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89
00788 최후의 기록. =========================================================================
문을 연 순간 불현듯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내부에서 우리를 반긴 건 봉인 장치도 악신도 아니었다. 크고 둥근 얼음 공동(空洞)이 눈에 들어왔다. 있는 거라고는 정면 방향으로 보이는 작은 제단 하나. 그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에 흐르는 한기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허탈하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 장소가 정말로 신녀곡이라는 말인가?
“우선 수색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딘가 비밀 장치가 있을 가능성이….”
차소림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말했으나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서너 번 감지를 돌렸으나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문도 보이지 않는다. 말인즉 이 장소가 신녀곡의 중심 지점인 것이다. 그래도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이제 남은 건 저 제단뿐. 저기서 단서를 얻지 못하면 차소림 말대로 비밀 장치를 수색해야 할 판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냥 제단이 아니라, 관처럼 생긴 것이 제단에 올려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혀, 형님.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히 열었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거나….”
진수현의 목소리에 잠깐 갈등이 일었지만,
– 괜찮으니까 열어.
화정의 보증에 망설임 없이 한쪽 끄트머리를 손으로 잡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꽝꽝 엉겨 붙었는지 딱딱한 느낌이 전해졌으나, 힘껏 힘을 주자 얼음 갈리는 소리가 나며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상황은 똑같았다. 기껏 문을 뜯어냈음에도 관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간 갇혀 있던 냉기가 허연 김을 피우며 올라올 뿐, 텅 비어 있었다.
“…….”
오묘한 침묵이 감싸 안는다. 동료들은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표정이었으나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서서히 막막한 기분이 엄습했다. 여기서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는 소문은 들은 기억이 없다. 무언가 단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혹시….
내가 잘못 짚은 건 아닐까?
“세상의 구원과 안녕을 기원하여.”
그때 앞에서 들려온 차가운 음성에 나도 모르게 눈을 들었다. 근원은 내가 들어 올린 얼음 뚜껑의 안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쳐다보더니 하얀 김이 어른거리는 면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안쪽에 장문의 글이 기록돼 있습니다.”
“장문의 글이 기록돼 있다고?”
“그렇습니다. 손상된 부분은 있으나, 읽는 데 크게 무리가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무슨….”
반사적으로 손을 뻗자 확실히 느껴졌다. 손끝으로 툭툭 걸리는 느낌이 이어졌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얼음에 새긴 듯했다.
“계속 읽습니까?”
“그, 그래 봐.”
얼떨결에 머리를 끄덕이자 다시 눈을 돌린 근원은 조용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신녀곡에서 피어난 꽃은 스스로 시들어 떨어졌네요.
꽃을 찾아온 이들이여.
현 세상은 과연 어떤가요.
안녕한가요.
다행이네요.
그러면 기억은 하시나요.
저를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로 이 외진 곳을 찾아오셨나요.
돌아가세요.
사실 원래는 남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만에 하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또다시 하늘이 어두워졌다면,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보세요.
낮이라면, 아직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밤이라면,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를 배제할 수 있다면.
선이 사라지고 악이 먹혀 잠든 장소는
그대의 눈앞에 나타날 거예요.
그곳에서 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절대로 무언가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저를 깨워주시는 걸로 충분하답니다.
그럼,
부디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긴말을 마친 근원은 끝났다는 듯 입을 닫았다. 중간중간 연결이 조금 어색했으나 아마 손상된 부분인 듯싶다.
무슨 말인지 100%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모종의 가능성이 트였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홀연히 관을 도로 닫았다.
“클랜 로드?”
누군가 붙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몸을 돌려 우리가 들어온 통로로 도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뛰었다.
“용족화.”
얼음 통로를 헤치고 나가 곧바로 날개를 펼쳤다. 노을 빛 허공을 가르며 주변을 둘러봤으나 수상한 건 보이지 않는다. 설산을 둘러싼 산등성이의 외부는, 잔잔한 물결이 흐르는 바다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까 잠깐 나약한 생각이 들었으나 더 이상은 아니었다. 비록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관 짝에 새겨진 기록을 보고 확신이 되살아났다. 그래. 간신히 알 것 같다. 1회 차의 기억은 틀렸던 것이다. 아니, 틀린 게 아니라 애초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조금 전 들어간 설산은 신녀곡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직 신녀곡을 찾은 게 아니었다.
새삼 그 백야의 무희라는 여인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아득한 미래를 예상하고 대비책을 남겨뒀다. 비록 기록 뿐이기는 했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최소한 잘못 짚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됐으니까.
“…….”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인데. 우선은 하나씩 되새겨보자. 전부 되짚을 필요는 없고 중요한 부분만….
‘또다시 하늘이 어두워졌다면,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보세요.’
가장 높은 곳. 이 부근에서 가장 높은 장소라고 하면 한 곳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곧바로 날개를 움직여 설산의 꼭대기로 이동했다. 여기서 바다를 보라는 뜻이겠지?
‘선이 사라지고 악이 먹혀 잠든 장소는….’
그 장소가 바로 진정한 신녀곡일 것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붉은 황혼 빛을 반짝이는 바다는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게다가 바닷물이 굉장히 투명하고 깨끗해, 수면에 설산을 거꾸로 비추는 게 인상적이다. 단, 그뿐이었다. 안력을 높이고 이리저리 둘러봐도 딱히 눈에 걸릴만한 건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절대로 무언가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저를 깨워주시는 걸로 충분하답니다.’
이건…. 그 여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일까? 아니, 우선은 젖혀두자. 가보면 알 일이니까. 신녀곡을 찾는 게 급선무다.
‘그럼, 부디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이게 끝이었나?
스멀스멀 올라오는 초조감을 삼키며 천천히 머릿속을 곱씹는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바다를 보라…. 가장 높은 곳에 올라…. 가장 높은 곳….
‘낮이라면, 아직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바다.
‘밤이라면,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를 배제할 수만 있다면.’
이 거대한 설산을 그대로 복사해 붙여넣기 한 듯 비추는, 맑은 수면.
‘…그대의 눈앞에 나타날 거예요.’
그 순간.
“……!”
바다에 비치는 설산을 바라본 찰나, 나도 모르게 끓는 듯한 신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레 찾아온 강렬한 충격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나는 한 번 더 주변을 돌아보고 다시 바다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있는 장소는 설산. 그러나 설산의 아랫부분은 분명히 산등성이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다. 만일 저 바다가 설산을 비춘다면, 왜 산등성이는 보이지 않는 걸까?
이제야,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 그러네. 그림자를 배제할 수만 있다면…. 이게 가장 큰 핵심이었어.
그래. 화정의 말대로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기록이었다.
– 일단은 가보자고. 가면 나도 확실해질 것 같거든.
화정이 재촉했다. 어차피 더 미적거릴 이유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공중으로 있는 힘껏 뛰었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슴은 어느새 가득 차오른 긴장감 때문일까. 아니면 1회 차에서도 풀지 못했던 신녀곡의 비밀을 비로소 풀어냈다는 설렘 때문일까. 바다가 점차 가까워질수록, 수면 속으로 보이는 새하얀 산도 점차 선명해진다.
나는 그대로 바닷속으로 빠져들었다.
*
– 풍덩!
무언가 깊은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무거운 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울렸다.
소리는 뚜렷하지 않았다. 마치 억지로 통신을 연결한 것처럼 노이즈가 섞인 소음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어둠에 몸을 묻은 청년은 외려 흥미로운 눈으로 허공의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일렁이던 파문이 서서히 잦아들 즈음.
“아, 이런.”
청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정수리에 돋은 두 개의 뿔을 부여잡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들켰잖아.”
살짝 드러난 청년, 아니 루시퍼의 얼굴은 무척이나 묘했다. 낯에는 진한 낭패감이 서려 있었으나,
“이야. 이것 참, 엉터리 같은 일이잖아? 벨제부브나 아스모데우스를 탓할 게 아니었어.”
두 눈만은 빙글거리며 웃고 있다. 마치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상기된 어조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후, 루시퍼는 곧장 몸을 일으켰고, 황급히 영상을 지나쳐 어딘가로 걸었다. 그곳에는 예의 무수한 사슬과 허공에 묶여 매달린 악마 여인이 있었다. 걸음을 멈춘 루시퍼는, 슬픈 빛을 띤 상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미안해. 프로세피나.”
프로세피나(Proserpina). 14 군주 중 일 좌를 차지하는 고위 악마이며 ‘저승의 여왕’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다. 또한 김수현에게 살해 당한 플루톤의 아내이기도 했다. ‘마족’이 아닌 ‘악마’라는 사실만으로도 저 여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인즉, 저기 얽히고설킨 사슬에 묶여 떠 있는 여인이 바로 14 군주급 악마라는 소리였다.
“웬만하면 네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잖아? 응?”
문득 말끝을 흐린 루시퍼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러나 곧 신색을 회복하더니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프로세피나를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약속할게. 이렇게 너를 제물로 바치지만, 네 바람은 무조건 이루어질 거야. …무조건.”
그렇게 말한 루시퍼는 엄지와 중지의 끝 마디를 붙였다가 잠깐 멈칫했다. 아무리 루시퍼라도 악마 14 군주를 마냥 제물로 사용하기에는 아까웠던 걸까. 그러나 잠깐 눈을 돌린 사이, 영상 내 잠잠해졌던 수면에 파문이 도로 이는 걸 보고는 입을 질근질근 짓씹었다.
“자아, 김수현….”
이를 악물어서 그런지, 그르렁거리는 야수와 같은 음성이 흘러나온다.
“어디 한 번 미친 악신을, 내가 만든 무대를! 이번에도 멋지게 평정해보라고…!”
딱!
마침내 루시퍼의 말이 끝나는 동시, 힘차게 손을 튕기는 소음이 공간을 왕왕 울렸다.
그 순간이었다.
차르르릉, 차르르릉!
차르르릉, 차르르릉!
불현듯 프로세피나를 꽁꽁 옭아매던 사슬이 일제히, 무서운 속도로 풀리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철그렁, 철그렁!
그리고 루시퍼의 웃음과 사슬의 철성(鐵聲)이 동시에 겹쳐 울린 순간,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심연 속에서 흘러나온 듯한 웅혼한 울음이, 황혼의 바다에 길게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