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93
고요함 가운데 작은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몇몇씩 옹기종기 모여 선 이들의 표정은 진지했고, 조용히 오가는 목소리들은 심각했다.
둥!
그리고 북이 울렸다.
닫힌 문 안으로 선명하게 스며든 그 소리에 수군거림을 멈춘 이들이 제자리를 찾아 좌우로 흩어졌다.
어느새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숙인 이들이 눈만 굴려 문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높이가 일 장에 달하는 거대한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박, 자박.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누군가의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내 문 앞에 나타난 한 사내의 모습에, 좌우로 늘어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미천한 종복들이 지존을 뵙습니다.”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
그 장엄한 광경을 마주한 사내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피풍의를 휘날리며 걸었다.
그가 나아가는 걸음을 따라, 그 옆에선 이들이 순차적으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들의 숙인 고개를 눈인사하듯 하나하나 바라보며 걷던 사내가 이윽고 계단 위 권좌에 앉았다.
끼익, 쿵.
문이 닫히고, 장내의 세상이 외부와 단절되었다.
두 팔을 팔걸이에 살포시 올려 둔 사내가 반개한 눈으로 단 아래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 오랜만입니다.”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사람들을 맞이하는 사내, 바로 일월신교의 십오 대 교주 능운비였다.
그가 담운천에게 교주의 위를 승계받은 지 삼 년, 그간 일월신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유령곡이라 불리던 성화곡은 본래 이름을 되찾고 신교의 성지(聖地)로 추대되었다. 신녀인 향이가 성화곡의 주인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어 장로부를 폐지한 뒤, 육존의 체제를 정착시켰다. 그 과정에서 지난 세월 동안 마교를 지탱해 오던 육가의 체계를 무너뜨렸다.
반발이 없을 수는 없었다. 권력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해결 방법은 무척 간단했다.
바로 담운천.
능운비는 자신의 스승을 원로원주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기존의 장로들, 즉 각 가문의 가주였던 자들을 전부 원로원에 귀속시켰다.
반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 원로원주로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그딴게 가능할 리가 있겠는가?
물론 그 때문에 평생 들어야 할 욕을 다들었다.
뒷방으로 물러나시더니 어찌나 잔소리가 심하신지…….
하지만 어쩌 겠는가?
무릇 한 무리의 수장은 사람을 적재적소에 쓸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한데 스승께서 딱 적임자시니 어떻게든 그 자리에 앉힐 수밖에.
그리고 안한다는데 끝까지 자신을 교주로 만들려고 애쓴 사람이 누구던가? 결국 다 스승께 배운 것이다.
일월신교는 그렇게 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선화.”
“예, 교주님.”
“벌써 후계를 키울 준비를 하고 있다면서?”
“당연한 말씀입니다. 다음 대는 반드시 우리 야수문에서 배출할 것입니다.”
소선화가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다음대라니…….
자신이 교주가 된 지 이제 겨우 삼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잘도 그런 소리를 한다.
“야수문? 말도 안 되는 소리! 사저는 아직 결혼도 안 하지 않았소. 다음 대는 우리 천력탑이 차지할 거요.”
소선화의 말에 구양휘가 조소를 머금고 말했다.
“뭐, 인마?”
“난 벌써 신부를 간택 중이오. 내달안에 장가를 들 거고, 그 다음해에 나를 닮은 아들을 낳을 거요.”
“지랄하네. 너 같은 멍청일 누가 좋아해?”
“허, 그럼 사저 같은 왈패를 좋아할 사내는 있고?”
“뭐!? 이 자식이!”
또 시작이다.
자신이 교주 자리를 승계받았듯 각기 야수문과 천력탑을 이어받아 그 주인이 되었음에도, 툭하면 저리 애처럼 싸워 댄다.
“그만들 해라.”
“흥!”
“췌!”
결국 능운비의 만류가 있고 나서야 두 사람이 제각기 콧방귀를 뀌며 홱 하니 고개를 돌렸다.
아마 더 나이가 들어도 저 둘의 사이는 여전할 것이다.
늘 저리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티격태격하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능운비는 이어서 다른 이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가 새로이 가문을 이어받은 자들이다.
신혈가, 우도림, 설산장에 이어 혜심정까지…….
그들 모두와 인사를 마친 능운비의 표정이 일순 진지해졌다.
“내 오늘 그대들 모두를 모이게 한것은 앞으로 일월신교의 행보를 결정코자 함이다.”
담담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장내에 고요가 찾아왔다.
인사를 나누며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가라앉고, 능운비를 향한 모두의 시선에 묘한 열기가 서렸다. 마치 내내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가시는 것입니까?”
구양휘의 물음에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때가 도래했음이다.”
“크으…….”
모두가 구양휘와 같은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표정과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능운비가 권좌에 오르던 날 모두에게 했던 말.
중원 정벌.
마교인이든 일월신교의 일원이든, 그보다 더 홍분을 들끓게 하는 말은 없었다.
모두가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 왔던 일이다.
심지어 능운비에게 반발했던 마교의 원로들까지도 그 말에는 아무런 반박을 가하지 못했다. 되레 그런 능운비의 포부를 지지하는 뜻을 대놓고 드러내기도 했었다.
“교주님, 제게 선봉을 맡겨 주십시오! 제가 첫 승리를 안겨 드릴 것입니다!”
늘 그랬듯 구양휘가 두툼한 주먹을 움켜쥐어 보이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중원의 잡것들에게 우리 일월신교의 위엄을 똑똑히 보여 줄 것입니다.”
뒤이어 목소리를 낸 소선화에 이어, 각 세력의 수장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의지를 표출했다.
한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분위기, 그 열기가 번지고 번져 일월신교의 깃발이 내걸린 모든 곳을 활화산처럼 들끓게 할 것만 같았다.
“정숙하라.”
“……”
능운비의 손이 요동치는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하나 이미 화약고였다. 불씨만 던져지면 당장에 중원을 향해 타오를 듯한 열기가 장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두가 능운비를 바라보았다.
불꽃을 품은 눈동자들을 차례로 훑어본 능운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모두가 바라 왔던 일임을 안다. 누구나 앞서고 싶어 하는 마음도 안다.”
“……”
“하나 첫 행보는 응당 나여야 할 것이다. 내 첫걸음이 닿는 곳을 시작으로, 일월신교는 중원을 향해 뻗어 나갈것이다.”
능운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오매불망 기다려 온 이들의 가슴에 불씨를 던졌다.
“시작은…… 청해다.”
“……!”
청해.
그곳이 곤륜을 말하는 것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랫동안 마도와 대척해 온 중원의 수문장.
중원으로 가는 능운비의 첫걸음이요, 시작점이었다.
“지금 즉시 전쟁을 준비하라.”
“……”
“청해를 시작으로 중원을 평정할 것이다!”
“존명!”
명이 떨어졌고, 마도가 답했다.
소식을 실은 전서구가 쉴 새 없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일월기가 마도 전역에서 높이 솟아 펄럭였다.
하나 중원은 알지 못했다. 마교는 언제나 폐쇄적이었고, 전쟁을 위해 더욱 폐쇄적으로 변해 버렸기에.
* * *
“하암…….”
청해의 북쪽 어느 산자락.
막 새벽 동이 터 오는 시간, 곤륜의 이대제자 정한이 졸음을 쫓으려 입이 찢어질 듯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피곤하지?”
“아, 사숙.”
옆에 있던 정한의 사숙 운상이 옆구리를 툭 치며 물었다.
곤륜의 순찰조를 이끌고 있던 그가 교대 시간이 다가오자 한 바퀴 둘러보러 나온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밤을 새운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냐?”
“하하…….”
운상의 말에 정한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들의 임무는 경계 너머의 적들을 살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대척해 온 그들, 마교를.
“벌써 삼년이나 되었구나.”
“……?”
“너와 나이가 비슷하다던데.”
“아! 새로 교주가 된 능운비라는 마귀 말이죠?”
“그래.”
운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북쪽산을 바라봤다.
“적이지만 대단한 인물이지 않으냐?”
“뭐, 그렇긴 하죠. 저와 같은 나이에 마교를 통째로 집어삼켰다고 하니.”
“그래.”
“참, 사숙께선 그를 직접 봤다고 했었죠?”
“그랬지. 정말 대단했다.”
운상이 고개를 끄떡였다.
사년 전.
전 중원이 능운비를 추격하던 그때, 운상도 곤륜의 장로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당시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직접 보았던 운상이 지난 일을 회상했다.
“한데, 그가 검제를 죽인 게 사실일까요?”
“글쎄……”
그에 관해서는 호사가들의 말이 제각각이었다.
암수가 있었다느니, 실은 다른 이가 죽였다느니…….
그럼에도 밝혀진 것은 없었다. 사건의 당사자였던 남궁가가 함구했기 때문이었다.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검제를 죽인 게 능운비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남궁가는 물론 중원 전체가 자존심에 큰상처를 입을 테니까.
한때 중원의 하늘이었던 자를 제천도 아닌 그 제자가 죽인 셈이지 않은가.
“그가 검제를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내 당당하긴 했다.”
“당당해요?”
“그래.”
“……”
“도제, 창제, 권제. 비록 오래전에 깨진 하늘이지만, 능운비라는 자는 그분들께 고개조차 숙이지 않더구나. 또한, 권제 어른과 직접 싸웠음에도 밀리지 않았지.”
“권제 어르신을 상대로 밀리지 않았다니요?”
“음…… 이전에 검제 어른과 싸우면서 상처를 입거나 지쳤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지.”
“와…… 여하튼 굉장한 자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한데, 그런 대단한 무인이 첩자들과 함께 정무맹을 전복시키려 했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정무맹이 그리 결론지은 사안이 아니더냐?”
“에이, 저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이미 그 너머에 속사정이 있다는 것쯤은 알 만한 사람은 전부 안다구요.”
“속사정?”
“실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권력 다툼이 있었다고……”
“떽! 이 녀석, 근자에 교대가 끝나자마자 저자로 나가더라니……. 쓸데없는 소문만 들었구나. 당치도 않음이다. 더는 그 같은 이야기를 귀에 담지 말거라.”
“다들 그러던데…….”
정한이 입을 삐죽거리자 운상이 한숨을 내쉬며 그를 달랬다.
“정한아. 소문이 어떻든 그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말거라.”
“왜요?”
“왜긴 왜더냐? 도사가 세속에 감추어진 이면을 속속들이 알아 무엇 한다고.”
“치이…….”
“허! 이 녀석 참.”
입을 삐죽이다 못해 볼까지 빵빵하게 부풀리는 정한의 모습에 운상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한창 호기심이 많을 나이다.
하물며 당시의 사건이 너무나 많은 의문점을 남겼으니, 세속에 관심 많은 정한이 쉬이 떨치기는 어려웠을 터.
하나 이대제자인 그가 내막을 알아 좋을 게 없었다.
본산의 장로들조차 그때의 일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괜한 호기심은 때로 앞길을 망칠 수도 있음이었다.
“정한아. 이 사숙의 말은 전부 너를 위한 것이다. 네가 호기심이 많은 줄은 아나, 듣기는 해도 함부로 입에 담지 말거라.”
“하지만…….”
“어허!”
“……”
“후우, 어느새 해가 높이 떠올랐구나. 군소리 그만하고, 교대할 준비나 하거라.”
“예.”
운상의 말에 시무룩하게 대답하던 정한이 아쉬움이 남는지 북쪽 산자락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
그리고 그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 정한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사숙, 저게 뭡니까?”
“응?”
정한의 말에 북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운상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북쪽의 산자락, 시커먼 그림자가 능선을 뒤덮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안력을 돋우어 바라보던 운상이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능선을 덮은 그림자 위로, 각양각색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저, 정한!”
“예?”
“속히 본산에 전서구를 띄워라! 어서!”
“……?”
“마교가…… 중원의 경계를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