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18
00817 사멸 무저갱(死滅 無底坑). =========================================================================
결국, 전문가들도 소식이 끊겼다고 결론이 나오고 말았다.
오늘 회의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병사들을 들여보내 보자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으나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다.
병사들도 심상치가 않다. 이미 적국의 수도를 점령했는데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순간 발끈할 뻔했으나 나보고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늦게까지 이어진 회의를 끝내고 침소로 돌아오니 침대에 죽은 짐승이 이불 안으로 놓여 있었다.
…과연 어떤 놈이 한 짓일까.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
눈을 찌푸린 고연주는 집어 던지듯 사내의 멱살을 놓고 걸어왔다. 오른손에는 쌈지 같은 것이 줄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고연주는 주머니 입구를 살짝 벌리며 내밀었다.
“이거요. 혹시 뭔지 아시나요?”
스리슬쩍 들여다보니 그득히 쌓인 분홍 가루가 보였다. 주머니의 약 삼 분의 이 정도 채워져 있었다. 아까 화살 끝에 달려 있던 건가.
뭔지 궁금해 살짝 냄새를 맡아보니 달콤한 향기가 순식간에 콧속을 찔렀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신속히 머리를 멀찍이 떨어트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서 까닭 없이 경종이 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향은 코를 타고 들어와 빠르게 퍼지려 했으나 화정의 힘을 일으켜 곧바로 정화할 수 있었다.
“콜록, 콜록!”
두어 번 기침하고 눈을 들자 고연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역시 수현에게는 통하지 않는군요.”
“이건…?”
“미약(媚藥)이에요.”
“미약?”
“네. 단 보통의 미약은 아니죠.”
“……?”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가는 눈으로 다시 놈들을 째려봤다.
“수현. 혹시 아프로디지아라는 약초를 아세요?”
아프로디지아? 그런 약초는 1, 2회 차를 통틀어 나도 처음 들어보는데.
머리를 가로젓자 고연주가 말을 잇는다.
“애초 아는 사용자가 별로 없기는 해요. 이 가루는 아프로디지아라는 약초로 조제한 약이에요. 구하기도 엄청나게 어렵지만, 조제 방법도 굉장히 까다롭거든요. 저도 한창때 이걸 사용해본 적은 한 번밖에 없어요. 위험해서 잘 안 쓴 것도 있고 없어서 못 쓰기도 했죠.”
“효과가 좋나 봅니다?”
“좋으냐고요? 끝내주죠. 살아 있는 가루라고 불릴 정도인데요. 아주 조금이라도 흡입하는 순간 10초 안으로 온몸으로 퍼지니까요. 그때부터는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만이 남아 있게 되죠. 거기다 내외적으로 열기와 반응하면 퍼지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져요.”
“…….”
그래서 아까 불덩이를 무차별적으로 발사한 건가.
한창때의 고연주라면 아마 살문 시절을 말하는 듯싶다. 말인즉 우리를 습격한 놈들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소리다. 하기야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대놓고 저격했을 리가 없겠지.
“더욱 무서운 건 현재까지 알려진 해독 방법이 없다는 거죠. 물약도 주문도 어떤 것도 소용 없어요. 오직 죽기 직전까지의 성교로 간신히 가라앉히는 방법뿐….”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럼 만약 저 가루에 당했다면….”
“글쎄요? 수현이 있으니 당할 리는 없지만, 만약 당했다면…. 가루가 흩어지기까지는 약 5분에서 10분 정도 걸리니까….”
중얼중얼하던 고연주는 돌연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죽일 듯한 눈초리로 중앙에 묶인 놈들을 노려봤다.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열 받네.” 라며 나를 흘겼다.
“듣고 싶어요?”
“아니요. 됐습니다. 아무튼, 위험한 거라니 이건 제가 맡아두도록 하죠. 그렇게나 강력한 가루라면 분명 좋은 곳에 사용할 수 있겠지요.”
쌈지를 건네받고 품으로 밀어 넣자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연주, 남다은, 정하연, 임한나…. 네 여인이 낯을 살짝 붉힌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이기지 못해 입을 열었다.
“잠시만. 그런 식(?)으로는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한별과 이유정이 섭섭하다는 눈초리를 보내왔다. 아니. 너희는 또 뭐가 서운한 건데.
여하튼 부수입도 얻었겠다. 이제는 처분을 결정해야 한다.
“우선은 좀 알아보는 게 낫겠죠? 워낙 꺼림칙해서리.”
얼른 유혹의 눈동자를 사용하고 싶은지 고연주는 오른손을 야릇하게 놀리면서 말했다. 나는 능력의 사용을 허락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습격당한 이상 곱게 살려 보낼 생각은 없다. 어차피 대부분 죽일 생각이다. 물론 살릴 필요가 있으면 살려두겠으나 그것도 필요한 놈들에 한해서고. 그걸 알고 있기에 저놈들도 체념하고 침묵하는 것일 터.
그러나 고연주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열이 오른다. 왠지 곱게 죽여주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다.
“응?”
그때 공교롭게 눈에 걸린 게 하나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비비앙이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며 손톱을 깨물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아직까지 거품을 부글거리는 철통 하나.
그 순간.
“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불침번을 걷어차 깨웠고, 경계를 소홀한 죄로 야영지를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이유정과 진수현은 어슬렁어슬렁 일어나면서도 나직이 투덜거렸다. 왜냐면 야영지 한쪽으로 총 스물여덟 구의 시신이 알몸인 채로 가지런히 쌓여 있었으니까. 아마 처리하려면 꽤나 고생할 것이다.
어젯밤 습격에 관한 별반 소득은 없었다. 늦게까지 심문했으나 결국 모두 처형하는 것으로 매듭짓고 말았다. 말을 걸어도 묵묵히 묵비권을 행사했고 유혹의 눈동자로도 딱히 이거다 싶은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제 3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하나 건진 게 있다면 우리가 머셔너리 클랜인 걸 알고도 습격을 감행한 거라는 사실.
단, 중간에 한 번 담담히 죽음을 기다리던 태도가 변하기는 했다. 정확히는 비비앙이 만든 음식을 먹였을 때부터.
놈들은 처음에는 음식을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억지로 입을 벌리고 강제로 집어넣자 곧바로 신호가 왔다. 글쎄. 그 표정을 도대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려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두 그릇, 세 그릇을 계속 퍼 넣자 반응도 시시각각 변했다. 두 그릇째에는 욕을 했고(정확히 말하면 어디서 이런 개 좆 같은 음식을 먹이느냐고 했다.), 세 그릇째에는 울며불며 애걸했다. 잘못했다고, 제발 이러지 말라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적어도 인간답게 죽고 싶다고.
그러나 멈추지 않고 네 그릇째를 퍼 넣자 갑자기 조용해지는 놈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약물(?)을 과하게 남용한 나머지 정신 줄을 놓아버린 것이다. 아무리 건드려도 반응이 없어 결국에는 그 상태로 안식을 내렸다.
여하튼 어쩌면 부랑자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우선 원정 중 일어난 소소한 해프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우선은, 이지만.
시신을 소각하고 야영지까지 완벽하게 정리한 후 우리는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고연주와 임한나는 혹시 또 비비앙이 한다고 할까 봐 발 빠르게 끼니를 준비했고, 덕분에 정상적인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는 조금의 시간 낭비 없이 바로 출발을 알렸다.
맑은 날씨와 쾌청한 하늘 아래, 우리는 수림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수림은 갈수록 더 깊어졌다. 사방이 빽빽한 나무와 우거진 수풀로 뒤덮인 것이 초원에서 줄곧 보던 트인 풍경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거기다 수풀이 허리까지 닿는 곳도 있어 행군 속도도 자연스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수림은 점차 투박한 정도를 넘어서 살벌하다 느낄 만큼 꺼치러워졌다. 길은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고, 이제는 동서남북 방향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임한나는 처음에는 자신감 있게 우리를 이끌었지만, 조금씩 걸음이 느려지더니 종래에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디디기 시작했다. 신중한 건 좋으나 너무 속도가 느린 탓에 중간에 내가 선두로 나섰다.
어차피 두 번의 수송 어빌리티 이후 목적지에 거의 근접한 상태였다. 그리고 장소도 대충 알고 있겠다. 나는 무검을 휘둘러 억세게 성긴 수풀을 잘라내며 전진했다. 그러자 조용히 따라오던 클랜원들도 한 명 두 명 무기를 들어 보다 적극적으로 길을 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 와중 돌연히 빼욱하던 숲이 일시에 사라지며 걸음이 편해졌다. 머리를 들자 눈앞으로 불현듯 약 100미터 정도 돼 보이는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검게 그을린 수풀이나 비뚜름하게 베인 나무가 종종 보이는 것이 아마 앞서 들어간 사용자들이 벌인 짓인 듯싶다.
“도착했어요?”
누군가 나직이 물었으나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아니고 조금 더 가야 하지만, 거의 도착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장애물도 사라졌겠다. 나는 약 5분을 느긋이 행군해 공터를 가로질렀고 다시 수림이 막아서기 직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을 펴 조용히 정면을 가리켰다. 다시 나타난 수림 속에는, 수풀과 나무에 가린 적당한 크기의 언덕 하나가 조용히 솟아 있었다.
“응? 어디? 어디?”
“저거 아니야? 언덕.”
등 뒤로 몇몇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나조차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쳤을 정도로 언덕은 주변 풍경과 동화돼 있었으니까.
운 좋게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 공터도 빽빽한 수림이었을 테니 이래서야 여태껏 드러나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단순한 착시 현상이라기보다는 아마 마법적인 처리가 가미된 게 아닐까 싶다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언덕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언덕의 둘레를 따라 돌자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갱도(坑道) 비슷해 보이는 입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행군을 멈추고 부근을 둘러싸 입구를 응시했다.
흙으로 된 입구는 높이가 약 5미터 정도 돼 보였으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조금씩 좁아지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안력을 높여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블랙홀처럼 막막한 어둠만이 아스라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마치 이대로 목구멍까지 넘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확실히 들어간 흔적이 여럿 보이는데 나온 흔적은 거의 없네요.”
고연주는 어느새 입구 가까이 다가가 땅을 살피고 있었다. 김한별이 조금은 불안한 기색을 비쳤다.
“나온 흔적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니. 하나도 없지는 않고. 하지만….”
“하지만…?”
“글쎄. 어디까지 들어갔다가 나왔는지는 이제 우리가 들어가 보면 알겠지. 초입만 서성거리다가 나온 거면 별 의미 없는 흔적이니까.”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쭈그린 몸을 일으켰다. 클랜원들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서히 긴장감이 올라오는 모양이다.
이윽고 나는 정비를 명목으로 잠시 휴식을 지시했다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겠습니다. 모두 진형을 잡아주세요.”
그러자 클랜원들도 한 명씩 주섬주섬 일어나 각자 적당한 위치를 잡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지켜보다가 뒤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여인을 보고 입을 열었다.
“임한나. 교대하자.”
“응?”
“교대하자고. 선도를 부탁해.”
“내가…? 아, 응. 그래야지.”
바로 납득하기는 했지만, 임한나의 낯빛에는 약간 떠름한 낯빛이 섞여 있었다. 마치 자신도 왜 뒤로 걸어갔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비단 임한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어색한 눈초리들이 알게 모르게 느껴졌다. 그 시선들은 임한나가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억지로 떨쳐냈다.
“…그럼 진입하겠습니다.”
나는 중앙에 키퍼로 자리를 잡고 나직이 출발을 알렸다.
잠시 후.
흙 계단을 내리밟는 발소리가 고요하고 어두운 갱도를 울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예고 시간보다 16분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오늘 집필 거의 후반부에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모두 진형을 잡아주세요.” 라고 타이핑을 하는데, ‘진형’을 치다가 갑자기 “들어가겠습니다. 모두 진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렇게 ‘ㅎ’가 쭉 이어지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엔터, 스페이스, 백 스페이스 바를 연타했는데 무려 9페이지까지 이어지고 나서야 겨우 멈췄습니다. 그 페이지는 모조리 ‘ㅎ’로 도배돼 있었고요. 사실 오류일 수도 있는데 쭉 내려보니까 왠지 모르게 섬뜩하더라고요. 막 히히히히 이렇게 웃는 것 같고….
마침 그때 공기가 안 좋아서 환기할 생각에 창문을 열어뒀는데, 자꾸 신경이 쓰여 옆을 흘끔거리면서 집필하고 있었거든요. 예민한 걸 수도 있겠지만, 제가 무서운걸 보거나 읽는 건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짜 질색할 정도로 싫어해서요(?). 그래서 그런지 괜스레 신경이 쓰이네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