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62
00761 선택의 시간. =========================================================================
가브리엘과 대 천사들이 떠난 걸 확인한 후, 돌연히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난데없이 왜 이렇게 힘든 기분이 드는 건지.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흡사 격한 전투를 치른 것처럼 몸이 노곤하다. 아니면 머리가 어지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제 끝난 건가?
“후우.”
가볍게 숨을 흘리고 몸을 살짝 젖히니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세라프와 눈을 마주쳤다. ‘뭘 봐.’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으나 피로한 관계로 그냥 얌전히 허공을 응시했다. 비밀 상점은 이미 활성화된 상태고 방해꾼들도 떠났고. 이제부터는 신 나고 재미있는 쇼핑 시간이다.
“쿡.”
그러나 목록에 손을 올린 찰나,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흘깃 눈을 돌리니 눈을 살짝 치뜬 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세라프가 보였다. 제 딴에는 조신하게 웃고 싶었던 것 같은데, 사실 약간 무서웠다. 웃는 입이 보이면 그나마 낫기라도 하지. 두 눈만 치켜 뜨고 있으니 이상하잖아. 아니, 애초 왜 웃는 거지?
“이런, 실례했습니다.”
내가 쳐다보는 걸 인지했는지 세라프는 바로 얼굴을 회복했다. 허나 어딘가 모르게 잔잔함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수현은….”
세라프가 살짝 운을 띄웠다.
“정말…. 엄청난 것 같습니다.”
“엄청나?”
“네. 여느 천사는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가브리엘 님을 상대로 그런 모습을 보이셨으니…. 저로서는 그냥 엄청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가브리엘이 그렇게 굉장한가? 아. 물론 천사를 총괄하는 입장인 건 알고 있는데.”
“네. 7대 악마의 수장인 사탄이 유일하게 기탄(忌憚)하는 천사니까요. 물론 가브리엘 님도 사탄을 꺼리는 건 매한가지입니다만.”
“그런가.”
절로 심드렁한 소리가 나왔다. 처음 듣는 말이기는 했으나 별다른 흥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 ‘수현은’이라고 부르는 게 상당히 거슬렸지만,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직 부탁할 것이 남아 있으니까.
목록으로 시선을 돌리자 우측 상단으로 잔여 GP가 눈에 들어온다.
『현재 사용자 김수현의 Gold Point는 20,609,684 Gold Point입니다.』
후후. 정말 좋은 환불이었어…. 가 아니라.
아무리 GP가 많다고는 하나, 두어 개 필수적으로 사야 할 품목이 있는 터라 무작정 낭비할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엘릭서도 슬슬 떨어져 가던가?
우선 엘릭서 6병 정도와 능력치 상승 영약을 구매할 GP, 그리고 하승우 사건과 같은 경우를 대비해 약 600만 GP는 남겨두는 게 좋겠다. 그럼 정확히 14,609,684 GP가 남는데, 이 안에서라면 무엇을 사든지 상관없다. 이후 또다시 비밀 상점을 이용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이번 기회에 모조리 사용하는 게 좋으리라. GP야 또 모으면 그만이니까.
“아.”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불현듯 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세라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또 하나 소개해주지 않았어? 통과의례 입장권 말고.”
“괴물 소환 상자 말씀이십니까?”
세라프의 말이 들려와 나는 곧장 항목을 검색했다.
『괴물 소환 상자 1(1,000 GP)』
『괴물 소환 상자 2(10,000 GP)』
『괴물 소환 상자 3(100,000 GP)』
『괴물 소환 상자 4(1,000,000 GP)』
(설명 : 홀 플레인 전역에 존재하는 괴물을 무작위로 소환할 수 있다. 상자에 각인된 숫자가 높을수록 더욱 강력한 괴물이 소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길 수만 있다면, 사체나 괴물이 착용한 장비를 가질 수 있다.)
“좋은 선택입니다. 이 상자는 최근에 신설된 품목으로, 동서남북 대륙뿐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먼 지역에 돌아다니는 괴물까지 소환할 수 있습니다.”
세라프의 부연 설명이 저번과 비슷하게 이어졌다.
“그때 말씀하신 대로 사용자의 행운에 좌우되는 품목입니다만…. 그래도 운만 좋으면 쉬이 경험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오호.”
“물론 어디까지나 행운이 굉장히 좋아야. …아, 상자는 꼭 구매자가 개봉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 그래.”
세라프가 연달아 행운을 강조하자 속으로 킥킥 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로 대놓고 말해주는데 못 알아듣는 게 병신이다. 그러니까 안솔을 시키면 된다는 소리지?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안솔에게 행운의 영약을 먹인 후 이 상자를 개봉하게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행운 능력치가 105 포인트면 나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하하.
“괜찮네. 이거, 제일 좋은 걸 사는 게 낫겠지? 상자 4번으로.”
“물론입니다.”
“그런데 100만 GP…. 꽤 비싸잖아. 여기에 전부 쏟아 붓기는 좀 그렇지 않나.”
“하기야 지정 소환이 아닌 무작위 소환이니까요. 그래도 차후 구매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참작해, 최소 여섯 개에서 최대 열 개 사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흠. 여섯 개에서 열 개 사이라.
얼마나 사야 할지 약간 고민되기는 했지만, 갈등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좋아. 6개 구입하겠어.”
『괴물 소환 상자 4를 구입합니다(x6).』
『6,000,000 Gold Point가 차감됩니다. 남은 GP는 14,609,684 Gold Point입니다.』
순식간에 GP가 팍팍 줄어들었으나 이상하게도 별로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라프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를 인도할 리는 없고, 안솔을 떠올리면 오히려 기대감이 솟구친다.
여하튼 이렇게 괴물 소환 상자도 구입 완료했고, 어디 보자.
[…….『아르고스의 눈(1,400,000 GP)』
『모이라이의 기념품(55,000,000 GP)』
『앙칼라의 거울 방패(700,000 GP)』
『성흔의 증표(500,000 GP)』
…….]
흥미를 끄는 품목이 꽤 있는데, 뭘 구매해볼까?
“…응?”
그때였다. 상념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니 문득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한 은발이 흘러 넘치는 고개가 열심히 품목을 들여다보고 있다. 흘끗 시선을 내리자 내 왼팔을 살며시 부여잡고 있는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보였다. 당연히 세라프였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지만, 왜 멀쩡한 제단을 놔두고 내 옆으로 붙은 거지? 이러니까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러니까 마치 서로 사이 좋게 팔짱 낀 채 마트에서 장을 보는….
“수현.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장비도 업그레이드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 세라프가 내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 어? 글쎄?”
“무기야 딱히 필요치 않다손 쳐도…. 제가 알기로는 2년 전 전쟁으로 노블 미스릴 셔츠와 푸른 용기사의 외투가 파손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
“그럼 이번 기회에 장갑(裝甲)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마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물리 방어력을 고려하셔서요.”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재 착용 중인 하늘, 태양의 영광에 큰 불만은 없지만, 내구력은 둘째치고서 라도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왔다. 물론 그래도 좋은 장비임은 분명하나, 아무래도 거미 실로 만들어진 도복이다 보니 갑옷보다 물리 방어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찌르기 공격에는 상당히 취약한 면도 있고.
결국 세라프의 말인즉, 이미 충분한 마법 저항력보다는 물리 방어력에 신경을 쓰라는 소리였다. 현재 최고의 보호구인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있기는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로 사용해야 한다. 마력 소비량이 정말로 엄청나니까. 금번 원정에서 확실하게 느꼈다.
“그것도 좋지. 쓸만한 게 있나 봐?”
“물론입니다. 무검도 비밀 상점에서 구매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근데 너무 비싸지 않을까?”
“GP는 이미 충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장갑 전체는 투구, 갑옷, 건틀릿, 부츠 등등이잖아. 부담스럽다고.”
“…….”
일리 있는 말이라 여겼는지 세라프는 잠시 입을 닫았다.
“확실히…. 품목이 많기는 합니다.”
“애초 건틀릿은 바꿀 생각도 없다고. 여하튼 꼭 전부 여기서 맞출 필요는 없잖아? 아까 상자도 있으니까.”
다른 좋은 건틀릿도 많겠지만, 현재 착용하고 있는 『TOPG』도 절대로 어디서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다. 근력 능력치를 무조건 올려주고, 액티브 어빌리티가 잠재된 건틀릿이 어디 흔한가? 비록 조건부 발동이기는 하지만 서도.
세라프는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전체가 아닌 일부만 여기서 보강하시는 건?”
“일부?”
“나머지는 외부 활동으로 장만하시고, 가장 중요한 갑옷이나 망토. 혹은 장신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현재 수현의 사용자 정보를 고려해 가장 적합한 품목을 추천할 수도 있습니다.”
“어…. 그러던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세라프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느껴졌다. 도와주지 못해 안달 난 이를 보는 듯하달까?
“갑옷은 무조건 저번에 봐둔 걸로…. 이 망토는 성능은 좋은데, 갑옷과는 심히 어울리지가…. 위엄도 중요하니…. 그리고….”
“아니, 꼭….”
“아, 찾았습니다. 수현? 이것들 좀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
…잠깐만.
방금 ‘당신한테는 이게 제일 어울릴 것 같아요.’ 라고 느꼈다면 내 착각이겠지?
허나 나를 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면 착각이 아닌 것 같다.
그래. 이건 마치 부인이 남편을 데리고 이것저것 골라주는 행동과 흡사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우리가 무슨 커플이나 부부도 아닌데, 저렇게 즐겁고 행복해하는 걸 보면 심히 부담스러워진다.
“…수현?”
아차.
왠지 여기서 당황하면 지는 것 같아,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눈앞에 집중했다.
『치우천왕의 갑옷(5,400,000 GP)』
『붉은 달의 망토(1,400,000 GP)』
『라실라스의 축복(900,000 GP)』
그러나 출력된 목록을 확인한 순간, 나는 뜨악 할 수밖에 없었다.
단단해 보이는, 멋들어진 칠흑색 상하 일체형 갑옷. 맑고 붉은 월광이 은은히 흐르는 고풍스러운 망토. 그리고 아름답게 세공된 브레이슬릿. 확실히 외견상 좋아 보이기는 한다.
허나 총 합해서 770만 GP는 무슨 개념이지. 갑옷도 엄청나게 비싸고, 망토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작은 팔찌 주제에 무슨 90만 GP나 하는 거야?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팔찌이기는 합니다만, 괜히 추천해 드린 건 아닙니다.”
이런, 들렸나?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모양이다.
“수현 우선은 설명을.”
재촉처럼 느껴지는 권유에 나는 천천히 설명을 훑기 시작했다.
“흠….”
“어떻습니까?”
“응, 괜찮네. 마음에 들어.”
“다행입니다.”
솔직한 감정을 말하니 세라프는 부드러이 웃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심사숙고했으나 결국에는 모두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확실히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성능이 좋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까와 비슷한 이유였다. 어차피 GP를 모두 소모하기로 마음먹었거니와,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성능의 장비 여러 개를 사느니, 하나라도 확실한걸 구매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치우천왕의 갑옷을 구입합니다.』
『붉은 달의 망토를 구입합니다.』
『라실라스의 축복을 구입합니다.』
『7,700,000 Gold Point가 차감됩니다. 남은 GP는 6,909,684 Gold Point입니다.』
이제 남은 GP는 약 690만. 그러나 필수 구매 품목에 사용할 600만을 남겨야 하는 걸 생각해보면 가용 가능한 GP는 90만 정도였다. 세라프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는지 더는 간섭하지 않았고, 나는 남는 GP도 소모할 겸 혹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을까 자세히 목록을 훑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확실히 구매 범위가 좁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만한 건 있었다. 나는 우선 여러모로 유용하겠다고 판단한 『속박의 볼라(750,000 GP)』를 구입했다. 이어서 요즘 겁 없이 덤벼오는 여인네들을 혼내주는데 매~우 도움이 될 것 같은, 『정(精)의 반지(100,000 GP)』를….
“수, 수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 반지는 왜….”
뒤늦게 저지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잽싸게 구입을 마쳤다. 그러자 세라프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자, 이제 남은 GP는 끽해야 5만 정도인가?”
“수현?”
“후, 겨우 다 썼네.”
“사용자 김수현?”
…젠장. 그래, 알고는 있다. 세라프의 성격상 분명 합리적인 구매가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고, 나도 쑥스러운 마음이 없잖아 있다.
허나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장비를 새롭게 맞추는데 얼마나 많이 투자했는데, 10만 GP 정도는 나를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잖은가.
뭐, 아무튼.
그렇게 필수 구매 품목을 제외한 쇼핑을 마치니 비로소 미뤄뒀던 보상이 떠올랐다.
이제는 더 이상 신경 쓸 것도, 지체할 이유도 없어졌다. 가슴이 서서히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라프.”
“…….”
“쇼핑도 일단락 지었고, 이제 각성 시크릿 클래스 목록을 보여주겠어?”
“…….”
“…세라프?”
“네. 알겠습니다.”
쌩, 찬바람이 지나치는 듯한 목소리. 허나 별로 나쁘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지금부터는 방해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은 지금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나도 잃은 게 없지는 않다. 그저 피해를 최소화했을 뿐, 포기한 부분도 있으니까.
그런 만큼 이제부터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생각한 것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도 있다.
나는 두근두근 설레는 가슴과, 긴장으로 요동치는 심장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심안 덕분일까.
마음은 곧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고요해졌다.
잠시 후.
“각성 시크릿 클래스, 개방 완료했습니다.”
서서히 눈을 뜨자, 총 10개로 이루어진 항목이 눈앞에 출력돼 있다.
그리고 시선은,
『각성 시크릿 클래스(Arousal Secret Class) 목록』
1. [검의 군주(Sovereign Of Sword)]
2. [강철의 여황(女皇)(An Empress Of Iron)]
3. [위대한 개척자(Grand Pathfinder)]
4. [신성 투사(Sacred Champion)]
5. [천궁(天弓)]
6. [혼돈의 황녀(A Royal Princess Of Chaos)]
7. [복마전(伏魔殿)의 성인(聖人)(Saint Of Pandemonium)]
8. [마도 황제(魔道 皇帝)]
9.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0. [백야(白夜)의 무희(舞姬)]
“이건….”
자연스레 한 곳으로 고정됐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후기 생각하다가 깜빡 졸 뻔했네요.
지금 조금 한계인 것 같아서,
우선 약간이라도 자고 오겠습니다.
기다리신 분들에게는 정말로 죄송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