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313
찌푸려진 향이의 표정에서 어쩐지 슬픔을 느낀 청진은 한참 동안 고민했다.
능운비가 자신을 구하러 을 것이라니…….
“군사가 그러더군요. 이 한 마디만 전하라고.”
“말씀하시게.”
“화산은 그저 물러나 지켜봐 주십시오.”
“음…….”
향이의 말에 청진의 안색이 무겁게 굳어졌다.
제 손을 들어 달라는 뜻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아니, 답도 듣지 않고 간단 말이오?”
“어쩌겠어요? 누군가가 저희가 함께있는 모습을 보면 좋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
“교주님의 마음을 흔들 수도 있다고하니, 저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모셔가고 싶은 마음인데…… 제가 그럴 처지가 아니라서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할 일이 많거든요.”
“할 일?”
“그럼요? 서둘러 종남의 진산 어른께도 가야 하고, 소림의 정화라는 중도 찾아가야 하고, 창랑에 녹림왕에……이런 젠장, 생각할수록 열받네.”
향이가 별안간 짜증스럽게 욕설을 내뱉었다.
“바쁜 사람을 굳이 부르길래 맘에 안드는 놈들 목이나 잔뜩 딸 줄 알았더니…… 이것저것 바라는 게 뭐가 그리 많은지.”
혼잣말처럼 투덜거리는 향이의 모습에 청진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쨌든 이만 가 볼게요. 선택은 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만약에 정무맹의 인질이 되시면…… 아마 저를 다시 보게 되실 겁니다.”
“……?”
“그땐 부탁이 아니라 목을 따 드릴거예요. 교주님께서 위험에 빠지는 건 곤란해서요.”
해사한 미소와 함께 죽인다는 말을 뱉은 향이가 꾸벅 고개를 숙이곤 하기정의 절벽 아래로 훌쩍 몸을 날렸다.
“아니, 저, 저기!”
청진이 급히 붙잡아 보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절벽 아래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허! 무량수불……”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고작 그것이란 말인가?
그저 나서지 말아 달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 그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랐단 말인가?
도호를 외던 청진이 제 스승의 위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우, 스승님.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자신에게 되묻는 듯 중얼거리던 그때, 누군가 하기정을 향해 바삐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화산의 삼대제자 정산이었다.
“너는 정산이 아니냐?”
“속히 가 보셔야겠습니다!”
“응?”
인사조차 하는 등 마는 등 하는 정산의 모습이 몹시도 급해 보였던지라 청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학 사조께서 이것을……”
“……?”
정산이 내민 것은 화산의 도사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도명패였다.
비로소 화산의 제자가 되었음을 인정받을 때 얻게 되는 것으로, 그 의미는…….
“운학이 이것을 주었다고?”
“그렇습니다. 산문을 찾아온 도제를 향해 나서시면서……”
“뭣이! 이런!”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청진이 정산의 손에서 운학의 도명패를 빼앗듯이 낚아채고는 홀쩍 몸을 날렸다.
화산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도명패가 정산의 손에 있다면?
그는 지금 화산을 버리려 하는 것이다.
또한, 봉문한 화산을 찾아온 이들을 목숨을 걸고 막으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제자 운학이 욱하는 마음에 그런 결정을 내렸을 리는 없었다.
“도제……”
빠드득!
이를 악물고 달리는 청진이 손을 쭉 뻗자, 하기정에 놓아 두었던 검이 스스로 쫓아오듯 뒤따랐다.
한때 스승 독고성의 애병이었으며, 그의 진전을 이어 검선이 된 자신의 검.
그리고 언젠가 자하의 뜻을 이어 갈 운학의 손에 들리게 될 자오였다.
* * *
퉁!
짧게 내뻗은 손에 가슴을 때려 맞은 운학이 튕겨 나가듯이 밀려나 산문의 계단에 처박혔다.
“커억!”
돌계단이 부서질 정도로 등을 세게 부딪힌 터라 숨이 턱 하니 막혀 왔다.
“검선의 진전을 이었다 하더니, 참으로 제법일세.”
“컥, 커억.”
힘겹게 숨을 토하며 다시 몸을 일으키는 운학을 비웃으며, 팽위천이 또 하나의 계단을 올랐다.
벌써 계단의 중턱이었다.
이미 자하의 뜻을 깨달아 자줏빛 강기를 드러낸 운학이었지만, 한때나마 중원의 하늘 중 하나를 자처한 팽위천의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이보게 운학 도장, 이만 비켜나는것이 어떻겠는가?”
“……”
“자네와 같은 동량들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목숨을 잃는 것은 중원의 큰 손해일세.”
“하악, 하악……”
“그 넘치는 힘이 나를 향해서야 되겠는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어 저 무도한 마교를 향해 쏟도록 하시게나.”
“큭큭, 역시나 그런 것이지요? 화산이 마교를 막게 하고자……”
“필연적인 일일 뿐일세. 화산 또한 중원의 한 맥이 아니던가?”
“중원의 맥이라……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진심이라니?”
“도제님의 마음에 담은 것이, 정녕 중원에 대한 염려입니까?”
“……”
“그저 지금껏 이어 온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욕심이 아니구요?”
“허허, 이 사람 곡해가 심하구만.”
“곡해였으면 좋겠으나, 제 마음이 그렇지 못하군요. 이미 도제님께서 걸어오신 길들에 불의가 가득함을 알아 버렸기에…….”
소매로 묻은 피를 닦아 낸 운학의 입가에 ?한 조소가 어리자, 팽위천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제 말이 정곡이라도 찌른 것입니까?”
“흠…….”
오르던 걸음을 멈춘 팽위천의 눈동자에 살기가 스산하게 피어올랐다.
“이보게, 운학도장.”
“……”
“사람의 생각이야 서로 같지 아니한 법이나, 해서는 안 될 말이란 것이 있네.”
“저는 옳은 것을 옳다 한 것뿐입니다.”
“그 옳다는 말이, 정파를 위해 헌신해 온 나의 자긍심을 무시한 것임은 아는가?”
“말도 안 되는 자긍심이군요.”
“뭐라?”
“진정으로 마도의 발에 짓밟힐 중원을 걱정하였다면, 어찌하여 이곳에 계십니까?”
“……”
“그 많은 이들이 마도를 막기 위해 섬서의 전선으로 향했는데, 중원을 그토록 걱정하시는 도제께선 어찌하여 전선이 아닌 봉문한 화산에 찾아와 저희를 핍박하고 계시냐는 말입니다.”
“운학 도장!”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리십시오. 그릇된 자들과 척을 지시고, 진정으로 중원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화산은 분명 뒤따라 걸을 것입니다.”
운학의 말이 끝났으나, 팽위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운학을, 그리고 화산을…….
그리고 한참 만에 그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살기로 가득 찬 매서운 미소였다.
“허허, 이거야 원. 더는 안 되겠어. 천상 무인인 내가 어찌 말로서 도사를 당할까?”
허리춤에 뒷짐을 지고 있던 팽위천의 양손이 풀렸다.
“하나 걱정이 되는군. 자네의 생각이 일견 마도를 향한 듯하여 다른 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칠까 봐.”
“제 생각이 마도를 향해요?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리하면 사람들이 모를 것 같습니까? 지금 도제께는, 그리고 정무맹에는! 화산을 설득할 만한 대의가 없습니다!”
“그만!”
팽위천의 목소리가 산문을 쩌렁쩌렁 울리며 퍼져 나갔다.
그 안에 기파가 가득히 실려 매섭게 몰아치니, 내력이 약한 화산의 제자들이 귀를 막고 고통스러워했다.
“중원이 마도를 막는 것보다 더 큰 대의가 어디 있단 말이냐! 봉문을 핑계로 나서지 아니하는 화산이야말로 대의를 무시한 것이다!”
“화산은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막을 것입니다. 권력만을 위한 탐욕에서 비롯된 대의가 화산의 산문을 넘지 못하도록 막을 것입니다!”
호흡을 겨우 바로잡은 운학이 전력을 다해 자하신공을 끌어 올렸다.
우우웅!
자색 안개가 산문 앞에 자욱하게 내려앉으며 앞길을 막자, 팽위천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휘이익!
팽위천이 손을 내뻗자 커다란 도가 날아와 그 손안에 잡혔다.
“그럼 따르게 해야지. 저 산문을 부숴서라도.”
그 살벌한 목소리에 이어, 도신에 가공할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도신이 잘게 떨며 울음을 토해 냈고, 그 위로 시퍼런 불꽃마저 튀어 올랐다.
“나는…… 산문을 노린 것이네!”
뒤로 힘껏 당겨졌던 도신이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졌다.
후우웅!
거대한 궤적이 만들어 낸 반월형의 강기가 산문을 향해 쾌속하게 날아갔다.
콰콰콰콰!
대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몸이 떨려 올 정도였지만, 운학은 도리어 힘껏 몸을 날리며 양손에 자색 강기를 둘렀다.
만약 산문이 열린다면, 그것은 자신이 죽은 이후일 것이다.
그것이 화산의 제자로서 가진 그의 마지막 소명이었다.
“하압!”
쭉 뻗은 양손을 타고 나아간 자하강기가 팽위천의 도강에 부딪혀 거칠게 충돌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자줏빛 강기와 도강이 산산이 부서졌고, 운학의 몸이 산문을 향해 튕겨 나갔다.
쿵!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가까스로 산문에 부딪히기 전 몸을 멈춘 운학이 팽위천을 노려보았다.
“놈! 제법이구나!”
훌쩍 뛰어오른 팽위천이 허공에서 다시금 도강을 날렸다.
쐐애애액!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기운이 응축된 도강이, 산문은 물론 운학과 화산의 제자들까지 노리고 날아왔다.
“제자들은 속히 피하라!”
“아닙니다! 저희가 막겠습니다!”
운학이 남은 온 힘을 끌어내 자하강기를 펼치며 외쳤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떠나지 않았다. 도리어 팽위천의 도강을 막기 위해 저마다 검을 뽑아 들며 힘을 보탰다.
그들 역시 화산의 제자, 강자라 하여 물러나지 않고 화산을 지키려는 운학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기로 각오한 것이다.
그 순간.
휘이이이…….
한줄기 선풍이 불어와 화산의 제자들을 감쌌다.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산들바람 같은 기운이었다.
쉬이이익!
그리고 이어 날아온 검 하나가 운학의 눈앞까지 짓쳐들어온 팽위천의 도강을 꿰뚫었다.
콰드득! 쩌어엉!
반으로 갈라져 버린 도강이 좌우로 날아갔다. 산문 양측으로 가득했던 아름드리 거목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날렸다.
그리고 운학의 앞에, 검 하나가 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꽂혀 있었다.
“자, 자오?”
검을 알아본 운학이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때,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청진이 나타났다.
그가 무심하게 발을 뻗어 검을 차 내자,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이 그대로 뽑혀 나와 팽위천을 향해 부드럽게 날아갔다.
깡!
도를 휘둘러 쳐 냈지만, 검은 마치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되돌아가 팽위천을 공격했다.
“이, 이기어검?”
스스로 움직여 하늘을 수놓는 매화의 모습에 팽위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나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검의 움직임은 화공의 손에 들린 붓처럼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서 피어난 매화꽃은 겨울의 찬 서리처럼 매섭고 날카로웠다.
깡! 까가가강!
화려한 변화 속에서 몸을 물릴 수밖에 없었던 팽위천은 결국 산문의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마침내 그가 계단에서 완전히 밀려나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눈앞에 가득했던 매화가 사라졌다. 허공을 유영하던 자오는 어느새 청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스승님!”
“……”
팽위천을 산문의 계단 아래로 내쫓아 버린 청진이 자신을 부르는 운학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짜아악!
매서운 타격음과 더불어 볼이 화끈거리는 감각에, 운학이 멍한 얼굴로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녀석.”
“……”
“자하의 뜻을 이어 갈 녀석이 어찌 이리도 행동이 가볍단 말이냐!”
“스, 스승님, 저는……”
“되었다. 너의 경솔한 행동에 대한 죄는 나중에 물을 것이다.”
싸늘히 말한 청진이 무언가를 획 던지며 산문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툭.
운학의 발 앞에 떨어진 것은 그가 정산에게 주었던 자신의 도명패였다.