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13
00712 심하게 모난 돌은 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구출한 사용자 전원을 무사히 뮬로 인도한 이후, 나는 곧장 아틀란타로 돌아왔다.
전투가 끝났을 때 중천에 걸려 있던 해는, 어느새 서서히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며칠은 소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의뢰가 예상을 벗어나 당일치기로 끝났다. 물론 이런 예상외의 일은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고생했어. 보상이 확정되면 신전에서 거주민 전령을 보낼 거야.)
이효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흠. 왠지 보상 지급에 시일이 걸릴 것 같다고 들리는데.”
(아마도? 음…. 사실 천사들 사이에서 지급할 보상에 관해 논란이 있는 것 같아.)
“논란?”
(응. 나도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아무튼, 떼어먹지는 않을 테니 걱정은 안 해도 좋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차라리 말을 않거나 교묘하게 돌릴지언정, 천사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니까.
“어련히 알아서 주겠지. 그나저나 서 대륙 사용자한테 수호자 일을 물어봤는데….”
(응? 너 설마 북 대륙 수호자를 아느냐고 물어본 건 아니겠지?)
“장난하냐. 그냥 여기까지 오면서 다른 북 대륙 사용자와 접점이 있느냐 물어봤는데 없다고 하더라고. 만난 건 우리가 처음이래.”
(으음. 역시 연관이 없었던 건가….)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
그 순간 수정구에 비치는 이효을이 잠시 입을 닫았다.
침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우선은…. 어떻게든 찾아봐야지. 지금도 찾고는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효을은 긴 숨을 흘렸다.
(물론 안쪽 도시도 잊지는 않고 있어. 어쨌든 며칠 더 찾아보다가, 정 단서가 안 나온다 싶으면 아틀란타에 신경 쓸 생각이야.)
“그럼 그때 또 연락할 일이 생기겠군.”
(그렇겠지? 도시 발전 지원이나 주요 건물 이전 계획에 관해서 이것저것 논의해야 하니까. 그건 그때 가서 연락할게.)
“그래. 알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동시에 통신을 종료했다. 구슬을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아둔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밖으로 걸어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처음 테라스가 있는 방으로 개축한다고 들었을 때는 ‘굳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이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렇게 바람을 맞고 있으면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도 좋고, 또 연초를 태우기에도 안성맞춤인 공간이니까.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 해 질 녘 도시의 풍경이 언뜻 눈에 들어온다. 상당히 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어디 한 군데 빈 공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고 빼곡하다. 아마 눈에 보이는 태반이 오전에 탐험을 떠났다가 오후 즈음 돌아온 사용자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틀란타에서 탐험을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나?’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귀찮아서 안 나갔다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나가지 않았다.
물론 탐험을 나가는 것도 무조건 나쁘다고 보기는 어렵다. 북 대륙처럼 전부는 아니지만, 아틀란타에서도 여러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 또 굳이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북 도시 내 비밀 도서관의 기록을 활용해 성과를 추적해서 찾을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 있고.
하지만, 나는 다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바라는 게 다르다. 다른 사용자들이 포화한 북 대륙을 벗어나 새로운 성과를 맛보려 강철 산맥을 공략했다면, 나는 조금 더 근본적인 목적에 초점을 두고 있다.
홀 플레인에서 잘 먹고 잘 살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애초 돌아오지도 않았다. 내가 강철 산맥을 공략한 목적은, 테라 공략을 넘어, 다시 한 번 제로 코드를 내 손에 거머쥐기 위해서이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 나는 절대로 이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틀란타는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테라로 진군하고 싶다. 그러나 현재는 ‘약속의 신전’까지 도착할 역량이 안될뿐더러, 형의 말대로 급하게 해봤자 실패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하게 계획을 완성해나가야 한다.
최우선 과제인 도시 정착은 끝났다. 물론 앞으로 못해도 6개월 이상은 더 발전해야 하지만, 그건 우리 머셔너리가 아닌 산하 클랜들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똑똑.
그때였다.
“클랜 로드? 나 들어갈게요~?”
하나하나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 돌연 노크 소리에 이어 상큼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동시 한 여인이 살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런하게 흘러내린 칠흑 빛 긴 생머리와 학을 연상케 하는 쭉 뻗은 다리. 생글생글한 눈매 속, 빨려 들어갈 듯한 심원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제갈 해솔?”
“응? 꽤 멋있잖아. 그렇게 석양을 등지고 서 있으니까.”
“칭찬은 고맙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흥.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보는 사이에요? 서운하게.”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들어오라고 손짓한 후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제갈 해솔은 묘하게 눈웃음을 치더니 골반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별로 성적 매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얘는 차라리 발랄한 게 낫지, 이런 건 별로 안 어울려.
“…오늘은 또 무슨 약을 먹었습니까?”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으나 제갈 해솔은 멈추지 않았다.
“바보 같기는. 생각해봐요. 이런 늦은 시간에 여인이 스스로 사내가 있는 방을 찾아왔다면….”
오히려 내가 앉은 안쪽까지 걸어 들어와 책상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며 다리를 꼬았다. 이어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는 한쪽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뜨기까지.
“…어떤 생각으로 찾아왔겠어요?”
감미로운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속으로 절로 한숨이 나왔으나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하기야 당신 정도의 여인이라면 나쁘지 않겠죠. 그럼 바로 침대로?”
나는 제갈 해솔의 허리를 감아 내 쪽으로 살살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흘끗 시선을 올리자 무언가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후.
퉁 소리와 동시에 왼팔에서 느껴지던 무게가 사라지고, 앞쪽 허공에 제갈 해솔이 나타났다. 이내 아래 소파로 가볍게 안착하는걸 보며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공간 이동 능력은 정말 볼 때마다 신기한 기분이 든다.
“기막혀. 너 정도의 여인이라면 나쁘지 않아? 원래 그러는 성격이에요? 아니잖아요.”
제갈 해솔이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저는 진심인데.”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들먹이자 이제는 숫제 나를 노려본다.
“진심?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제 몸에 손댈 생각은 꿈도 꾸지 마요. 나는 바람기 있는 사내는 딱 질색이니까.”
“그럼 앞으로 쭉 당신만 바라본다면?”
“음~. 그럼 머리카락, 얼굴, 가슴, 팔, 배, 엉덩이까지는 손대도 좋아요. 아. 엉덩이는 그 부분까지 포함해서.”
“…다리는?”
하나씩 꼽아보다가 무언가 하나 빠졌다는 생각에 물었다.
제갈 해솔은 별꼴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두 다리를 움츠렸다.
“어머.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짐승이네. 실망이에요. 클랜 로드.”
“……?”
“그럼 다리까지 만지게 해달라고요? 미안하지만, 그건 결혼하고 나서 허락해줄게요. 저 이래 봬도 나름 혼전순결주의자거든요.”
“…….”
이어지는 “다리는 제 프라이드에요.”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얼굴을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문득 선율과 제갈 해솔을 서로 붙여놓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 두 명이랑 대화하면 꼭 한 번씩은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다.
“됐고. 무슨 일로 찾아온 겁니까?”
“아. 저번에 거절한 거 미안해서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강제도 아니었고, 나도 별로 내키지 않은 의뢰였으니까. 그래서, 사과하려고 찾아온 거?”
“당연히 그것뿐만은 아니죠. 그런데 의뢰 보상은.”
“아직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보상이 궁금해서 찾아온 거?”
“…알았어요. 본론 꺼내면 되잖아요.”
아예 말을 끊어버리자 시무룩해 하는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뿐사뿐 걸어오는 기척까지.
“다른 건 아니고, 이제 슬슬 머셔너리도 변화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서요.”
그 말에 나는 번쩍 손을 내렸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도시 정착 다음 단계인 클랜 발전 계획으로, 예를 들어 클랜원 충원 등등.
제갈 해솔은 어느새 책상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선 이거부터 읽어주시겠어요? 부디.”
이윽고 제갈 해솔은 품에서 A4 용지만 한 기록을 한 장 한 장 꺼내기 시작했다. 이내 쌓이는 양은 상당히 많…. 지는 않고, 네 장에 불과했다.
“이건 뭔가요?”
“머셔너리 클랜 발전 계획. 저자는 제, 갈, 해, 솔.”
제갈 해솔은 명료하게 대답했다.
나는 머리를 갸웃하면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섬세하면서도 유려한 필체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차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빼곡히 적인 기록을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은 그냥 넘겼다. 현재 머셔너리 클랜의 장단점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있기는 하지만, 이건 나도 알고 있는 거니까. 그동안 쭉 지적 받아온 문제였다.
그러나 세 번째 장의 첫 줄을 읽은 순간, 나는 크게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클랜원별 등급제 시행?”
“네. 참고로….”
나는 도로 시선을 올렸다. 제갈 해솔은 다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 계획, 하루 아침 만에 생각한 거 아니에요. 처음 가입한 이후 강철 산맥을 거치고, 아틀란타에 도착해 클랜 로드가 사라진 머셔너리를 보고, 또 클랜 로드 생환 이후까지. 여태껏 쭉 보면서 생각을 정리했죠.”
“음….”
“이제는 머셔너리도 새 옷을 입을 때가 됐잖아요? 그러니까 몸에 꼭 맞는 옷.”
“그럼 지금까지 머셔너리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겁니까?”
날카롭게 물어보자 제갈 해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글쎄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 또 북 대륙에서의 상황은…. 에….”
제갈 해솔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빙긋 웃었다.
“에이, 그냥 말할래. 클랜 로드?”
“듣고 있습니다.”
“이건 제 예상이지만, 이 상태 이대로 계~속 유지하면, 앞으로 머셔너리 절대 발전 못해요.”
“무.”
예상이라는 말을 서두에 두기는 했지만, 한순간 욱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아니꼽다는 기분도 없잖아 들었고.
하지만 나는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다른 누가 들었으면 꼴랑 0년 차의 헛소리라고 들을지 몰라도, 나는 제갈 해솔의 정체를 알고 있다. 사실상 차승현과 반다희만 있던 너도밤나무를 한소영의 이스탄텔 로우와 필적한 클랜으로 키워낸 장본인이 아닌가.
그래. 추스르고 한 번 들어보자. 괜히 이런 계획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계획을 시행하면 머셔너리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건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면 무슨 다른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세요?”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계획해둔 건 있었다.
“클래스별로 조직을 나누고, 각 조직의 수장을 선출해 관리하게 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들어올 신입을 포함해서요.”
“음. 확실히 머셔너리에는 선장이 많으니까요. 항공모함에 모두 담을 수 없다면 구축함을 만들어야겠죠. 필요할 때마다 클랜원 간의 건설적인 교류도 겸사겸사 이루어질 수도 있겠고.”
“…….”
“좋네요. 용병 클랜의 취지를 잘 살린, 무언가 본격적으로 느껴지는 좋은 계획이에요.”
아직 상세한 설명을 하지도 않았는데 제갈 해솔은 곧장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말인즉 집중된 권력을 여러 군데로 분산하겠다는 요지를 대번에 짚어낸 것이다.
“그런데요. 그래도 클랜원별 등급제는 시행하셔야 해요.”
그렇게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거리던 제갈 해솔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나는 기록의 다음 장을 넘겼다. 친절하게도, 제갈 해솔은 직접 클랜원들의 등급까지 평가해서 적어놨다. 나는 EX 등급. 고연주 S 등급. 차소림 A 등급. 안현은 B 등급 등등. 이유정은 D라고 적었다가 찍찍 긋고 C로 적혀 있는 게, 의도적인 오타처럼 보였다. 마치 C도 주기 아깝다는 듯이.
아무튼,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계획이 너무 갑작스럽다. 이걸 이대로 시행하면 반발은 물론, 분명이 문제가 터질 것이다.
“제갈 해솔.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뭐, 계획이 조금 센 건 인정해요. 그런데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도 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클랜 로드.”
그 순간 제갈 해솔이 말을 끊음과 동시에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처음 열 명 남짓한 소수 정예 시절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머셔너리는 어느 순간부터 맞지 않는 옷을 너무 오랫동안 입어왔어요. 그리고 그 결과,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거죠.”
서서히 장난기가 사라지고.
“이제는 선택하셔야 해요. 옷을 조금 수선하는 선에서 그칠지, 아니면 아예 새 옷을 입을지.”
진지한 기색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자신 있습니까?”
“당연하죠. 왜냐면….”
제갈 해솔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이 계획을 실행하면, 현재 머셔너리에서 사라진 두 개의 분위기를 되살릴 수 있으니까요.”
…두 개의 분위기? 머셔너리에서 사라진?
퉁!
그때였다. 또다시 마력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제갈 해솔이 홀연히 책상 앞으로 나타났다.
“그래요. 이왕 말 나온 김에 궁금한 거 하나 물어볼게요.”
책상에 짚은 양손을 천천히 벌리며 등을 낮추더니 나와 정면으로 눈을 맞춘다.
“클랜 로드는….”
말해보라는 의미로,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윽고, 연분홍 빛 입술이 살며시 떼어졌다.
“왜 클랜 내 갈등을 억누르고, 경쟁을 없애셨죠?”
============================ 작품 후기 ============================
오늘 이상하게 조아라가 느린 것 같습니다. 하하.
음…. 그리고 어제 코멘트를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네요.
사라 제인의 진명으로 불쾌하셨던 독자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드립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숙고해서 적도록 할게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