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19
00818 사멸 무저갱(死滅 無底坑). =========================================================================
오늘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전쟁은 끝났다고. 그리고 도망친 발칸 놈들의 추적이나 병사들을 은신처로 들여보내는 것도 중지하겠다고.
부장들은 정말이냐고 계속 되물었으나 내심 기쁜 마음은 감추지 못한 것 같다.
물론 나는 아직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다.
정확히는 ‘우리’가 직접 놈들을 추적해 잡는 건 포기했다.
하지만 꼭 우리가 직접 잡을 필요는 없잖아?
아니. 무조건 사람이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오늘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괴물들을 잡아오라고.
주로 ‘언데드’나 혹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흐흐흐흐.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려가고는 있었으나 계단은 상당히 길었다. 시간은 10분 정도, 거리는 250미터쯤 지난 것 같은데 아직 문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빛이라고는 한 톨도 들어오지 않아 주변은 침침하다 못해 새카만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흡사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 마침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김한별이 조용히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 ────. 애주라이트 화이트(Azurite White). 라이트(Light).”
잠시 후, 캄캄하던 시야가 일시에 확 밝아졌다. 주먹만 한 구체가 눈 부신 빛을 비추며 위로 떠오른다. ‘보석 증폭(Jewel Amplification)’을 사용해서 그런지 구체는 보통 라이트 마법보다 갑절은 밝은 빛을 뿜었다. 김한별이 살짝 지팡이를 휘젓자 구체는 허공을 둥실둥실 유영해 앞으로 이동했다. 아래의 시야가 확보되자 임한나가 후, 숨을 흘리며 상냥히 웃었다.
“고마워. 많이 긴장하고 있었는데 한결 나아.”
“응? 긴장? 왜 긴장을 해?”
비비앙의 반문에 다시 흙 계단을 내리밟으려던 임한나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살그머니 돌아본 눈동자에는 어색하고 불안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혹시, 나만 이상한가?”
“이상해?”
“응. 그러니까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계단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계단이 아닌 부분을 밟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상당히 거슬려.”
“…그게 무슨 소리야?”
비비앙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고, 임한나의 감에 속으로 감탄했다. 그래. 명색이 궁수인데 이 정도도 예민하지 못해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도 알고 있다. 왜냐면 이미 제 3의 눈을 활성화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별로 이상하지 않은데요? 밟는 느낌도 확실한데. 이거 보세요.”
그때 진수현이 앞으로 성큼성큼 나서더니 계단을 마구 밟기 시작했다. 퍽, 퍽! 발과 계단이 부딪을 때마다 딱딱한 흙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째로 부딪쳤을 때였다.
우지지직!
돌연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계단에 종횡(縱橫) 방향으로 커다란 금이 생겼다. 크게 기함한 진수현이 황급히 발을 떼고 물러났다. 그러나 생성된 균열은 이미 천천히, 허나 가일층 가속을 붙이며 사방으로 번져가는 중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약관화(明若觀火).
“야 이 미친놈아!”
“아, 아니! 내가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됐으니까 어서 달려야…!”
“너무 늦어! 한별아, 해솔 씨! 어서 보호막을…!”
곧 추락할 것을 예상했는지 클랜원들은 삽시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 ────.”
혼란한 와중 언뜻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애티는 벗지 못했으나 일말의 고저도 보이지 않는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근원이 머리에 비해 커다란 고깔모자를 살짝 든 채 빠르게 입속말로 웅얼거리고 있다.
“피드백(FeedBack)!”
짧지만 강렬한 외침. 근원이 왼손에 든 혼돈의 솜니움으로 흙 계단을 살짝 쳤다. 그러자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이 위태위태하던 계단이 갑자기 멈췄다. 아니. 정지한 것도 모자라 사방의 금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이 도로 닫히고 사방팔방 번졌던 균열이 진원으로 되돌아온다. 흡사 시간을 되감기라도 한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십 분입니다.”
근원은 고깔모자를 푹 눌러쓰며 입을 열었다.
“십 분?”
“이 계단은 마법으로 생성된 마력 계단입니다. 침입자가 중간을 건넜을 즈음 스스로 무너져 떨어트리게 하고, 이후 추락한 생물을 낙석으로 처리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말인즉 진수현의 발길질은 어쩌다 딱 맞아떨어진 우연에 불과하며 10분 후에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소리였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우리는 얼른 진형을 가다듬고 아래로 빠르게 내달렸다. 중간에 흙이 튀는 소리가 까닭 없이 불길하게 들렸으나 약 5분이 지났을 즈음 다행히 문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높이는 2미터 정도 될까. 온통 흙으로 이루어진 천지에서 홀로 퇴색된 철문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잠시만….”
임한나도 그렇게 느꼈는지 철문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허나 별 이상한 건 발견 못 한 듯 곧 문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고개를 돌렸고, 정하연이 보호 주문을 걸어주자 힘주어 문을 밀기 시작했다. 끄긍, 끄그그긍! 녹슨 소음이 고요한 갱도를 울렸다.
모두가 경계하는 가운데 마침내 문이 활짝 열렸다. 마침내 사멸 무저갱의 초입을 눈앞에 뒀다.
내부도 역시나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김한별은 앞서 생성한 구체를 안으로 들여보냈고, 정하연과 제갈 해솔도 이어서 라이트 주문을 외웠다. 시야를 확보한다손 쳐도, 원래는 주문 낭비라고 생각될 행동이었지만, 두 명 모두 더블 캐스트(Double Cast) 이상을 할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윽고 내부가 환하게 밝아지자 임한나는 두리번거리며 느릿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두어 걸음 걷기도 전 또 한 번 걸음을 멈췄다. 왼쪽을 바라보는 임한나의 이맛살이 와짝 찌푸려지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맙소사….”
“무슨 일이지?”
열린 문을 통과해 들어선 순간 문득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하 특유의 습한 내음과 시체 썩은 내가 뒤섞인 굉장히 역겨운 냄새였다.
숨을 참으며 둘러보니 직경 400미터 가량 돼 보이는 크고 너른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들어온 문을 포함해 사방으로 총 6개의 문이 이어지는 교차로 같은 공간이었다.
문제는, 중앙에 작은 광장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그곳에는 빛바랜 허여멀건 한 것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특히 비탈진 부분에는 아직 살점이 붙은 너덜너덜한 것들도 눈에 밟혔다. 그 부분은 유독 붉게 얼룩져 있다.
“저게….”
“아마 앞서 들어온 사용자들이겠지.”
누군가의 물음에 대답하자 등 뒤로 약한 탄성이 연달아 들렸다. 아까 근원의 말을 이제야 이해한 듯싶다. 왜냐면 뼈와 시체의 언덕 위로 천장에 붙은 계단이 있었으니까.
이윽고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니 역시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백 년, 혹은 일천 년 전에 사망한 해골은 차치하고서라도 외면에 적잖은 사용자들의 시신이 보였다. 길게는 한 달부터 짧게는 바로 닷새 전까지.
하나 특이한 게 있다면 장비나 옷이 벗겨진 시신들이 드문드문 보인다는 것이다. 설마 알몸으로 유적에 들어왔을 리는 없고 누군가 가져갔다고 보는 게 옳을 터. 하기야 이만큼이나 뼛조각이 쌓였는데 운 좋게 살아난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 깊게 파묻혔다면 완충 역할을 해줬을 테니까.
이윽고 여러 문으로 들어간 흔적을 발견했다는 고연주의 소리가 들려와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한 찰나.
– 들어왔네? 또 들어왔어!
– 정말이네? 이번에는 몇 명이지?
문득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귀를 웅웅 울렸다.
“누구냐!”
진수현이 쩌렁쩌렁 외치며 자세를 잡았으나 소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시끄럽게 떠들며 사방에서 킬킬 비웃는 소리를 보냈다. 몹시 거슬리는 웃음이었다.
– 끼끼, 끼끼끼끼! 또 죽을 놈들이 제 발로 기어들어 왔군.
– 그런데 이놈들…. 조금 다른데? 그 계단을 통과했어!
– 정말? 정말이네?
– 진짜야!
참지 못한 진수현이 한 번 더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나는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진수현은 이를 악무니 소리 또한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나 요상한 시선은 여전히 느껴지고 있었다.
클랜원들을 한 곳으로 불러모은 후 나는 진수현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우리는 우리가 할 일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하지만…!”
“명령이다. 지금부터 이 목소리들을 부랑자라고 생각한다. 이유정? 내가 부랑자를 보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응? 네? 아. 절대 말을 섞지 말고 무시하라고….”
조금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이유정은 훌륭히 대답했다.
“그렇지.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야. 전혀 휘둘릴 필요가 없어.”
– 키키키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어차피 실체는 보이지도 않는 놈들이야. 직접적으로 해를 입힐 수도 없어. 이놈들이 원하는 건 우리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거지.”
– 푸헤헤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소음은 계속해서 대꾸했다. 클랜원들은 불편한 낯빛을 비췄으나 철저히 무시하자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었다.
– 이놈들 보게나?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 아무래도 조금 쓴 맛을 보여줘야겠군! 킬킬킬킬!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잉!
철컹!
돌연히 귀를 긁는 시끄러운 철성(鐵聲)이 고막을 때렸다. 정확히는 정면에서 오른쪽 방향, 문 안쪽에서 들렸다. 마치 굳게 박힌 쇠창살이 억지로 뽑힌 듯한 불쾌한 소음이었다.
그러나 소음은 한 번만 들려오지 않았다.
끼이이잉!
철컹!
끼이이잉!
철컹!
끼이이잉!
철컹!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무려 세 번이나 연달아 도처를 울렸다.
그르르르르르르르….
다각다각…. 다각다각….
이어서 들려오는, 부글부글 끓는 듯한 긴 울부짖음과 말발굽 소리.
– 죽음이다! 죽음의 기사가 오고 있다! 우히히히히히히히!
– 도망쳐! 한쪽 문으로 도망치면 살 수 있다는 말이야! 물론! 어느 문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을 거지만~.
“젠장. 이 새끼들 입 좀 닥치게 할 수는 없어요?”
“나도 그러고는 싶다만.”
진수현이 귀를 틀어막으며 이를 갈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고연주와 임한나는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두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아마 기척을 잡는 데 집중하는 것일 터. 나는 소란을 무시하며 기다렸다. 먼저 눈을 뜬 건 임한나였다.
“놈들의 말이 맞아. 우리가 들어온 문 제외. 여기서 정면 방향의 문 제외. 나머지 네 개의 문에서 다가오고 있어.”
“수는?”
“각 문당 예닐곱 마리. 총 서른 마리 안팎. 죽음의 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가능성은 높아.”
“말을 탄 죽음의 기사라면…. 거, 거의 리치(Lich) 급이라는 소리잖아요.”
김한별이 망연히 덧붙이자 몇몇 클랜원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 말대로 말을 탄 죽음의 기사나 리치는 결코 쉬이 볼 놈들은 아니었다. 언데드 무리를 상대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장 격 언데드는 무리에 아예 없거나 엄청나게 많아 봤자 서너 마리 섞여 있는 게 일반적이다. 한데 만일 서른 마리 전부가 죽음의 기사라면 쉽지 않은…. 흠. 아니. 나는 쉬우려나.
– 어어? 얘네 뭐야? 어떻게 아는 거야?
– 계단을 통과한 놈들이잖아. 음…. 장난 아닌데?
무시하자. 무시.
내가 고민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정하연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수현. 요격도 좋지만 한나 말도 있고…. 한 번 앞쪽 문을 열어보기라도 하는 게….”
그때 불현듯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땅에 드리운 어둠이 연기처럼 자욱이 흐르더니 구불구불 움직여 땅으로 흡수된 것이다. 멍하니 눈을 들자 느릿하게 일어서는 여인이 보였다. 비로소 고연주가 몸을 일으킨 것이다.
“수, 수현.”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으나 착각이 아니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확연히 떨려 나왔다. 그런 고연주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미세하게 떨리는 검지가 정면의 문을 가리켰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늦은 이유는….
설마….
아직도….
아직도, 내가 로유진으로 보이니?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