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87
00986 Epilogue 5. 세라프의 계획. =========================================================================
긴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난 속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고, 형은 기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정적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가끔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우선 앉아요. 제발.”
돌담에서 등을 뗀 한소영이 조심스레 말했다. 명령이라기보다 애원에 가까운 어조였다. 무너지듯 의자에 앉아 애꿎은 연초만 질근질근 씹었다.
잠시 후, 필터가 씹히다 못해 뭉그러졌을 즈음, 형이 느릿하게 머리를 들었다.
“…아, 혹시 메시지는 봤어?”
“문자?”
“아니. 문자 말고.”
“……?”
형은 “아직 못 봤구나.” 라고 중얼거리더니 사용자 정보를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아직 반발심이 가라앉은 건 아니었지만, 순순히 창을 띄웠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윽고 익숙한 창이 허공에 떠올랐을 무렵 얼핏 이상한 부분이 눈에 밟혔다. 아랫부분에 무언가 작은 점처럼 보이는 것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뭔가 싶어 물끄러미 응시하자,
『메시지가 있습니다.(Y/N)』
새로운 창이 홀연히 출력됐다.
“메시지?”
“역시. 읽어봐.”
처음 보는 거라 망설임이 들었지만, 이내 끌리듯이 손을 뻗어 Y를 건드리는 찰나였다.
– 사용자 김수현.
순간적으로 펄쩍 뛸 뻔했다. 메시지 창이 뜰 거라 예상했는데 갑자기 머릿속으로 생생한 음성이 울렸기 때문이다. 화정이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 이 메시지를 읽을 때면 수현은 굉장히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아마 혼란의 원인이 저한테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겠지요.
수현이 자초지종을 알게 됐을 때 절 얼마나 원망하실지 생각하면 사실 무섭습니다.
당신에게 미움받는 건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긴 변명을 남기게 됐습니다.
하지만 먼저 말씀드리건대, 제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건 사실입니다.
어떤 변명을 한다고 해도 제 잘못이 정당화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부디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세라프다. 몇 번을 들어도 세라프였다. 세라프임을 확신하는 순간 바로 귀를 기울였다.
– 우선 드리고 싶은 말씀은 현 상황에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저는 당신의 도우미인 만큼, 약관상 사용자에게 위해가 가는 짓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습니다.
최소한 악의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건 아니라는 점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세라프는 설령 선의로 거짓말은 했을지언정, 날 잘못된 길로 이끈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형은 말할 것도 없고.
알고는 있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였다.
– 악마와의 전쟁이 끝난 후, 저는 비로소 선택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직감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아마 수현도 복잡한 심경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소환의 방에서 하루하루 기다리는 와중, 수현의 뜻을 알게 된 건 이유정이라는 사용자와 나눴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습니다.
두 세상을 잇는 통로를 개설한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가 몇 년 동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후, 홀 플레인으로 돌아온다.
확실히 나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합리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쨌든 한 번은 지구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고.
– 수현도 아시겠지만 홀 플레인의 사용자는 지구의 인간에게서 파생된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서로 동일하면서 구분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둘이 하나로 합쳐질 때, 원칙적으로 파생된 존재가 본체로 들어가는 게 옳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지구로의 귀환은 홀 플레인의 ‘사용자’가 지구의 ‘인간’에게 덧씌워지는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즉 ‘인간’이라는 그릇에 ‘사용자’라는 물이 새로 채워지는 셈입니다.
세라프의 음성은 성질 급한 아이를 달래듯 차근차근 이어졌다.
–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받아들이는 ‘인간’ 처지에서는 필연적으로 괴리가 발생하게 됩니다.
수십 년을 평범하게 살다가, 한순간 알지도 못하는 세상의 경험과 기억을 받아들이는 건 굉장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니까요.
일단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조승우도 말하지 않았는가. 마흔 명이 넘는 귀환자 중 응답한 이는 얼마 안 된다고.
– 여기서 관건은 지구의 ‘인간’ 김수현이 홀 플레인의 ‘사용자’ 김수현을 감당할만한 그릇이 되느냐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회의적인 입장이었지만 단순히 예상만 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므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실험?
– 십오 년 전 갓 소환됐을 때의 인간 김수현.
현재의 사용자 김수현.
이 두 자료를 토대로 삼아 일종의 귀환 시뮬레이션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안타깝지만 예상대로였습니다.
결과를 듣는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 한두 번이 아니라, 수천수만 번을 돌렸습니다.
그중에서 딱 한 번이라도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면.
아마 그랬다면 저는 그 방법을 선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수한 시뮬레이션의 결과는 단 하나도 예외 없이 전부 동일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비록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 김수현이 사용자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견디지 못해,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으로….
…수현.
사람의 본성이 형성되는 과정은 관성과 비슷합니다.
버릇이나 습관처럼 오랫동안 반복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익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말인즉 실험의 결과는 하나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관성이 붙고 붙은 사용자 김수현의 본성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시절의 인간성이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멀리 가버린 겁니다….
시뮬레이션의 결과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속으로는 믿고 싶지 않았으나, 사실 세라프가 걱정하는 부분은 나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유정이 엇나가려는 낌새가 보였을 때, 스쿠렙프를 부셔서까지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는가. 난 이미 늦었지만, 이유정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
– 몇 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때로는 밤을 지새우고, 힘들 때는 동향을 관찰한다는 명목으로 수현을 한없이 구경했습니다.
어차피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니 현실은 다를 것이라는 합리화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당신을 아무 조치 없이 보내는 건 안 된다는 생각만 강해졌습니다….
세라프의 걱정은 공감한다.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의도로 계획을 세웠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들을수록 의문은 증폭됐다.
이 회차로 돌아온 것도 나고, 제로 코드를 획득한 것도 나다. 무엇보다 당사자 아닌가.
한데 세라프는 어째서 혼자서 끙끙 앓았을까. 아니, 왜 언질이라도 주지 않았을까?
– 결국에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 김수현은 사용자 김수현을 감당할 수 없다고….
그러나 그때, 한 생각이 벼락처럼 떠올랐습니다.
인정하기 싫었던 명제를 인정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갑자기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길?
“수현아.”
그때 공교롭게도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음성도 바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아 옆으로 눈을 돌렸다. 형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후회해?”
“…뭐?”
“지금 이 상황을 후회하느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뭔 말을 하는가 했더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후회하느냐고?
“그래.”
후회한다. 당연히 후회한다. 미치도록 후회한다.
분명히 지구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지만, 이렇게 돌아오는 걸 원한 건 아니었다. 게헨나가 아무 말도 않고 수나를 데리고 떠났을 때, 난 심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얼마나 게헨나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는가. 한데 자의가 아니라 타의라지만 이번에는 내가 똑같은 짓을 해버렸다.
탁 까놓고 말해서 멋대로 통로를 개설한 것까지는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제대로 된 이별의 시간을 갖기를 원했다. 그랬다면 어느 정도 감정도 정리할 수 있었을 테고, 비록 회한은 남되 후회는 없었을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홀 플레인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야.”
“그래. 그렇구나.”
으르렁거리며 말하자, 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 보며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 수현아.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나는 돌아왔을 때 몹시 극심한 괴리를 겪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지.”
멍하니 형을 응시했다.
후회하느냐고 묻더니 이제는 괴리로 화제를 돌린다.
형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런데 말이다.”
그때였다.
“그런 날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
형의 말이 이어지는 순간.
“생각해봐. 나도 그렇고 돌아온 사용자 전원이 괴리를 느꼈고 고통에 몸부림쳤잖아. 하지만 너는…. 어땠지?”
느닷없이 망치로 머리를 세게 후려 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뭐….”
맞다.
어째서.
어째서 이제껏 놓치고 있었던 걸까?
돌이켜보면 기차에서 내 모습을 봤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왜 군복이 아니라 갑옷을 입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나도 지구로 돌아왔으니 분명히 괴리를 느꼈어야 정상인데…?
간신히 정신 줄을 잡고 형을 바라봤을 때, 형은 더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긴장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온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형은 빙긋 웃었다.
“기대해도 좋아. 아까 내가 왜 그 상태로 너도 조금은 이해할 거다.”
– 그 새로운 길이란, 인간 김수현에게 사용자 김수현을 덧씌우는 게 불가능하다면.
형과 세라프의 음성이 겹쳤다.
엉겁결에 따라 시선을 올리는 찰나, 돌연 반투명한 창 너머의 하늘을 밝히는 단 하나의 푸른빛이 밟혔다.
푸른 빛무리는 정확히 날 향해 강하하고 있었다.
잠시 후.
– 반대로 해서, 사용자 김수현에게 인간 김수현을 덧씌우는 길이었습니다.
세라프의 음성이 이어지는 것과,
번쩍!
푸른빛이 정수리로 내려꽂히는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인간이 사용자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인간을 받아들인다…?”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망연히 뇌까리고 말았다.
– 수현은 사용자로서 완전무결했지만, 바꾸어 말하면 인간성을 거의 소실됐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세라프는 날 보내고, 지구에 있던 날 홀 플레인으로 데려갔다는 건가? 그래서 내가 군복이 아니라 갑옷을 입고 있던 거고?
– 그러므로 저는 명제를 바꾸어, 수현이 인간 시절에 느꼈던 기억과 경험이….
세라프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리고 형이 경고했던 괴리는.
– 사용자 김수현이 상실한 인간성을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불씨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생각보다, 천천히 찾아왔다.
“큭!”
어떤 예고도 없이 찌르는 듯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엄습했다. 통증은 바로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시시각각 커지며 머리를 압박했다. 흡사 무언가를 억지로 쑤셔 넣으려는 것처럼.
– 이렇게 마지막 기대를 걸었지만, 사실 이 계획에도 맹점은 있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고 있을 즈음, 이번에는 갑자기 시야가 둘로 나누어졌다가 도로 합쳐졌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 설령 인간성이 무사히 수현 속에 자리 잡는다손 쳐도, 이미 넘쳐 흐르는 사용자 본성에 잡아 먹혀 희석되는 경우도 염두에 둬야 했으니까요.
젠장, 초점이 흔들리니 안 그래도 심하던 두통의 강도가 더 강해지잖아. 이제는 숫제 날 중심으로 세상이 빙그르르 회전하는 것 같다. 이게, 이게 괴리라는 건가?
– 그래서 저는 대비책으로, 수현이 홀 플레인을 떠올릴 때마다 후회와 회한이라는 미련을 느끼기를, 그리고 그 감정이 될 수 있으면 크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세라프의 음성은 쉬지 않고 머릿속에 또렷하게 울리고 있었다.
– 오 년 동안, 보고 싶은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원동력 삼아 견뎌낸 수현이,
오 년 후, 돌아가는 통로가 열렸을 때.
홀 플레인이 살육과 전투 욕구를 마음껏 해소할 수 있는 장소보다는,
회포를 풀 수 있는 고향으로 생각해주기를 바랐던 겁니다.
그 순간 갑자기 무게 중심이 푹 꺼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고통과 어지러움의 합동 공격을 이기지 못해 결국 무릎 꿇은 것이다. 좌우에서 황급히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으나, 나는 털썩 엎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 왜냐면 그것이 수현이 바랐던 진정한 인간다움일 테니까….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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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다음 회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