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13
00912 A Poisoned Chalice, Two. =========================================================================
정신 차리고 하늘을 바라봤을 때, 구름에 걸린 해는 하늘과 땅의 경계선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중이었다. 땅으로 떨어지는 붉은 황혼은 어느새 짙은 석음(夕陰)이 섞여, 검정 물감을 부은 듯 어스레한 빛을 띠기 시작한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어둠이 올 듯 말 듯한 하늘 아래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수천의 사용자가 주먹을 번쩍 올린 채 밤이 떠나가라 환호하고 있었다.
전장은 이미 완벽하게 끝난 상태였다.
성으로 돌아가는 걸음마다 발끝이 툭툭 걸리는 게, 내가 루시퍼를 죽어라고 쫓은 것처럼 북 대륙도 악착같이 남 대륙을 추격한 듯싶었다. 전투가 종료된 땅에는 못해도 사오천은 넘을 듯한 시체로 가득 차, 땅이 핏빛 진흙으로 변해 질척거릴 정도였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함성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전투 직후 승리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한 사용자들은 전장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누구는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고, 또 누구는 부상자를 돌봤다. 간혹 신 나는 얼굴로 시체를 뒤지는 이들도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선혈의 강을 가로지르는 동안, 문득 기이한 기분이 전신을 엄습한다.
이겼다.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압도적으로 이겼다. 북 대륙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모르고 있지만, 동 대륙 대첩(大捷)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우선 남 대륙은 총 병력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망자를 남겼다. 첫날 시가지 전투 때 발생한 사상자를 합치면 그쯤 될 것이다. 게다가 남 대륙 최고의 무력 부대라는 원탁의 기사를 상당수 꺾었고, 엘도라를 살해한 건 확실한 성과였다.
악마 쪽도 만만치 않다. 자세한 건 보고를 받아야 알겠으나 상대는 ‘타락 천사’ 루시퍼라는 엄청난 전력을 헌납했다. 대 악마라는 타이틀을 생각해보면 거의 공으로 잡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루시퍼를 따라갔던 악마 군주 두 놈까지 덤으로 죽일 수 있었다.
사실상 이번 전쟁은 몹시 험난할 것이라 각오하고 왔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 정반대로 흘렀다. 물론 오벨로 기사가 등장한 뜻밖의 행운도 있었고, 위험하고 아찔한 순간도 없는 건 아니었으나 풀려도 너무 잘 풀렸다.
그래서 이상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쉽게 승리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 지가 않는다. 가슴 한 켠으로는 모종의 불안감이 있었지만,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하.”
아무튼, 기쁘다. 이 회차를 시작할 때부터 악마를 염두에 두고 만반의 준비를 하려 노력했다. 알고 있던 안배를 하나씩 차근차근 파괴하고, 춘추 전국 시대를 넘겼으며, 힘을 최대한 모으고 보존했다.
그리하여 할 수 있는 선에서 전력을 기울여 맞부딪친 결과, 이렇게 엄청난 성과로 이어지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지난 십사 년의 고생이 헛되지 않고 보상받은 기분이다.
“하하.”
상황은 일 회차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는 인간이 궁지에 몰린 게 아닌, 악마가 벼랑 끝에 놓였다. 할 수만 있다면 사탄을 앞에 두고 묻고 싶을 지경이다. 딱 한 마디. 이렇게 되어보니 기분이 어떠냐고.
“하하하하!”
“기분 좋게 웃는 걸 보니 추격에 성공했나 봐?”
한껏 웃어 젖힌 찰나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앞쪽으로 형과 한 무리가 어스레한 석양을 받으며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특히 형의 옆에서 “오! 부왕의 형님이셨군요. 헤헤.” 라고 말하며 손을 싹싹 비비다가, 내가 있는 곳을 돌아보는 해골 기사도 낯설지 않다.
“베히모스?”
– 이야, 이거 정말 오랜만입니다?
딱딱, 베히모스는 특유의 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멋들어진 장검을 들어 올렸다. 칼끝에는 백금발 머리카락의 작고 어린 소녀가 목이 꿰인 채 걸려 있다.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이었으나 얼굴은 지독하리만치 일그러져 있었다.
“바알!”
낯짝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두 번 세 번 확인해도 ‘동쪽의 왕’ 바알이 맞다. 게헨나에게 이미 목숨을 한 번 잃은 터라 놓치면 아까웠을 건데 용케 추격에 성공한 모양이다.
“형도?”
“나는 발목만 잡았고, 직접 처리한 건 이 친구지.”
형이 옆을 흘끗 쳐다보자 베히모스가 가슴을 쫙 폈다.
– 훗훗훗훗.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년을 따르던 악마 두 놈, 그리고 타나토스의 조각을 처리한 것도 추가해주시죠.
“원래는 여섯 모두 저격하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전부 놓칠 것 같아서 한 놈한테 집중했지. 뭐, 애초 그렇게 도망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형은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순간 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형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어, 어헉? 수, 수현아?”
형이 당황한 기색을 느꼈으나 나는 감정에 이끌려 행동했다. 눈앞에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니, 그냥 고마웠다. 이로써 대 악마 둘, 악마 군주 넷이다. 순식간에 성과가 두 배로 늘었다.
“머셔너리 로드.”
고요한 음성이 귀에 흘렀다. 바로 뒤를 돌아본 나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소영과 하승우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하승우는 씩 미소 짓더니 손으로 끌고 온 걸 털썩 내려놨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추레하게 늘어져 있는 것은 바로 벨제부브였다. 눈동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설마.”
“네. 보시는 그대로.”
한소영은 설명을 간단하게 일축했다. ‘폭식’ 벨제부브 또한 전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 한 번 성과가 세 배로 뛰었다. 이제는 숫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어쨌든 저도 추격은 성공했네요.”
한소영은 유독 ‘저도’ 라는 말을 강조했다. 문득 나와 형을 번갈아 보더니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살며시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뺨을 붉히며 어깨를 살짝 웅크렸다.
혹시 어디 아프시냐고 물으려는 순간, 돌연 또 한 무리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선유운과 차소림과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자연스레 기대가 솟았지만 씁쓸해하는 얼굴을 보니 아마 허탕을 친 것 같다.
“죄송합니다. 잡으라는 말씀을 듣고 바로 추격에 나섰는데…. 놓치고 말았습니다.”
역시나. 차소림은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사죄했다.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다.
“좀 아깝게 놓쳤습니다. 저격이 성공하기 직전 호위하던 놈이 대신 맞는 바람에….”
선유운은 담담히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그럼 저격한 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물론 처리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선유운의 목에도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어…. 크, 클랜 로드.”
선유운은 당황하는 것도 담담하게 했다.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더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라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평소의 나답지 않다는 건 알고 있으나 왜인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대 악마를 놓친 건 아쉬우나 악마 군주를 처리한 것도 매우 혁혁한 성과였다.
“저, 머셔너리 로드.”
그때 한소영이 내 옆으로 다가와 톡톡 건드렸다.
“그러고 보니 저도 하나, 아니 둘을 추가로 처리한 것 같은데….”
“아, 그렇습니까?”
과연, 철혈 여왕이라는 한소영이 놓칠 리가 없지. 아마 악마 군주 한 놈과 타나토스의 조각 중 하나를 말하는 듯싶다. 그럼 대 악마 셋, 악마 군주 여섯, 그리고 타나토스의 여섯 조각 중 세 조각을 처리한 건가? 하하, 하하하하.
“정말 잘하셨습니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한소영은 스리슬쩍 눈을 내리뜨더니 또 어깨를 웅크렸다. 응? 아까부터 왜 저러시는 거지? 어깨에 상처라도 입으신 건가?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혹시 다치셨습니까?”
“…네?”
“어깨가 좀 불편하신 것 같아서….”
“…….”
그 순간 한소영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이어서 어느 때보다 완연히 토라진 표정을 짓더니 나를 싸늘하게 노려본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더듬었다. 그러나 꽉 안아주며 같이 기뻐하기만 했을 뿐,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잠시 후.
“아, 네. 괜찮으니까 걱정은 하지도 마세요.”
한소영은 가시 돋친 말투로 쏘아붙이더니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린 냉기를 풀풀 날리며 쿵쿵 걸어갔다. 나는 느릿하게 멀어지는 한소영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 쯧쯧.
누군가 느닷없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부왕도 참….
베히모스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해골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왜? 내가 뭘 잘못했길래?
*
황혼이 진 후 땅거미가 깔릴 무렵에는 아군의 사망자를 확인하는 등, 기본적인 전장 정리는 끝낼 수 있었다.
물론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끝낸 건 아니었다. 땅에는 여전히 시체가 흐드러지게 널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리는 내일로 미룬 후 우선 성으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바짝 조였던 긴장이 풀리기도 했고, 넘어오자마자 쉴 틈 없이 격렬한 전투를 치른 만큼 휴식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성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동 대륙의 환영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아키노라는 동 대륙 대표는 확실히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있었다. 약간 부담스럽게 느껴질 만큼 과하게 감사해 하더니, 잠자리 제공과 더불어 간소한 축제까지 열어준 것이다.
그래 봤자 약간의 주류와 음식을 내놓은 정도였지만, 나는 사양하지 않고 기껍게 받았다. 내가 기뻐하는 만큼 아군도 승리에 즐거워하고 있었고, 클랜끼리 간단히 먹고 마시며 피로를 푸는 것도 좋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딱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오벨로 기사단이었다. 목격자의 증언을 따르면 오벨로 기사단도 추격 조에 참가한 것 같다.
사실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면 추격을 중지할 법도 한데, 오벨로 기사단장은 무어라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끝까지 쫓아, 끝끝내 먼 곳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기실 돌아오면 한 판 붙어야 할 처지나, 그 말을 들으니 왜인지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엄밀히 말하면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으나, 너무 조이기만 하면 터질 염려가 있으니. 오늘 하루쯤은 전부 내려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 아이고 맛 좋다!
라고 여겼건만, 나는 곧 생각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 이게 얼마만의 고기요! 술이냐! 우헤헤헤!
축제에 은근슬쩍 낀 베히모스는 이제는 매우 흥겨워하며 덩실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곧 돌아갈 줄 알았는데 아직 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해골 주제에 맛을 느낀다는 게 말이나 돼?
워낙 붙임성이 좋다 보니 금세 어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너 명은 어색한 얼굴로 비비앙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정작 소환한 장본인은 음식을 흡입하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결국, 내가 총대를 메기로 했다.
“베히모스.”
– 예? 왜요?
“너 안 돌아가?”
– 엥? 뭡니까. 부왕. 꼭 서둘러 꺼지라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맞아.”
– 와, 서운합니다. 보시죠. 방금 부왕~하고 울 뻔했습니다.
미친놈.
“헛소리 말고. 맛도 느끼지 못하면서.”
– 무슨 말씀입니까. 축제는 분위기입니다. 무시하지 마시죠. 이래봬도 일국의 왕이었던 해골입니다.
그게 뭔 상관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술잔을 맛있게 들이키는 걸 보니 아주 거짓말 같지도 않고. 예전에도 느꼈지만 얘도 참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다.
“그래도 어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 싫습니다. 부탁입니다. 절대로 빨리 돌아가기 싫습니다.
한 번 더 권했으나 베히모스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왜?”
– 후유, 그게 말입니다.
갑자기 진지해지지 마라.
– 요새 분위기가 엄청나게 살벌합니다. 진짜로 생지옥이라고요.
아니, 거기 지옥 맞잖아.
– 그러니까 게헨나 님이 왕을 출산하시고 돌아오셨을 때까지는 좋았는데요. 문제는 왕께서 굉장히 진노하셔서….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왕이라면 내 딸인 수나를 말하는 것일 터. 수나가 진노했다고?
“왜?”
– 아이 씨, 그걸 알면 제가 이러겠습니다. 이유는 말해주지도 않고, 게헨나 님만 보면 이를 박박 갈면서 할퀴려고만 들고. 애새끼 주제에 말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 내 딸이야.”
– 알아요. 그런데 제가 오죽하면 이럴까요. 그것 말고도 여러 사건이 있었다니까요. 심지어 지옥 마수 군단이 재편성되는 일까지 있었다고요. 아, 이건 말해주는 게 좋으려나.
베히모스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더니 문득 비비앙을 흘깃거렸다. 그러나 비비앙은 접시째 음식을 들이마시는 중이었다.
– 아무튼, 이번에 나름 공도 세웠는데 같이 좀 즐깁시다. 돌아가기 전에 다 말씀드릴 테니까요. 돌아가는 순간부터 또 모녀 전쟁에 시달려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 베히모스는 퀭한 눈구멍을 간절히 빛냈다.(사실 붉은 안광이 희번덕거려 좀 소름 끼쳤다.)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떨떠름히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베히모스는 기쁜 듯이 딱딱거린 후,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 자자, 한 잔 더! 여기 빨리 좀 따라주십쇼! 아이고 팔 떨어진다! 으아아아!
============================ 작품 후기 ============================
잠시 쉬어가는 회…. 입니다.
아, 일러스트에 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현재 일러스트레이터께 두 장의 일러스트를 요청한 상황입니다. 한 장은 제 개인 욕심으로 예전에 보여드렸던 일러스트 중 하나를 새로운 이미지로 보여드리기로 했고, 한 장은 김수현 + 화정이 될 예정입니다. 우선 전자는 늦어도 6월 30일 안에는 완료될 듯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