단하게 들었지 전후 사정은 듣지 못했어요.”
“…….”
나는 딱 잘라 말을 끊었다. 혼란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그건 나 또한 매한가지였다.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설명을 해줄 수 있겠는가. …젠장. 생각하니까 또 열 받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클랜원들은 계속 내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신재룡이 살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 클랜 로드. 죄송하지만 무법자가 누구를 일컫는 말입니까?”
“부랑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서 대륙의 부랑자.”
“그렇군요. 그럼 우리가 구출을 해야 하는데. 현재 서 대륙 사용자를 쫓고 있는 무법자 무리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계십니까?”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현재 무법자 대다수는 남 대륙으로 도망간 서 대륙 사용자를 쫓고 있는 중이랍니다. 상대적으로 북 대륙으로 오는 수는 대단히 적다고 하니, 우리 수준에서 충분히 정리가 가능할 듯싶습니다.”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으나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세라프가 그랬으니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천사는 언제나 사용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올바르게 조언하는 도우미로써 존재한다. 차라리 공개할 수 없는 정보라며 입을 닫고 말지, 의도적인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물론 그게 우리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지만, 어쨌든 액면 그대로 보면 도우미 역할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액면으로만 보면 말이다.
“그럼…. 의뢰에 관한 보상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섭섭지 않게 주겠다고 확실하게 약속 받았습니다. 아마 이번에 참가하는 클랜원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만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이제 이번 의뢰에 참가할 인선 발표를 해야 하는데….”
조금씩 말끝을 흐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뜻밖에도 클랜원들은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아니. 몇 명은 오히려 가고 싶다는 듯 눈을 희번덕 빛내고 있었다. 아직 혼란스러운 기색은 남아 있어도, 의뢰에 관한 두려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강철 산맥을 거치면서 변했는지 아니면 보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다. 어차피 의뢰 특성상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낼 필요가 있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로 시작하죠. 근접 계열은 저를 포함해 고연주, 남다은, 안현, 차소림, 허준영. 이상 6명. 궁수는 선유운. 이상 1명. 마법사는…. 잠시 넘어가고. 사제는 안솔, 신재룡. 이상 2명. 특수로 백한결. 이상 1명입니다.”
이미 오면서 어느 정도 생각은 해둔 터라, 인선 발표를 빠르게 마칠 수는 있었다.
단, 마법사만 빼고.
‘마법사는….’
나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놀리며 무거운 고민에 빠졌다.
데려갈 인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아틀란타가 아직 한창 발전 중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제 슬슬 손을 뗄 시기는 됐지만, 어디까지나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거지 완전히 내깔려 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말인즉 도시에 남아 이것저것 처리해줄 사용자가 필요한데, 현재 마법사 대다수가 행정 업무를 맡고 있었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데, 무작정 데리고 갈 수는 없잖은가.
“마법사는…. 우선은 비비앙.”
간신히 한 명을 호명하자 비비앙의 콧대를 척 치켜세우며 거드름을 피웠다. 마치 자신이 뽑힐 줄 알았다는 것처럼. 비비앙은 있어봤자 도시 발전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으니 데리고 가는 게 도움될 것이다.
‘딱 한 명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나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정하연은 무조건 도시에 있어야 하고…. 김한별은 영감님 일 때문에 아직 힘들 테고…. 사샤는 대군 전투에는 맞지 않고…. 원혜수나 표혜미는 조금 불안하고…. 헬레나는 죽었고…. 아.’
그 순간 제갈 해솔에 생각이 미쳤다. 번쩍 눈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그러나 제갈 해솔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는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가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나 또한 썩 내키지는 않는 의뢰라 굳이 억지로 끌고 갈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 클랜에 이렇게나 믿고 쓸만한 마법사가 없었나?’
여러 상황이 겹쳤다고는 하지만, 입맛이 쓰다. 뒤늦은 후회가 찾아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정령 소환사를 육성시켜놓는 건데.
대군 전투에서 마법사가 가지는 위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그냥 이대로 가도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최소한 마법사만은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싶었다.
“저…. 클랜 로드.”
그때였다.
“혹시 마법사 때문에 고민하시는 거라면….”
내 고민을 알아차렸는지 정하연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나는 어서 말해보라는 의미로 턱을 까닥였다.
“아주버님께 도움을 구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정하연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안을 내놓았다.
“아주버님? 제 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아주버님이요. 클랜 로드가 받아온 의뢰이지만, 아주버님께서 용병으로 참가하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형도 지금 한창 도시 발전 문제로 바쁠 텐데.”
“제가 알기로는 해밀 클랜에는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사용자가 많고, 또 산하 클랜의 도움도 상당히 많이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클랜 로드가 도와달라고 하면 바로 달려와주실 거예요. 저번 공략 때 진 빚도 갚을 겸.”
“으음. 그래도….”
“물론 그냥 도와달라고 하자는 게 아니에요. 의뢰를 도와주면 약속된 보상은 물론, 차후 도시를 발전시키는데 우리가 따로 도움을 주겠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산하 클랜으로 돌아갈 거주민들을 조금 빼거나, 아니면 금화를 무상으로 지원하는 조건으로요.”
정하연이 차근차근한 어조로 설명했다.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정하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형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큰 부담은 아닐 터. 무엇보다 형의 능력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뇌제(雷帝).
대인 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대군 전에 특히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 최고의 시크릿 클래스였다.
정말 이래도 될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결국 한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꼭 형한테만 도움을 받으리라는 법은 없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결국 조용히 입을 열고 말았다.
“정하연. 통신용 구슬을.”
“알겠습니다. 클랜 로드.”
정하연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백한결이 눈을 뜬 건 한밤중이었다. 새벽으로 치면 아마 4시쯤 되지 않았을까.
“으암….”
백한결은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상반신을 일으키다가 돌연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손이 천천히 자신의 몸을 더듬는다. 백한결은 흡사 탐험을 앞둔 사용자처럼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잠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다.
“아차!”
그 순간 갑자기 백한결이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뜻 내다본 창밖은 그저 어둡기만 했다. 그러나 무에 그리 급한지, 백한결은 빠른 손놀림으로 눈곱을 떼고 복장을 점검하더니, 곧 침대 한쪽에 비스듬히 세워둔 둥그런 방패 하나를 들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성의 입구를 나서, 아틀란타의 거리로 진입했다. 아직은 어둠이 스며든 동이 틀락말락 한 거리에는, 아직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바삐 움직이는 사용자가 간간이 보였다. 가끔 백한결을 보고 은근슬쩍 접근해오는 사용자도 있었지만, 백한결은 일부러 모른 체하며 거절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아마 아틀란타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그래서 이른 새벽부터 탐험에 필요한 동료를 구하려는 이들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백한결은 한층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탐험도 나쁘지는 않지만, 오늘은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어제 저녁. 긴급하게 소집한 회의가 끝난 이후, 김수현은 의뢰에 참가한 클랜원에게 하나를 추가적으로 주문했다. 그 주문이란, 다름 아닌 의뢰를 수행하기에 앞서 모이는 곳을 정해놓고 집결지에 따로따로 오라는 지시였다. 한꺼번에 우르르 움직여 괜한 소문이 나는 것 보다는,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의뢰를 수행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아무튼, 김수현이 요구한 건 두 가지였다.
집결지까지 최대한 시선을 끌지 말고 도착할 것. 그리고 절대로 늦지 말 것.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백한결은 집결지가 있는 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워프 게이트에서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인을 보며 로브를 눌러쓰고 나오지 않은 걸 후회하기는 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나름 성공적인(?) 도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뮬은 아틀란타와 달리 한산하기 이를 데 없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조신한 숙녀…. 조신한 숙녀….”
백한결은 집결지 건물 이름을 멍하니 되뇌며 상점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시 발전이 멈춰서 그런지 거리는 여러 상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어제 몇 번이고 집결지 장소를 들어둔 터라, 자신 없는 얼굴을 하면서도 백한결의 다리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쪽에서 꺾어서….”
이제는 완전히 망했는지, 이곳저곳이 헌 ‘영감님 보석상’이라는 건물을 돌은 후 백한결은 직선으로 5분 가량을 걸었다. 그러자 곧 치마 입은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는 간판을 내건, ‘조신한 숙녀’라는 낡은 여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 좋아.”
백한결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세심히 살폈다. 사실 들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분위기가 상황을 만든다고 하던가. 백한결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비밀 결사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똑똑.
“저 백한결이에요.”
그냥 들어가도 상관없지만 서도 예의 바르게 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살그머니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본 순간, 백한결에 어여쁜 얼굴에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 서렸다.
주방, 카운터, 탁자 등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여관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여관에 있는 사용자들은 전혀 흔하지 않았다. 우선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고개를 박고 있는 여인은 머셔너리 클랜원이 아니다.
백한결이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부스스 고개를 들더니 실눈을 뜨며 노려본다.
“…쟤는 또 누구야?”
“신의 방패.”
대답은 옆에서 나왔다. 흔들거리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 품에 검은색 창을 꼭 품고 있는 사내였다. 거의 2미터에 가까운 체구를 보이는 거한도 역시나 머셔너리 클랜원이 아니었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신의 방패?”
“방어에 특화된 시크릿 클래스라고 하던데.”
“흐응. 하여간 이 클랜은 신기한 애들 되게 많다니까….”
“…….”
여인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하고 사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백한결은 당황했다. 분명 자신을 두고 얘기하는 것 같은데, 저 두 명이 누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한두 번 보기는 한 것 같은데….
그렇게 얼굴만 빼꼼 들이민 채로 누군지 기억해내려 애쓰는 찰나였다.
“이런…. 내가 가장 늦었나?”
문득, 등 뒤로 새벽 바람이 묻은 차가운 코트가 스쳤다.
이윽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백한결은.
“미안한데. 조금 비켜주지 않을래?”
멋들어진 칠흑 색 마법사 코트를 걸친, 황금빛 스치는 눈동자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암에 걸린다는 기분이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미묘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래요.
하….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